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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에서는 낮12시, 기념 강론과 미사 후, 간소한 다과회도 있었는데, 오늘의 우리나라 교회 史學人들 대부분이 너무도 모르고 있는
문도공의 천주교회 신앙활동을 간추려보자.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장차 文度公의 신앙 활동과 學德의 世界化 터전이 될 것이다.
8월 5일(水),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文度公 若望 丁若鏞 承旨) 탄생 제253주년(1762~2015) 기념일에,
문도공의 母校, 천진암 성지에 착공된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과 문도공 현양을 되새겨보자.
천진암 대성당 건립의 의미는 천주교회의 종교적이며 신앙적인 면을 차치하고서라도, 마치 서양의 여러 대성당들이 수세기에 걸쳐 수행하고 있는 역활처럼,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세계화시키는 특징적인 종교적 문화, 예술, 경제, 등, 다방면에 있어, 세계적으로 우리의 관광자원 확보 차원에서도 역사적인 분수령이 될 것이다.
10여세 이전 어린 시절부터 天眞菴 聖地에서 광암 이벽 성조를 사사(事師)하며, 天學堂을 母校로 삼아 修學한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1762~1836)는, 1762년 당시 윤 6월 16일(양력 8월5일)에 탄생하였다. 문중과 일부 단체에서는 이날(음력 6월 16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진암 성지에서는 양력화하여 8월 5일에 기념하고 있다.
故 최석우 신부님은, 주로 Daveluy 주교의 문헌을 근거로하여 정약용의, [韓國 天主敎 福音傳來史]라는 저서에 관하여, 여러 책에서, 특히, 벽위편 (양수리 본)의 해제 머리말, 등에서 수차 단정적으로 밝혔다. 정약용이 저술한, [韓國 天主敎 福音傳來史]라는 書名을 확신하며 거론하였다. 필자역시 문도공의 그러한 저서에 공감하며 동의하는 바이지만, 다만, 아직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그 책 이름만은 최신부님이 현대인들을 위하여 意譯하여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므로, 필자의 견해로는, [朝鮮聖敎史記], 혹은, [朝鮮天學逸志], 또는, [朝鮮 聖敎誌],등의 표현을 썼을 것으로 본다.
1906년 大韓帝國 때에 경향잡지 전신 [보감(寶鑑)] 창간호 첫 머리부터, [대한셩교샤긔] 제목으로 쓰였던 [대한성교사기]라는 제목은 당시 [보감] 창간 편집자들(파리외방선교회 안신부님과 권철신 후손들 중 일부 文人들)이, 정약용 승지의 朝鮮聖敎史記를, 大韓聖敎史記라고, 國名만 바꿨다고 확신한다. 오늘날 識者然하는 국어 상식의 함량 미달이 극심한 일부 사학도들에게는 이해가 난감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마치 3.1.운동 이후, 1920년대초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우리나라 국호, 大韓帝國을 大韓民國으로 고쳤듯이. 아직 사회와 교회의 많은 용어가 확립되지 않던 격변기에는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
아직 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치 않던 文度公 시대에는 朝鮮聖敎史記 라고 하였을 이 책은 1830년 전후에 저술을 시작하여 1835년 말경 마친 후, 문도공이 조카 정하상에게 주고, 정하상 회장은 자신이 직접 안내하던 조선 최초의 프랑스인 선교사 Pierre Maubant 신부님에게 드리고(1837년 양지 공소 전후에?), 모방신부는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자수하기 직전(?) 앵베르 주교 비서 겸 국내양성 신학생이었던 이재의 토마스에게 맡겼고(혹시 Jacque Chastant 신부의 비서 겸 복사였던 현석문 가롤로가 받아 맡았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희박하다.), 이재의 토마스는 1845년에 입국한 Daveluy 신부님에게까지 전달하므로서, 유롭 교회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정황을, 조금만 살펴보면 史學人들은 이를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천주께 감사를!!(P. Maubant 신부 문헌 참고)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는 흔히 한국교회 창립사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남긴 면만 중요시하고 있으나,
어린시절(1770~1777, 약 7년간) 천진암에서 曠菴公 事師와 勉學과,
소년시절(1777~1784, 약 7년간) 천진암 강학 멤버로서, 또,
청년시절(1784~1791, 약 7년간) 이승훈 진사와 함께 자발적인 新生 평신도교회의 [임시준성직자단 결성]에 적극 참여하여 함께한 젊은 주역의 한 신앙인으로서(Daveluy 주교 문헌), 그의 정치 사회 활동에 크나큰 장애를 받으면서도, 그리고, 유배 후,
원로시절(1818~1836, 약 18년간), 조카 정하상 바오로의 조선교구 설립 배후의 숨은 지도자와 숨은 후원 신앙인으로서 그의 사명과 역활을 인정할 수 밖에 달리 볼 수 없는 당시 정황을 두루 살펴보면, 달리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어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음을, 오늘의 史學人들이라면 쉽게 깨닫게 될, 거룩한 업적을 남겼다.
