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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 서울 개최를 앞두고, 오늘 8월5일은 순교자 문도공 사도 요한 정약용 승지 탄생 기념일인데, Memory Guard ! 교회 史學人들 대부분도 소홀히하는 바를 성찰하자,,,!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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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8월5일은 순교자 문도공 사도 요한 정약용 승지 탄생 기념일, 오늘의 敎會史學人들 대부분이 너무도 잘 모르고 소홀히 하는 바를
우선 밝혀보자...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權哲身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潄, 誦夙夜箴, 日出誦敬齊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强…日身嘗從李檗…李檗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墓誌銘, 丁若鏞,(1816),1797,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李檗讀書猶有處,苑公棲跡杳難尋,風流文采須靈境,半日行杯半日吟,,,!1801黃嗣永 帛書 主恩之於東國, 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 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제5대 조선교구장  St. Antoine Daveluy 주교의 증언기록,
Herbert Vorgrimler 교수의  Nuovo Dizionario Teologico 참조.

오늘 8월5일은 순교자 문도공 사도 요한 정약용 승지 탄생 기념일,

 

Memory Guard ! 

 

 

오늘의 敎會史學人들 대부분이 너무도 잘 모르고 있는 바를 우선 다시 한번 더 밝혀주자 !.  

 

<회고: 변기영  몬시뇰>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 서울에서 한다, 준비에 우리 모두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 
오늘 8월5일 순교자 요한 정약용 문도공 탄생 기념일을 맞아 진솔하게 기도하며,
일부 敎會史學人들도 흔히 잘 모르고 소홀히 하는 바를 또 다시 밝혀보자 ! 변기영  몬시뇰
 

거룩하고 위대한 우리 [순교 선조들]은, [냉담자]냐 ? [배교자]냐 ? 우린 모두 [순교 선조] [재판장]이냐 ?

 apostasia ? martyrium ? -Majorem hac dilectionem,,,-motu proprio July 11, 2017. 

 

 Seminarium sinseminarista in Corea ?!!
<한국에 신학생 없는 신학교가 ? 그럼, 개교 아닌 폐교가,,,? ! > 

 

 공중누각이 아니라면, 집 터 없는 허공에 어떻게 집을 세우며뿌리없는 나무는 또 어떻게 자랄 수가 있으리오 ? !
더구나 뿌리없는 나무 가지가 어떻게 자라서 무성한 잎을 낼 수가 있겠으며, 
 또, 더군다나 뿌리없는 나무 가지에 어떻게 잎 피고 꽃 피어,열매까지 열릴 수 있으랴 ? !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거라 !] 하시는 우리 주님 말씀 잊었느냐 ? 
 
 지워서 없애 보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데도 지우려고 하는, 
 위대한 우리 순교선조들의 이름과, 훌륭한 우리 선배들의 발자욱이 무슨 죄가 있길래 ! ?
 우리 순교 선조 선배들이 남겨주고 가신 업적 중에, 거룩하지 아니하고, 그릇된 것이 무엇이길래 ! ?
 우리 선조들과 우리 선배들은 결코 우리 투쟁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와 경쟁의 후보들도 아닌, 사부님들이시다. 
 같은 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상호보완의 벗들이오, 동료들이며, 동행자들일 뿐인데, (SYN + ODOS, SYNODALITAS !) ,
 교황님의 가르치심 따라, 우리 모두, [기억 지킴이]의 사명을 명심하자 ! [Memory Guard !, 기억 지킴이]를 !
 [기억 지킴이]는 [희망 지킴이]의 기초요, 우리의 힘이 아닌가, 그래야 우리의 힘과 의지가 되지 아니하랴 !!?
 기억을 잊지 않고, 잃지 말아야, 기억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되고, 우리 길의 방향과 우리의 발걸음이 될텐데 !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사라져가고, 신학교와 수도원의 문들이 닫혀 있어도 문을 여는 이들이 보이지 않고,
 열려 있어도 닫으려고 오는 이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서산자락 입산길도, '설마' 하지 마라, 
 어둠에 사라져간다 ! 서산 너머 교회들 수십여 차례나 돌고돌며 둘러보고 걱정되던 모습이, 결국 우리게도,,,! 
 순교정신, 순교성지, 순교 선조들의 피로 물든 발자욱을 지우려고 가리고 덮어서, 잊혀지게 하려 하지 말거라 ! 
 사목 아닌 사업이나 상업에 마음 붙이면, [돈]에 머리가 돈]아주 돌아버린 [돈 사람들]이 되고야 말리라 ! 
 
 '[성부와]나' 하면서, 뒤따라다니며, 원님 덕분에 나팔이나 불어보고, 생나무가지도 꺾어 버린다더니만,
 한 술 더 떠서, 나무 줄기랑 둥치까지도 베어서 토막내며, 담이랑, 행랑도, 안채까지 헐어내려고 한다더니만,
 이제는 어느새 영세한 마귀들조차 모여들어, 스승의 말씀을 찾는체 휴지통과 쓰레기장까지 뒤진다고 하니,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걸친 도포 소매 걷어부치고, 저 우람한 기둥감들마져, 아예 뿌리채 뽑아 캐내려는구료 !!
 그래서, 뉘게 무슨 이익이 되느냐,,,!?, 그러면 또 누가 제일 좋아할는지, 어찌 모르랴마는,,,!? 
 그러니, 비싼 품값 들여서 벌어 놓은, [저 무서운 천벌들]을 어찌 모두 네가 피하며, 면할 수가 있으랴,,,!?
 
[Memory Guard ! , 기억 지킴이]를!-현 교황 프란치스코 말씀은 ?-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 -우리 주님 친히 하신 말씀의 엄명을 !, 미사 중 성체 축성문-
    
천진암 성지에서는 낮12시, 기념 강론과 미사 후, 간소한 다과회도 있었는데, 
오늘의 우리나라 교회 史學人들 대부분이 너무도 모르고 있는
문도공의 천주교회 신앙활동을 간추려보자.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장차 文度公의 신앙 활동과 學德의 世界化 터전이 될 것이다.
 
8월 5일(水),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文度公 若望 丁若鏞 承旨탄생 제253주년(1762~2015) 기념일에, 
문도공의 母校, 천진암 성지에 착공된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과 문도공 현양을 되새겨본다. 
스승이 없는 제자가 어디 있으며, 출신 母校 없는 인물들이 어떻게, 어디서 나왔다더냐 ! ? 
            
천진암 대성당 건립의 의미는 천주교회의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면을 차치하고서라도, 마치 서양의 여러 대성당들이 수세기에 걸쳐 수행하고 있는 역활처럼,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세계화시키는 특징적인 종교적 문화, 예술, 경제, 등, 다방면에 있어, 세계적으로 우리의 관광자원 확보 차원에서도 역사적인 분수령이 될 것이다.
 
