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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본당 출신 수원 성빈센트수녀회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1주일간 귀국 휴가 중 가족들과 함께 곡수리 시골 공소로 변기영 몬시뇰 방문.(2024.06.04).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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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oodless Martyrs' Breathless Voices ! (무혈순교자들의 운명 전 무력한 음성 !) -Msgr. Byon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모두 급감하여 극심한 성소고갈 현상은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비상시기로, 실로 오래간 만에, 아마 3, 4 십 여년만에, 성 빈센트수녀회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의 짧은 귀국방문 중의 휴가기간을 이용한  방문을 받고, 거의 45년 전 당시 같은 시기에 언니는 결혼으로, 동생은 수녀로, 각자 다른 성소에 충실하며 살아온 신장본당 장수동 공소 최병갑 회장의 거룩한 가정의 장한 모습을 뒤돌아보며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1970년대 말의 한국천주교회를 뒤돌아보면, 오늘날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반 세기 전보다 신자들도 110만 여명이 600 여만명으로 많이 늘었고, 교회 시설과 교회 사업도 엄청나게 확장되었으며, 업종도 다양해져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반세기 전보다 비할 수 없이 많아졌으나, 모든 교구 신학교와 모든 수도회 수련소들은 지금 지원자들이 급감하여, 박해시대 후, 최악의 위기를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회에 성직자 부족이나 수도자 부재 현상이 극심하면 종래에 닥쳐오는 결과가 어떠할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독화살을 맞고 쓰러진 위독한 부상병 중환자에게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과 화살을 쏜 적병을 찾는 일도 필요하지만, 화살을 맞은 부상자에게서 우선 독화살을 뽑고 환부를 제독하며 치료하는 일은 더 시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요즈음은 좀 건강하고 젊은 수도자나 사제들을 만나보기가 점점 힘들어져 가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반세기 전에 신장본당의 미사리 한강 마을 장수동과 구산, 신장, 석바대, 검단산 밑의 천현리, 등, 시골 본당에서 신학교와 수도회에 들어가던 젊은이들을 만나보게 되면 80 고개를 넘은 중턱에 서서 어제의 추억을 오늘에 되살리며, 내 자신이 젊어지는 느낌이나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은 허원 후, 일반적으로 기피 대상인 난치병 환자 장기 치료나 빈민굴의 극빈 아동들을 돌보며, 극빈자들과 함께 극빈 상태를 극복하며 즐기고 산다고 들렸었는데, 지금 70 을 바라보는 젊지 않은 나이(68세)에도 아직 늙은 티가 없고, 그 옛날 주일학교 선생하던 그 모습 고대로 보이고 있어서, 더더욱 반갑고 고맙습니다. 

 

사실 1976년 3월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자 수도 400여 명에 불과한 시골 가난한 본당에서 대부분이 생계도 그다지 넉넉지 못한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구산공소 신자들과 함께, 구산 성지 순교복자 김안당 순교비 건립, 신장본당에서 구산본당 설정, 천진암 성지와 남한산성 순교 성지 개척, 서부성당 설정, 또, 동시에 전국 주교회의에 불려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사무국장,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부장, 등.,한국교회가 전에 전혀 해보지 않은 일들을 빈손으로, 맨 입으로, 도맡게 되어, 처음에는 혼자서, 계획수립, 인사 발탁, 기구 결성, 등. 주교님들의 잔 심부름과 200주년 기념 실무를 총괄하며, 매일 같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양한 회합으로, 불철주야로 동분서주 하느라고, 필자는 작은 신장본당의 주일학교 교사들과 공소 회장님들에 관한 일은 보좌신부로 함께 살던 당시 이용훈 새 신부(현재 수원 교구장님)에게 일임하고, 필자는 주교회의에서 전국 차원의 일에만 얽매어 시달리고 있던 때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며 주일학교 교사들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주변에 있는 순교선조들의 발자욱을 딛으며, 순교 선조들의 땀에 젖고 피에 물든 산성리 순교 형장과 구산 마을의 순교자 무덤들을 순례하던, 참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우리 교사들 중에는, 7,8명이나 수도자의 길을 걷고자, 복자수녀회, 성가수녀회, 마리아수녀회, 성 빈센트수녀회, 성체수녀회, 등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택하였고, 지난 반세기 동안 이들은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이룩한 무명의 큰 일꾼들이 되어, 지금 아직도 늠늠한 모습으로, 늙고 낡은 옛날의 본당 신부를 찾아보러 오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각 교구의 신학교들과 각 수도회의 수련소들이 텅 비어 가기 시작한다는 말을 예사로 들어서는 안되는 지금, 성지와 성지순례는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의 샘이오, 산실임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고, 성지를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 나가갑시다. - Msgr. Byon-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당시 같은 시기에, 언니는 결혼으로, 동생은 수녀원으로 입회하고, 각자의 성소에 충실하게, 반세기를 살아온 주님의 축복에 감사드리며, 출발은 다르지만 종점은 같은 데서 다시 만나게 될 기쁨을 천주께 감사합시다. (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 반가운 옛날 친구 신장본당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사무장 고옥자 로사 언니도 아직은 여전히 변함없이 교회를 위한 봉사에 80을 바라보는데도 옛날과 다름없이 그대로랍니다. 