제5대 조선교구장 St. Antoine Daveluy 주교의 증언기록과
Herbert Vorgrimler 교수의 Nuovo Dizionario Teologico 참조.
또한, 문도공이 신유년에 체포되어 구금, 문초, 고문시에 배교하였다고 하지만, 고통에 못 이겨서 배교적인 표현을 한 것은 사실이나, 신앙 때문에(in odio Fidei) 비난과 수난을 겪었으며, 나아가, 18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후, 들어나지 않게 열심수계하며, 몸에는 항상 쇠사슬을 두르고 고신극기하였으며(후손 정해창, 후손 정덕진 신부, 정욱진 진부의 가승 증언), 1836년 봄 중국인 여항덕 신부한테 병자성사 까지 받고 선종하였다.
예수님 예언처럼, 첫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否定하고 背敎 이상의 背主 발언을 공개적으로 예수님 면전에서 유태인들 앞에서 공언한 사도 베드로와, 또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성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쓴 잔을 모면하게 해주십시오 !”하시고, 또 운명 직전 십자가 상에서는, “성부여,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내버리십니까?”하시며, 나약해 보이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고 복음사가들은 기록하였는데, 지금 같으면, 예수님도, 사도 베드로도 시복이나, 시성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754년에 순교하고, 1천여년이 지난 후, 1827년에 시복되어, 계속하여 5년 후 시성되고, 성인호칭기도에 올려진, 독일의 사도(Apostolus Germaniae * 시복 전 수세기 동안 교황청에서 쓰던 호칭), 성 보니파시오처럼, 문도공 정약용 요한은 장차 분명히, 반드시, 시복 시성될 자격있는 후보자였기에, 우리는 지난 1984년 103위 시성으로 중단되었던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재추진하면서, 1984년 6월, 한국주교회의 명의로 (담당 위원회 위원장 김남수 주교, 총무 변기영 신부, 역사 담당 위원들, 서울대 유홍렬 교수, 이숭녕 교수, 오기선 신부, 유영도 신부, 최석우 신부, 김옥희 수녀, 등이 약 5년간(1979~1984) 5회이상 발표와 검토회의 후) 우선 이벽 성조는 물론, 정약용도 포함하여, 98위를 선별하고, 확정된 시복추진 후보자 명단을 전국 모든 본당과 수도원 등, 교회 기관에 보내며 선언하였었다. 그러나. 그 후 2000년대에 와서 후임자들(위원장 박정일 주교, 총무 유한영 신부,등) 시대에 와서는, 98명을 추가 보완 첨삭하면서 정약용 요한 문도공도 명단에서 삭제되였다.
그 후 124위가 지난 번에 시복 되었는데, 우리의 아쉬움은 훗날 더 큰 기쁨의 씨앗이 될 것으로 본다. 요한 정약용 문도공이 한국 5천년 역사 안에서 지닌 위치와 덕망의 무게로 보아도, 문도공의 시복과 시성은 한민족 전체의 입교와 개종에 끼치는 영향이 어떠할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이며,한국교회의 이러한 실수는 반드시 회복되어 그리 멀지 않은 앞날에 정약용 요한 문도공의 시복, 시성이 크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박해시대 제5대 조선교구장 성 안토니오 다불뤼 주교(St. Antoine Daveluy)가 요한 정약용 문도공의 박해 중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선종 확인보다 더 확실하고 힘있는 증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주교회의 1981~2005, 약 20여년간 시복시성추진부장 역임, 변기영 몬시뇰>
거룩하고 위대한 우리 선조들은, [냉담자]냐 ? [배교자]냐 ? 우린 [순교선조]들의 [재판장]이냐 ?
apostasia ? martyrium ? -Majorem hac dilectionem,,,-motu proprio July 11, 2017. ?