10여세 이전 정약용은 어린 시절부터 天眞菴 聖地에서 광암 이벽 성조를 사사(事師)하며, 天學堂을 母校로 삼아 修學한 영재,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1762~1836)는, 1762년 당시 윤 6월 16일(양력 8월5일)에 탄생하였다. 그래서 문중과 일부 단체에서는 이날(음력 6월 16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진암 성지에서는 양력화하여 8월 5일에 기념하고 있다.북한 과학원에서도 우리처럼 양력 8월 5일에 기념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故 최석우 신부님은, 주로 Daveluy 주교의 문헌을 근거로하여 정약용의, [韓國 天主敎 福音傳來史]라는 저서에 관하여, 여러 책에서, 특히, 벽위편 (양수리 본)의 해제 머리말, 등에서 수차 단정적으로 밝혔다. 정약용이 저술한, [韓國 天主敎 福音傳來史]라는 書名을 확신하며 거론하였다. 필자역시 문도공의 그러한 내용의 저술이 있었다는데 공감하며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아직 원본이 발견되지 않아, 그 책 이름만은 최신부님이 현대인들을 위하여 意譯하여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므로, 필자의 견해로는, [朝鮮聖敎史記], 혹은, [朝鮮天學逸志], 또는, [朝鮮 聖敎誌],등의 표현 중에 하나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1906년 大韓帝國 때에 경향잡지 전신[보감(寶鑑)] 창간호 첫 머리부터, [대한셩교샤긔] 제목으로 쓰였던 [대한성교사기]라는 교회사 연재물 제목은 당시 [보감] 창간 편집자들(파리외방선교회 안신부님과 순교자 권철신 후손들 중 일부 文人들)이, 정약용 승지의 朝鮮聖敎史記를, 大韓聖敎史記 라고, 國名만 한글로 바꿔서, [대한셩교샤긔] 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는 이상으로, 오히려 확신이 간다. 오늘날 識者然하는 국어 상식의 함량 미달이 좀 심한 일부 사학도들에게는 이해가 난감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마치 3.1.운동 이후, 1920년대초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우리나라의 국호, 大韓帝國大韓民國으로 고쳐서 썼듯이. 아직 사회와 교회의 많은 용어가 확립되지 않던 격변기에는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
 
아직 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치 않던 文度公 시대에는 朝鮮聖敎史記 라고 하였을 이 책은 1830년 전후에 저술을 시작하여 1835년 말 경에 마친 후, 문도공이 조카 정하상에게 주고, 정하상 회장은 자신이 직접 안내하던 조선입국 최초의 프랑스인 선교사 Pierre Maubant 신부님에게 드리고(1837년 양지 공소 직전에?), 모방신부는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자수하여 체포되기 직전(?) 앵베르 범주교 비서 겸 [국내사제양성 신학생]이던 이승훈 진사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에게 맡겼고(혹시 Jacque Chastant 신부의 비서 겸 복사였던 현석문 가롤로가 받아 맡았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이재의 토마스는 1845년에 입국한 Daveluy 신부님에게까지 전달하므로서, 유롭 교회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정황을, 조금만 살펴보면 史學人들은 이를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천주께 감사를!!(P. Maubant 신부 문헌 참고)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는 흔히 한국교회 창립사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남긴 면만 중요시하고 있으나, 문도공의 소년시절을 보고, 또 그 험난한 일생을 보면, 그의 신앙생활과 한국천주교회 건설의 업적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문도공은 두세차례 좌천과 유배 생활 속에서도 480 여권이 넘는 각가지 다방면의 저술을 소홀히 하지 않던 솜씨로, 朝鮮聖敎史記 같은 저술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도공 사도요한 정약용 승지는;
 
어린시절(1770~1777, 약 7년간) 천진암에 가서 曠菴公 事師와 勉學,
소년시절(1777~1784, 약 7년간) 천진암에서의 강학 주동 멤버로서, 또,
청년시절(1784~1791, 약 7년간이승훈 진사와 함께 [임시준성직자단]도 결성하고,
유배시절(1801~1818, 약 18년간) 주로 강진 귀양살이 중에도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귀향생활(1818~1836, 약 18년간) 문도공은 조카 정하상 바오로의 조선교구 설립 배후의 숨은 후견인 고문이었다.
 
문도공은 조카 정하상 바오로의 조선교구 설립 배후의 숨은 후견인 고문의 책임을 다하였다.
문도공은 조카 정하상 바오로의 조선교구 설립 배후의 숨은 후견인 고문으로서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위하여 이승훈 진사와 함께 [임시준성직자단 결성]에도,적극 참여하여, 자발적인 新生 평신도교회의 사제직도 맡아 함께한 젊은 주역의 한 신앙인으로서(Daveluy 주교 문헌), 그의 정치 사회 활동에는 크나큰 장애를 주는 신앙으로 인하여, 생사의 위험을 각오하고 겪으면서도, 그리고, 1797년 정사년 약용이 2 분 형님들과 천진암을 찾아와서 3일을 머물며 20여수의 시를 짖던 시절 후, 즉, 18년 유배 생활에서 해방되어, 지난 정사년 방문 후, 만 30년이 지난 후 이번 천진암을 또 찾을 때는 2분 형님들(정약전, 정약종)은 이미 신유년 박해로 세상을 떠나신 후였다. 귀향 후에는 박해 중이라서, 조심조심하느라, 문도공은 친 아들과 아주 친한 옛 친구들하고, 즉, 1827년 정해년 아들과 옛 친구들을 데리고 절간 건물도 완폐되어 농토가 되어버린 천진암 옛 터를 찾아와, 건물은 하나도 없고 농지화한 천진암 터독서처 터를 3일씩이나 둘러보며, 먹고 잘 곳이 없어, 절막 아래 마을 윗소미에 살고 있는 伊蒲의 戒를 받은 佛子의 집에서 3일을 숙박하며 머물면서, 낮에만 폐허가 된 천진암 옛터와 독서처 옛터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며, 장문의 명문장으로 된 천진소요집 시문 집필을 여러 페이지 현장에서 남겼다.
 
말년에 조카 정하상을 도우며, 1836년 봄에는 중국 섬서성 출신으로 이태리에 유학하여 나폴리에서 신부가 되어 중국에 돌아온 여항덕 알렉시오 신부,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야고버 신부가 순교한 후, 두번째로 한국에 들어와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1836년 봄 문도공은 여항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후세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죽기 전에, 최초로 한국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Pierre Maubant 신부를 안내하는 조카 정하상과 함께 만나 뵈올 수 있었다. 
 
문도공은 조카 정하상 바오로의 조선교구 설립 배후의 숨은 후견인 겸 지도자와 숨은 후원 원로 고문 신앙인으로서 그의 사명과 역활을 다하였다. 북경교구장 주교가 그 나름대로의 부득이한 비협조적 반대를 무릎쓰고, 조선교구, 즉 서울교구를 설정하는데 목숨들을 걸고 애쓴 실무자들은 바로 정하상 동료들과 후견인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였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며,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달리는 생각해 볼 수 없는, 각가지 당시 정황을 두루 살펴보면, 이와 달리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어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음을, 오늘의 史學人들이라면 쉽게 깨닫게 될, 거룩한 업적을 남겼다.
 
제5대 조선교구장 St. Antoine Daveluy 주교의 증언기록과
Herbert Vorgrimler 교수의 Nuovo Dizionario Teologico 참조.
 
또한, 문도공이 신유년에 체포되어 구금, 문초, 고문시에 배교하였다고 하지만, 고통에 못 이겨서 배교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 때문에(in odio Fidei) 비난과 수난을 당하였으며, 나아가, 18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후, 들어나지 않게 열심수계하며, 몸에는 항상 쇠사슬을 두르고 고신극기하였으며(후손 정해창, 후손 정덕진 신부, 정욱진 진부의 가승 증언), 1836년 봄 중국인 여항덕 신부한테서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병자성사까지 받고 선종하였다.
 
