잡록(雜錄)과 낙수(落穗) - 김창렬 주교 지음 -
주님께서 특수 성소로 나와 인연을 맺어주신 한국의 성직자 및 수도자 형제자매님들께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
잡록(雜錄)과 낙수(落穗) * 김창렬 주교 지음
주님께서 특수 성소로 나와 인연을 맺어주신 한국의 성직자 및 수도자 형제자매님들께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
- 2 - 독자님들께 이 책은 수시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옮겨 놓은 것입니 다. 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고 주님의 이끄심을 느끼는 것만 추려서 쓴 것입니다. 성현과 영성가들의 정신이나 이론에서는 벗어나는 이야기들이 되 리라 예측하면서도 굳이 내놓는 것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하나의 영 혼의 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는 잡록 편이고, 다른 하 나는 낙수 편입니다. 둘 다 단순하고 짤막한 글이지만, 전자에 비 해 후자는 이삭줍기라는 말 그대로 그야말로 반짝 글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애써 주신 가톨릭 출판사와 현순심 다리아님의 크나큰 도우심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95세 생일을 기념하여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은수자 김창렬 주교
- 3 - 제1부 잡록 편
<차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8 수동受動의 기도
9 부정의 영성
10 우리에게 약을 주시는 하느님
11 나는 있는 나다
13 한국천주교회의 겉과 속
16 반비례의 논리 18 모두가 나보다 낫다
21 ALTER EGO, ALTER TU 24 이상 체질
27 나 주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노라
28 예수님의 이름으로
29 나는 ‘무엇’이다.
31 칼 라너와 마르틴 루터 그리고 은수자
33 신형 ‘코로나19 재앙’에 대한 일언
34 병신 이야기 36 분위기 이야기
38 숫자 이야기
39 어리광의 영성
42 원망하거나 투덜거리지 마라.
44 하느님 마음에 드는 기도
46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생각함
47 내 인생의 각본
48 재미라는 것
49 계명과 고통의 한 가지 공통점
50 - 4 - 약점 자랑하기
51 육화의 신비
52 슬며시 해 주시는 하느님
53 원죄와 본죄
55 나누고 싶은 묵상 두 가지
56 - 5 - 제2부 낙수(落穗) 편
<차례> 아버지 개념의 중요성
59 하느님의 작품
59 하느님 사랑의 전령들
60 주님의 섭리 따라
60 약점을 자랑하라
61 재생再生
61 너는 나를 따라라
62 내가 한 것과 하느님이 하신 것
62 양극이 만나는 세상
63 희귀한 성소聖召
63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느님
64 주인은 단 하나
64 허영과 시기
65 속사俗事와 속인俗人
65 진주와 쓰레기
66 당연하지 않은 일
66 가장 슬픈 일
67 이상한 일
67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68 기쁨의 등급
68 하느님의 자비 없는 순간은 없다.
69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69 신비 중의 신비
70 ‘내 탓이오’의 영성
70 미사성제
71 - 6 - 나의 수호성인과 나
71 부부애
72 사랑받을 나의 자격
72 처지를 바꾸면
73 의인과 죄인 1
73 의인과 죄인 2
74 나를 필요로 하는 하느님
74 죄인임을 자랑하라
75 솔직성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진리
75 홀로 능동자이신 하느님
76 핑곗거리
76 하느님은 무한 사랑의 소유자
77 애지중지하지 마라
77 이성과 신앙
78 사랑하고 나서 만나라
78 조건 79 성내지 마라
79 뜻을 따름
80 양자택일
80 맡겨놓고 떠나신 주님
81 동등하신 삼위일체
81 재미있는 생
82 사울 왕의 전철을 밟지 마라
82 예수님의 이름으로
83 잘못 생각하지 마라
83 나의 평화기도
84 나는 외롭지 않다
84 주시는 하느님
85 너무 모자랍니다
85 예수 성탄의 특은
86 못 말려
86 유언 삼아
87 - 7 - 제1부 잡록(雜錄)
- 8 -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한데,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고. 그러나 우리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는 적극적인 토대 위에서 하는 말이고, 이에 반하여 나는 소극적인 바탕 위에서 하는 말이기 때문 이다. 사도는 한 편으로는 자기 약점을 자랑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자 기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그 선언을 하기 바로 전에도 자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도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6,17)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1,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 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립1,20) 등등.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나는 떳떳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약점 밖에는 드러내 보일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내가 구원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 주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서로의 출발점이 다르고 경로도 같지는 않지만, 우리 두 바오로는 한 곳에서 만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는 그 말을 말이다. -
9 - 수동受動의 기도 나는 한동안 날마다 주님께 “나를 맡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었다. 그 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이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 시는 것이었다. 주님은 당신이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분, 내 생명과 운명을 쥐고 계신 분, 한 마디로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 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어느 집에 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 집을 맡아 주십시오.’ 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그와 같이 네 주인인 나보 고 너를 맡아 달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 않겠느냐?.” 잘못된 기도임을 깨달은 나는 말을 바꾸어 이렇게 기도해 보았다. “주 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립니다”라고.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도 제동을 걸면서 “그것은 능동能動의 기도다. 네 천성에는 수동의 기도가 어울린 다.”라고 하셨다. 이리하여 나는 “주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게 해 주 십시오.” 또는 “주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고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 기도를 수동의 형태로 바꾸어 바치기로 하였다. 주님은 참으로 좋은 기도를 내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수동의 기도가 능력 없고 주변 없는 내게 어울림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쉬 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완전히 주님 께 맡겨드리려면 나로서는 아무것도 궁리하지 말아야 하고 무슨 계획이 나 일을 꾸미지 말아야 하며, 나의 지능과 의지와 감정의 작용을 억제하 고 오직 성령의 충동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 면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 평화는 성 령의 열매이며 그분의 은사다. 완전히 맡겨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나에게 주님께서 는 그러한 체험을 하게 해 주신 것이다.
- 10 - 부정의 영성 내 영성의 바탕과 시발점은 부정성否定性에 있다. 나에 대한 긍정肯定이 아닌 부정, 곧 나의 죄와 결함에 있다는 말이다. 나는 죄와 결함 덩이이다. 나는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 말하기를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아침 마다 이렇게 기도를 한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 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철부지를 가여워하시고, 이 어린아이를 귀여워 해 주소서. 이 병신을 애련히 여기시고, 이 병자를 측은히 여기소서.> 이 와 같이 내 죄와 결함을 드러내 놓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이 기도를 주님께서는 매우 좋아하신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 결함과 약점은, 나로서는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으로서는 내게 내려오시는 통로요 길道, 途인 것이다. 죄악은 구원의 귀중한 발판이다. 나의 죄악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주 의를 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의인은 의인이기에 사랑하시고 죄인은 죄 인이기에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은 같지 않다. 앞엣것은 보통 사랑 이고 뒤엣것은 특별 사랑이다. 되찾은 양의 비유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바리사이 시몬 앞에서 죄 많은 여자를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 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 은 적게 사랑한다.” 나는 용서를 받은 만큼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하고 살지만, 주님은 줄 곧 많은 사랑을 내게 주시니 어찌 된 일인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런대 로 감사드리며 살고 있다. 세상에 주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를 나만큼 크 게 가진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혹 있을지라도 많지는 않으리라.
- 11 - 우리에게 약을 주시는 하느님 나는 이 주제의 근거를 사무 상2,6~7에서 발견한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는 분,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사실 하느님의 무한한 자유 재량권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 수없이 많이 들어있다. 병, 곧 모든 종류의 질병, 시련, 고통, 십자가를 주시고 약, 곧 치유, 은총,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성경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 짓말 같은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터이다. 목하 지구촌 은 신형 코로나19로 인하여 온통 힘들어하고 있다. 일상의 생활 리듬은 깨지고 경제를 비롯하여 사회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서 질서들이 혼돈 상 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는 터이다. 불과 2년 전 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예상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 병에는 강대국이나 약소국의 구별이 없고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차 이도 없다. 모두가 이 코로나19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며 우리 인간 존재의 처량함과 가벼움을 느끼기도 한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말은 무너질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 나 어떰 공든 탑이라도 하느님의 눈짓 하나로 무너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한 실례를 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보아라. 하느님께 서는 그 병에 상응하는 양약良藥도 손에 쥐고 계신다. 그러므로 병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분이 들고 계시는 약을 보아야만 한 다. 병이 있으면 약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오호 애재!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늘의
- 12 - 세상이니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그 귀중한 약을 끝내 알지 못하고 말겠 구나! 물론 재난은 힘들고 아프겠지만 그러한 때일수록 약을 주시는 하 느님을 깨달아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기억하는 에 실패한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구나! 신형 코로나19는 아픈 병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보다 더 큰 재앙을 당 하지 않으려면 이조차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이것은 내가 사람들의 비난과 힐책을 무릅쓰고, 또한 돌 맞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다. 이를 우리의 비뚤어진 정신과 행태를 바로 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모든 병을 기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다. 최악의 병을 주심은 최선의 약을 주시기 위함이다. 곧, 그분은 생명이 끊기고, 죽게 되었을 때 내게 영생과 영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무엇을 더 말하랴. 이제 나는 오직 모든 일에 절제하고 아끼는 삶을 살아가야 하리라. 나 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아야 하리라.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 로 오고 가고 때로는 큰돈을 들여 여행을 하기도 한 나의 생활을 차근차 근 정리해 나가야 하리라. 오,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여기서 다루어진 약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이 주제는, 세상의 모든 의문과 불가사의와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마스터키임을 명심함이 좋으리 라.