[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린 [선조 순교자들]의 [재판장]이냐 ? apostasia ? martyrium ?-
Majorem hac dilectionem,,,-motu proprio July 11, 2017. ?
LETTERAE APOSTOLICAE MOTU PROPRIO DATAE DE OBLATIONE VITAE
«Maiorem hac dilectionem,
nemo habet, ut animam suam quis ponat pro amicis suis» (Io 15,13).
-2017. 07. 11. 시복 시성 추진을 위하여, 교황님께서 새 교서를 발표하셨읍니다. 추후, 전문 번역 후 게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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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들은 이런 일에 [선조 순교자들]의 [재판장]인가 ? -apostasia? o martyrium ? o indifferentia? - 글 : Msgr. Byon
[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는 [순교자들]의 재판장이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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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들은 이런 일에 [순교자들]의 재판장인가 ? -apostasia? o martyrium ? o indiffere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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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훠르그리물러(Herbert Vorgrimler) 교수는 각국어로 번역된 그의 [새 신학 사전]에서 背敎에 관하여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주 깔끔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영어나 다른 언어보다도, 이태리어 번역판(Nuovo dizionario teologico)이 우리에겐 더 이해하기 쉽다고 보며,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의 사목과 교회역사와 순교선조 존경 문제를 당하여, 몇 면 안되는 것을, 몇줄로 요약해서라도, 우리 사제들이 한번쯤 읽을 거리가 되는 논거라고 본다.
칼 라너(Karl Rahner) 신부의 자리를 계승하여,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전에도 이미 박사과정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칼 라너신부의 신학방향을 전승하는, 현대의 세계적인 敎義神學 대석학으로, Herbert Vorgrimler 신부는 널리 알려져 있다(1969년, 필자가 Karl Rahner 신부의 모든 저서 번역 출판 전권을 무상으로 받고서, Natur und Gnade와 Der Mensch von Heute und Religion을 먼저 번역하여 발행할 때, 그 때만 해도, 사실상 배교 문제에 관한 논술은 방법논상 함축적인 부분에서뿐, 정식으로 터놓고 다룰 수는 없는 처지였다. 지금은 사전에서까지 대석학들이 배교를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교회적인 이해 차원에서, ‘背敎’(Apostasia)라는 표현은, 한 때 意識的이고도 아주 온전히 충만한 자세로 신앙에 결속되어 있던 사람이 후에 자신이 지니던 그리스도적인 신앙을 의식적이며 全的으로 고의적인 자세로 거부하는 것이다(Apostasia,,, nella comprensione ecclesiale è il cosciente e totale rifiuto della fede crsitiana da parte di una persona che un tempo era giunta alla fede in maniera cosciente e piena.)."라고 Herbert Vorgrimler 교수는 밝힌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민족과 정신문명에 따라, 배교는 꽤 상이한 해석이나 이해가 있었으며, 그 개념과 의미가 조금씩 첨삭되면서 변천되고 발전(?)되어 왔다. 유태계의 율법포기 의미 경우를 비롯하여, 사도들과 교부들의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또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로 대동소이하게 사용된 말이었다.
그 중에, Dizionario Critico di Teologia나, 뮌스터에서 카알 라너 신부 중심으로 편찬한, Sacramentum Mundi에서, 특히, G.B.Guzzetti 교수는, 배교자에 관하여 좀 상세히 논술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모든 紀綱 실천을 단순히 포기하는 자들도, 엄밀히 말해서, 배교자들이 아니다(,,,But those who simply give up all pratices of the Christian life are not, strictly speaking, apostates.)"라고 쓰고 있다. 자신은 비록, 안하고 못해도, 배교는 아닐 수 있다는 뜻인지 ! ?
