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알 라너 신부 저서 전권 무상번역출판권 ! 받은 문서 ! 이 毒蛇의 族屬들아,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 서울서] !
글 :
Msgr. Byon
우리 순교 선조들은 [냉담자]냐 ?, [배교자]냐 ?, 우리 후손들은 [순교선조들]의 [재판장]인이냐 ? -apostasia ? o martyrium ? o indifferentia ?
글 : Msgr. Byon
[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는 [순교자들]의 재판장이냐 ?
[냉담자]냐, [배교자]냐, 우리들은 이런 일에 [순교자들]의 재판장인가 ? -apostasia? o martyrium ? o indifferentes?
허버트 훠르그리물러(Herbert Vorgrimler) 교수는 각국어로 번역된 그의 [새 신학 사전]에서 背敎에 관하여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주 깔끔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영어나 다른 언어보다도, 이태리어 번역판)(Nuovo dizionario teologico이 우리에겐 더 이해하기 쉽다고 보며,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의 사목과 교회역사와 순교선조 존경 문제를 당하여, 몇 면 안되는 것을, 몇줄로 요약해서라도, 우리 사제들이 한번쯤 읽을 거리가 되는 논거라고 본다.
칼 라너(Karl Rahner) 신부의 자리를 계승하여, 뮌스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전에도 이미 박사과정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칼 라너신부의 신학방향을 전승하는, 현대의 세계적인 敎義神學 대석학으로, Herbert Vorgrimler 신부는 널리 알려져 있다(1969년, 필자가 Karl Rahner 신부의 모든 저서 번역 출판 전권을 무상으로 받고서, Natur und Gnade와 Der Mensch von Heute und Religion을 먼저 번역하여 발행할 때, 그 때만 해도, 사실상 배교 문제에 관한 논술은 방법논상 함축적인 부분에서뿐, 정식으로 터놓고 다룰 수는 없는 처지였다. 지금은 사전에서까지 대석학들이 배교를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교회적인 이해 차원에서, ‘背敎’(Apostasia)라는 표현은, 한 때 意識的이고도 아주 온전히 충만한 자세로 신앙에 결속되어 있던 사람이 후에 자신이 지니던 그리스도적인 신앙을 의식적이며 全的으로 고의적인 자세로 거부하는 것이다(Apostasia,,, nella comprensione ecclesiale è il cosciente e totale rifiuto della fede crsitiana da parte di una persona che un tempo era giunta alla fede in maniera cosciente e piena.)."라고 Herbert Vorgrimler 교수는 밝힌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민족과 정신문명에 따라, 배교는 꽤 상이한 해석이나 이해가 있었으며, 그 개념과 의미가 조금씩 첨삭되면서 변천되고 발전(?)되어 왔다. 유태계의 율법포기 의미 경우를 비롯하여, 사도들과 교부들의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또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로 대동소이하게 사용된 말이었다.
그 중에, Dizionario Critico di Teologia나, 뮌스터에서 카알 라너 신부 중심으로 편찬한, Sacramentum Mundi에서, 특히, G.B.Guzzetti 교수는, 배교자에 관하여 좀 상세히 논술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모든 紀綱 실천을 단순히 포기하는 자들도, 엄밀히 말해서, 배교자들은 아니다(,,,But those who simply give up all pratices of the Christian life are not, strictly speaking, apostates.)"라고 쓰고 있다. 자신은 비록, 안하고, 못해도, 배교는 아닐 수 있다는 뜻인지?
거짓말을 하거나, 주일을 못 지키거나, 하는 윤리적인 결함이나, 사목 현장에서 우리가 자주 보는 교우들의 신앙생활 태만이나 포기, 이탈, 등이 들어나더라도, 아직 ‘배교자’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하겠다. 교회의 離脫者나 공동체를 背信하는 者나, 교회법규의 犯法者들과 背敎者는 좀 구별해야 하겠다.