- 13 - 나는 있는 나다 기본 중의 기본 신앙 ‘하느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누구나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대답을 요청받는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 는 것이 내 대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나는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 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앞세워야 할 말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그분의 사랑에 앞세워 야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으로 알려주신 것은 바로 ‘나는 있는 나다.’이다. 이는 당신 자신을 존재로서 계시하신 말씀이다. 이리하여 ‘천주 존재’의 신조는 그리스도교의 으뜸 진리로서 첫 자리에 놓인 교리가 된 것이다. 도전받는 기본 신앙 그런데 ‘나는 있는 나다.’라고 일러 주신 지 수천 년이 흘렀으며, 예 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인간과 함께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신 지도 이천 년이 넘은 오늘날 이 중대한 기본 신앙이 도전을 받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무신론과 사신론死神論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우선 내 가 살고 있는 대륙이 거의 전체가 그런 모습이 아닌가. 주님께서 당신 말고는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으니, 계시된 하느님이 아닌 그런 신들은 모두 뜨내기들이요 가짜들인 것이다. 그러면 다른 대륙들의 사정은 어떤가? 한때 꽃피었던 그리스도의 신앙 이 경제적 풍요와 소비주의, 계속 번지는 무관심과 세속주의, 무신론으 로 인해 뿌리째 흔들리기도 하고, 복잡한 인종적, 사회적, 문학적 원인으 로 인해 신앙을 떠나고 있다. 나는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라다 만 겨자 나무, 부풀어 오 르다 만 밀가루 반죽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 14 - 역대 교황님들은 복음화의 기치를 내걸고 온 힘을 세계 복음화에 기울여 왔다. 이러구러 지금은 ‘새 복음화’라는 단어를 쓰기로 되었는데, 이것은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며, 결국 원점에서 시작하자는 것이다. 곧 하느님 의 존재를 믿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호전될 기미 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도리어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군 상은 늘어만 가고 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슬프기 그지없다. 새 복음화라는 말이 인제 와서는 한낱 요식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 어가고 있고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도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 이다. 하느님만의 생각과 길 위에서처럼 인류구원 문제에 얽혀 있는 나는 불현듯 하느님의 ‘충격 요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권능이 일시에 사람을 압도하여 당신의 존재 앞에 머리 숙이고 무릎 꿇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충격 요법에 대한 발상은 이사 55,8~9에 의한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운니지차 또는 천양지간이란 말은 인간의 척도로는 측량 불가능한 일 을 두고 하는 말인데, 사실 하느님과 인간 간의 차이는 무한과 유한의 차이요, 무궁한 차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 께는 가능하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우리의 것과는 무한히 다른 생각과 길을 지니신 하느님을 믿기에 나는 인류구원을 위한 기상천외의 좋은 결
- 15 - 정을 해 놓고 계실 그분께 희망과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 파우스티나 성녀가 지은 ‘하느님 자비의 호칭기도’의 마지막 호칭은 “요행수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자비여”이다. 이것 역시 우리를 같은 곳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신형 코로나19의 충격 속에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외면하고 버티는 사 람들이 있다. 이들을 보면 이 충격 요법의 효과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여기서 충격 요법을 말하는 것은 다만 인간 측의 어떠한 외침이나 몸부림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파격적인 은총만 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 16 - 한국천주교회의 겉과 속 나는 우리 한국 교회의 겉 곧 외형을 보아왔다. 신자 수라든가 본당의 수적 증가를 보았다. 선교 200주년을 경축하는 교회를 보았다. 교황님을 모시고 103위의 순교자들의 시성을 경축하면서 ‘순교성인 만세! 교황님 만세!’라고 외치는 군중을 보았고, 역시 그 교황님을 모시고 세계성체대 회를 치르는 자랑스러운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교황님을 모시고 124위의 시복식을 치르면서 기뻐 용 약하는 교회, ‘순교복자 만세! 교황님 만세!’를 크게 외치며 환호하는 군 중을 이곳저곳에서 보았다. 나는 이렇게 우리 한국 교회의 겉모습을 보 면서 마음 흐뭇해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최근에 CBCK에서 발표한 2019년도 ‘한국천주교회 통계’를 들여 다보았다. 거기에는 신자, 성직자·대 신학생, 수도자, 성사, 신자 단체· 주일학교, 교육기관, 사업, 해외 파견 등 많은 통계가 들어있었다. 그것 들은 한국 교회의 성장하는 모습과 발전상을 내 눈앞에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마치 드러내기를 꺼리듯이 ‘통계’는 구석진 곳에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 늦게야 매우 중요한 두 가지에 착안 하게 되었다. 곧 우리 교회의 속, 그 실상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중 하나는 판공성사인데, 판공성사 대상자 가운데, 부활 판공 때는 31.4%, 성탄 판공 때는 30.3%가 성사를 본 것으로 되어있었다. 또 다른 속사정은 주일미사 참여에 관한 것이다. ‘통계’에는 주일미사 참례자가 신자 총수의 18.3%로 나와 있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 의 우리 교회 방문 시 교황청이 우리나라의 주일미사 신자 수를 25%로 발표한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 교구들이 서로 참고하고 돕고 격려하기 위해 이 두 가지 속사정 을 CBCK가 교구별로 발표해 주면 좋겠다. 나는 이 의견을 사무총장에게 제시해 보았다. 그는 그것이 총대리회의의 결정이 필요한 것이므로 나의 그 제안을 하나의 안건으로 그 회의에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그 일이 어 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하리라. 이 지상에는 한때 성하였다가 쇠망해 버린 교회들의 잔해가 적 지 않으며 지금도 쇠잔해 가는 교회 공동체들이 드물지 않은 사실을 주
- 17 - 목해야 하리라.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하기 힘든 말을 30년 전에 내가 한 일이 있는데 그때 한 말을 되새겨 보련다. “다행히 우리 한국 교회는 후퇴를 막아 주는 좋은 신앙적·선교적 장치 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판공성사의 전통과 판공 성사표 제도이다. 또한 평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과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존경이다. 판공성사를 도우러 가는 사제들을 정성 들여 따뜻이 맞이하는 평협 회 장과 회원들을 볼 때, 그리고 성의를 다해 음식을 장만하는 자매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의 따뜻한 환대에서 맛보는 인간적인 만족감에 앞서, 한국 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심화를 내다보며 더욱 큰 기쁨에 잠기게 된다. 한 편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은 그에 못지않게 항상 새롭게 신자들의 영혼 을 더욱 정성 들여 보살피며, 그들을 어려워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는 믿음, 사랑, 상호 존경 속에 삼자가 일치된 가운데 하느님의 축복을 계속 받을 것이다.”
- 18 - 반비례의 논리 이것은 두 존재 가운데에서 하나가 높아지면 다른 것은 반비례로 낮아 지게 된다는 논리다. 곧 한 쪽이 위에 올라앉으면 다른 쪽은 저절로 그 만큼 내려앉게 되고, 하나가 선두에 나서면 다른 하나는 자연히 후미로 밀려나게 되어있다는 이치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놓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자리를 두 고 하느님과 겨룰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격체, 곧 인간뿐이다. 나와 그 대,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라도 하느님과 겨룰 수 있고 또 견주기를 바란 다. 사실 인간은 그 시조가 천진무구한 상태에서도 우월감과 교만의 기운 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러다가 유혹을 받자 허황되이 하느님을 거슬러 감히 그분과 맞서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예들은 누구나 그 기질을 타고 난다. 이것을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나를 두고 누가 윗자리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를 수시로 점검하며 지낼 필요가 있다. 생각과 말로는 어찌 감히 하느 님 위에 올라앉겠느냐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 있 기에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활동하는 것 전량全量이 아니라, 그중에서 하느님을 맨 위나 맨 앞에 모시고 한 것만이 알맹이가 되고 나머지는 모조리 쭉정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혹여 그 많은 교회의 활동에 비해 실질적인 성과 는 시답지 않다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람은 인간 찬양의 본능을 타고난다.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일 경 우도 더러 있지만 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마구 추켜세우는데 그 중에 게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이들도 들어있다. 그런데 그들을 찬양하는 소리가 높아지면 반사적으로 그 찬양자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진다. 하 느님이 뒷전으로 물러나 가려지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마음을 주님 께서 내게 주시는 소중한 선물로 여긴다. 인간 찬양 없는 시대가 없었지 만, 특히 대중 전달 매체가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 찬양의 소리는
- 19 - 더욱 요란해지고, 하느님은 반비례로 더욱 소외되는 현실을 뚜렷이 보게 되니 못내 슬프고 안타깝다. 성인 공경이나 순교자 현양은 물론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도 법도가 있는 것이다. ‘순교자 감사송’에도 있듯이 우리는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연약한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 순교가 영웅적인 행위라서 뛰 어나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느님이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교회헌장 47항’에 있는 말처럼 순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예 외적인 은혜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분은 오직 하느님 이시다. 그리고 필요한 때에 쓸 일꾼을 임의로 보내는 이가 그분이시다. 성인을 공경하고 순교자들을 현양할 때에는 하느님 대전에서 하는 것 임을 염두에 두고 자숙 자제함이 마땅하다. 하느님을 뒷전에 모셔놓고 ‘순교자 만세!’를 부른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질투의 하느님이라고 하셨는데, 당신과의 반비례 관 계에 놓인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경고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나는 성인들을 좋아하고 순교자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을 찬미 찬 양하는 일은 애써 삼간다. 다만 그들이 하느님의 굄을 받아 선택된 것을 기뻐하며 축하할 뿐이다. 찬미와 찬송은 하느님께 드린다. 성인들과 순교자들도 나의 그러한 자세를 기뻐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이것은 그분들의 전구 덕을 많이 입고 사는 사실을 내가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기에 숨김없이 하는 말이다. 나는 가끔, 장수의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나를 하느님께서 왜 이렇게 오래 살려두고 계시는지 몹시 궁금해하곤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반비례의 이치를 더 깊이 더 확실히 깨닫고, 또한 가능한 대로 작은 소 리로나마 세상을 향하여 그것을 외치다가 당신께로 가게 하시려는 하느 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다. ‘홀로 위대하신 하느님! ‘주님을 맨 위에! ‘주님을 맨 앞에!
- 20 - 내가 살아있는 한 이 구호들이, 안으로는 내 가슴에 새겨지고, 밖으 로는 내 입버릇이 되게 하리라. 행복하여라, 영광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돌리는 그 사 람! 하늘나라에서 그가 받을 영광이 클 것이다.
- 21 - 모두가 나보다 낫다 나의 스승이자 동지였으며 많은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신부 한 분 이 어느 날 나에게 이르기를 “모두가 나보다 낫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의 진심에서 나오는 실토였다. 그가 그렇게 선언한 것은 그의 나이 50이었을 때이다. 그리고 그는 향년 62세 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와 헤어져 그분이 계신 곳으로 올라갔다. 나는 나를 놓고 생각해 보았다. 해가 가고 나이가 쌓여감에 따라 연하의 사제들이 많이 생기고 제자들도 적지 않아졌다. 그렇게 되면서 그들보다는 내가 나으리라는 얼토당토아 니한 생각이 은연중에 내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 른 채 살았다. 나는 노경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지만 늦게나마 나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아니 주님께서 내 모습을 내 앞에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를 보고 나니 “모두가 나보다 낫다.”라고 한 그 신부님의 말이 바로 내가 할 말임을 깨달았다. 젊은 신부들을 볼 때 젊은 사제 시절의 나보다 그들이 더 낫게 여겨지 고, 모든 세대의 성직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인 정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생들을 보면서도 내 학창 시절보다 더 나은 학생들임을 솔직히 말하게 되었다. 그 신부님의 ‘모두’에 평신도가 포함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 다. 여하튼 나의 ‘모두’에는 성직자·수도자와 함께 평신도가 들어있다. 한데, 평신도를 포함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는 하였다. 그 리고 그것은 사제직에 대하여 내가 지니고 있던 공식적인 보편 관념의 탓이었다. 사제직은 다른 이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성소다. 신학교 입학과 동 시에 나는 ‘사제’라는 라틴 원어에 대해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의 뜻 은 ‘성스러운 것을 주는 사람 sacerdos’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사제는 남 에게 주는 사람, 베푸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내 머리에 꽉 박히게 되었
- 22 - 다. 사제가 된 후에도 나는 나 자신이 거룩한 것을 주는 사람임을 스스로 느끼거나 다짐하면서 살았다. 사실 사제직은 남에게 베푸는 성소임이 틀 림없다. 사제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사람, 주는 입장에 있는 사람, 줄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남을 가르치고, 성화하고, 다스리는 것이 사제 의 사명이자 의무일진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얼마 뒤에 사제에 대한 나의 고정 관념의 테두리를 벗어 나서 사제와 평신도의 상호관계를 깊이 깨닫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곧, 사제는 평신도에게 주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서 받는 사람이 기도 하다는 것을 깊이 그리고 절실히 깨달았다. 물론 사제가 신자들로 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고 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지만, 영적인 도움도 적지 않게 받고 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깨닫지 못하고 지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평신도가 나를 가르치는 진리의 스승이자 내 신앙생활을 돕는 영적 동반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 었다. 마치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 앞서 평신도, 그것도 여신 도들로 하여금 당신 부활의 첫 체험자가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사도들 앞에서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게 하셨듯이, 주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존재 와 자비의 증인으로 내 앞에 내 세우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평신도들의 글을 자주 읽어 오 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들을 찾아가서 단순한 방관 자로 거기에 서 있지 않고 그들의 신앙체험을 나누어 받곤 한다. 나는 마 치 그들의 만남의 자리들을 편력하는 일종의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복음서에 나오는 만남의 여러 장면들, 가령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이나 니코데모를 만나시는 장면에서 받는 것과 비슷한 감명을 주님 과 그 평신도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느낀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는 이 야기는 언제나 나를 즐겁고 기쁘고 신나게 해 준다. 이 새로운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나는 나도 모르게 평신도가 나보다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 이면서 스스럼없이 그것을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마음에서 우러나온 나의 기도를 여기에 덧붙인다.