거짓말을 하거나, 주일을 못 지키거나, 하는 윤리적인 결함이나, 사목 현장에서 우리가 자주 보는 교우들의 신앙생활 태만이나 포기, 이탈, 등이 들어나더라도, 아직 ‘배교자’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하겠다. 교회의 離脫者나 공동체를 背信하는 者나, 교회법규의 犯法者들과 背敎者는 좀 구별해야 하겠다.
예컨대, 신자 가정에서 부인이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여, 더욱 악화되고, 심각해지는 가정불화나 미신자 종친들의 문중 불란 예방을 위하여, 한 때 본당의 회장들 모임에 부득이 불참하였던 본당 총회장을 배교자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문제로 한국교회는 우리 신앙선조들의 시복시성 행정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형벌의 고통을 참지 못한 형제들”, “본심에 없는 거짓말을 하였던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나 !?
위에서 아주 간략하게 소개한 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1984년 5월, 103위 시성 후, 한국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부에서는, 이미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를 비롯한 새 시복대상 후보자들 중, 제1차로 98명의 순교 확정명단을 문서로 전국 본당과 기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몇차례 멈췄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중세기 신학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국교회 신학 발전 과정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분명히, Karl Rahner을 비롯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문신학자들(Periti Concilii)이 세계 교회, 특히 오늘과 미래교회의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헌으로 교회는 한걸음씩 더 진정한 [천주님 백성의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Karl Rahner 신부는 말년에, 信經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에다가 et in Ecclesiam,,,"이라는 표현을 종종 덧붙여 가며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배교의 올바른 의미에 관한 Herbert Vorgrimler 교수의 이 몇 줄을 읽는 우리자신이 누구든지간에,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나,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 같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냉담자니, 배교자니, 하며 재판하는 드높은 판정관으로 자처하기 보다는, 저 어른들한테서 물려받은 주님의 신앙, 주님 때문에 겪는 수난과 순교의 신앙후예 중에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Msgr. Byon
칼 라너 신부의 [오늘의 인간과 종교] 번역 출판과 동시에,
그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번역, 출판 전권을 받은 문서 사진 복사판.
칼 라너 신부의 [오늘의 인간과 종교] 번역 출판과 동시에, 그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번역, 출판 전권을 받은 문서. 사실 그 후로, 수원교구청 2회 근무와 농촌사회 지도자 교육기관 설립 추진과 주교회의에서 한국교회 200주년 기념 준비 및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 개척,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추진, 등으로 밀려오는 업무의 폭주로 필자는 칼 라너 신부의 저서 번역 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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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장차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學德을 세계화시키는 결정적인 터전이 되어, 우리 민족을 통하여 전 세계 만민이 더욱더 천주님을 공경하게 하는 현장이 될 것이다.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10여세 전부터 두 형들과함께 자주 찾아와서 머물던 천진암은 문도공이 일찌기 詩文 저작을 시작하던 10대 중반의 15세 경부터 65세 노년기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 이곳 천진암 현장에 와서 머물면서 가장 많은 詩文을 남긴 곳이다.(여유당 전집 I권 II권 참조).
이미 착수된 천진암 대성당 주변과 성지 내에는 장차 문도공의 방대한 詩文碑를 비롯하여, 그의 學德을 들어내는 기념물들도 성지와 대성당을 지성적인 높은 차원으로 장식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 대성당을 통하여, 미케안젤로를 위시한 인류문화의 거장들이 성장하고 들어났듯이, 문도공의 학덕역시 천진암 성지와 대성당을 통하여 세계화할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천진암에 와서(昔我童時遊) 이벽 성조를 사사(師事)하며, 약 15년 (1770~1784) 동안 修學하던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母校, 천진암 성지에는, 문도공이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수많은 詩文 제목과 저작 연도를 우선 제목만이라도 알리는 紀念碑가 박물관 마당에 작게나마 서론처럼 하나 세워졌다.