예컨대, 신자 가정에서 부인이나 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여, 더욱 악화되고, 심각해지는 가정불화나 미신자 종친들의 문중 불란 예방을 위하여, 한 때 본당의 회장들 모임에 부득이 불참하였던 본당 총회장을 배교자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문제로 한국교회는 우리 신앙선조들의 시복시성 행정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형벌의 고통을 참지 못한 형제들”, “본심에 없는 거짓말을 하였던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나 !?
위에서 아주 간략하게 소개한 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1984년 5월, 103위 시성 후, 한국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부에서는, 이미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를 비롯한 새 시복대상 후보자들 중, 제1차로 98명의 순교 확정명단을 문서로 전국 본당과 기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몇차례 멈췄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중세기 신학 아닌, 편파적이며 인간적인 사고방식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국교회 신학 발전 과정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분명히, Karl Rahner을 비롯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문신학자들(Periti Concilii)이 세계 교회, 특히 오늘과 미래교회의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헌으로 교회는 한걸음씩 더 진정한 [천주님 백성의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특히, 라찡거 교수를 비롯한, 그동안 교의성에서 다년간 심층연구 하고 밝힌, 현행 천주교회 교의서는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크나큰 업적이다. 특히, 영세 예비자, 천주교회 신문 교우들, 입교자들에 관한 교의신학적 선언은, 우리나라 같은 선교지방의 교리교수와 사목에 매우 중요한 지침을 아주 명확히 해주고 있는데 사실 이부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헌장에서 이미 천주교회 교부들께서 천명하여 선포하신 분야다. [순교냐?]. [배교냐?]를 따지고 다루어야 하는 시복시성부 직원들은 신문교우 영세입교에 관한 교회법규 조항 이전에, 교회헌장의 선언을 반드시, 반드시, 재독, 삼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Karl Rahner 신부는 말년에, 信經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에다가 et in Ecclesiam,,,"이라는 표현을 종종 덧붙여 가며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배교의 올바른 의미에 관한 Herbert Vorgrimler 교수의 이 몇 줄을 읽는 우리자신이 사제든, 주교든, 수도자든간에, 누구든지간에,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나,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 같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냉담자니, 배교자니, 하며 재판하는 드높은 판정관으로 자처하기 보다는, 저 어른들한테서 물려받은 주님의 신앙, 주님 때문에 겪는 수난과 순교의 신앙후예 중에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고 싶다. Msgr. Byon
Karl Rahner 신부의 [오늘의 인간과 종교] 번역 출판과
동시에, 그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번역, 출판 전권을 받은 문서 사진 복사판.
Karl Rahner 신부의 그 어려운 [오늘의 인간과 종교] 우리말 번역 출판과 동시에, 그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번역, 출판 전권을 받은 문서. <사실 그 후로, 필자는 수원교구청 연속 2회 근무와 농촌사회 지도자 교육기관 설립 추진과 주교회의에 불려가서, 한국교회 200주년 기념 준비 및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 개척,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추진, 등으로 밀려오는 업무의 폭주로 필자는 칼 라너 신부의 저서 번역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세계적 대석학들의 신학서적 번역 출판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삼아 취미가 있던 필자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 내용 소개나,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신애론] 등의 번역 발행 후, 독일유학에서 귀국하는 선후배 신부들에게 미루는 심정으로, 또 주교님들의 명을 따라, 한국교회 시사적인 당시의 최급선무(103위 시성과 순교선조들의 시복시성, 200주년 기념행사와 기념사업, 103위 시성과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개척, 교황 방한과, 백년계획 한민족대성당 건립, 등에 매달리며, 주교회의에서 주교님들의 잔 심부름꾼들 틈에 끼어, 4,50대의 젊음을 불태우고, 교회 땅이 1평도 없던 천진암 산골에 들어와서 산골 또랑치고 가재 잡으며, 275 필지나 되는 조각 땅들 30 여만평이나 교회토지 확보, 등에 6,70대를 다 보낸 셈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대석학 Karl Rahner 신부님으로부터, 실로 애쇵이 무명의 젊은 한국 시골 사제로서 받은 과만한 인정과 초대와 너그러운 대접에 충분히 답해드리지 못한 것을 늘 마음 한 구석으로 죄송하게 여기며, 필자와 카알 라너 신부님 사이에 부드럽고 너무나고마운 가교실무를 해주신 예수 성심수녀회의 거룩한 Zielinsky 할머니 수녀님에게도 늘 감사하는 마음 지니고 사는 필자는, 이제 우리 나이 84세나 넘어, 내 차례가 되어, 늙고 낡아서 더 이상 번역에도 손을 댈 수가 없게 되었으나, 교회를 위하여만, 힘껏 여한없이 일하며 한평생 살아온 필자는 지금도 졸지 않고 주님이 부르시는 날을 기다리며 묵주 알을 굴리고 있다.>Msgr. Byun 2024 /Aug./11. 곡수 공소, 하느님의 종 순교자 권일신 사우거사 기념서재에서.