예수님 예언처럼, 첫닭이 울기 전에 3번씩이나 예수님을 否定하고 背敎 이상의 背主 발언을 공개적으로 예수님과 유태인들 앞에서 공언한 사도 베드로와, 또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성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쓴 잔을 모면하게 해주십시오 !”하시고, 또 운명 직전 십자가 상에서는, “성부여,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내버리십니까?”하시며, 천주 성부님께 원망이나 불만을 보이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고 복음사가들은 기록하였는데, 지금 같으면, 예수님도, 사도 베드로도 시복식이나, 시성식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754년에 순교한 영국 출신의  젊은 보니파시오 선교사는, 꾈른 강 기슭 덕구 지역에서 당시 야만족으로 불리던 게르만 족들한테 순교한 후, 1천여년이 지난 후에서야 1827년시복되고, 계속하여 5년 후 시성되었으며, 당시 성인열품도문, 즉, 요새 용어로, 성인호칭기도에까지 올려진, 독일의 사도(Apostolus Germaniae) 라고 부르던 명칭은, 시복 전 거의 10 여 세기 동안 교황청에서 쓰던 호칭이었다. 사도, 즉, Apostolus  라는 단어의 표현은, 복자, 즉, Beatus 나, 성자, 즉, Sanctus 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높은 신앙적이며 역사적인 존경의 표현이었다.
 
성 보니파시오처럼, 문도공 정약용 요한은 장차 분명히, 반드시, 시복 시성될 자격있는 후보자였기에, 우리는 지난 1984년 103위 시성으로 중단되었던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주교회의 공식 기구에서 재추진하면서, 1984년 6월 초, 한국주교회의 명의로 (담당 위원회 위원장 김남수 주교, 총무 변기영 신부, 역사 담당 위원들, 서울대 유홍렬 교수, 이숭녕 교수, 오기선 신부, 유영도 신부, 최석우 신부, 김옥희 수녀, 등. 당시로서는, 아니, 지금도, 가장 박학다식한 전문인들이 약 5년간(1979~1984) 5회이상 연구 발표와 검토회의 후), 우선 이벽 성조는 물론, 정약용도 포함하여, 98위를 선별하고, 확정된 시복추진 후보자 명단을 전국 모든 본당과 수도원 등, 교회 기관에 보내며 선포하였었다. 그러나. 그 후 2000년 대에 와서 후임자들(위원장 박정일 주교, 총무 유한영 신부,등) 시대에 와서는, 98명 시복 후보 순교 선조들 명단을 첨삭 추가 보완한다면서 정약용  요한 문도공도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그 때 우리는 놀라 어안이 멍하여, 말이 안나왔였다.그 후 124위가 지난 번에 시복 되었는데, 우리의 아쉬움은 훗날 더 큰 기쁨의 씨앗이 될 것으로 본다. 
 
요한 정약용 문도공이 한국 5천년 우리 민족사 안에서 지닌 그 박학다식한 함량과 위치와 덕망의 무게로 보아도, 문도공의 시복과 시성은 한민족 전체와 전 세계 지성인들의 입교와 개종에 끼치는 영향이 어떠할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이며, 한국교회의 이러한 실수는 반드시 회복되어 그리 멀지 않은 앞날에 정약용 요한 문도공의 시복, 시성이 크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조선 박해시대 초기에 제5대 조선교구장 성 안토니오 다불뤼 주교(St. Antoine Daveluy)가 우리에게 밝혀주는 요한 정약용 문도공의 자신의 박해 중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선종 확인보다 더 확실하고 힘있는 증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기영 몬시뇰, 전 주교회의에서 약 20여년간 (1981~2005)시복시성추진부장,위원회 총무 역임>  
 

거룩하고 위대한 우리 선조들은, [냉담자]냐 ? [배교자]냐 ? 우린 [순교선조]들의 [재판장]이냐 ? 

apostasia ? martyrium-Majorem hac dilectionem,,,-motu proprio July 11, 2017. ?

글 : Msgr. Byon


 

우리 순교 선조들[냉담자]냐 ? [배교자]냐 ? 우린 [선조 순교자들][재판장]이냐 ? 

 

apostasia ? martyrium ?Majorem hac dilectionem,,,-motu proprio July 11, 2017.?


LETTERAE APOSTOLICAE MOTU PROPRIO DATAE DE OBLATIONE VITAE / 

 

«Maiorem hac dilectionem, - nemo habet, ut animam suam quis ponat pro amicis suis» (Io 15,13).

-2017. 07.  11. 시복 시성 추진을 위하여, 교황님께서  새 교서를 발표하셨읍니다. 추후, 전문 번역 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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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순교 선조들은 [냉담자]냐 ?, [배교자]냐 ?, 우리 후손들은 [순교선조들][재판장]인이냐 ? -apostasia ? o martyrium ? o indifferentia ?

글 : Msgr. Byon
 
[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는 [순교자들]의 재판장이냐 ?
 
[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들은 이런 일에 [순교자들]의 재판장인가 ? -apostasia? o martyrium ? o indifferentes?
 
허버트 훠르그리물러(Herbert Vorgrimler) 교수는 각국어로 번역된 그의 [새 신학 사전]에서 背敎에 관하여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주 깔끔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영어나 다른 언어보다도, 이태리어 번역판)(Nuovo dizionario teologico이 우리에겐 더 이해하기 쉽다고 보며,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의 사목과 교회역사와 순교선조 존경 문제를 당하여, 몇 면 안되는 것을, 몇줄로 요약해서라도, 우리 사제들이 한번쯤 읽을 거리가 되는 논거라고 본다.

칼 라너(Karl Rahner) 신부의 자리를 계승하여, 뮌스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전에도 이미 박사과정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칼 라너신부의 신학방향을 전승하는, 현대의 세계적인 敎義神學 대석학으로, Herbert Vorgrimler 신부는 널리 알려져 있다(1969년, 필자가 Karl Rahner 신부의 모든 저서 번역 출판 전권을 무상으로 받고서, Natur und Gnade와 Der Mensch von Heute und Religion을 먼저 번역하여 발행할 때, 그 때만 해도, 사실상 배교 문제에 관한 논술은 방법논상 함축적인 부분에서뿐, 정식으로 터놓고 다룰 수는 없는 처지였다. 지금은 사전에서까지 대석학들이 배교를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교회적인 이해 차원에서, ‘背敎’(Apostasia)라는 표현은, 한 때 意識的이고도 아주 온전히 충만한 자세로 신앙에 결속되어 있던 사람이 후에 자신이 지니던 그리스도적인 신앙을 의식적이며 全的으로 고의적인 자세로 거부하는 것이다(Apostasia,,, nella comprensione ecclesiale è il cosciente e totale rifiuto della fede crsitiana da parte di una persona che un tempo era giunta alla fede in maniera cosciente e piena.)."라고 Herbert Vorgrimler 교수는 밝힌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민족과 정신문명에 따라, 배교는 꽤 상이한 해석이나 이해가 있었으며, 그 개념과 의미가 조금씩 첨삭되면서 변천되고 발전(?)되어 왔다. 유태계의 율법포기 의미 경우를 비롯하여, 사도들과 교부들의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또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로 대동소이하게 사용된 말이었다.

그 중에, Dizionario Critico di Teologia나, 뮌스터에서 카알 라너 신부 중심으로 편찬한, Sacramentum Mundi에서, 특히, G.B.Guzzetti 교수는, 배교자에 관하여 좀 상세히 논술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모든 紀綱 실천을 단순히 포기하는 자들도, 엄밀히 말해서, 배교자들은 아니다(,,,But those who simply give up all pratices of the Christian life are not, strictly speaking, apostates.)"라고 쓰고 있다. 자신은 비록, 안하고, 못해도, 배교는 아닐 수 있다는 뜻인지?

거짓말을 하거나, 주일을 못 지키거나, 하는 윤리적인 결함이나, 사목 현장에서 우리가 자주 보는 교우들의 신앙생활 태만이나 포기, 이탈, 등이 들어나더라도, 아직 ‘배교자’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하겠다. 교회의 離脫者나 공동체를 背信하는 者나, 교회법규의 犯法者들과 背敎者는 좀 구별해야 하겠다.
 
