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uld be able to find themselves of the Christian brave faithful martyrs, like their forefathers,
but, never, they could be sure that they are leading the faithful life for themselves! -
Catholic people of our sincere Korean Church today
主特擧斯道而, 親舁之繼
would be able to find themselves of the Christian brave faithful martyrs, like their forefathers,
but, never, they could be sure that they are leading the faithful life for themselves!
하느님의 종 순교자 이승훈 진사 북경 파견 240주년 기념일 미사.
2023. 11. 18. 토요일 오전 10시 포천 화현리 이벽 성조 성지 미사 강론, 11시 미사
하느님의 종 순교자 이승훈 진사 북경 파견 240주년 기념 미사
2023. 11. 18. 토요일 오전 10시 강론, 11시 미사,하느님의 종 이벽 화현 성지에서
1)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발자국이 나기 전에, 한국인 선조들에게 천주 친히 손수 천주교 신앙을 가르쳐 주시고 심어주시고 붙들어주시어시작하였음을 밝히는 현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께서,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 교구장 주교 전원을 모으신 Ad Limina 중에 밝히신 교회사와 천주교 교의.
2) 한국교회는 선교사들 발길이 들어오기 전에, 선교사 없이 한국인들 스스로가 한국 천주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표한 글은 순교자 黃嗣永 진사의 帛書였다. 우리말 번역은 한학의 대가 김익진 선생의 번역문이 일찍이 월간 가톨릭 청년지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아래 대강 그 의미를 소개한다.
[….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而, 主特擧斯道而, 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豫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천주님께서 우리 동쪽나라 조선에 베푸신 크신 은덕은,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특출한 예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일찍이 처음부터 그 어떤 傳敎者도 들어오기 전에, 천주님께서는 친히 이 道를 우리 선조들에게 특별히 들어내 보이시고, 우리와 마주하며 끊임없이 붙들고 거들어주시고자, 聖事거행자도 미리 마련하여 주시니, 갖가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특은을 세려면 손가락 꼽아봐도 모자랍니다.
- 黃嗣永 帛書 -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漱 誦敬齊箴,,,李承薰亦灑磨自强,,,],<丁若鏞 墓誌銘 天眞菴 講學>
녹암 선생 자신이 강학규정을 만들어,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빙천수로 세수하고나서 경제잠을 외우곤 하였는데 이 때를 당하여 이승훈은 쇳돌에 자신을 갈듯 연마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였다. <정약용의 천진암 강학 기록>
[李承薰 李檗 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書師 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
이승훈은 이벽이 크게 기특히 여기고 있었는데, 벽이 가로사대,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라는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서양에서 온 선생들이 살고 있을 텐데, 교를 전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어서 찾거든, 기도서 한권 구하러 사러 왔다고 하고, 아울러 영세받기를 청하여라…. 반드시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여라!….]
- 黃嗣永 帛書 - .]
3) 이벽 성조의 무술 연마하던 소년시절 내력에 관한 자료.
- 李德懋(1741~1793)와 羅東善의 이벽 성조 言及 요약 -
<이하는 이덕무, 라동선 등, 당시 북학파 학자들의 대화 기록 중에서 이벽 선생을 언급하는 내용을 처음으로 읽고 발굴하여 소개한 것은 서종태 박사의 업적이다.>
- 1778년 戊戌年 11월 26일, 李德懋(1741~1793)의 言及 -
李德懋言 近日京中 以西學數理專門者 徐命膚及子浩修 而又有李檗 卽武人格之弟也 廢擧不出 偉人高潔 方居紵洞 又有鄭厚祚 卽文官喆祚之弟也 專意於天下輿圖之學 嘗言 大淸一統志輿圖固精 而猶不如大淸會典所載者云(頤齊亂藁) 27책 戊戌 1778, 정조 2년, 十一月 二十六日壬子.
- 1786년 丙午年 5월 5일, <黃胤錫의 질문에 羅東善의 대답 중에> -
余問 羅君曰 今世都氏 亦有聽明特達之士乎 曰有李蘗者 月川君廷馣之後 兵史鐽之子格之兄也 看苦十行俱下繙閱如飛 目能一上視一下視 一左視一右視 甓骨不雙 而單能三次回斡 能上跳二丈 平生酷好西洋之天主實義 爲一時其徒之冠 年三十而夭 近年上命西洋文學 自律曆數學三種以外 其爲天主實義之學者 自刑曹聚其書焚之 嚴禁中外 李君時入桂坊別薦 上疏自列天主之說云(頤齊亂藁)38책 병오(1786, 正祖 10), 5월 5일 丁未.,,,.
[….내가 묻고 라군이 답하였는데, 최근 수학이나 여타 학식 있는 인재가 없을까 하고 내가(이덕무)묻는 말에, 라동선이 답하기를, 아주 청명 특달한 선비로 이벽이라는 젊은이가 있기는 한데, 병사 달의 아들이고, 격의 형인데, 십여 발자국 가다가 나는 듯 뛰어서 공중에서 두세 바퀴 돌고 지상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두 사람 키 두 길씩을 훌쩍 뛰어 넘으며, 양쪽 눈으로 동시에 상하를 보고, 책도 좌우를 동시에 읽는데…. 서양 학문에는 박학하여 천주교를 하며 천주실의를 연구하다가 형조에서 그 책들을 빼앗아 소각시켰고, 집안 별당에 감금시켜 집안에서도 못하게 엄금하였는데…. 정조 10년 5월5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成大中과 徐命膺이 이벽의 白頭山 北極高度(=緯度) 언급 기록 - 北極出地 漢陽則三十七度十五分 滑原則四十度五十一分 舊聞諸李檗 白頭山則四十二度强 徐奉朝賀命膺云(<靑城雜記> 권5, <醒言> 백두산의 緯度.