그러나 천진암 현장에서 지은 문도공의 여러 詩文은 최초 10세 이전의 어린 시절과 특히 少年으로 성장한 후 1776년 경부터 老年期, 1827년에 마지막으로 와서 3일간 머물던 때까지, 모두 50 여년간에 걸쳐, 종종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며 현장에서, 옛 추억과 감회를 기록으로 남긴 내용으로, 시문만 90여수, 7,000餘字에 이르는데, 처음부터 저 방대한 시문들 原文과 譯文 모두를 단 번에 비석에 옮겨 새기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과 세월이 소요되어, 매우 어려우므로, 이번에는 시문 제목과 저작 연대와 일부 주요 제목만이 비문에 새겨, 지성적 기념사업 방향을 알리는 자극제에 그치지만, 이렇게라도 시작하면, 저 방대한 시문들 하나 하나 모두가 앞으로는 저작 현장인 천진암 성지에 詩碑로 남아서, 후대인들에게 스승의 목소리가 되고, 거울이 되며,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를 온 세계에 알리는 얼굴이 될 것이다.
365일, 24시간, 항상 주야로 흘러나오는 天眞菴 氷泉水처럼, 또, 天眞山 메아리 처럼, 오늘의 우리와 내일의 후대들에게 순수하고 진솔하며 소박한 詩文碑가 건립되는 것은, 화려한 각종 행사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역사성을 띤 매우 의미있는 문화사업이다.
* 아래 詩文을 읽을 때, 漢文에서 '童時'라고 하면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10세 이하를 뜻하며, 11세부터는 少年이라 하고, 장가를 들기 시작하는데, 정약용 승지는 15세에 결혼하였으니, 그것은 형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좀 늦은 편입이었다.
아래 이 詩文을 보면, 문도공 정약용 승지는 1770년 경, 8세 전후부터 천진암에 자주 놀러 왔거나, 20대 초반의 스승, 젊은 이벽 성조께서 가르치는 天學堂의 前身이 되는, 천진암의 산골 절간 書堂에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를 회고하며 추억하는 詩文이, 늙으막 65세 때(1827년)옛날 동료 학우들과 정해년(1827년) 늦봄, 천진암에 와서 3일을 머물며 지은, 天眞消搖集의 여러 대목에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다.
文度公 若望 丁若鏞 承旨(1762~1836)가 1827년 늦봄에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天眞消搖集 詩文들 중에서 우선 몇 줄만 뽑아서,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의역(譯述)해 본다, 같은 시기에(약 3년 후, 1830년 경) 같은 심정으로 쓴 蔓川遺稿의 跋文에서도 한 두 줄을 옮겨, 함께 섞어서 음미해보자.
문도공은 1797년 丁巳年에 천진암을 다녀간 후 30년만에 丁亥年(1827년)에 친구들과 아들과 친구 아들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왔으나, 절은 폐허가 되어, 밤에는 바로 아래 마을 절막에 살던 伊蒲의 戒를 받은 佛子의 집에서 3일을 머물면서 낮에는 폐허가 된 천진암 터에 올라와, 한많은 인생말로에서도, 지난 날의 勉學과 信仰과 修道의 神聖한 추억을 되새기며, 그 거룩한 현장에서 天眞消搖集을 지었다.
<天眞消搖集 일부, 이하에 발췌 의역>
천진암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石徑細如線.>
내가 어린 아이 때 와서 공부하며 오르내리고 놀던 길이지 ! <昔我童時遊.>
호걸다웠던 우리 선비들은 일찌기 여기서 講學하며 讀經하였었지!<豪士昔講讀.>
少時的 그 생활 아련하여, 다시는 해볼 수 없으니 서글프고나! <前躅凄迷不可求.>
선방에서 함께 참선하던 그런 훌륭한 옛친구들을,이세상 어디 간들 다시 구해올 수 있으랴? <禪房無處舊人求.>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 해질녘에 같이놀던 옛동무 생각나네! <粥鼓斜陽念舊游.>
천진암에 아주 와서 살고 싶은 내 마음이야 간절하지만,<我欲來此住.>
아무도 나에게 오고 가고 할 방도와 머물 곳 마련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네.<無人示方便.>
이제 나역시 30여년만에 나그네가 되어 다시 와서 보니,<三十년來重到客.>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배 한척의 신세로다<猶然苦海一孤舟.>
-<이하는 1830년 경,문도공 정약용 승지 편술의 蔓川遺稿 跋文에서 拔萃 意譯한 것.>-
한평생 사는 동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도 하였으나 <平生囚獄>
그래도 死刑은 면하여 죽지않고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네<死免於出世>
3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三十餘星霜>
강산은 예전과 다름이 없고<江山依舊>
푸른 하늘에 힌 구름 지나며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이 없건만<靑空白雲不變影>
선배 성현들과 옛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갔나 ?<先賢知舊何處去哉 ?>
나 혼자만 아무데도 連接되지 못한 나무토막 돌덩이처럼 외톨이 신세가 되어 <不接木石之身勢>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거꾸러지고 쳐박히고 하는 동안<轉轉倒處中>
슬프도다 ! 모두가 불의에 세상을 떠났구료 ! <憶 不意移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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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프란치스꼬 교황께서는 한국에 오시어,
아시아 각국에서 모이는 청소년들을 만나셨읍니다 !