예컨대, 신자 가정에서 부인이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여, 더욱 악화되고, 심각해지는 가정불화나 미신자 종친들의 문중 불란 예방을 위하여, 한 때 본당의 회장들 모임에 부득이 불참하였던 본당 총회장을 배교자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문제로 한국교회는 우리 신앙선조들의 시복시성 행정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형벌의 고통을 참지 못한 형제들”, “본심에 없는 거짓말을 하였던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나 !?

위에서 아주 간략하게 소개한 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1984년 5월, 103위 시성 후, 한국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부에서는, 이미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를 비롯한 새 시복대상 후보자들 중, 제1차로 98명의 순교 확정명단을 문서로 전국 본당과 기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몇차례 멈췄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중세기 신학 아닌, 편파적이며 인간적인 사고방식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국교회 신학 발전 과정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분명히, Karl Rahner을 비롯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문신학자들(Periti Concilii)이 세계 교회, 특히 오늘과 미래교회의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헌으로 교회는 한걸음씩 더 진정한 [천주님 백성의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특히, 라찡거 교수를 비롯한,  그동안 교의성에서 다년간 심층연구 하고 밝힌, 현행 천주교회 교의서는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크나큰 업적이다. 특히, 영세 예비자, 천주교회 신문 교우들, 입교자들에 관한 교의신학적 선언은, 우리나라 같은 선교지방의 교리교수와 사목에 매우 중요한 지침을 아주 명확히 해주고 있는데 사실 이부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헌장에서 이미 천주교회 교부들께서 천명하여 선포하신 분야다. [순교냐?]. [배교냐?]를 따지고 다루어야 하는 시복시성부 직원들은 신문교우 영세입교에 관한 교회법규 조항 이전에, 교회헌장의 선언을 반드시, 반드시, 재독, 삼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Karl Rahner 신부는 말년에, 信經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에다가 et in Ecclesiam,,,"이라는 표현을 종종 덧붙여 가며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배교의 올바른 의미에 관한 Herbert Vorgrimler  교수의 이 몇 줄을 읽는 우리자신이 사제든, 주교든, 수도자든간에, 누구든지간에,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나,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 같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냉담자니, 배교자니, 하며 재판하는 드높은 판정관으로 자처하기 보다는, 저 어른들한테서 물려받은 주님의 신앙, 주님 때문에 겪는 수난과 순교의 신앙후예 중에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Msgr. Byon
 
 
 Karl Rahner 신부[오늘의 인간과 종교] 번역 출판과 
동시에, 그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번역, 출판 전권을 받은 문서 사진 복사판.

    Karl Rahner 신부의 그 어려운 [오늘의 인간과 종교] 우리말 번역 출판과 동시에, 그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번역, 출판 전권을 받은 문서. <사실  그 후로, 필자는 수원교구청 연속 2회 근무와 농촌사회 지도자 교육기관 설립 추진과 주교회의에 불려가서, 한국교회 200주년 기념 준비 및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 개척,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추진, 등으로 밀려오는 업무의 폭주로 필자는 칼 라너 신부의 저서 번역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세계적 대석학들의 신학서적 번역 출판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삼아 취미가 있던 필자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  내용 소개나,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신애론] 등의 번역 발행 후, 독일유학에서 귀국하는 선후배 신부들에게 미루는 심정으로, 또 주교님들의 명을 따라, 한국교회 시사적인 당시의 최급선무(103위 시성과 순교선조들의 시복시성, 200주년 기념행사와 기념사업, 103위 시성과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개척, 교황 방한과, 백년계획 한민족대성당 건립, 등에 매달리며, 주교회의에서 주교님들의 잔 심부름꾼들 틈에 끼어, 4,50대의 젊음을 불태우고, 교회 땅이 1평도 없던 천진암 산골에 들어와서 산골 또랑치고 가재 잡으며, 275 필지나 되는 조각 땅들 30 여만평이나 교회토지 확보, 등에 6,70대를 다 보낸 셈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대석학 Karl Rahner 신부님으로부터, 실로 애쇵이 무명의 젊은 한국 시골 사제로서 받은 과만한 인정과 초대와 너그러운 대접에 충분히 답해드리지 못한 것을 늘 마음 한 구석으로 죄송하게 여기며, 필자와 카알 라너 신부님 사이에 부드럽고 너무나고마운 가교실무를 해주신 예수 성심수녀회의  거룩한 Zielinsky 할머니 수녀님에게도 늘 감사하는 마음 지니고 사는 필자는, 이제 우리 나이 84세나 넘어, 내 차례가 되어, 늙고 낡아서 더 이상 번역에도 손을 댈 수가 없게 되었으나, 교회를 위하여만, 힘껏 여한없이 일하며 한평생 살아온 필자는 지금도 졸지 않고 주님이 부르시는 날을 기다리며 묵주 알을 굴리고 있다.> Msgr. Byun  2024 /Aug./11. 곡수 공소, 하느님의 종 순교자 권일신 사우거사 기념서재에서.
 
                                            www.변기영몬시뇰사랑방.krwind bell  에서 퍼온 글, 바로가기    WIND BELL
 따라서,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장차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學德을 세계화시키는 결정적인 터전이 되어, 우리 민족을 통하여 전 세계 만민이 더욱더 천주님을 공경하게 하는 현장이 될 것이다.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10여세 전부터 두 형들과함께 자주 찾아와서 머물던 천진암은 문도공이 일찌기 詩文 저작을 시작하던 10대 중반의 15세 경부터 65세 노년기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 이곳 천진암 현장에 와서 머물면서 가장 많은 詩文을 남긴 곳이다.(여유당 전집 I권 II권 참조).
 
이미 착수된 천진암 대성당 주변과 성지 내에는 장차 문도공의 방대한 詩文碑를 비롯하여, 그의 學德을 들어내는 기념물들도 성지와 대성당을 지성적인 높은 차원으로 장식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 대성당을 통하여, 미케안젤로를 위시한  인류문화의 거장들이 성장하고 들어났듯이, 문도공의 학덕역시 천진암 성지와 대성당을 통하여 세계화할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천진암에 와서(昔我童時遊) 이벽 성조를 사사(師事)하며, 약 15년 (1770~1784) 동안 修學하던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母校, 천진암 성지에는, 문도공이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수많은 詩文 제목과 저작 연도를 우선 제목만이라도 알리는 紀念碑가 박물관 마당에 작게나마 서론처럼 하나 세워졌다.
 
그러나 천진암 현장에서 지은 문도공의 여러 詩文은 최초 10세 이전의 어린 시절과 특히 少年으로 성장한 후 1776년 경부터 老年期, 1827년에 마지막으로 와서 3일간 머물던 때까지, 모두 50 여년간에 걸쳐, 종종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며 현장에서, 옛 추억과 감회를 기록으로 남긴 내용으로, 시문만 90여수, 7,000餘字에 이르는데, 처음부터 저 방대한 시문들 原文과 譯文 모두를 단 번에 비석에 옮겨 새기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과 세월이 소요되어, 매우 어려우므로, 이번에는 시문 제목과 저작 연대와 일부 주요 제목만이 비문에 새겨, 지성적 기념사업 방향을 알리는 자극제에 그치지만, 이렇게라도 시작하면, 저 방대한 시문들 하나 하나 모두가 앞으로는 저작 현장인 천진암 성지에 詩碑로 남아서, 후대인들에게 스승의 목소리가 되고, 거울이 되며,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를 온 세계에 알리는 얼굴이 될 것이다.
 