 

나는 그 당시 주교회의에 매일 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기념행사 준비103위 시성추진로마 교황님의 한국 천주교회 최초 방한 준비, 등, 약 5년여 동안 매일 새벽에 일어나 본당에서 혼자 5시에 미사를 올리고, 포니 차를 몰고 수원 교구청에 가서 김남수 주교님 모시고 7시 아침 식사를 하며 전날의 업무보고와 당일업무 수행 지침을 받은 후, 서울 퇴계로에 있던 주교회의 본부 건물 4층 200주년 내 사무실에 들려서, 교황대사관과 로마 교황청 시성부와 전국 각 교구청과의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당시 주교회의 사무처에서는 돈을 낸데도 사무처 근무 사제 1,명만 식사가 가능하다고 하여, 나도 우리 직원들과 함께 매일 점심은 날마다 직원들을 데리고 나가서 사먹고 들어와서 일을 봐야 했다. 오후 내내 각 분과위원회 순방하며, 나가서 저녁을 함께 한후, 빨라야 밤 11시 경에야 신장본당에 와서 침실에 들던 시절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1980년 봄부터 1984년 말까지, 해외 출타시 외에는 늘 이렇게 살았는데,,,!!!

 

당시 주교회의 업무 수행은 교회 내부와 외부 사회와 매일 좌충우돌하며, 설명하고 또하고 하여 설득시키고, 시기 질투와 오해와 충돌하는 것이, 특히, 200주년이 뭐냐? 103명 순교복자들의 시성이 뭐냐?, 교황님이 한국에를 어떻게 오실수가 있다는 말이냐? 등, 큰 목소리들의 질문과 늘 부딫히면서, 그래도 4개분과 위원회를 맡은 주교님들이, 특히 전국행사위원회를 맡은 서울대교구 경갑룡주교님과 김옥균 신부님(그 후 주교로 임명), 총무 박신언 신부가 가장 힘든 많은 초유의 업무를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아주 잘 처리하여, 역사적인 모든 일이 아무 하자없이 기적같이 정말 잘 되었었다. 로마와 유롭 및 세계 교회가 감탄하며 격찬하였다. 사실 천상에서. 우리 순교선조들이 도우셨다고 우리들은 모두가 확신하며 진심으로 감사하며 지금도감사하는 마음 여전하다. 결코 우리 힘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졌다..!!! (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당시 같은 시기에, 언니는 결혼으로동생은 수녀원으로 입회하여, 각자의 성소에 충실하게, 반세기를 살아온 주님의 축복에 감사드리며, 출발은 다르지만 종점은 같은 데서 만나게 될 기쁨을 천주께 감사합니다. (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언니, 형부)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하였고, 바로 같은 시기에아마 적어도 같은 해(?)에, 위의 언니는 결혼생활로 들어갔읍니다(그 당시 언니부부 혼배미사 주례 후 기념사진을 오늘 처음 보니 반갑습니다. (2024.06.04) 

 

 신장본당 출신 수원 성빈센트수녀회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오래 만에 1주간의 귀국 휴가 중, 곡수 공소로 옛날의 신장본당 주임 변기영 몬시뇰을 예방한 후,(2024.06. 04), 현 근무처 필립핀의 불우아동들이 쓰레기 터미 뒤지는 빈민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들 모습 단 한시도 못잊어, 성모 마리아처럼, 극빈불우 아동들한테로 어린이들의 환호 속에 무사히 귀환 소식을, 사진 몇장과 같이 보내왔읍니다.(2024.06.10)  

 

 신장본당 출신 수원 성빈센트수녀회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오래 만에 귀국 휴가 중, 곡수 공소로 옛날의 신장본당 주임 변기영 몬시뇰 예방 후,(2024.06. 04) 

 근무처 필립핀 빈민가에서 기다리는 불우 아동들 품에 성모 마리아처럼 무사히 귀환  (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과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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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장본당에서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며 주일학교 교사들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순교선조들의 발자욱을 딛으며, 순교 선조들의 땀에 젖고 피에 물든 산성리 사형장과 구산 마을의 순교자 무덤들을 순례하던 추억은,,,! 그래서 참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우리 교사들 중에는, 7,8명이나 수도생활을 택하고, 복자수녀회, 성가수녀회, 마리아수녀회, 성 빈센트수녀회, 성체수녀회, 등. 수도생활을 택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이룩한 무명의 큰 일꾼들이 되어, 아직도 오늘 늠늠한 모습으로, 이 늙고 낡은 옛날의 본당 신부를 찾아보러 오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천주교회의 성소 비상시국입니다. 각 교구의 신학교들과 각 수도회의 수련소들이 텅 비어 가기 시작한다는 말을 예사로 들어서는 안되며, 성지와 성지순례는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의 샘이오, 산실임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잊지 말고,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고, 정신을 차려, 지나간 젊은 날 우리가 함께 자주 찾아 순례하던 성지를 지키고, 아끼고, 가꾸며 살아가므로써, 순교 선조들의 땀과 피로 물든 천진암, 남한산성, 구산, 등의 성지에 깃들어 서려 있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그 순교정신으로 굳세고 바르고 용감하게 거룩히 살다가 신앙으로 천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죽어갑시다. 이러한 죽음은 바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혹시라도 수도자들의 기도 소리가 끊어지고 사라진 교회가 있다면, 그러한 성당은 더 이상 천주님은 계시지 않는, 천주교회가 아니랍니다.

 

< Bloodless Martyrs' Breathless Voices >

(무혈 순교자들이 최종 운명하는 무력한 숨결 소리는, 영생의 호흡 소리입니다!)  -Msgr. Byon  


입력 : 2024.06.06 오후 9: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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