이는 우연이 아니니, 한국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역사상 유례가 없이,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세웠으며, 특히,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성조들께서는 일찌기 10대 후반, 20세 전후의 청소년들로서 거룩히 빛나는 교회창립을 이룩하시고, 목숨을 바쳐 지키고, 아끼고, 가꾸셨으며, 그 정신과 덕행과 교훈을 대대로 우리와 온 세상 젊은이들에게 물려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뿌리없는 나무 가지가 어떻게 무성한 잎을 내며, 뿌리없이 더구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읍니까 ? !
1770년 경, 15세로 천진암에 입산한 이벽 성조께서는 7년 후,
1777년 경, 자연스레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리강학을 점차 발전시켜,
1779년을 전후하여서는 당시 저명한 학자로서 40대 중반의 권철신도 참석하는 교리논증과 신앙수련회로 승화시켰으니,
당시 이벽 성조 23세, 이승훈 21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이총억14세, 등!
10대 후반과 20세 전후의 젊은 청소년 학자 선비들이 세운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을
로마 교회는 장차 분명히 전 세계 청소년들의 주보와 모범으로, 신앙의 교과서로 선언하게 될 것입니다. !
1801년 신유년에 참혹한 박해로 교회 창립선조들이 대부분 순교하거나 유배되고,
가산이 몰수된 후에도, 교회 재건을 위하여,
역시 10대 후반, 20세 전후의 그 자녀들과 젊은 10 대 후반, 20대 초반의 후손들은 창립선조들의 뒤를 이어
조선교구 설정 때까지 한국교회를 이끌어나갔으니,
16세 전후의 정하상 소년은 정약종 성현의 둘째 아들로서, 전국 심산궁곡 박해의 천주교 난민촌에 숨은 교우들을 탐방하며, 백두산 너머 무산 땅까지 마천령을 넘어가서 조동섬 유스띠노(아버지 정약종 성현의 친구) 유배지까지 찾아가 3년간이나 머물면서, 조동섬으로부터 朝鮮 聖敎會의 내력과 아버지 정약종의 덕망에 관하여 공부하고, 20여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조선교구 설정을 위하여 북경 교회를, 자신이 권유하여 입교시킨 유진길, 등, 교우들과 교대로 20여차례나 왕래하였다.
특히 15세의 김대건, 15세의 최양업, 14세의 최과출은 정하상 회장의 제자들로서, 사제가 되기 위하여, 1836년 12월 6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스승 정하상 회장의 지도와 안내로 국경, 의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여항덕 중국인 신부와함께 북경에 이르렀다가, 거기서 여항덕 신부를 이별하고부터는, 안내원을 따라, 마카오까지, 한양에서부터는 2만리 길을 걸어서, 이듬해, 즉 1837년 6월 6일에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사제관에 도착하였으니, 6개월 동안 걸어서만 갔읍니다. 장한 우리 한국 소년들의 모범이여 ! 김대건, 최양업, 두 소년들은 10여년 후 천신만고 끝에 사제가 되어 돌아왔지만, 최과출 방지거는 6개월 걸어가던 노독과 열대지방 말라리아(?)에 걸려 앓다가 마카오에 도착한지 8개월만에 마카오에서 성모님과 엄마를 부르며 세상을 떠났다.
최과출 신학생의 무덤을 찾아, 한 조각 돌을 세워보고자, 필자는 1984년부터 마카오 현장을 몇차례 갔었으나 헛수고 였고, 몇년 후, 최승룡 신부님께도 부탁하여, 수고하셨으나 못 찾았다.