365일, 24시간, 항상 주야로 흘러나오는 天眞菴 氷泉水처럼, 또, 天眞山 메아리 처럼, 오늘의 우리와 내일의 후대들에게 순수하고 진솔하며 소박한 詩文碑가 건립되는 것은, 화려한 각종 행사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역사성을 띤 매우 의미있는 문화사업이다.
* 아래 詩文을 읽을 때, 漢文에서 '童時'라고 하면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10세 이하를 뜻하며, 11세부터는 少年이라 하고, 장가를 들기 시작하는데, 정약용 승지는 15세에 결혼하였으니, 그것은 형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좀 늦은 편이었다.
 
  아래 이 詩文을 보면, 문도공 정약용 승지는 1770년 경, 8세 전후부터 천진암에 자주 놀러 왔거나, 20대 초반의 스승, 젊은 이벽 성조께서 가르치는 天學堂의 前身이 되는, 천진암의 산골 절간 書堂에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를 회고하며 추억하는 詩文이, 늙으막 65세 때(1827년) 옛날 동료 학우들과 정해년(1827년) 늦봄, 천진암에 와서 3일을 머물며 지은, 天眞消搖集의 여러 대목에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文度公 若望 丁若鏞 承旨(1762~1836)가 1827년 늦봄에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天眞消搖集 詩文들 중에서 우선 몇 줄만 뽑아서,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의역(譯述)해본다, 같은 시기에(약 3년 후, 1830년 경) 같은 심정으로 쓴 蔓川遺稿의 跋文에서도 한 두 줄을 옮겨, 함께 섞어서 음미해보자. 
 
문도공은 1797년 丁巳年에 형님들 두 분과 함께 천진암을 다녀간 후 30년만에 丁亥年(1827년)에 친구들과 아들과 친구 아들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왔으나, 절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농지가 되어, 아랫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짖고 있어서, 문도공 일행은 밥 한술 얻어 먹고 또
단 하루 밤이라도 잠 잘 곳이 없어서, 밤에는 바로 아래 마을 절막에 사는, 伊蒲의 戒를 받은 佛子의 집에서 3일을 머물면서, 낮에만 폐허가 된 천진암 터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며, 한많은 인생말로에서도, 지난 날의 勉學과 信仰과 修道의 神聖한 현장에 관한 추억을 되새기며, 그 거룩한 도장에서 天眞消搖集을 지었다(정약용 전집 I 권과 II권 참조)..
 
<天眞消搖集 일부를 이하에 발췌 의역
 
천진암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石徑細如線.> 
내가 어린 아이 때 와서 공부하며 오르내리고 놀던 길이지 ! <昔我童時遊.> 
호걸다웠던 우리 선비들은 일찌기 여기서 講學하며 讀經하였었지!<豪士昔講讀.> 
少時的 그 생활 아련하여, 다시는 해볼 수 없으니 서글프고나! <前躅凄迷不可求.> 
선방에서 함께 참선하던 그런 훌륭한 옛친구들을,이세상 어디 간들 다시 구해올 수 있으랴? <禪房無處舊人求.>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 해질녘에 같이놀던 옛동무 생각나네! <粥鼓斜陽念舊游.> 
천진암에 아주 와서 살고 싶은 내 마음이야 간절하지만,<我欲來此住.> 
아무도 나에게 오고 가고 할 방도와 머물 곳 마련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네.<無人示方便.>
이제 나역시 30여년만에 나그네가 되어 다시 와서 보니,<三十년來重到客.>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배 한척의 신세로다<猶然苦海一孤舟.> 
 
-<이하는 1830년 경,문도공 정약용 승지 편술의 蔓川遺稿 跋文에서 拔萃 意譯한 것.>-
 
한평생 사는 동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도 하였으나 <平生囚獄> 
그래도 死刑은 면하여 죽지않고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네<死免於出世> 
3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三十餘星霜>
강산은 예전과 다름이 없고<江山依舊> 
푸른 하늘에 힌 구름 지나며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이 없건만<靑空白雲不變影>
선배 성현들과 옛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갔나 ?<先賢知舊何處去哉 ?> 
나 혼자만 아무데도 連接되지 못한 나무토막 돌덩이처럼 외톨이 신세가 되어 <不接木石之身勢>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거꾸러지고 쳐박히고 하는 동안<轉轉倒處中> 
슬프도다 ! 모두가 불의에 세상을 떠났구료 ! <憶 不意移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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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프란치스꼬 교황께서는 한국에 오시어,
아시아 각국에서 모이는 청소년들을 만나셨읍니다 !
 
이는 우연이 아니니, 한국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역사상 유례가 없이,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세웠으며, 특히,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성조들께서는 일찌기 10대 후반, 20세 전후의 청소년들로서 거룩히 빛나는 교회창립을 이룩하시고, 목숨을 바쳐 지키고, 아끼고, 가꾸셨으며, 그 정신과 덕행과 교훈을 대대로 우리와 온 세상 젊은이들에게 물려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뿌리없는 나무 가지가 어떻게 무성한 잎을 내며, 뿌리없이 더구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읍니까 ? !
                           
1770년 경, 15세로 천진암에 입산한 이벽 성조께서는 7년 후,
1777년 경, 자연스레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리강학을 점차 발전시켜,
1779년을 전후하여서는 당시 저명한 학자로서 40대 중반의 권철신도 참석하는 교리논증과 신앙수련회로 승화시켰으니, 
당시 이벽 성조 23세, 이승훈 21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이총억14세,  등!
 
10대 후반과 20세 전후의 젊은 청소년 학자 선비들이 세운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을 
로마 교회는 장차 분명히 전 세계 청소년들의 주보와 모범으로, 신앙의 교과서로 선언하게 될 것이다. !
 
1801년 신유년에 참혹한 박해로 교회 창립선조들이 대부분 순교하거나 유배되고,
가산이 몰수된 후에도, 교회 재건을 위하여, 역시 10대 후반, 20세 전후의 그 자녀들과 후손들은 창립선조들의 뒤를 이어 
조선교구 설정 때까지 한국교회를 이끌어나갔으니,
 
16세 전후의 정하상 소년은 정약종 성현의 둘째 아들로서, 전국 심산궁곡 박해의 천주교 난민촌에 숨은 교우들을 탐방하며, 백두산 너머 무산 땅까지 마천령을 넘어가서 조동섬 유스띠노(아버지 정약종 성현의 친구) 유배지까지 찾아가 3년간이나 머물면서, 조동섬으로부터 朝鮮 聖敎會의 내력과 아버지 정약종의 덕망에 관하여 공부하고, 20여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조선교구 설정을 위하여 북경 교회를 유진길, 등, 교우들과 교대로 20여차례나 왕래하였고,
 
15세의 김대건, 15세의 최양업, 14세의 최과출은 정하상 회장의 제자들로서, 사제가 되기 위하여, 1836년 12월 6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스승 정하상 회장의 지도와 안내로 국경, 의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여항덕 중국인 신부와함께 북경에 이르렀다가, 거기서 여항덕 신부를 이별하고부터는, 안내원을 따라, 마카오까지, 한양에서부터는 2만리 길을 걸어서, 이듬해, 즉 1837년 6월 6일에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사제관에 도착하였으니, 6개월 동안 걸어서만 갔읍니다. 장한 우리 한국 소년들의 모범이여 !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들은 10여년 후 천신만고 끝에 사제가 되어 돌아왔지만, 최과출 방지거는  6개월 걸어가던 노독과 열대지방 말라리아(?)에 걸려 앓다가 마카오에 도착한지 8개월만에 마카오에서 성모님과 엄마를 부르며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최과출 신학생의 무덤을 찾아서, 한 조각 돌을 세워보고자, 
필자는 1984년부터 마카오 현장을 몇차례 갔었으나 헛수고 였고, 
몇년 후, 최승룡 신부님께도 부탁하여, 수고하셨으나 못 찾았다.
 