- 23 - 지극히 사랑하올 주 하느님, 나는 너무 늦게야 ‘모두가 나보다 낫다’라는 이 말을 하게 되었나이다. 하오나, 내가 그 말을 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은 나로 하여금 허리를 펴고 고개를 세워 어엿이 나보다 나은 그들 한가운데 살게 해 주셨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는 은혜와 기쁨에 감싸여 살아왔나이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사오나 이것은 특별히 나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편애로 느껴지옵니다. 사랑하올 주님, 당신이 나보다 나은 그 많은 형제자매들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심 같이 그들은 나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소서. 홀로 위대하신 우리 주 하느님, 감사와 찬미와 영광과 흠숭과 사랑을 이제와 영원히 받으시옵소서. 아멘.
- 24 - ALTER EGO, ALTER TU Ⅰ ‘alter ego, alter tu’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0년, 하느님께서 나와 동창의 인 연으로 맺어 주신 이응현(李應鉉) 테오도로 신부가 만든 말로서, ‘다른 나, 다른 너’ 또는,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너’로 번역되는 라틴어다. 따라서 이 신부와 나는 서로를 ‘너는 다른 나요, 나는 다른 너’라고 부르 는 사이라는 것이다. 우리 1940 입학 동기 동창생들은 한 가지 말고는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 가 없는 아주 평범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평범 이하의 학년이었다. 위 에서 말한 한 가지란 상급 학년생들도 부러워한 우리들의 강한 동기 의식 과 우애와 친화력이었다. 그중에서도 이 신부와 나의 우정은 특별한 것이 었는데, 그렇게 된 것을 나는 하느님의 별다른 섭리로 이해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삭발례로 시작되는 성직의 품수는 일곱이었다. 1품에서 4 품까지는 소품이라고 하였고, 다른 세품 곧 차부제·부제·사제의 세품은 대품이라 하였다. 그런데 소품들을 다 함께 받을 수 있었던 우리 동창들 이 대품들을 각기 흩어져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는데, 그 전쟁은 우리 동창생 하나를 공산당의 손으로 참혹히 살해하게 하고 또 우리 모두를 흩어놓은 전쟁이었다. 이 신부와 나는 그 전쟁에서 같이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였고 제대하여 함께 대품들을 받았다. 차부제·부제품은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그리고 신품성사는 1953년 서울 수복 직후 명동대성당에서 받았다. 이리하여 ‘동창’이라는 명사는 우리 두 사람의 대명사가 되기에 이르 렀다. 우리는 본이름 대신에 서로를 이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 그와 나 는 신장과 체중이 비슷할 뿐 닮은 데가 없는데 친근히 지내노라니 우리 를 쌍둥이라고 보는 사람들까지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그가 만들어 낸 말이 바로 alter ego, alter tu인
- 25 - 것이다. 그와 나는 출신 교구가 달랐고 하는 일의 종류가 달랐으며, 서 로의 처지와 위치가 달랐지만, 우리의 관계는 그런 것들 위에 초연했다. Ⅱ 전쟁의 분산력보다 우리 동창회의 결집력이 더 강하여 우리는 전쟁 후 에도 잘 모였다. 정식 동창회는 연 2회 있었는데 우리는 극성스럽게 열 심히 참여하였다. 그렇게 기쁘게 사제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제주교구의 주교로 임명되는 뜻밖의 일로 인하여 동창회에서 제명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주교가 되면 동창과의 인연은 자연히 소멸된다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릇된 상식의 영향으로, 내가 주교로 임명되고 아직 서품되지는 않은 때였는데도 내 동창들은 존칭과 존댓말을 쓰면서 나를 경원하는 것 이었다. 나는 몹시 슬펐다. 그들도 그들대로 동창 하나가 주교 되는 것 을 기뻐하면서도 상실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놓였다 는 것을 나는 알았다. 취임식 전날 밤 그들이 묵던 숙소를 찾아갔을 때 그들은 마침 나와의 고별 만찬회에 대하여 의논하고 있었다. 피만큼 진한 동창의 인연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별식을 의논하자니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무겁고 어두웠다.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동창들에게, 나는 절대로 동창의 인연을 끊 을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 물이나 부모, 아내, 형제, 자매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동창들을 버 려야 한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고 떼를 쓰다시피 하여 그들의 계획을 포기하게 하였다. 그날 밤의 충격이 너무 컸기에 나는 이튿날 착좌식 취임사에 그 이야 기를 집어넣었다. 아마도 주교 취임사에 그런 말이 들어간 것은 한국 교 회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 이후에도 없으리라. 나는 그날 내가 발표한 취임사의 그 어떤 말 못지않게 동창에 대한 그 이야기가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자부한다. 주교라고 해서 동창들에게도 주교여야 하는가? 우리는 미처 철이 들기 전에 주님이 맺어주신 귀중한 동창이며, 육십 년이 넘도록 그 인연을 함께 지켜왔다. 세상의 다른 어떤 인연보다도 나의 사제직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 온 인연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따돌려놓는 것을, 나를 버리고 떠나는 것 -
26 - 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도 나의 간절하고 완고한 요 청을 고맙게도 받아들인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동창회에 아주 자연스럽게, 아니 오히려 그전보다 더 큰 애정과 친근감을 가지고 참석하여 모임의 은총과 기쁨을 나눌 수 있 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동창들의 생각과 마음을 기쁘게 여기고 축 복해 주셨다. Ⅲ 어느덧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하나 다 가 버리고 이제는 96세인 alter ego와 95세를 바라보는 alter tu가 덩그렇게 남아있을 뿐 이다. 새 하늘 새 땅의 사정은 현세와는 전혀 다를 터인데 동창의 인연이 어 떻게 될는지 궁금하다. 나는 다만 이 인연이 거기에서도 살아 있기를 바 랄 뿐이다. 몇 해 전에 동유럽 순례 중에 ‘검은 마돈나’로 불리는 성모자 화(聖母 子 畵)를 구하였는데, 나는 그 성화 앞에서 우리 동창들이 모두 주님 안 에서 모여 있게 해 주시기를 날마다 기도드린다.
- 27 - 이상 체질 나는 비정상 체질 곧 이상 체질의 소유자이다. 나의 혈압은 대한고혈압협회가 정의한 혈압 수치의 기준을 크게 벗어 나, 최고 혈압이든 최저 혈압이든 순간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형편 이다. 한편 부정맥으로 불리는 나의 심방세동이 드러난 지 수십 년! 65가 기 준으로 되어있는 맥박이 몇 해 전부터는 40에서 90 사이를 순간순간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현상이다. 이럼에도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신기로워 은연중에 기적을 생각하게 되 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신기한 일, 또는 자연법과 반 대되는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이 공인된 기적의 정의다. 생각건대, 내가 생존하는 것이 기적이 아닐지라도 기적 같은 일임은 틀림없을 성싶다. 그동안 혼자 간직하고 살아온 일을 공개하는 것이 어 떨는지 주님의 뜻을 살펴보니,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받는 너‘를 보지 말 고 ’주는 나‘를 보게 하라 하셨다. 이는 뜰의 잔디를 바라보듯 무심히 삶 을 누리고 있는 나에게가 아니라, 악조건하에서도 평연히 생존하는 은혜 를 베푸시는 당신께로 이목을 끌게 하시려 함이다. 옳거니, 하느님의 굄을 받는 내가 드러나도록 해서는 결코 안 될 일! 오직 내게 잘해 주시는 하느님만이 눈에 뜨이도록 해드려야 마땅하고 옳 은 일 일터!
- 28 - 나 주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노라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늙어도 아주 많이 늙은 몸이다. 과연 나는 영락없는 철부지 어린아이이다. 그것도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짜 어린 아이, 철부지 중의 철부지이다. 나는 어른들처럼 내 일을 나 스스 로 못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를 위한 시간표와 계획표를 짜 주시 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시간표에 따라 살아가면 되니 참으 로 편한 노년 시기라 하겠다. 그러나 실토하자면 내 영혼과 육신, 내 전 존재를 맡겨드리는 일 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른 노릇을 하려는 유혹이 있어서 나 자 신이 시간표를 만들려 들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나는 신심의 부 담을 덜어주고 정력의 소모를 모면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길을 벗어 나지 않도록 힘쓴다. 내가 바라기로는, 주님께서 당신은 특례적인 은총에 힘입어 순전 한 100% 철부지 어린아이로서 나를 주님께 내맡겨드리는 가운데, 기쁘고 평안하게 그리고 감사하며 (joyfully, peacefully, gratefully)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 29 -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을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부르는 것을 매우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들어주신다고 한 그분의 말씀이 사실이라 는 것을 실제 체험을 통하여 깨닫고 있다. 참으로 그분의 이름이 지닌 힘은 놀라운 것이다. 내가 제주도에 부임해서 처음 거주한 주교관은 싸움과 굿이 그칠 줄 모르는 동네 한가운데 놓여있었다. 내 자신이 편안히 살기 위해서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싸움판이나 굿판 에 모조리 끼어들었다. 몸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말이다. 사 실 나는 그들을 직접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싸움이나 굿하는 곳을 향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기 도하든가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를 하 기도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싸움이나 굿이 멈추는 것이었 다. 처음에는 그것이 우연의 일치려니 했지만, 번번이 같은 결 과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 덕분임 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동네가 차츰 소란이 잦 아지다가 마침내 내가 다른 데로 이사할 무렵에는 아주 평온해 졌다. 이러한 체험은 나로 하여금 미신행위나 다툼의 배후에는 그 것을 조종하는 사탄, 곧 악령이 도사리고 있음을 여실히 깨닫 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미신이 행해지는 곳, 다툼이 있는 곳, 미움 이나 악습에 묶여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분의 이름을 불러 혹은 내쫓고 혹은 가라앉히고 혹은 풀어주곤 한다. 항공기나
- 30 -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어린 애가 발악하듯이 자지러지게 우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때에도 슬며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하여 울음을 멈추게 하곤 한다. 이밖에도 내가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한 일들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제 또 는 성직자로서의 내 생활은 보람과 성스러운 재미로 채어지게 되는 것이다.
- 31 - 나는 ‘무엇’이다. 자기가 무엇이나 된 듯이 행세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무엇’인 자이다. 나는 평생 ‘무엇’인 자로서 말하거나 행동하면서 살 아왔다. 이리하여 예수님과 나는 전연 다른 이치에, 정반대 위치에 서 있게 된 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찬양·영광·지혜·감사·영예·권능 그리고 세력을 누리셔야 할 분이셨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셨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 가? 아니, 그것을 누리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형언할 수 없는 극도의 수 치를 당하신 예수님이다. 한편 나에 대해 말하면 온갖 수치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죄인임에도 그것을 당하지 않고 있어, 그것만도 천만다행한 일인데 외려 사람들 앞 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으니 이 어인 일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정신을 암 암해지게 하는 일종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 죄송함과 고마움을 깊이 느끼며 살아야 하리라.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아 야 하리라. 나는 내가 일찍이 듣기는 하였으면서 따라 살지는 못한 주님의 그 말 씀을 새로이 가슴에 새기고 진심으로 통화해야 하리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은 그분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너는 내 덕에 호강하고 있음을 알아라. 내 사제라고 해서 너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내가 지상에서 받지 못한 영예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너의 의식주, 그리고 네가 누리는 그 모든 편의와 안락을 헤아려 보아라. 나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었느니라. 사람들이나 대중이 네게 표하는
- 32 - 존경과 대접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늘 낮은 자세로 사람들로부터 비하와 업신 여김을 받음으로써 그것을 상쇄하도록 힘써라. 내 긴 인생의 끝머리에서나마 내가 그동안 받아온 과람하고 과분한 대 접이나 영예가 천대로써 상쇄되기를 바라며 살아가리라.