따라서,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장차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學德을 세계화시키는 결정적인 터전이 되어, 우리 민족을 통하여 전 세계 만민이 더욱더 천주님을 공경하게 하는 현장이 될 것이다.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가 10여세 전부터 두 형들과함께 자주 찾아와서 머물던 천진암은 문도공이 일찌기 詩文 저작을 시작하던 10대 중반의 15세 경부터 65세 노년기에 이르도록, 여러 차례 이곳 천진암 현장에 와서 머물면서 가장 많은 詩文을 남긴 곳이다.(여유당 전집 I권 II권 참조).
이미 착수된 천진암 대성당 주변과 성지 내에는 장차 문도공의 방대한 詩文碑를 비롯하여, 그의 學德을 들어내는 기념물들도 성지와 대성당을 지성적인 높은 차원으로 장식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 대성당을 통하여, 미케안젤로를 위시한 인류문화의 거장들이 성장하고 들어났듯이, 문도공의 학덕역시 천진암 성지와 대성당을 통하여 세계화할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천진암에 와서(昔我童時遊) 이벽 성조를 사사(師事)하며, 약 15년 (1770~1784) 동안 修學하던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의 母校, 천진암 성지에는, 문도공이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수많은 詩文 제목과 저작 연도를 우선 제목만이라도 알리는 紀念碑가 박물관 마당에 작게나마 서론처럼 하나 세워졌다.
그러나 천진암 현장에서 지은 문도공의 여러 詩文은 최초 10세 이전의 어린 시절과 특히 少年으로 성장한 후 1776년 경부터 老年期, 1827년에 마지막으로 와서 3일간 머물던 때까지, 모두 50 여년간에 걸쳐, 종종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며 현장에서, 옛 추억과 감회를 기록으로 남긴 내용으로, 시문만 90여수, 7,000餘字에 이르는데, 처음부터 저 방대한 시문들 原文과 譯文 모두를 단 번에 비석에 옮겨 새기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과 세월이 소요되어, 매우 어려우므로, 이번에는 시문 제목과 저작 연대와 일부 주요 제목만이 비문에 새겨, 지성적 기념사업 방향을 알리는 자극제에 그치지만, 이렇게라도 시작하면, 저 방대한 시문들 하나 하나 모두가 앞으로는 저작 현장인 천진암 성지에 詩碑로 남아서, 후대인들에게 스승의 목소리가 되고, 거울이 되며,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를 온 세계에 알리는 얼굴이 될 것이다.
365일, 24시간, 항상 주야로 흘러나오는 天眞菴氷泉水처럼, 또, 天眞山 메아리 처럼, 오늘의 우리와 내일의 후대들에게 순수하고 진솔하며 소박한 詩文碑가 건립되는 것은, 화려한 각종 행사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역사성을 띤 매우 의미있는 문화사업이다.
* 아래 詩文을 읽을 때, 漢文에서 '童時'라고 하면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10세 이하를 뜻하며, 11세부터는 少年이라 하고, 장가를 들기 시작하는데, 정약용 승지는 15세에 결혼하였으니, 그것은 형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좀 늦은 편이었다.