  어린 최과출 초대 신학생의 무덤은 찾지 못하더라도, 그 웅지와 노고를 잊지는 말아야 하겠읍니다. 이제는 적당한 곳, 마카오 주교좌 성당 마당이나, 혹은 마카오의 어느 성당이나, 어떤 선교회 본부 마당에라도, 사제가 되기 위하여 14세 어린 나이에 한양에서 유학갔던, 거룩하고 위대한 [한국 초대 신학생 방지거 최과출(1823~1837) 기념비]를 세웠으면 합니다! 아니, 
국내의 모든 신학교 마당과 주교좌 성당 마당에라도 ! 
 
최과출 방지거의 원래 고향은 충남 합덕(?)이나 당진 부근이며, 박해를 피하여 남양이나 사강 부근 상귀(?) 마을, 신자들이 숨어살던 해안가의 갈대 숲 새 마을로 부모님들과 함께 피난왔다가, 남양지역에서, 정하상 회장이 모시고 순회하던 피에르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 후보로 인정되고, 발탁되었다. 
 
오늘날 유롭 교회들과는 달리,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사제성소가 많았고, 끊이지 않아, 대신학교가 발전하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는 과거 역사를 망각하고, 말소시키려는 잘못된 사조가 너무 심합니다. 특히, 정치, 사회, 교육, 종교, 언론계에서 심합니다. 기억을 지킵시다. 기억은 역사의 원본적인 순수한 기본 자료다.
 
정권이 바뀌면 변화와 개혁이란 모험적인 명분으로 위대한 역사도 소멸시킵니다. 그리하여, 조상님들을 탓하고, 선조들을 비난하며, 선배들을 무시하고, 선임자들을 매도하면서 배척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이 관료사회에서 비일비재한 현주소다.
 
이런 사람들은 후손들을 위하지 않고 자신을 위하며, 후배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이용하려 하며, 후임자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당대주의에 젖어 있다. 그러다 보니, 겨우 10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안중근 의사 묘를 잃어버리고도 우리의 얼굴에는 후회하는 빛보다 이름내려는 사이비 단체 결성에나 기웃거리는 이들도 없지 않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사제 지원자들이나 수도회 지원자들이 줄어가다가 마침내 아주 사라져가는 사제성소 고갈의 비상시국이 시작되고 있다. 신학생 없는 신학교가 마침내 한국에도 시작되었다.
 
 Seminarium sine seminarista in Corea !!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으며, 더군다나,
뿌리없는 나무 가지가 어떻게 자라서 무성한 잎을 낼 수가 있겠으며, 더 더군다나
 뿌리없는 나무 가지에 어떻게 꽃이 피고, 열매까지 열릴 수 있으랴 ? !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거라 !]하시는 우리 주님 말씀 잊었느냐 ? 
 지워도, 또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을 지울 수가 있겠느냐 !?
 우리 순교 선조 선배들이 해 놓고 가신 일 중에 거룩하지 아니한 그릇된 일이 어디 있더냐?
 교황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우리 모두, [기억 지킴이]의 사명을 다하자 !.
 [기억 지킴이]는 [희망 지킴이]의 기초요, 모태가 아닌가, 아니면, 절망 속으로 빠지려나 ! ?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사라지고, 신학교와 수도원의 문이 닫히고 용도변경 하려는데 !!??
 성호를 그으면서 뒤따라다니며 나무가지를 꺾어 버리기 시작하더니만,
 한 술 더 떠서, 나무 줄기까지도 베기 시작하려고 하더니만,
 이제는 아주 영세한 마귀들의 말을 스승의 말씀이나 되는 양, 모시며 모여들어, 
 어디서 났는지 성의까지 걸치고 나서서 그 위대한 나무들을 아예 뿌리채 뽑아내려는구료 !!! 
 뉘게 이익이 돌아가며, 누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랴 ? 어떻게 천벌을 피할 수 있으랴 ?? 
[Memory Guard ! , 기억 지킴이]를!-현 교황 프란치스코 말씀은 ?-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 -우리 주님 친히 하신 말씀이상의 엄명을 !, 미사 중 성체 축성문 
- Msgr. By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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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大韓民國 建國記念日은  
聖母 마리아 昇天大祝日 이었다 !  
 
또한,천진암 성지에서는 겨레의 꽃 [무궁화의 날]이고, 
 
천진암 성지의 8월은 겨레의 꽃, ['무궁화 사랑의 달]이다 ! 

 
'광복 70주년'이라고 남북한이 모두 기념행사 거행에 떠들썩하며 거론하고 있는데,,,.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는
 
30여년 전부터 기념 경축 감사미사를 봉헌한다. 금년엔 8월 15일(토) 낮 12시에>
 
외부적 행사에 先行해야 할, 내부적 정신자세 확립도 중요한 급선무다 ! 
 
천주교회 2 천년 역사를 훑어보면, 天上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使徒들의 어머니시고, 地上 敎會의 어머니시며, 信徒들의 어머니이신, 聖母 마리아의 紀念 祝日이나, 聖母 聖月, 5월에는 고통중인 약소민족들에게 파격적인 神秘로운 恩寵의 단 비가 내렸었다.
 
특히, 8월 15일은 使徒들의 시대부터 聖母 마리아의 昇天을 기념하며 공경하던, 19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의 가장 오래된 축일로서 예수성탄 축일보다 앞선 기념일이었다. 끊임없는 戰亂과 凶年과 疾病과 迫害 같은 苦難의 와중(渦中)에서, 눈물로 부르짖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상에 계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의 신도들과 함께 天主 聖父께 간구하시어, 종종 人力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던 自由와 平和와 救援의 큰 은총이 내렸었다. 그래서, 전쟁이 그치고, 포로들이 석방되는 慶事가 성모님 축일이나 성모성월, 5월 중에 종종 있어서, 우연이라고만 보기에는 번수가 너무 많은 편이다.
 
제1차 세계대전도 1917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을 깃점으로 終戰 회담 씨앗이 공개적으로 거론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그 해, 아주 종전의 결실을 맺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역시 1945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에 日本이 항복하므로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그 무서운 전란이 끝났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2개 투하되어 도시는 잿터미가 되었고, 20 여만명 일본국민들이 죽었어도, 당시 日本은 항복은 커녕, 오히려 毒을 뿜는 방송만 계속하였었다.
 
그 당시 조선 땅에서도 우리 어린이들까지도 부르게 하던 노래가 있었다. “갓따서 닛뽕, 단 지데 갓따서, 메이헤이 이마꼬소 돗찌우리다”(이겼다, 일본이, 또 이긴다, 일본이, 이제서야 美, 英을 박살내어 진이겨 버린다!”. 후퇴와 항복과 패배라는 말 자체를 禁忌視하던 日本은 전 국민이 모두 죽어도 항복할 수 없는 체질의 막강한 軍隊의 나라, 軍國主義 帝國이었다. 마치 지금의 북한처럼!! 따라서 미국의 무력이나 중국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남북 어느 쪽에서든 평양이나 서울을 점령한다해도, 쌍방의 항복은 없을 것이며, 종전이 되어도, 남북간의 게릴라 전은 짧아도 10여년, 길면 30여년 갈 것이다. 6.25 사변 후, 남부군 이현상 부대의 지리산 공비토벌은 3년이 넘게 걸렸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상흔은 우리 사회에 난치병같은 현실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 10억을 넘는 천주교 신도들의 애절한 기도와 천상에 계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세계대전이 신앙자유 국가들의 승리로 끝난 것은 천상 성모마리아의 도우심이었다. 사실 당시의 표현으로 우리나라는 불시에 뜻밖의 해방을 맞았다.
 