- 33 - 칼 라너와 마르틴 루터 그리고 은수자 〈순결한 창녀 casta meretrix〉·이것은 이름난 신학자가 교회를 두고 만든 말이다. 창녀는 인간의 것이고 순결은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은 창녀 를 용납할 수 없는 지순지결至純至潔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그녀를 받아들 이시려면 순결의 옷을 만들어 그녀를 덧씌우셔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실제로 그렇게 해 주고 계시는 분이다.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하느님이 이루어 주심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 simul iustus et peccator 〉(의인인 동시에 죄인). 루터의 이 명제命題는 분명히 앞에 언급된 가톨릭 신학자의 경구警句와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명실공히 의화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채로 있으면서 다만 의인으로 간주될 뿐 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명名은 의인이로되 실實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나 은수자는 다른 관점과 견지이기는 하지만 루터의 주장을 수긍한다. 하느님은 더러운 나를 데리고 계실 수가 없고, 더욱이 내 안에 사실 수 가 없는 분이시다. 한데 그분은 나와 하나 되시려고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깨끗이 씻어주신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이 일을 주님께서 해 주신 덕에, 그분으로서는 내 안에 사시게 되고, 나로서는 황공하게도 주님 안에 살기에 합당한 자격자가 되는 것이다.
- 34 - 신형 ‘코로나19 재앙’에 대한 일언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온갖 행위와 운동을 당신의 섭리대로 이끌어 가시고 이루시는 분이다. 그 섭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다. 곧 그분의 섭리 밖에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섭리에 따라 매를 드시기도 하고 벌을 주시기도 한 다. 그러나 그것은 매를 위한 매나 벌을 위한 벌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 까지나 교정矯正을 위한 처벌poena medinalis 藥罰인 것이다. (약벌은 내가 만든 신어新語인데, 이 자리에서만은 그 사용이 허락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이제 세상 모든 화제의 중심에 있는 신형 코로나19 재앙에 대 해 생각해 본다. 인류 사상 일찍이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 이처럼 남녀노소, 부자와 빈 자, 강자와 약자의 차별 없이, 지위의 고하나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전 인류가 그것 앞에 힘들어한 적이 있었던가? 이처럼 지구촌의 한구석 도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휩쓸어 버린 재앙이 있었던가? 우리 교회에서 대성전들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성당들의 문이 온통 닫히고 대축일에도 전례가 집전되지 못한 때가 있었던가? 이것은 마치 박해 시대를 방불케 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서두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야기하였 다. 그러면 이 전대미문의 가공할 만한 괴질이 나타난 이유와 의미는 무 엇인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을 겪게 하시는지 마땅히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으리는 그동안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로룬 자유를 모른 채 그것을 당연하 고 예사로운 것으로 여겼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무심히 서로 만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도외시하고 돈을 들여가 며 크고 작은 여행들을 즐기지 않았단 말인가? 주님을 뒷전에 모셔놓고 마냥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지 않았단 말인가?
- 35 - 나는 이 재앙이 우리 인류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지만 약벌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는 그리고 하느님을 바라볼 때에야 거기서 희망을 발 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그리스도인 들만이라도 하느님을 찾아 모시고 그 앞에 엎드려 깊이 뉘우쳤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살아야 하리라. 곧 다시는 이전과 같 은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일상의 생활 리듬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가운데, 지금처럼 계속 거리를 두고 사는 것도 고려해야 하리라. 가까운 사람들마저 서로 경계하며 만 나기를 꺼리면서 사는 삶을 살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을 해야 하리라. 여 행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조심조심 가려가며 해야 하리라. 반비례의 논리에 따른 세례자 요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더욱 높아져 야 하고 우리 인간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더욱 낮아져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교회의 복음화를 위한 활동이 알맹이보다 쭉정이가 더 많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느님보다 인간이 커진 증후인 것이다. 코로나를 보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방정맞은 소리로 들릴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허 락하고 계신 것으로 나는 믿는다.
- 36 - 병신 이야기 나는 병신이다. 병신은 나의 신원이다. 내 육신은 몇 군데 결함이 있 어 온전치 못하다. 나와 함께 살아본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개중 에는 슬쩍 쳐다만 보아도 알아낼 수 있는 결함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병신임을 들어 말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글을 읽은 내 제자 의사 한 사람이 펄쩍 뛰면서 이제는 그 낱말을 쓰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다. 병신 대신에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기로 되었 으니 앞으로는 부디 그렇게 하라고 내게 간촉하는 것이었다. 그는 80줄에 들어선 은퇴 교수인데,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응답하였다. “친애하는 제자 이시도르, 나는 내 생전 단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병 신이란 낱말을 쓴 일이 없다네. 그것은 오직 하느님과 나 사이에 오가는 말일세. 나는 병신임을 주님 앞에서 아무런 망설임이나 거리낌 없이 틈 틈이 고백하곤 한다네. ‘병신’보다 더 혐오스러운 단자가 있다면 나는 그 것을 사용할 걸세. 왜냐하면 내가 자신을 천시하고 비하하는 표현이 강 할수록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더 내게 가까이 오셔서 사랑해 주시는 분임 을 내가 확실히 알기 때문이라네.” 주님은 나하고 가까워지시기 위해 시련을 보내신다. 시련과 친근은 비 례한다. 늙은 나의 이·목·구·비·수·족·오장·육부가 어디라 할 것 없이 성한 데가 없고, 지적 정신적 기능의 쇠퇴로 인해 안타까울 때가 적지 않다. 내 몸이 고통을 겪을 때, 노쇠가 가져오는 거동의 불편함이나 소외감 에 시달릴 때 주님께서는 내게 가까이 오신다. 참으로 주님은 늙은 나에 게 더욱더 가까이 계시기 위해 더 크고 더 많은 고통을 주신다. 바로 이 것이 내가 살아온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이때가 주님께서 나에 게 더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 이유다. 이것은 또한 내가 전 에 없이 큰 기쁨 속에서 노년기를 즐기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 37 - 놀라운 것은 내가 영 밖의 문제들을 가졌을 때보다도 내 영 안에 문제가 있을 때, 곧 죄를 지었을 때, 주님께서 더 큰 사랑을 가지고 더 가까이 내게 오신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 죄인은 마음을 쥐어뜯는 식의 통회를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속맘으로 회한과 감사의 눈 물을 흘린다. 일이 이리되면 나를 죄로 유인하는 마귀와 세속과 육신은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리라. 하느님께서 내게 가장 가까이 오시는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내가 가 장 견디기 힘들 때, 가장 큰 시련을 겪을 때, 곧 죽을 때일 것이다. 지금 의 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과 내가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 더라도 베일이 드리워진 가운데, 또는 거울을 매체로 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죽을 때에는 그 베일은 벗겨지고 그 거 울도 치워질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나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 리라.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그것은 전지전능하시고 지인 지자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섭리인 것이다. 병신 이야기는 여기서 이렇게 끝난다. 아 참, 중요한 한 마디가 남아 있다. 그 한 마디란, 우리의 일생이 비극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 은 기쁨의 원천>이시라는 것이다.
- 38 - 분위기 이야기 자연계에 분위기가 있듯이 초 자연계에도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앞엣 것은 물적 분위기요 뒤엣것은 영적 분위기이다. 분위기는 매우 중요하다. 가톨릭 신자의 집에는 십자고상, 성상, 성화가 걸려있거나 놓여있다. 이것은 외적·진료적 분위기다.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가정 구성원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 화목해지는 내적·형상적 요소가 갖추어져야만 온전 한 가톨릭 가정이 되는 것이다. 천주교 성당에는 반드시 십자고상이 있고 성상이 놓여있고 14처 성화 를 비롯하여 다른 성화들이 벽에 붙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감실에 지극 히 거룩한 성체가 모셔져 있다. 갈라진 형제들의 가정에는 외적 분위기 라는 것이 없고 그들의 집회소 곧 예배당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분위기는 가정마다 다르고 본당이나 교구마다 같지 않다. 그것은 지역 따라 차이를 보인다. 우리 교회는 모름지기 서로 다투듯이 속된 냄새가 아니라 영적인 향기를 풍겨내는 원천이 되도록 힘써야 하리라. 내가 감싸여 사는 ‘새미 은총의 동산’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순례하 는 성지 등의 그것과 상통한다. 곧 영적 분위기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에는 거리를 누비는 대대적인 성체거동이나 성모 행렬 같은 행사 등이 있어서 영혼의 목마름을 풀어줄 뿐 아니라 영적 분 위기를 유지 보존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져 자 연 그런 행사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에 따른 영적 공허감을 해소 시 켜주기 위해 하느님은 고맙게도 ‘새미 은총의 동산’을 만들어 주신 것이 다. 그리하여 피정의 집과 여러 부대시설 곧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연 못 길, 삼위일체 대성당 행사 등을 통해 교구 신자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허다한 신자들의 영적 갈증을 풀어주고 있으니 이것은 제주교구에 맡겨 진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임무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는,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마땅한 징계로 깨닫고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터이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재앙으로 인해 저 흐름이 중단되었으니 심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 39 - 숫자 이야기 Ⅰ 사람은 숫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잉태되는 순간부터 숫자가 시작된다. 그의 생애는 숫자로 채워진다. 숫자는 그의 운명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 성자께서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상 숫자를 떠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잉태되시고 탄생하시는 순간부터 숫 자에 매이시어 그 날짜, 곧 숫자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더욱이 예 수님은 앞으로 마냥 늘어날 숫자의 원천인 A.D.와 B.C.라는 인류 역사 의 새 기원을 세우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즐겨 쓰신 비유들 안에는 숫자가 많이 들어있다. 사실 성경은 처음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온통 숫자 천지다. 달력과 시계는 숫자로 꽉 차 있다. 달력은, 1년이 365일이고 1개월은 30일이며 1주간은 7일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시계는, 1일이 24시간이고 한 시간은 60분이며 1분은 60초임을 알려준다. 이 많은 숫자들 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길이 없다. 정녕 숫자는 인간 생존의 절대적 필수 조건 condicio sine qua non인 것이다. 숫자가 없으면 나는 생일도 나이도 없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숫자 와 관련된 모든 것이 내게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되면 남는 것은 아무것 도 없으리라. 백지상태가 나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력서가 되리라. 모 두가 동시에 멍하니 숨만 쉬다가 미치고 말리라. - 40 - Ⅱ 숫자와 관련이 있는 말 가운데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 은 아주 작은 경우를 말할 때 쓰인다고 하지만, 이것을 뒤집으면 아주 큰 것을 말할 때 쓰이기는 말이기도 하다. 하여간 이 말은 접어도 펴도 과장된 표현인 것이다. 하느님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오히려 평가절하가 된다. 하느님을 위해서는 만분지일이 아니라 억億의 1억 배, 또는 조兆의 1만 배인 경京이란 숫자로도 안 된다. 그분은 숫자 를 초월하는 분이시다. 어느 만치 초월하시는가? 무한히 초월하신다. 그렇다. ‘무한’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그 사용 이 유보된 배타적 성격의 단어이다. 무한이라는 말이 있는 곳에 하느님 이 계신다. 누가 영멸에서 구해내 준다면 그 고마움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겠는 가? 게다가 영생까지 누리게 해 준다면 그 은혜를 무슨 숫자를 써서 드 러낼 수 있겠는가? 그 은혜, 그 고마움은 무한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느님의 행하심은 언제나 무한하다. 영생이 아닌 현세적 은혜일지라 도 예외 없이 모두가 무한하다. 하느님은 ‘무한’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 존재로 체험하기 시작한 때 바친 기도가 있 는데, 아 그 기도를 이 자리에 들여놓고 싶은 충동을 도시 억제하지 못 하겠으니 이를 어쩔까나! 죄인을 끌어안으시기 위해 몸을 낮추시는 주 예수님, 당신은 죄인인 나를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 온몸을
- 41 - 낮추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위해 죽 는 시늉이 아니라 실제로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못 알아들을 일입니다. 주님, 인간의 진실한 사랑도 신비스러워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거나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당신의 사랑이야 무한 무량하시니 그 신비스러움 또한 그지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 한 가닥인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몸을 낮추시어 대죄인인 나를 끌어안아 주시고 간난신고 끝에 목숨까지 내주시면서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나를 구해내신 은혜와 아울러 영생의 희망을 안겨 주신 사랑에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1989년 4월 13일)
- 42 - 어리광의 영성 내가 여러 해 동안 간직해 온 비방祕方 하나를 공개하고자 한다. 이 비 방은 신앙생활을 돕는 하나의 길이며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전 생애를 연구에 바친 유식 한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한 완덕의 비결을 자기는 14세 때 이미 터득했 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는 이순耳順에 이르러서야 겨우 감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어리광의 영성’이다. 주님 앞에서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어 어리광과 재롱을 부리는 이 길을 가보려는 나를 가로막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지적·정신적· 영적인 우월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당신 친히 어리광과 재롱부린 경험 이 있는 예수님과, 내가 매일 그의 성화 앞에서 기도드리는 ‘영원한 도 움의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그 장애는 수월하게 제거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개인이나 공동체들이 너무 힘을 많이 쓰고 있 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그 힘을 빼야 제 맡은 사명을 더 쉽고 더 효과 있게 이루어 나가게 될 터인데 말이다. 이루어 나간다기보다도 주님의 이루어 주심을 얻게 되리라. 자기 자신의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자신에게 강요하는 일을 삼가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신앙 과 영성 생활에서 자력自力과 자조自助를 과도히 중요시하게 되어 십중팔 구 오만과 망상을 불러들이게 되리라. 같은 이유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과대평가하는 일도 삼 가야 하리라. 가장 완전한 응답인 성모 마리아의 ‘Fiat’까지도 실은 주님 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성모님의 성소는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 상 최고의 것이었고, 그분의 응답 또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훌 륭하고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모님도 당신의 힘으로 또는 당신 자 신의 자격이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무염시태의 은혜를 베푸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마리아의 응답인 피아트를 정해 놓으셨 던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피아트가 더없이 훌륭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이 만들어 주신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네 응답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리. 지나친 무게와 가치를 거기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 43 - 지당한 일이 아닌가!? 누구나 시간이 나는 대로, 아니 시간을 내서 자주 주님을 찾아뵙고 그 분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거나 재롱을 떨자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소 리 높이 외치고 싶다.