아래 이 詩文을 보면, 문도공 정약용 승지는 1770년 경, 8세 전후부터 천진암에 자주 놀러 왔거나, 20대 초반의 스승, 젊은 이벽 성조께서 가르치는 天學堂의 前身이 되는, 천진암의 산골 절간 書堂에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를 회고하며 추억하는 詩文이, 늙으막 65세 때(1827년) 옛날 동료 학우들과 정해년(1827년) 늦봄, 천진암에 와서 3일을 머물며 지은, 天眞消搖集의 여러 대목에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文度公 若望 丁若鏞 承旨(1762~1836)가 1827년 늦봄에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天眞消搖集 詩文들 중에서 우선 몇 줄만 뽑아서,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의역(譯述)해본다, 같은 시기에(약 3년 후, 1830년 경) 같은 심정으로 쓴 蔓川遺稿의 跋文에서도 한 두 줄을 옮겨, 함께 섞어서 음미해보자.
문도공은 1797년 丁巳年에 형님들 두 분과 함께 천진암을 다녀간 후 30년만에 丁亥年(1827년)에 친구들과 아들과 친구 아들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왔으나, 절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농지가 되어, 아랫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짖고 있어서, 문도공 일행은 밥 한술 얻어 먹고 또
단 하루 밤이라도 잠 잘 곳이 없어서, 밤에는 바로 아래 마을 절막에 사는, 伊蒲의 戒를 받은 佛子의 집에서 3일을 머물면서, 낮에만 폐허가 된 천진암 터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며, 한많은 인생말로에서도, 지난 날의 勉學과 信仰과 修道의 神聖한 현장에 관한 추억을 되새기며, 그 거룩한 도장에서 天眞消搖集을 지었다(정약용 전집 I 권과 II권 참조)..
<天眞消搖集 일부를 이하에 발췌 의역>
천진암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石徑細如線.>
내가 어린 아이 때 와서 공부하며 오르내리고 놀던 길이지 ! <昔我童時遊.>
호걸다웠던 우리 선비들은 일찌기 여기서 講學하며 讀經하였었지!<豪士昔講讀.>
少時的 그 생활 아련하여, 다시는 해볼 수 없으니 서글프고나! <前躅凄迷不可求.>
선방에서 함께 참선하던 그런 훌륭한 옛친구들을,이세상 어디 간들 다시 구해올 수 있으랴? <禪房無處舊人求.>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 해질녘에 같이놀던 옛동무 생각나네! <粥鼓斜陽念舊游.>
천진암에 아주 와서 살고 싶은 내 마음이야 간절하지만,<我欲來此住.>
아무도 나에게 오고 가고 할 방도와 머물 곳 마련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네.<無人示方便.>
나 혼자만 아무데도 連接되지 못한 나무토막 돌덩이처럼 외톨이 신세가 되어 <不接木石之身勢>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거꾸러지고 쳐박히고 하는 동안<轉轉倒處中>
슬프도다 ! 모두가 불의에 세상을 떠났구료 ! <憶 不意移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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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毒蛇의 族屬들아,
닥쳐 오는 天罰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들에게 일러주더냐 ?
3차 세계대전의 포성과 화염이 퍼지는 마당 가에 서서, 코로나 대난국 3년을,
허송세월한듯, 아직도 제 정신 못차리는 너희들,,!>, 이 毒蛇의 族屬들아,
닥쳐 오는 天罰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들에게 일러주더냐 ?
<"You, sons of snakes!" he warned. "who said that you could escape the coming wrath of God ?>Mat. chp.3/7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테오복음 .3장 7절~10절>
<",,,il leur dit: Engeance de viperes, qui vous a suggere' `de vous soustraire `a la Colere prochaine ? Produisez donc un fruit qui soit digne repentir et ne vous avisez pas de dire en vous memes:' Nous avons pour pere Abraham.'>Mat. chp.3/7
크리미아 반도를 물고 삼키며 우크라이나 곡창으로 들어가려는 소련군 부대들과,
이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티벳, 위그르, 카자흐스탄에서 총포 소리 요란한데,
大興安嶺과 遼河의 東明故疆을 내놓지 못하는 중공은,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臺灣 상공의 天氣와 釣魚島 낚시터와,
三峽 댐도 결코 담지 못할 태평양의 저 큰 물을,
혼자서만 다 마시겠다고 ? 마시다가 하늘 물난리로 익사할텐데 !