1945년 9월 8일(옛 성모 성탄축일)에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4선까지 한 대통령으로서 유명한, 미국의  Roosevelt 대통령의 전권특사였으며군종신부 총 사령관이었던 美國의 Spellman 대주교(후에 추기경) 미군 하지 중장 (Lt. General Hodge)을 대동하고, 대한민국 해방군으로서,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서야 인천에 상륙하여 입국하였으며, 남한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정권인수를 정식으로 공식 접수하고, 다음 날 9월 9일에는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스펠만 대주교와 노기남 주교 공동집전으로, 2차대전 승전종식과 倭政 終熄으로 한민족 해방과 미군의 개선 입성을 환영하는 감사의 경축미사를 봉헌하였다.
 
<미국 역사상 루즈벨트 이름을 가진 대통령은 2명인데, 제26대 대통령(1901~1909),Theodore Roosevelt (1858 生~1919 死)와, 4선 대통령(1932, 1936, 1940, 1944), Franklin Delano Roosevelt(1882生~1945死)과 구별해야 한다. 테오도르 루스벨트는 1910년 한일합방과 이어서, 1917년에서야 종전한 세계 1차대전 직전의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고,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는 1945년에서야 종전된 세계 2차대전 전후와 전쟁 중에, 세계정세 영향을 끼쳤다.>
 
지금 욕심 같아서는, 미국 Roosevelt 대통령의 전권특사였던 Spellman 대주교가, 미군 하지 중장(Lt. General Hodge)과 함께 조선 독립군(광복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의 항복과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실시하였다면, 우리로서는 얼마나 좋은 당연지사였으랴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지만, 당시 사정은 그렇지 못하였다.
 
사실 소련군은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8월 15일)과 동시에 즉시(8월 20일?) 만주 지역의 고려공산당의 항일 독립군 부대원들과 함께 평양에 진주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나 항복문서 서명 및 행정권 이양, 등의 외교적 절차가 있었는지 불명확하며, 즉시 일본인들과 친일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끼나와 점령에 많은 미군이 희생되고, 당시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일본의 정치, 경제, 행정, 산업, 등의 항복인수를 받던 맥아터 장군이, 우선 일본의 항복과 무장해제 시행 업무 후에  20 여일 후에야 비로서 일본의 속국이었던 조선에 대하여 미군 장성급 일부가 업무를 분담,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전권특사였던 스펠만 대주교가 하지 중장을 대동하고 마침내 서울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 상륙을 경유하여, 서울에 입성하는 즉시, 중앙청(당시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가서, 일본인 총독(데라우찌?)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문서에 서명하고, 일본인 군경의 무장해제를 선언하므로서, 해방 후, 거의 20여일이 넘도록 국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은 마침내 패전국 전범자들의 신세로 자리에서 물나게 된 것이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예하 미군 장성들은, 정권 인수와 동시에 다음 날(9월 9일) 제일 먼저 승전 감사미사 겸 개선장군 일행의 환영 미사가 마련된 명동대성당으로 직행하였고, 성당 마당에 모여 기다리던 해방군 환영차 운집한 정계 최고위 저명인사들 앞에서 미군 장성들은 일제히 땅에 무뤂을 꿇고 노기남 주교의 손가락에 낀 주교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였다.
 
미군 장성들의 공손한 이러한 존경의 인사는 당시 한국 요인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100여년간을 두고, 처참하게 잡아 죽여도, 말한마디 못하고 맞아 죽던 천주교인한테 점령군 사령관 장군들이 성당 마당에서 땅에 무뤂을 꿇고 서서 맞이하는 천주교 주교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입을 맞추다니 !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한 예절이었다. 국제적인 이 관례는 여러해를 두고 서울시민들간의 화제였으며, 천주교회의 위상을 크게 알리고 상승시킨 천주교 성직자들에 대한 인사였으며, 당시 경성의 한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었다.
 
사실 동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요한 장면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노기남 주교의 추천, 등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당 新派로 훗날 내각 총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그 분 자신의 인품과 자격에 큰 보탬이 되는 천주교회의 국제적 위상을 느끼게 하는 미군의 대동아전쟁 승전 감사 미사가 큰 계기가 되었다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1945년 10월 성모 마리아 로사리오 성월(16일?)에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노기남 주교를 먼저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박사는 그의 환영식 답사에서, 미국서 뉴욕 대교구장 Spellman 대주교G. M. Carrol 안신부재미 윤을수 신부, 및 중국 南京의 우빈(于斌) 대주교로부터 그동안 한국독립을 위해 받은 크나큰 특별 지원에 대하여 아주 진솔하게 정중한 감사를 표하였다. 
 
독립군들의 전투현장 외에, 당시 국제 무대에서 세계 4대 강대국 지도자들, 즉,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국 장개석 총통, 소련 스탈린 수상에게, 직접 대면하여 수시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뉴욕 대교구장이며 2차대전 중 루스벨트 미 대통령 전권특사였던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의 장개석 총통 정치 고문이었던 南京 교구장 우삔 대주교 뿐이었다.
 
독일과 일본과 이태리를 패배시키고, 세계 2차대전을  승리로 끝맺은 것은 전투현장의 맼아더를 비롯한 名將들의 지휘 用兵術(technic) 뿐 아니라, 영국 쳐칠 수상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천재적 정치 지도자이며, 유일한 4선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 같은 위대한 정치가의 정책(politic)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은 U.N. 총회를 창설한 주역이었고Spellman 대주교와는 일찍부터 매우 절친하여, 일심동체로 인류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 시대에, 특히, 지금도,  미국의 Roosevelt 대통령과 Spellman 대주교 같은,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역활이 필요하고 아쉬운 싯점이다.  
 
1945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는 노기남 주교가 명동대성당에서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 귀국 환영식 거행하며, 임시정부 요인들, 金九 主席과 金奎植 박사, 등을 위하여 환영미사를 드렸고, 그동안 임시정부의 업적과 희생에 감사를 드렸다. 이 날 환영행사 중에, 金九 主席은 공개석상에서 답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독립을 지원한 蔣介石 총통과, 그 정치 고문이었던 천주교 우빈 대주교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특히, 1943. 11. 27. Cairo 회담에서, 미국 Roosevelt 대통령과 종종 동행하면서까지 그의 해외 미국 대통령 전권특사로 활약하던 스펠만 대주교의 성원은 지대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1945. 7. 26.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장총통과 함께 참석하여, 회의참석자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장개석 등에게 회의 개최 직전을 전후하여, 약소민족의 자치권과 특히 대한민국의 독립을 역설해준, 천주교 Spellman 대주교의 지지와 성원에 깊히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많은 세월, 일본의 속국 국민으로 숨을 죽이고 숨어다니며 투쟁하던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얼마나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으랴 ! 사실 한국독립을 세계 강대국 정상들에게 직접 거론한 유일한 경우였다. 1945년 12월 2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하여, 여정을 풀자마자, 8일에 명동대성당에서, 김구 주석과 함께 당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최고 최대의 정중한 임시정부 귀국 환영식을 받은 것이었다.
 