- 44 - 원망하거나 투덜거리지 마라. 자기나 자기의 일, 남이나 남의 일, 나라나 교회나 세상의 일, 그 일들 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투덜거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항거 가 되는 것이다. 모든 원망은 하느님을 향한 원망이요, 모든 투덜거림은 만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내가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하 느님께서는 매우 싫어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투덜거리는 자들을 모두 치셨다. 직결 처분을 하신 일도 드물지 않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었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웠던 위 대한 인물 모세도, 그럴만한 핑곗거리가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투덜 거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약속된 땅에 들어간 것은 오직 험난한 여정에서 투덜거리지 않고 하느 님의 계획과 결정에 맹목적으로 순응한 사람들뿐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원망하거나 투덜거릴 일들이 예고 없이 무시로 나를 찾아 든다. 그리하여 얼핏 마음이 풀어져 그만 투덜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지체하지 않고 뉘우치면서 성모님을 바라보곤 한다. 성모님은 원망을 모 르신 분이다. 아드님을 모질게 채찍질하는 자들이나 그 거룩한 얼굴에 손찌검하고 침 뱉는 자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으셨다. 자기들을 위해 돌아가시는 구원자를 조롱하는 것을 보시면서도 투덜거리지 않으셨다. 빌라도, 헤로 데, 유다 이스카리옷, 반역하고 배반하는 군중 가운데 그 누구를 두고도 원망하거나 투덜거리지 않으셨다. 성모님은 오직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 이신 분이다. 순교자들은 성모님의 그 모범을 본받아 자기 운명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은 이들이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이 또한 그러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원망 없이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이라고 여겨진다. 앞으로 나는 지난날의 억울한 일이나 실패한 일을 되새기지 않으리라. 그것들이 나를 원망으로 이끌어 갈 것이기에. 또한 미래의 일에 큰 기대를 걸지 않으리라. 그것이 투덜댈 싹을 지니
45 - 고 있기에. 그리고 과욕을 품지 않으리라. 그것이 툴툴거릴 씨앗을 숨겨 놓고 있 기에.
- 46 - 하느님 마음에 드는 기도 모든 기도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는 기도는, 예수님이 손수 만들어 주시 면서 우리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신 ‘주님의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들의 중심 기도, 기도의 왕이다.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들은 이 기도를 거들어 주고, 여타의 기도들은 이 기도의 둘레를 도 는 기도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기도들이 있다. 그것들은 마치 사 개가 들어맞는 기도, 곧 들어가야 할 말들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 도, 짜임새가 멋진 기도이다. 하지만 이 기도는 힘이 약하고 효력이 변 변치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멋지게 꾸며 놓은 말들이라도 떼어버려야 할 군더더기들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개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면 주님의 기도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사람 들이 많은 말로 맞추어 놓은 사개는 예수님이 몇 마디로 만드신 사개 앞 에 무릎을 꿇고 나서 부끄러이 물러가기를 바란다. 전통에 속하는 기도들은 소중히 간직하되 잡다한 지향들로 바쳐지는 기도들은 정리하여 가장 단순하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주님의 기도 를 혼자서 또는 여럿이 마음을 합쳐 바치면 얼마나 좋으랴. 주님께서 반 드시 들어주시리라 믿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주님의 기도를 애송하고 애용하면서 주님의 기도와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47 -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생각함 오늘 대축일의 공식 명칭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대축일’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그에게 주신 교훈과 모 범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곧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반대로 섬기 신 예수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곧 구원사업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 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그의 임금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오늘의 대축일을 제정하신 비오 11세 교황님의 뜻이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종식 직후의 혼란 뒤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을 때 그 나라의 참상을 통감하게 되었다. 마치 가장을 모시지 않은 집안 꼴을 보는 듯하여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셔야 함을 깊이 절감하였다. 이리하여 그가 교황으로서 서둘러 하신 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제정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당연한 처사라 여겨진다. 모든 나라의 방송국에는 신호 음악이 있어서 날마다 그것으로 방송을 시 작하고 또 그것으로 방송을 끝낸다. 우리나라 방송국의 신호 음악은 애국가 이다. 바티칸 방송국의 신호 음악은 무엇인가? 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그리스도 승리하시는도다. 그리스도 통치하 시는도다. 그리스도 명령하시는도다. 이것을 노래로 부르는데 이른 아침 에 열면서 연거푸 세 번, 늦은 밤에 닫으면서 역시 연거푸 세 번을 부른 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는 그분이 남기신 교훈과 모범을 따라 사는 한편 그분을 만 왕의 왕, 만군의 주님으로 삼가 모시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하리라. 예수 님을 덮어놓고 낮추어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분은 더 이상 종 취 급을 받아서는 안 되고 높이 높이 올려지셔야 할 분이다.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만세! 만세! 만만세!!
- 48 - 내 인생의 각본 모든 인생에는 각본, 일명 시나리오가 있다. 각자의 각본은 본인 자신 이 만드는 것이다. 당사자 외의 그 누구도 그를 위해 시나리오를 작성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일들을 두고 각본을 쓰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번번이 빗나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미래, 내 인생의 운명을 두고 진지하게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었지만, 그것이 말끔 허사가 되는 것이었 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렇게 되어온 사유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랬 더니 그것이 인간 위에 군림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에 의한 것임을 알아내 게 되었다. 하느님은 놀랍게도 내 각본에 들어있는 것들을 기어이 이루어지지 않 게 하시는 분이시었다. 그러니 나는 좋든 싫든 원하든 말든 내 인생에 대한 소신과 자세를 돌려야만 했다. 실상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그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내가 아닌가? 마음을 비운다 는 말이 유행어가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와 상통하는 말이다. 나의 뜻은 사라지고 오직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시나리오만 남겨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계기로 하여 나는 마침내 내 이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치와 그분이 지니신 이유를 받들어 살게 되었다. 불완전하게나마 주님께 나 자신을 맡겨드리고 무심히 사노라면 홀연히 뜻하지 아니한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 이 나를 주님께 완전히 내맡겨드리도록 나를 유도해 주고 있다. 나는 일 을 꾸미지도 말고 궁리하지도 말아야 한다. 비록 내 뜻은 사라지더라도 결국 일들이 잘됨을 깨닫고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이 들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있 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자기 이 름으로 청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각본에 따르지 않고 자기가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청하기 때문이다.
- 49 - 재미라는 것 재미가 없어서 주일 미사에도 주일 학교에도 안 나간다는 소년을 보았 다. 그리고 재미가 없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냉담자도 보았다. 재미에 대한 그들의 말은 진언이요 명언이다. 재미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이다. 결혼 생활에서 재미가 결여되면 부부의 관계는 힘들고 어두워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극 에 이르면 파경이 되기도 한다. 재미없는 성직 또는 수도 생활은 무거운 짐이 되고 급기야 파계로 이 어지기도 한다. 재미없는 인생은 암울하여 우울증을 자아내며 심한 경우에는 자살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소중한 재미는 억지로 또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다. 재미는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 가 운데 하나인 기쁨과 통하는 것이다.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은혜이 다. 이 은혜를 받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평화와 기쁨과 웃음이 사라지리 라.
- 50 - 계명과 고통의 한 가지 공통점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복잡다단하고 까다로운 계명 과 규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기록해 놓고 매일같이 들여 다봐야만 했다. 신약시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년과 시기들이 있고 봉헌된 달들과 주일을 비롯하여 경축하거나 기념할 날들이 있다. 계명의 존재 이유는 명백하다. 주님께서 내가 그것들을 늘 정신 차려 기억하고 있어야만 하도록 하신 것은 행여나 내가 한시라도 당신을 잊을 까 저어해서이다. 내가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줄지어 기다리게 하신 것은 내가 당신을 잊어버리고 끝내 놓쳐버릴 것을 내다보 셨기 때문이다. 고통을 주시는 이유도 한가지다. 고통이나 시련이 없으면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느님은 나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눈 물을 머금고 고통을 주심으로써 내가 당신을 찾고 부르고 당신께 매달리 게 하시는 것이다. 이리하여 계명과 고통은 이 한 가지에서 상통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계명을 가지지 않거나 무시하는 사람과 고통을 겪게 하는 하느님을 외 면하거나 찾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참 그리스도인이라 면 계명을 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감사를 드려야 하리라.