이보다 더 큰 천치 바보가 천상천하에 어디 있으랴 !?
<3차 세계대전의 포성과 화염이 시작되려는 마당가에 서서, 코로나 대난국 3년에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너희들,,!> 이 毒蛇의 族屬들아, 닥쳐 올 天罰을 피하라고,
누가 느덜에게 일러주더냐 ?<마테오복음.3장 7절~10절>
<"You, sons of snakes!" he warned. "who said that you could escape
the coming wrath of God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테오복음.3장 7절~10절>역사는 인류의 거울이다. 大國夢이나 大陸夢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왕년의 강대국들중공이나 일본이나 소련이나 미국, 등은 겸손하고 정직한 현대국가로 돌아와야 한다. 아직도 과거 대국의 교만한 욕망을 못 버리면, 국가라기보다도, 차라리,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안기는 惡漢의 集團이 되어, 제3차 세계대전의 불길을 대상으로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이 毒蛇의 族屬들아, 닥쳐 올 天罰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들에게 일러주더냐 ?
<"You sons of snakes!" he warned. "who said that you could escape the coming wrath of God ?>
영토가 없어서, 영토가 좁아서, 침범하는가 !?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와 신앙이 다르고, 문화와 역사가 다른 민족들을,
절대로 무력으로 대량학살하지 말아라 ! 오래 갈 수 없다. 너희들 머리 위에 천주님이 계시다.
뱀들이 새끼칠 때가 되어 어미 뱀이 알을 배면, 땅 굴 속에 들어가서 알을 여러개 낳아서 지키고 보호하고자 알을 떠나지 않고 품는데, 뱀들 중에 가장 독한 독사들 중에도, 살모사(殺母蛇)라고도 부르는 어떤 어떤 독사종류는 새끼칠 때 땅 바닥에서 알을 낳지 않고, 대개 한 마리씩 낳는 새끼 낳을 때가 되면, 그리 굵지 않은 가느다랗고 나즈막한 나뭇가지로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몸을 감고, 새끼를 낳아서 아래 땅바닥으로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독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 아주 특이하게 독한 독사는 새끼가 어미 뱀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저를 낳아 준 어미 뱀을 독침이 있는 앞 송곳이로 물어서 독을 넣어 퍼트려 어미 뱀을 죽이고 조금씩 삼켜서 먹고자 하나, 아직 가늘고 작은 갖난 새끼 독사라서,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독으로 어미 뱀을 죽이기는 해도, 저보다 비할 수없이 굵고 큰 어미 뱀을 삼키기는 어려워서, 어미뱀을 물어죽일 뿐 살아남기 위한 먹이로서는 연하고 부드럽고 작은 청개구리 새끼들을 찾거나 풀끝의 이슬이라도 먹어야 한단다.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독사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일반 독사라고 부르지 않고, 아예 제 어미를 물어서 죽이는 살모사(殺母蛇) 라고 부르기 때문에, 살모사 어미 뱀은 나무 위에서 새끼를 낳아야만 땅에 떨어진 새끼한테 물려 죽는 어처구니 없는 운명을 모면할 수 있으므로, 새끼를 난 후에 목숨을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기 위하여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서 새끼를 낳게 마련이라니, 험산준령의 장산들을 평지처럼 타면서 칠점사나 독사나 살모사를 잡는 전문가들이라야 일반 독사와 살모사(殺母蛇)를 구별할 수 있다니,,,,!
그러나 나뭇가지에서 낳은 살모사 새끼가 땅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미리 냄새를 맡으며 먹이를 찾고 있던 천적들은, 마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처럼, 독사나 살모사도 즐겨 찾아 잡아먹는 동물들이 있으니, 먹이 냄새에 아주 민감한 산돼지 새끼들이나 너구리, 오소리나 담비나 까마귀, 까치, 같은 천적들이 날래게 다투며 가로 뛰고 세로 뛰면서 갓태어난, 맛있는 보약 연한 새끼 살모사(殺母蛇)를 잡아 먹기 때문에, 새끼 살모사가 천적한테 걸려서 잡혀먹히는 위기에 처하면 어미 살모사는, 그래도 [어미]라서, 나뭇가지에서 지체없이 몸을 던져 땅으로 뛰어내려서, 좌우로 몸을 숨겨가며 쏜살같이 달려가서, 천적의 턱이나 목이나 앞발을 물어서 독(毒)을 뿜어 넣고는 사라짐으로써, 새끼 살모사가 천적들한테 먹히지 않고 도망갈 겨를을 갖게 한단다.