[….성대중과 서명준이 이벽한테 들은 바로는 우리나라의 위도가 한양은 북위 37도 15분 점에 있고, 백두산은 42도가 좀 넘어서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4)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사도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문 중에서 <2015. 03. 12. 바티칸에서.
[,,,In enrolling them among the Blessed, we praised God for the countless graces which he showered upon the Church in Korea during her infancy, and equally gave thanks for the faithful response given to these gifts of God. Even before their faith found full expression in the sacramental life of the Church, these first Korean Christians not only fostered their personal relationship with Jesus, but brought him to others, regardless of class or social standing, and dwelt in a community of faith and charity like the first disciples of the Lord. (cf. Acts 4:32).,,,]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의 태동기에 내려 주신 셀 수 없는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러한 하느님의 은사에 대한 충실한 응답에도 감사하였습니다.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32 참조)….]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룰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2014.8.16.).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궁극적인 행동으로 완성되어 그들의 피가 교회 못자리의 물이 되었습니다. ….]
5) [….한국천주교회는 아주 특출난 저명한 학자 이벽 박사(Doctorem I Pieki)가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여 영세하고 오게 해서….] 이하 원문.
- 김대건 신학생이 쓴 조선 천주교회 약사에서 -
“Inter eos celebrior fuit vir nomine I Pieki(nomen baptismi Joannes Baptista). Hic magno studio veri Dei cultum inquirens, cum audivisset religiopnem Domini caeli nuncpatam in Pekino florere,statuit homines mittere, qui illius religionis libros afferrent. Transacto demum aliquod temporis spatio, quumque legati proficiscerentur versus Pekinum; filius tertii legati I Senghugni dictus, adiit doctorem I Pieki eique se in Sinas profecturum affirmavit.”
<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 in Macau, 1845, Manuscriptum of the St. Andreas Kim Tae Gun, the first Priest in Korea.>
6)피에르 모방 신부(Lettre de St. Maubant)의 보고서.
아래 내용문 발굴은 파리 외방전교회 Marcelle Pellise M.E.신부님은(한국 성, 배신부님) 안동교구에 20여년 장기간 봉직하면서 영주 공소를 영주본당으로 18년 발전시키면서 일하여 성당을 건립한 배신부님이 발굴한 업적 중의 하나는 피에르 모방 신부가 한국에 와서 확인하게 된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귀중한 내용을 파리로 보낸 보고서 편지다.
Nous avons pu cette année nous procurer secrè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 Elles diffè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èes d'aprè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ée.
금년에 우리는 조선천주교회 설립에 관하여 은밀히 숨겨서 지켜오던 필기체로 쓴 문헌을 보았는데, 그동안 구두로 전하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1720년, 중국 강희황제 58년에 조선 사신단으로 끼어 들어온 이벽이 아닌, 다른 이씨(이이명)가 북경에 와서 교회 서적들을 사가지고 갔으며….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e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광이라는 사람은(광암 이벽을 말함) 본명이 요한인데, 저 책들을 읽고, 그 진리에 맛들였으며, 그 광암이라는 사람은 몇몇 다른 새 입교 지원자들(autres prosélytes)과 힘을 합하여 1783년에 북경으로 자신의 제2 대리자(autres délégué)를 보냈는데, 이는 먼저 말한 이승훈으로, 전과 다른 이씨로서, 거룩한 새 종교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알아보고 영세하고 갔습니다.
<Y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sousle nom de Pierre[…]".><Extrait d'une lettre de St.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1838>
7) 이벽 성조의 최후 임종 직전 형벌에 관한
조선교구장 다불뤼 안또니오 주교의 최초 기록 원문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en Corée,
Vol. IV, manuscript copies, pp.1~2> St. Antoine Daveluy
(조선순교자 비망록)
Vol. IV, manuscript copies, pp.1~2> St. Antoine Daveluy.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Mgr. Daveluy,,,]
대의 역술;
[…. 1786년(병오년) 봄에, 이벽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중국인들이 역병이라고 부르던 페스트에 걸려서 8일~9일 동안 앓다가,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두꺼운 이불 여러 겹으로 몸을 멍석으로 말듯하여 땀이 새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자 마침내 숨이 막혀 질식하여 죽으니, 당시 나이는 33세였다….] <이하 생략>
풀이;
<광암 이벽은 을사년 봄 추조판서가 주도한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박해, 즉 명례방 김범우 역관 집에서의 천주교 집회로 당시 정부와 유림 사회와 경주이씨 문중의 박해가 최종적으로 가정의 박해로 매듭지어, 진노하신 아버지의 엄명으로, 아버지 집에 호출되어 후원 별당에 감금되고, 문중 친척들과 유림들의 박해로 약 두서너 달 심하게 시달리며, 심지어 아버지가 대청마루 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까지 시도하는 소동을 벌여도 끝끝내 천주를 배반하지는 못한다는 결의를 보고, [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며 아버지가 극언까지 하였다.
1차 아사벌로, 그 후, 10여 일간을 굶주린 후에,
2차 음독벌을 명하여 음독시킨 후에도, 사경을 헤맬 뿐 운명하지 않자,
3차 마지막으로는 두꺼운 이불로 여러 겹 몸을 멍석말이하듯 말아서 눌러 질식사 당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