- 51 - 약점 자랑하기 죄는 고해소에서 남모르게 은밀히 고백하고, 고해소 밖에서는 자기 약 점을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한 예로서 내 약점 하나를 말하면 남을 쉽게 부러워하는 마음이라 하겠다. 곧 그 누구처럼 그 어떤 능력이나 재주를 지녔다면 이러이러할 때 쓸 수 있으련마는 하는 마음이다. 바로 이 약점을 동지들에게 꺼림 없이 자연스레 얘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소속했던 대교구에는 성직자들의 성령 기도 모 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두 분의 고위 성직자와 십여 명의 일반 성직 자로 이루어진 다소 특이한 동아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참여 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들은 주 1회, 금요일 오전 10시에 교구청 소성당에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주님께 드리는 그들의 기도에는 약점의 고백이 들어있었다. 그 렇게 기도를 바치는 동안 모두는 자연히 하나의 신원, 곧 주님 앞에서 한 형제임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하여 내가 오랫동안 지녀온 생각과 느낌이 있는데 이 자리에 서 그것을 말하는 것이 허락되기를 바란다. ‘인간의 약점은 상호 친화를 조성하는 역할을 해 준다. 주저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서로의 약점을 털어놓는 사이에 동류의식이 생겨 친화감을 가지게 해 주는 것이다. 나의 부덕 탓일까, 장난삼아라도 또는 농담으로 라도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과는 친 교를 가지기가 힘들다. 나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그런 사람과는 피상적이고 소원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지언정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는 못할 것이다.’
- 52 - 육화의 신비 하느님의 아드님이 강생하시어 인간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구 약시대에 살던 사람들처럼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하느님을 암중모색 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측에서 하느님을 보고 느낄 수가 없듯이, 하느님 측에서도 우리를 보시되 사람의 참모습을 보고 느 끼실 수가 없었다고 본다. 그래서 순수 영이신 말씀께서 살肉을 취하신 것이다.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당신이 지으신 사람과 똑같이 되신 것은 사람과 접촉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서였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 고 만지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인 이상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사람들을 위해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성체는 빵의 형상 아래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본체적으 로 현존하시는 제2위 성자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시다. 참으로 성체는 제2위의 육화이다. 따라서 첫 번째 육화가 중요하듯이 그분의 두 번째 육화인 성체도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누가 만일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한다면 그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리고 누가 만일 빵덩이를 들고 “이것이 예수님이다.”라고 한다면 그를 어떻게 보겠는가? 정신 나간 사람,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이라 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느님 자신이, 또는 예수님 친히 그렇게 선언하신다면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걸고 온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할 진 리가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당신과 접촉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보고 만지 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접촉의 최고 형태인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먹게까지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구원을 위한 필요불가결의 조건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아, 내가 그분 사랑의 끝을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결코 볼 수 없으리라. 그 사랑은 무한하니 말이다.
- 53 - 슬며시 해 주시는 하느님 주님은 드러나게도 일을 하시고 슬며시 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일을 슬며시 계획하신다.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을 홀로 슬며시 계 획하셨다. 나의 창조와 구원도 나 모르게 슬며시 계획하신 것이다. 신학교 시절 학칙에 따라 나는 하루의 일과를 끝낸 시간에 양심 성찰 을 하였다. 그런데 그 성찰은 그날이 그날 같고 밤낮 같은 자리에 맴돌 았을 뿐이었다. 뒤돌아보니 그 성찰을 다른 식으로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주님께서 슬며시 내게 해 주신 것이 무 엇인가 하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일, 한 일, 대인 관계, 어 려웠던 일, 기뻤던 일들에서 하느님이 슬며시 해 주신 일을 마음에 비추 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만일 매일 그렇게 했었더라면 내 안에 경이감이 자라났을 것이고 내 생활은 퍽 재미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슬며시 계획하신 일, 슬며시 해 주신 일들을 떠올려 본다. 헤아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새겨 보련다. 지금으로부터 8, 90년 전, 내 유년 시절에 배운 교리에 따르면 우리 교회의 으뜸이 두 분인데 한 분은 볼 수 없는 으뜸인 예수 그리스도이 고, 다른 한 분은 볼 수 있는 으뜸인 교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황님은 볼 수 없는 으뜸과 같은 분, 그저 사진으로 만 볼 수 있는 분이었다. 천상 예루살렘의 모상인 도성 로마라든가, 하 늘나라 성전의 모상인 베드로 대성전 역시 아시아의 한구석에 사는 나에 게는 꿈의 도성이요, 꿈의 성전일 뿐이었고 그 사정은 청소년 시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영상을 통해 움직이는 교황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지구촌도 차츰차츰 좁아지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나를 위해 슬며시 계획하시어 작성해 놓으신 하느님의 각본 에 따라, 나의 능동적 관여 없이,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어인 일인가! 천상 예루살렘의 모상이던 꿈의 도성 로마에 가 보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살면서 공부까지 하였으니!
- 54 - 꿈의 하늘나라 성전의 모상이던 베드로 대성전을 구경하고 무시로 드 나들었으니! 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이로되 볼 수는 없었던 교황을 만나보았으니! 어찌 그뿐이랴! 그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회의 으뜸이신 교황으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중앙 제대에서 그 으뜸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으니! 내 영혼아, 놀라지 마라!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슬며시 계획하신 일들이었느니라. 나 이제 무엇을 더 바라며 무엇을 더 기대하랴! 이제 남은 일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뒤에 생길 일들에 대해서 마음 쓰지 말고 오직 그분께 서 나를 위해 슬며시 계획해 놓으신 일들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며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
- 55 - 원죄와 본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아담이 지은 죄는 확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위대 한 구세주를 알게 해 준 그 탓은 복되다고 감격에 넘쳐 외쳤다. 한데 이 성인은 아담이 범죄하는 일에 하느님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 님의 섭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은 모든 일에 개입하시는 분이다. 실은 개입하신다기보다는 원죄 자체가 그 분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원죄를 범한 것은 사람이고 그것을 범하게 한 것은 하느님이다. 나의 본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죄에는 내가 떨어졌고 떨어뜨린 것 은 하느님이다. 그리고서는 원죄에서 나를 건지셨듯이 본죄에서도 나를 빼내 주셨다. 무죄는 하느님의 보통 사랑이고 죄의 구렁에서의 구출은 그분의 아주 특별한 사랑이다. 이것이 사람을 범죄하도록 하시는 하느님 측의 이유라 하겠다. 하느님은 무한한 자유재량의 소유자이시다. 그분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요,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시는 분이다. 결국 사람은 하느님의 섭리에서, 그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길은 전혀 없는 것이 다. 원죄 이전의 상태에서는 당신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고 있어서 하느님 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알리시기 위해 아담을 죄짓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보통 사랑이 계시된 창조에서는 그분의 전능 일부만이 사용 되었지만, 죽음의 구렁에서 끌어내신 구원에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이 계시되어 그분의 전능이 완전히 사용된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 그 이상의 것을 아니 하셨으므로 그리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절대권을 쥐고 계신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 56 - 나누고 싶은 묵상 두 가지 Ⅰ. 태양과 하느님 자연은 초자연의 상징이며 비유이다. 자연계는 초자연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태양의 빛이나 열에 무슨 도 움이나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나는 오직 태양에게서 전 적으로 그 두 가지를 받을 뿐이다. 태양은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상징이며 비유가 되어 준다.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추신 분이다. 내가 그분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그분의 영광에 무엇을 보태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분의 도움으로 그분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분께 영광을 드린다는 의 미는 내가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는 위치에 있음을 깨닫고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모독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Ⅱ.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본성이 그러한 것이다. 그분은 사랑 아닌 것을 생각하실 수도 행하실 수도 없다. 세상이나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 든 일이, 물리적인 것이든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이든, 그것이 백 색이든 흑색이든, 좋든 나쁘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구별 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그분 사랑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면 나는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또 실제로 그분 안에서 살게 되리라.
- 57 - 하느님이 미워하거나 복수하시는 분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밖에 하실 수 없는 그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는 말이 아니 다. 그러한 말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그분의 사랑 안으로 이끌어 들 이기 위한 방편적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걸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 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거부하면 구원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며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58 - 제2부 낙수(落穗)
- 59 - 낙수(落穗) 1 아버지 개념의 중요성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시작은 ‘우리 아버지’이다. 아, 고마워라! 개념상으로 ‘하느님’이라는 말은 나를 굳어지게 하고 ‘아 버지’라는 말은 나를 감싸주게 할 것을 아신 예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예수님, 나는 하느님이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로서 나를 사랑해 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 고 나로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꼭 껴안게 됩니다. 낙수(落穗) 2 하느님의 작품 만유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하느님의 작품인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또 다른 작품인 동식물과 인간이 함께 살고 있다. 그 인간 안에는 보편성과 고유성, 공유하는 것과 나만의 것이 있다. 그 리하여 나는 나만의, 나대로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나온 일들을 회상하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공들여 만들어 주 신 작품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하느님 친히 내게 심어 주 신 것이다.
- 60 - 낙수(落穗) 3 하느님 사랑의 전령들 하느님은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신 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비신자 등 가리지 않고 줄곧 보내신다. 그 사랑의 메신저, 사랑의 전령들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내게 일깨워 주신다. 바라건대, 나도 그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 사랑의 전령이 되었으면 한 다. 전령마다 맡은 메시지가 다른데 나는 글로써 하느님 사랑을 다른 이 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낙수(落穗) 4 주님의 섭리 따라 나의 기대나 소원에 어긋나더라도 하느님의 섭리에 준하는 것이 그리 스도인이나 사제의 인생에 매우 중요하다. 내 것은 깨끗이 버리고 섭리 를 완전히 받아들이면 내 안의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오는 것을 체험 하게 된다. 실은 세상만사가 주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세상사나 인간사 를 예외 없이 모두가 주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인 생은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게 되리라 확신한다.
- 61 - 낙수(落穗) 5 약점을 자랑하라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다. 예수님은 남을 비판 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다르셨다. 그들은 철저하게 규정을 따르면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들을 데리고 계실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자기 약점을 인정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의 약점을 깨닫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약점 없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낙수(落穗) 6 재생再生 나이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한다. 나이를 먹은 만큼 그만큼 더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고, 그러다가 철부지 어린아이의 경계를 뒤로 넘어서면 신생아가 되는 것이다. 재생은 신생아를 시발점으로 한다. 나는 신생아가 되어 내 영적 여정 을 시작하려 한다. 신생아가 지닌 유일한 본능은 젖을 찾아 빠는 것이라 고 한다. 그와 같이 나의 영적 본능은 하느님을 찾아 꼭 부둥켜안는 것 이라 하겠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것을 육성해 나아가는 것이 나 의 고귀한 운명이라 여긴다.
- 62 - 낙수(落穗) 7 너는 나를 따라라 긴 세월에 걸쳐 나는 교회 안에서 개인들이나 공동체들을 관심과 호기 심에 이끌려 기웃거리며 살펴보아 왔는데, 그러느라고 적잖이 내 신경은 소모되었다. 주님은 마침내 이런 혐오스러운 버릇을 가진 나에게 명령을 내리시게 되었다. 당신의 섭리에 함부로 상관하거나 참견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일 에 끼어들지 마라.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나는 지금 잘못을 깊이 깨닫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길 을 내 걷기 시작한 몸이 되었다. 낙수(落穗) 8 내가 한 것과 하느님이 하신 것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에 따르면 주님은 자기가 한 것을 싫어하셨고, 당신이 자기 안에서 하신 것은 좋아하셨다고 한다. 내 일생을 뒤돌아보면 성인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고 도 긴 내 인생에서 주님이 좋아하실 일로 내가 내세울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 대부분이 주님께서 싫어하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조건 없이 말이다. 그 사 랑은 보통 사랑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이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신 사 랑이다. 의인이 사랑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 당위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 같은 대죄인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경우 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것이니 되었을 뿐이다.