그러니, 어미 살모사(殺母蛇)가 지니고 있는 모성애(母性愛)는 자신이 지닌 독(毒)보다도 더 독하고 강하며, 또 자신이 당하는 죽음이 주는 공포나 고통보다도, 천성적으로 훨씬 더 굳세고 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 상류의 냇갈 가로 세례를 달라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당시 지도자급의 인사들을, “독사(毒蛇)의 족속(族屬)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독사의 족속(族屬)들아, 닥쳐 올 天罰을 피하라고, 도대체 누가 너희들에게 일러주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Mt.3장 10절-
요즈음은 무서운 살모사 같은 독사인간의 종류들이 무리를 지어, 사면팔방에서 조석으로 출몰하여 설치고 날뛰는 [독사인간들이 광란하는 시국]이다. 저 독사의 족속들 중에도 뛰어난 살모사(殺母蛇)의 족속들보다도 훨씬 더 악독하고 무식하고, 무례막심하며, 아주 더 몰상식하여, 자신이 뱀인지, 독사인지, 살모사(殺母蛇) 새끼 독사인지도 전혀 모르므로, 자아인식 자체가 없어서, 실로 우리와는 아주 다른 나라, 전혀 다른 사회의 광견들처럼,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과 윤리의식과 언어 자체가 전무한 살모사(殺母蛇 毒蛇)의 종류들이 소리없이 침입하여, 천주교회도 약화시키고,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악업만을 전문으로 하는 존재들과 조직체들이 있다.
더욱이 사회와 교회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막지하기 그지없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 사회에서 처음 외출나온 새끼 독사들이나 살모사(殺母蛇)같은 독을 내뿜으며, 언어랍시고 소리를 흉내내며 좌충우돌하는 인간군상들이 난동을 부리며 몰려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돈과 칼만을 잡기 위한 전쟁 터를 반복하며, 서로가 모두 극약처방만을 궁리하고 악용하는 생지옥같은 인간세계를 만들어 가는 현상으로 느껴진다. 어찌 돈주머니와 칼자루만이 춤을 추는 정치계 뿐이랴 !
이처럼 합리와 조리가 없어서 道理와 倫理도 불가능한, 오래된 공동묘지 망령들 같은 인간들이 자신을 낳아서 키워주고, 가르쳐서 사람으로 만들어준, 부모와 스승과 선배들을 물어뜯어 죽이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방식으로 알고 있으므로, 경제만을 국가존립의 유일한 목적으로 인정하고, 외쳐대는 목소리의 진심은 사실상 자신의 물욕을 채우는 살 길이라고 여기므로써, 비인간화 내지 반인간화를 추구하는 선천적인, [말 소리를 내는 살모사(殺母蛇)종류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고, 늘어만 가고 있지 않는가?! 기가 막힌다. 사상가 부재시대의 그나마 잔존해 있던 일부 지성인들조차,"말이 통해야 대화가 가능할텐데!"언어불통으로, [아예 말조차 나오지 않고], 숨이 막혀, [호흡도 극난한 지경]이니,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독하면, 저렇게까지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오죽하면 전에도 두 번째 귀양살이에서 풀려 나온 후,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를 또 다시, 그를 더 엄히 처벌해야만 한다!]고 아우성치며, 광견들 못지 않게 물어뜯고자 짖어대며 으르렁거리는 살모사(殺母蛇) 인간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참다 못하여, 마침내 문도공 요한 정약용 승지는 이 때의 심정을 훗날 한마디 기록으로까지 표현하여 남겼다, [악하고 독한 못된 저 인간들의 그 고약한 독기가 저렇듯 극심하고나!] "악인지불선이 여차하도다"<惡人之不善如此>.하야,,,!] 미친 개한테 물렸다고, 개한테 물린 사람이 돌아서서 보복으로 개를 물어뜯을 수야 없지 않은가 ? 사람마져 미쳐서, 미친 개를 물면, 개 같은, 아니, 미친 개만도 못한, 개 같은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
Nero황제 말년의Seneca는 Nero황제가 18세 젊은 시절, Nero의 스승(가정교사)으로서 아마 2년 여 이상 가르쳤는데, 로마 대제국 역사에서 Granada 출신의 가장 뛰어난 천재적인 교육가요, 정치가며, 문학가로서, 주후 64년 경(?), 말년에 로마의 젊은이들이 매일같이 광란하자, 외롭게, 마치 오늘의 서울의 광화문같은 로마의 개선문을 지나는 시가지 중심으로 들어가, 거의 매일 같이 로마의 거리를 누비며,
"Juvenes hodie Romani ,,,"로 시작되는 저 유명한 ['거리의 강연']으로 목이 쉬고 다 타도록 외쳐댔다.