어린 최과출 초대 신학생의 무덤은 찾지 못하더라도, 그 웅지와 노고를 잊지는 말아야 하겠다. 이제는 적당한 곳, 마카오 주교좌 성당 마당이나, 혹은 마카오의 어느 성당이나, 어떤 선교회 본부 마당에라도, 사제가 되기 위하여 14세 어린 나이에 한양에서 유학갔던, 거룩하고 위대한 [한국 초대 신학생 방지거 최과출(1823~1837) 기념비] 이번 기회에 세웠으면,좋으련만,,,! 아니, 국내의 모든 신학교 마당과 주교좌 성당 마당에라도 !
최과출 방지거의 원래 고향은 충남 합덕(?)이나 당진 부근이며, 박해를 피하여 남양이나 사강 부근 상귀(?) 마을, 신자들이 숨어살던 해안가의 갈대 숲 마을로 부모님들과 함께 피난왔다가, 남양지역에서, 정하상 회장이 모시고 순회하던 피에르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 후보로 인정되고, 발탁되었읍니다.
오늘날 유롭 교회들과는 달리,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사제성소가 많았고, 끊이지 않아, 대신학교가 발전하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는 과거 역사를 망각하고, 말소시키려는 잘못된 사조가 너무 심합니다. 특히, 정치, 사회, 교육, 종교, 언론계에서 심합니다. 기억을 지킵시다. 기억은 역사의 원본적인 순수한 기본 자료다.
정권이 바뀌면 변화와 개혁이란 모험적인 명분으로 위대한 역사도 소멸시킵니다. 그리하여, 조상님들을 탓하고, 선조들을 비난하며, 선배들을 무시하고, 선임자들을 매도하면서 배척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이 관료사회에서 비일비재한 현주소다.
이런 사람들은 후손들을 위하지 않고 자신을 위하며, 후배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이용하려 하며, 후임자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당대주의에 젖어 있다. 그러다 보니, 겨우 10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안중근 의사 묘를 잃어버리고도 우리의 얼굴에는 후회하는 빛보다 이름내려는 사이비 단체 결성에나 기웃거리는 이들도 없지 않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사제 지원자들이나 수도회 지원자들이 줄어가다가 마침내 아주 사라져가는 사제성소 고갈의 비상시국이 시작되고 있다. 신학생 없는 신학교가 마침내 한국에도 시작되었다.!!!
Seminarium sine seminarista in Corea !!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으며, 더군다나,
뿌리없는 나무 가지가 어떻게 자라서 무성한 잎을 낼 수가 있겠으며, 더 더군다나
뿌리없는 나무 가지에 어떻게 꽃이 피고, 열매까지 열릴 수 있으랴 ? !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거라 !]하시는 우리 주님 말씀 잊었느냐 ?
지워도, 또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을 지울 수가 있겠느냐 !?
우리 순교 선조 선배들이 해 놓고 가신 일 중에 거룩하지 아니한 그릇된 일이 어디 있더냐?
교황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우리 모두, [기억 지킴이]의 사명을 다하자 !.
[기억 지킴이]는 [희망 지킴이]의 기초요, 모태가 아닌가, 아니면, 절망 속으로 빠지려나 ! ?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사라지고, 신학교와 수도원의 문이 닫히고 용도변경 하려는데 !!??
성호를 그으면서 뒤따라다니며 나무가지를 꺾어 버리기 시작하더니만,
한 술 더 떠서, 나무 줄기까지도 베기 시작하려고 하더니만,
이제는 아주 영세한 마귀들의 말을 스승의 말씀이나 되는 양, 모시며 모여들어,
어디서 났는지 성의까지 걸치고 나서서 그 위대한 나무들을 아예 뿌리채 뽑아내려는구료 !!!
뉘게 이익이 돌아가며, 누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랴 ? 어떻게 천벌을 피할 수 있으랴 ??
[Memory Guard ! , 기억 지킴이]를!-현 교황 프란치스코 말씀은 ?-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 ”-우리 주님 친히 하신 말씀이상의 엄명을 !, 미사 중 성체 축성문
- Msgr. By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