- 63 - 낙수(落穗) 9 양극이 만나는 세상 나는 북극과 남극이 맞대고 버티는 지구, 의와 불의가 맞서는 세상, 통 회하는 죄인과 자신만만한 의인이 공존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 다.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자 칭 의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고 할 때에 그 의인은 의인을 자처하는 가짜 의인을 뜻하신 것이다. 낙수(落穗) 10 희귀한 성소聖召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위에 널리 내려진다. 그런데 오직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이 다. 이것은 내 일생 동안 하릴없이 줄곧 주님의 사랑만을 받아온 것을 확인하고 저절로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다. 사랑과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내가 흘리지 않았는데도 사랑해 주신다. 당신의 사랑에 감격할 줄 모르는 나인데도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마냥 받게 하신다. 이 일에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나는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모르는 채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으니 아, 이를 어쩔까나! 이런데 도 쉴 새 없이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베풀어 주고만 있으니 그저 받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 할 수밖에 없구나. 바라건대,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감사의 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나도 반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 64 - 낙수(落穗) 11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네가 할 나름일 뿐 당신 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늘도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 안에서 교회와 성사 등을 통하여, 그리고 직접 네 안에서 활동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주 님은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기 위해 결코 쉬지 않으신다. 낙수(落穗) 12 주인은 단 하나 나의 주인으로 모셔질 수 있는 것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내 밖에 있는 것, 곧 재물과 물욕이고, 그 둘은 내 육신 안에 있는 것, 곧 사욕과 육정이고, 그 셋은 내 정신 안에 있는 것, 곧 위신과 체념과 자존심이며, 그 넷은 내 영혼 안에 있는 것, 곧 내 선행과 공덕에 대한 자만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내 주인이 되는 날이면 다른 주인을 위한 자리는 남지 않게 된다. 그 다른 주인이란 나를 남김없이 온전히 차지하 실 하느님, 나의 영육을 내맡길 수 있는 유일한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려면 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것 이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마음을 비운다.’라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 65 - 낙수(落穗) 13 허영과 시기 오륜대회에서 펼쳐지는 경기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허영과 시기이다. 한편이 승勝하기를 바라는 것은 허영의 증표다. 염원대로 되었다 하더 라도 얼마 가지 않아 이내 사라지고 말 반짝 영광일 뿐이다. 그리고 상대편이 패敗하기를 바라는 것은 시기의 소치이다. 허영심과 시기심을 버린다면 경기 구경은 틀림없이 참으로 즐겁고 재 미있으리라. 낙수(落穗) 14 속사俗事와 속인俗人 세상 사람이나 일들에 대해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되면 저도 모르게 그들이나 그것들을 평가하고 심판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단죄하 게 되리라.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말고 거리를 두고 살면 그 해악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 66 - 낙수(落穗) 15 진주와 쓰레기 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마음으로 기리며 내가 범죄했을 때를 회상 한다. 범죄한 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통회하며 고해성사를 보는 일밖에! 하느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하느님이 내 안에서 당신이 하신 일, 곧 내 죄악을 씻어버리신 일을 두고 기뻐하시는 것을 느낌으로 깨달 았던 것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니 가치가 있고 내게 공로가 되게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무용의 장물長物일 뿐이다. 하나는 진주인데 반하여 다른 것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제아무리 활동을 많이 하고 좋은 일에 헌신하더라도, 그중에서 하느님이 하신 것만 소중하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것 이다. 낙수(落穗) 16 당연하지 않은 일 내가 이 나이에 불편을 느끼고 고통을 당하는 것, 좋지 않은 비판을 받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하다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 내게 잘해 주 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니다. 죽이기도 살리 기도 하시는 분, 나를 당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분이 나를 이렇게 살 려 두시는 것을 결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한순간 한순간, 한자리 한자리가 모두 주님의 선물이다.
- 67 - 낙수(落穗) 17 가장 슬픈 일 세상에 원통하고 분하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아쉬운 일들이 많지만, 쉴 새 없이 떨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과 권세를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여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으랴! 낙수(落穗) 18 이상한 일 받는 것은 많지만 짊어지는 십자가는 작다. 주님은 자연과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주고 계시면서 내가 짊어져 야 할 십자가 곧 시련과 고통은 내 약한 어깨에 맞도록 작게 만들어 주 신다.
- 68 - 낙수(落穗) 19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고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 르다. 굉장히 다르다. 나는 미사 후 미사 중 잘못한 것이나 부족하게 한 것이 분명히 있었음 을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한다. 그러면 그분은 나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여 용서를 해 주시며 그것을 기뻐하실 뿐 결코 후회하시지 않는 다.정녕 주님은 당신이 하신 어떠한 일들에 대해서도 결코 후회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하여 후회하셨 다는 표현을 쓰게도 하셨지만, 그분은 절대로 후회하실 일을 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 눈에 모순으로 보이는 무수한 일도 그분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 분께는 그분만이 지니신 의미와 이유가 있을 터이다. 낙수(落穗) 20 기쁨의 등급 부족한 기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는 기쁨은 의로운 처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법! 결국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목적이지만 그것은 내 죄를 용서 하시는 주님이 주시는 특전이다.
69 - 낙수(落穗) 21 하느님의 자비 없는 순간은 없다. 하느님의 성성聖性과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도 드러나고 성체 성사에서도 드러나지만 나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도 뚜렷 이 드러난다. 주님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듯하다. “내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알고 싶으냐? 너 자신의 몰골을 제대로 바 라보아라. 네가 받고 있는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바라보아라. 내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그 하루를!” 나는 하루를 지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님께 말씀드린다. “주님, 오늘 하루가 주님의 섭리하신 대로 이렇게 지나간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잘된 일과 잘 안 된 일이 섞여 있는 하루에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그 뜻대로 된 하루가 되었으리라 믿고 감사 드립니다.” 낙수(落穗) 22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많이 읽고 자주 들어도 지치지 않는다. 사람 의 말은 그렇지 않다. 같은 말을 자주 하다 보면 그 힘이 약해져 급기야 매력을 잃고 만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 힘과 가르침을 준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성령의 힘이 팽배해 있는데 반하여 사람의 말은 언 제나 그렇지 못하다. 하기야 사람의 말에서도 성령의 힘을 느낄 때가 있 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맨 앞에, 맨 위에 모시는 말의 경우 이다. 사람이나 현세 사정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이치에 맞고 애절한 호소라 하여도 식상하여 물리게 된다.
- 70 - 낙수(落穗) 23 신비 중의 신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으로 내 상처를 고쳐주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를 살려주셨다.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은 신비 중의 신비요,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다. 내 이해의 영역을 아득 높이 초월하는 하느님의 무한 한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나는 그저 받으면 되니 이 얼마나 고맙고 기 쁜 일인가! 낙수(落穗) 24 ‘내 탓이오’의 영성 여기서 나는 제3인칭인 ‘제 탓이오’가 아니라, 제1인칭인 ‘내 탓이오’로 표현하련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 사고를 직접 보거나 전해 들을 때, 그 즉시 나는 ‘내 탓이오’라고 한다. 그들이 내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 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빗나갔을 때, 또는 전쟁과 참변 같은 것이 일어 났을 때 나는 ‘내 탓이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정하여 속죄하는 생활을 한다.
- 71 - 낙수(落穗) 25 미사성제 어떻게 하면 주님을 제대로 흠숭하고, 주님께 속죄를 하며 감사를 드 릴 수 있는가? 미사성제를 통해서 가장 훌륭하게 그것을 할 수 있다. 그 렇게 하는 그것만이 완전한 흠숭과 속죄와 감사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 께 가장 완전한 흠숭은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가장 큰 속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감사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께 바치는 것이다. 나는 미사 때 이 셋을 제대로 하기 위해 기도한다. 본질적인 성제는 사제가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그분의 이름과 위격으로 예수님을 성부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미사 한 대를 제대로 드리면 그것이야말로 성부의 마음에 드는 흠숭이 자 속죄이며, 감사이자 힘 있는 청원이 되는 것이다. 낙수(落穗) 26 나의 수호성인과 나 나의 수호성인인 사도 성 바오로는 장점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덮어두고 주로 자기 약점을 자랑했다. 나는 어떤가? 마음, 육신, 영혼 어디를 훑어보거나 들여다보아도 자랑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내놓을 것이란 약점뿐이다. 하지만 내가 행한 시 시한 일들을 가지고도 좋은 것으로 내보이면서 자랑하려 들곤 한다. 그 럴 때마다 심기가 언짢아지면서 내가 바른길에 서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이라 해야 하리라.
- 72 - 낙수(落穗) 27 부부애 아담과 하와는 불가분리적인 관계이다. 아담에게는 하와가 100%의 여 인이었고 하와에게는 그가 100%의 남자였다. 그 두 사람에게는 다른 어 떠한 이성도 없었다. 오늘의 남녀들은 자기가 선택한 배우자 외에도 많은 이성들과 함께 살 고 있다. 그러나 배우자로서의 사랑은 100%가 되어야 한다. 100%가 되 지 못할 때에는 그것을 배우자에 대한 배신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 의 주장이다. 낙수(落穗) 28 사랑받을 나의 자격 나로서 주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것이다. 곧 죄인이라는 것, 철부지 어린아이라는 것, 병신이라 는 것, 병자라는 것,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나의 자격이다. 그것들이 주님과 나를 묶어주기 때문이다.
- 73 - 낙수(落穗) 29 처지를 바꾸면 사람이 서로의 처지와 상태를 바꾸어볼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모 든 권력가, 세도가, 부자 등, 세상이 부러워하는 이 사람들이 성인의 처 지와 상태를 맛보기만 한다면 과연 다시 자기네 처지와 상태로 돌아가겠 는가? 그렇게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것이다. 즉 성인은 자기 처지를 버리고 세상의 권력이나 세도나 부 자가 누리는 상태에 안주하지 하지 않고 즉시 본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낙수(落穗) 30 의인과 죄인 1 나는 의가 아니라 죄를 택한다. 아담과 하와는 의인의 지위를 거저 받았다. 그런데 원조는 ‘의’ 안에서 교만한 자가 되었다. 자기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교만에 빠져 언감생심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았다. 그리하여 주님께 받았던 초성과 과성 은혜들 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가 죄인의 처지를 택하는 이유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내가 받은 특전을 옹골지게 간직하기 위해서 이다.
- 74 - 낙수(落穗) 31 의인과 죄인 2 원죄로써 하느님께서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죄인 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사람이 의를 내세우지 못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은 한편으로는 당신의 사랑과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인간으로부터 의 통회와 감사하는 마음이 서로 만나기를 바라신다. 낙수(落穗) 32 나를 필요로 하는 하느님 주님은 당신의 사랑, 넘치는 사랑, 한량없는 사랑을 드러내시는데 필요 한 대상으로 나를 택하셨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주님께 귀여운 존재요 사랑스러운 존재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 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죄짓게 하시어 일단 비참한 상태에 처넣으신 것 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널리 드러내기 위한 대상으로 나를 선 택하셨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75 - 낙수(落穗) 33 죄인임을 자랑하라 바오로 사도는 약점을 자랑하였다. 다른 사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부족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야만 된다. 복음 서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머리로만 아버지를 알 뿐 마음으로는 아버 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작은아들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마음으로 아는 것은 곧 체험이다. 신앙생활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로 마음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낙수(落穗) 34 솔직성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진리 하느님은 인간 측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은 분이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만 그분의 것이고 좋지 않은 것은 그분과 상관 이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좋은 건강만 그분의 것이고 질병이나 허 약은 그분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 성공과 실 패, 평화와 전쟁, 생명과 죽음 등이 우리가 가장 솔직해야 할 사항들이 다. 주님을 변명해 드린답시고 가장 중요한 이 진리를 부정하면 큰 잘못 이다.