(Juvenes hodie Romani irrationabiles (non rationabiles), nec morales ita ut periculosa sit cras Romae ! Histr. Tacitus).
이를 알기 쉽게 좀 풀어가며 역술해 보자면, "오늘의 로마 젊은이들은 論理나 合理나 調理가 없으니, 道理나 義理나 倫理도 있을 수 없기에, 로마의 내일이 실로 위험하고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애제자였던 네로 황제가 내리는 자살벌을 받아, Seneca가 비운에 죽자, 바로 이어서 로마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한Nero 황제의 명(?)에 의한 관제 대 방화 사건으로, 동시에, 만만한 그리스도교인들을 방화범 제물로 삼아 몰아붙이면서, 잔인한 박해의 살풍을 불어대기 시작하였다.
이 박해 중에, 로마의 사도 베드로는 Tebere 강건너 바티칸 공동묘지 옆에 있던 마차경기장 부근에서 알몸으로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아 매달아 죽였으며, 로마의 점령지 이스라엘의 명문가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을 지참하고 있던 바오로는, 그래도 위대한 로마 대제국의 시민 대우를 받게 하려는듯, 지중해 연안 Ostiam 부두가로 나가는 모래 언덕 시골길로 끌고 나가 모래 언덕에서, 고통과 수치를 덜 느끼며 죽을 수 있도록, 단칼에 목을 베어, 장렬한 순교로 자신을 천주께 봉헌하게 하였다.
이렇게 박해의 칼날이 춤을 추는 막강한 박해자들은 끝내 승리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목숨을 바치면서 살아나온 로마의 거룩하고 위대한 순교자들은 오늘의 사도 성 베드로, 성 바오로, 대성당을 비롯한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영원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구원의 진리를 노래하고 있다.
네로 황제의 박해의 불길과 칼날이 난무하던 격동기에, 이렇게 로마의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의 설교로 창립되고, 두 분 사도들의 순교의 피로 축성되었다. 앞으로 어떠한 전란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교회, 한국천주교회는 더욱더 굳세고 바르게 급성장할 것이다. 위기 속에서 용기를 내고, 희망의 기도와 성가를 바치자! -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단체도, 나라도, 민족도,진솔하게 회심해야 한다. 이 회개의 길만이
천벌을 피하는 확실한 길이다.