이듬해, 즉, 1946년 10월 성모 마리아 로사리오 성월(9일?)에는, 미국 메리놀회 번(Rev. Byrne)신부가 초대 한국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입국하자, 3일 후, 10월 12일에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가 환영미사를 드리고, 18일에는 美軍政廳과 천주교회가 古宮, 秘苑에서 환영 축하연을 공동개최하였다. 2년 후,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 일이었으니, 로마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Corea)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사전 승인하고, 교황대사를 임명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초대 주한 교황대사 번 신부(Rev. Byrne)가 교황대사로서 제출하는 신임장을 받을 국가 원수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을 때였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나라는 100년 迫害(1785~1885)가 끝나는 것도 1886년 5월 1일, 聖母 聖月이 시작되면서였다. 5월 1일 韓.佛修好條約 체결로 인하여 신앙의 자유가 시작되었으니, 한국 교회는 성모 마리아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도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천주교대성당 건립이 같은 해 성모 성월 초(1886년 5월 3일 ?)에 明禮坊 鐘峴 언덕에 착공되었다. 
 
明洞에 427평의 大聖堂이 착공되던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전국에 성직자들이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들만 주교 1명, 사제 10명이 전부였고, 한국인 사제는 1명도 없을 때였으며, 수녀들도 전국에 1명도 없었으며, 신학생은 글방에 다니던 소년들 6명뿐이었고, 전국 신도수는 1만 4천 500여명 뿐이고, 그 중에 서울 장안에는, 고작 3백여명 남짓한 가난한 신도들만이 있을 때, 신앙의 자유와 대성당 착공은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聖母 마리아께서 보살펴주시고 돌보아주시는 은덕이었다.
 
1945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 당시 우리 어려서의 표현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解放이 되었으나, 38선을 경계로 南北이 分斷되자, 北韓은 소련의 스탈린 無神論 共産主義 정권이 지원하는 共産黨 조직으로 출발하였으며, 南韓 각처에서는 社會主義 혁명을 위한 조직적인 民衆 武裝蜂起가 서울과 지방에서까지, 심지어 정부수립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착하고 순수한 일가친척 농민들과 근면하고 정직한 동료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창과 낫이나 도끼를 들고, 아주 저속한 폭언과 폭력으로 대규모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서울 용산역 폭동을 비롯하여, 여수, 대구, 순천, 제주, 등의 폭동이나 반란은 분명히 미리 교육받고 훈련된 조직체에 속한 요원들의 선전과 선동과 지휘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다고, 당시 대부분의 노인들은 생각하였다. 합리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가가지 끔찍한 사회 충격적인 엄청난 사고들을 겪으면서, 이러한 대형 방화와 자살과 교통사고, 등은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위장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사껀사고의 결과로 득을 보는 집단과 피해를 입는 편이 누구인지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디어 1948년 聖母聖月, 5월 10일 U.N. 감시하에 南韓에서는 반만년 역사상 최초로 국민들의 자유 총 선거가 실시되어, 制憲 國會議員들을 선출하므로써, 제헌국회가 탄생하였다. 제헌국회의원들은 절대다수(98%)로 이승만 박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하였고, 해방 후부터 유진오 박사를 비롯한 헌법학자들이 미리 준비해 오던 헌법 초안을 접수하고 손질하여, 오늘날의 우리나라 헌법 제정을 제헌국회가 마무리하게 되었다. 
마침내 1948년 7월 16일, 갈멜산의 복되신 童貞女 聖 마리아 祝日에, 國號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憲法을 확정하여, 다음 날, 즉, 미국 독립기념일이기도 한, 7월 17일에는 大韓民國 憲法 선포식을 거행하였다. 制憲節이다.! 이어서, 헌법에 따라, 제헌국회에서는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를 절대다수(98%) 찬성으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헌법에 의한 政府 組織法을 가결하고, 계속하여 부통령과 12部, 4處의 장차관을 임명하였다. 황제의 나라 大韓帝國을 상해 임시정부의 우리 선조들이 大韓民國으로 국호를 개칭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전승한 이승만 대통령 정부와 제헌국회의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같은 해, 즉, 1948년 8월 15일 聖母昇天 大祝日에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전 세계에 大韓民國 政府 樹立을 선포하였다. 위대한 우리나라 大韓民國 建國日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늦가을 파리에서 열린는 U.N. 총회에 요한 張勉 선생과 趙炳玉 박사, 金活蘭 女史,모윤숙 시인, 4인을 대표로 파견하여 국제연합이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도록 요청하게 하고, 최초의 한국 대표 4인은 파리 Rue de Bac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 본부 앞 길건너의 Lutetia 호텔 2층에 머물면서,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의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후원으로 처녀외교 활동의 초년생들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共産黨 조직에서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U.N.의 승인은 나중으로 미루고, 먼저 南北이 공산주의 사회로 하나가 된 후에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1948년 12월 8일, 聖母 無染始胎 大祝日에 당시 파리 U.N. 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48대 6으로, U.N.은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기로 확정하였고, 발표식은 다음 날, 즉 12월 9일에 하였다.
 
그 당시에는 유엔 승인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1년 남짓 지난 후, 즉, 북한 共産軍의 기습 南侵이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시작되어,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계속하여 1주일 후 수원이 점령되고, 이어서 대전이 점령되어, 한달만에 대구와 부산만이 남는 전황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風前燈火 같이 위태로울 때, 1년 전 U.N. 총회의 승인을 근거로 하여, 전 세계 60여개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하여, 20여개 나라는 현역 전투부대까지 파병하는데 있어서, 1년 전 U.N.의 대한민국 국가 승인은 각국의 한국전 참전과 물심양면의 지원 명분과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모님의 안배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 마디 마디를 천주교 신앙인의 편에서 살펴볼 때, 성모 마리아의 축일에 베푸시는 은덕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와 우리 겨레를 위하여 성모 마리아 축일에 큰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만 같다. 특히 천진암 성지에서는 1995년부터 매월 첫토요일 저녁에 성모신심 미사와 묵주의 기도 15단을 바치는 촛불 기도회를 지금까지 185회 여회가 넘도록 15년 이상 거행하여 오고 있다.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위하여, 각 가정과 직장을 위하여 봉헌하고 있는, 천진암 성지의 순수하고 거룩한 촛불기도회가 시작된 후 몇 년이 지나자, 촛불만을 흉내 내어, 어느새 촛불기도회가 아닌, 촛불 시위가 서울 중심가에서 종종 개최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매우 얺잖아 지는것이 사실이다. 민주화나 인권신장이라는 말이 인끼가 있으니까, 가장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체 요원들이 모두 너도나도 복장과 명찰을 바꾸어 달고 나와서, 사회 각처에 진출하여 자천 출연하지만, 몸둥이는 바꿀 수가 없는데도!!
 
한국천주교회는 최근 여러 교황님들의 모범을 본받아 성모 마리아 공경에 정성을 다하여야 하겠다. 더욱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문서로까지 천명해주신 바를 따라, 우리나라의 평화통일 기원 천진암대성당 건립에 관심과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금년에 세계 평화의 청동제 성모상이 천진암 성지 광장 한쪽에 세워졌다. 천년세월을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겨례를 지킬 것이다. 서울과 예루살렘과 바티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졌다. 교우들은 관광지나 유원지 가는 일을 줄이고, 천진암 성지의 성모상 앞에 와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대한민국 건국기념일, 8월 15일은 성모 마리아 승천대축일이다, 이 날은 천진암 성지에서 [겨레의 꽃 무궁화의 날] 로도 기념하며, 천진암 성지의 8월은 겨레의 꽃, [무궁화 사랑의 달] 이기도 하다. 낮 12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 좀더 알고자 하는 분은 柳洪烈 박사  著,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제111장, 민족의 해방과 교회 발전> 1962. 가톨릭출판사 발행, 및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 HOME, vol. 10.  1965, McGRAW-HILL BOOK COMPANY, New York, London, etc.,,,.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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