- 76 - 낙수(落穗) 35 홀로 능동자이신 하느님 하느님은 유일한 능동자이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진리가 바 로 그것이다. 이 질서가 무너지는 날에는 비극이 온다. 태어남과 죽음이 그렇고 그 사이에 있는 생존 내용 모두가 그렇다. 인간이 스스로 능동적 으로 살고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물론 그는 능동자 가 되기도 하지만 수동자로서 받은 것을 쓸 따름이다. 세상이나 인류의 역사는 능동과 수동의 질서를 혼동하고 전도한 비극 으로 차 있다. 인간의 능동적인 면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주님 께서 주시는 능동적인 은총의 힘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낙수(落穗) 36 핑곗거리 하느님을 믿지 않을 또는 배반할 핑곗거리는 언제나 있다. 세례자 요 한을 보고 ‘마귀 들렸다’하고 예수님을 두고 ‘먹보’라 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는가? 나도 늘 핑곗거리를 찾고 반사적으로 남에게 탓을 돌리려 한 다. 실은 나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인데도 말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모순도 없고 부조리도 없다. 오직 그분의 뜻 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 77 - 낙수(落穗) 37 하느님은 무한 사랑의 소유자 마리아 우리 어머님은 사랑의 최고 소유자이시다. 그래서 나는 불가능 한 일을 성모님께 맡겨드릴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께야 무슨 일인들 맡 겨드릴 수 없겠는가? 일이 너무 커서 또는 너무 많아서 못하겠는가? 하 느님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믿어라. 낙수(落穗) 38 애지중지하지 마라 네가 좋은 발상으로 여기거나 잘한 일로 확신하는 것들을 가지고 너무 대견스러워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일들에 매료되거나 도취해서는 안 된다. 온 백성의 자랑거리였던 웅대하고 미려한 예루살렘 대성전이 돌무더기 로도 남아있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파괴되었느니라. 다시 말하거니와 네 글들에 매료되거나 도취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애지중지하는 아들 이사악을 두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지만, 너에게서는 시험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거두어 가실 때가 있으리니 이 를 명심하여 너의 그 글들에 대한 애착심과 집념을 끊어버려라.
- 78 - 낙수(落穗) 39 이성과 신앙 우리는 인간의 이치나 소견으로 하느님의 무한성과 전능에 테두리나 한계를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선과 의를 행한 사람 들에게 상을 내리시지만, 불선不善과 불의不義를 행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 기도 하는 분이니 말이다. 이 경우 벌 대신 상을 받으니 그 기쁨이야 얼 마나 더 크겠는가? 이 후자에 속하는 나로서는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낙수(落穗) 40 사랑하고 나서 만나라 너는 누구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너의 사랑을 확인하여라. 그 리고 나서 그를 만나라. 주님의 도우심으로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겠노라 는 말을 덧붙여라. 또한, 두 사람 이상 만날 때에도 반드시 그렇게 하여라. 사랑으로 너를 꽉 채워라. 내세의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채워진 곳 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지금 이 땅에서도 그리해야 한다.
- 79 - 낙수(落穗) 41 조건 주님께서 너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니 너도 조건 없이 그분께 감사드려 라. 무조건 사랑하신 분께 무조건 감사드리는 것이다. 네가 사랑받을 조 건이 채워져서 너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다. 실상 네가 주님께 감사드릴 일이 헤아릴 수없이 많지만, 혹시 그분께 감사드릴 까닭이 없다고 생각되더라도 감사드려라. 사랑의 동기는 사랑 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감사도 그와 비슷하다. 낙수(落穗) 42 성내지 마라 네가 만일 열 가지 좋은 일을 해 준 사람에게 성을 한 번 냈으면 가능 한 한 빨리 사과하여라. 불연 하면 너에 대한 그의 고마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말리라. 그리고 더 안된 일은 너의 그 귀중한 선행이 하느님의 책에서 지워지리라는 것이다.
- 80 - 낙수(落穗) 43 뜻을 따름 하느님은 인간에게 다른 이의 뜻을 따르는 본능을 많은 본능 중의 하 나로 끼워 놓으셨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는 것이다. 신 앙생활에서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맞선다. 궁리하고 함부로 일을 계획 하며 그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몸에 배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백일몽도 아니요, 분심 잡념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으 로 하여금 내 뜻을 따르게 하려는 짓인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 라야지 하느님이 내 뜻을 따르시게 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 닌가! 하느님께서는 나의 그러한 망상을 단 한 번도 이루어주지 않으셨 으니, 나는 그것을 나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 매우 다행한 일로 여기며 주님께 감사드린다. 낙수(落穗) 44 양자택일 내 안에서는 끊임없이 자리다툼이 벌어진다. 하느님과 나를 두고 누구 를 첫 자리에 앉히느냐는 것이다. 행동할 때마다 이 문제가 대두된다. 하느님을 위에 모시지 않는 나의 사언 행위는 모두 낭비이다.
- 81 - 낙수(落穗) 45 맡겨놓고 떠나신 주님 제 때에 식량을 내어주라고 분부하시면서 주님은 떠나신 지 오래되었 다. 나는 그동안 그분의 것을 제대로 내어주지 않고 지냈다. 마치 내 것 인 양 움켜잡고 내어주기를 게을리한 것이다. 그리고 흥청망청 내 마음 대로 그분의 것을 써 왔다. 늦게나마 이제는 그분의 것을 모두 내어주련 다. 낙수(落穗) 46 동등하신 삼위일체 성부와 동등하신 성자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언제나 아버지를 앞이나 위 에 모시고 사셨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보다 상위이고 성령은 성자보다 하위라는 종속론의 이단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존재의 선후 관계나 지위의 상하 관계가 전 혀 없는 삼위일체이시다.
- 82 - 낙수(落穗) 47 재미있는 생 너를 무지 무능한 어린아이로 여겨라. 그리고 전지 전능 전선 하신 하 느님께 모든 것을 말끔히 맡겨드리고 살아라. 그러면 뜻밖의 좋은 일들 이 일어남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네 인생은 자연이 재미있게 되리라. 낙수(落穗) 48 사울 왕의 전철을 밟지 마라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여라. 사울은 다윗을 기쁘게 받아들였어야 했다. 자기의 사명이 끝났음을 깨 닫고 주님께서 그동안 자기를 통해서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드리면서 주 님의 뜻을 따라 다윗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를 도왔어야 했다. 너는 이를 표본으로 삼아 네 뒤에 오는 사람들을 모두 주님의 사명을 띠고 오는 것으로 알고 환영하여라.
- 83 - 낙수(落穗) 49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다 들어 주리라 하셨다. 네 소 원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 하여도 결국 자기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예수님께 온 전히 내맡김을 말한다. 낙수(落穗) 50 잘못 생각하지 마라 네 주님인 내가 마치 모르는 듯이, 또는 없는 듯이 생각하거나 행동하 지 마라. 내가 모르는 것이 있겠느냐? 실은 내가 모든 것을 낱낱이 이끌 어 간다는 사실을 네가 똑똑히 알아 명심하기 바란다. 그러나 결코 긴장하지는 마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너를 위해 마련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너는 완전히 마음을 놓게 되리라.
- 84 - 낙수(落穗) 51 나의 평화기도 나는 조국의 평화를 위해 매일 기도드린다. 그 기도는 매우 간절하고 간결하고 단순하다. 그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인데 그것은 이러 하다. “주님, 우리나라에 평화와 안전을 주소서.” 나는 기도의 이유를 달지 않는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각본, 가령 서로 대화를 하게 해 달라느니,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게 해 달라는 따위의 각본을 주님께 만들어드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마땅히 그분의 것이기 때 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각본을 결코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 80 년 동안 바친 우리의 그 많은 기도들이 효력을 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 가! 이제부터라도 그 헛되고 잘못된 짓을 그만두자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소리높여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낙수(落穗) 52 나는 외롭지 않다 그렇게도 가까웠던 동창생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가더니, 2021년 8월 12일 바로 오늘은 유일한 동창으로 남았던 사람마저 떠나버 리는구나! 이제 나만 혼자 남았으니 의당 외로움을 느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이시지만 내 형님도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가! 동창 들과 내가 유명을 달리한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있었을 때보다 그들이 오 히려 아주 가까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내 생각이나 마음에 외로움이란 것이 자리 잡을 수 없고, 외로움이라는 말이 내 입에 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 85 - 낙수(落穗) 53 주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본성은 주시는 것이다. 주시되 부스러기가 아니라 옹골진 것 을, 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주신다. 잡물이 끼어있는 것이 아 니라 순수한 것을 주신다. 그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주 시는 분이다. 비록 우리의 유한성으로 인해 작아질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광대무 변한 것이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당연히 영원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신다. 당신 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주시는 것은 최고, 최상의 것이다. 그런데 이 길 에는 당연히 십자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내 등에 그 십자가를 얹어 놓 고 나를 데리고 가신다. 내가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온전히 그분이 해주시 는 대로 나의 전 존재를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되니 이 얼마나 편하고 쉬 운 일인가! 낙수(落穗) 54 너무 모자랍니다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내 주 하느님,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는 내 머리가 너무나 작습니다. 또 그것을 알고 마땅히 감격하며 감사드리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나 좁 습니다. 그리고 내 입의 말은 참으로 너무나 허합니다. 이 문제들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내가 이 몸을 벗어나는 날에 가서 야 풀리게 되리라 믿습니다.
- 86 - 낙수(落穗) 55 예수 성탄의 특은 2021년 예수 성탄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일러 주시는 다음 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나는 하느님이지만 너희를 구원하러 세상에 내려왔을 때, 내 출산을 위한 방은 사람 사는 집에 하나도 없어서 짐승 우리에서 태어났고 그것 들의 여물통에 누워있었다. 이것을 묵상하도록 하여라.” 구주 성자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하느님 대접은 고사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시어 한 차원 내려앉으셨는데 나는 어떤가? 아, 나는 한 낱 인간이면서 과람하고 과분하게 주님대접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이며 부조리인가! 이번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 진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내 전 존재를 흔들어 놓으셨다. 나는 앞으로 이 진실에 감싸여 살아야 하리라. 낙수(落穗) 56 못 말려 내 인생 역정에서 내 미래를 위해 청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소 학생일 때 신학교 가게 해 주십사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제가 갓 되 었을 때 유학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고 놀라운 것은 그 뒤에 내 인생의 수레바퀴는 오늘날까 지 자동적으로 굴러가고 저절로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못 말리는 일’이다. 나 자신도 또는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일인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실은 하느님이심을 깨닫는다. 내 인생 을 좌우하시는 그분께서 내 수레바퀴를 어떻게 멈추게 하실지 궁금해하 면서 그분께 매달릴 뿐이다.
- 87 - 낙수(落穗) 57 유언 삼아 감히 말하건대, 불가사의하게도 하느님께서는 가장 큰 인내심으로 가장 큰 못난이인 나를 참아 주시고, 또한 가장 큰 사랑으로 가장 큰 죄인인 나를 감싸주고 계심을 나는 깨닫고 있다. 그분은 나를 당신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최고기록의 소유자로 만드 시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진심에서 나오는 꾸밈없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