“이 독사의 족속(族屬)들아, 닥쳐 올 天罰을 피하라고, 도대체 누가 너희들에게 일러주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Mt.3장 10절- -Msgr. Byon. 입력 : 2021.03.23 오전 5:27:30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교구설정문과 동시에 새로 임명된 초대 조선교구장 소주교(Brughiere)에게 보내신 서간문. 이 서간문에서 교황은 성직자없이 평신도들이 간청하는 애절한 처지를 밝히시면서, 그동안 교회는 조선교우들이 순교하는 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함을 직무유기로 언급할 정도였으며, 전 세계 모든 교구설정은 기존 교구장의 추천이나 동의가 전제되는데, 조선교구 설정은 평신도들의 간청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경우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조선교구 설정 교서 발표와 동시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Bartholomaeo Brugueire) 蘇 주교에게 보내신 친서>
<2023년 8월 6일 PM.17:30 in ending the Holy Mass in Lisbon after pilgrim in Fatima of Portugal>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15세 전후와 20세 초반의 영세 전 젊은 한국인 예비신자 선비들에 의해서, 당시, '천학'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진리 탐구의 자발적인 강학으로 시작되었읍니다.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St. Antonio Daveluy 주교의'조선 순교자 비망록'(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과, 영국 주일대사관에서 20여년 이상 기거하며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조선 문화사를 연구하던 영국황실 소속의 William H. Longford 교수의 '[조선 문화사](The Story of Korea)'에서 비교적 간결히 잘 기록하고 있읍니다마는, 국내외의 공식 문헌에서도 이를 밝히고 있읍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777년 부터 진리 탐구에 집중하던 10대 중반~20대 초반의천학 동호인회(Coterie) 젊은이들이엄동설한에 심산궁곡 천진암 부근의 이벽독서처에 모여, 각자 앞에 촛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우며, 처음 10 여일간 강학하던 이 소년들의 모임의 중심적인 주인공 이벽은 1783년 이 모임과 자신의 대리자(Delegate)를 북경에 보낼 때까지, 약 13 년정도 천주교 교리 탐구와 실천에 전념하며, 이른 바, 천진암의[이벽 독서처 강학]에서 출발하였읍니다.
사실 한국천주교회가 외국의 선교사들 없이,국내에서 한국인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최초로 알리는 문헌은 바로,위의 黃嗣永 帛書다. 하느님의 종 순교자알렉시오 황사영 진사의 백서 후미 위 문장으로, 북경과 한양, Macau와 Lisbon과 Paris, 또, Roma에까지 선교사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한국 선교지 현장의 이 소식이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교황청 Propaganda Fidei 까지 놀라게 하였고, 바로 훗날 교황 Gregorius XVI 세가 된, 일찌기 포교성성 장관이었던 Capellari 대주교와 포교성 직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고 있다.
<교황님,[2027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 서울서 합니다. - 2027 WYD SEOUL COREA>
2023년 8월 6일, 파티마 성지 참배 순례 후, 교황님은 리스본 대미사 후에 다음 번 [세계 젊은이의 날]은 한국 서울서 한다고 선포하셨읍니다. [하늘과 땅도 화답례 하듯, 광난의 태풍 카-눈 (Typhoon Kahnoon)이 갑자기 상륙하여, 아산만 새만금 쟴보리 광장에서 열리던 [세계 청소년 잼보리 대회]가 갑작스런 기후급변으로 진행이 극난하게 되도록 만들었으나, 바로 뒤이어서, 그래도 하늘은 우리가 난생 처음 보는 너무나 황홀하고 장중한 쌍겹 무지개가 한강 상류의, 양여지간에, 양안 하늘을 채우며 신비롭게 출현하여 [하늘과 땅도 화답례 하듯 !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just like for blessing !
Holy Father, The Pope Francise proclaimed, [2027 World Youth Day in Seoul of Corea],
<2023년 8월 6일 PM. 17:30 at the end after the last Solemn Holy Mass in Lisbon of Portugal>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and praying for 3 days after,[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on the sky of the eastern part area 50 km upper stream far
from Seoul of Han River], <2023년 8월 9일 PM.19:20 in upper stream of Han River Seoul Corea>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praying, and for 3 days after,
<2023년 8월 9일, PM. 19:20 in Seoul of Han River> ! <2023년 8월 9일, 오후 7시 20분>
2023년 8월 6일,Fatima 성지 순례 참배 후 Lisbon에 오셔서 대미사 봉헌 끝에,[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은,대한민국 서울서 한다고 발표하셨습니다. [하늘과 땅도 화답례 하듯, 광난의 태풍 카-눈(Typhoon Kahnoon)이 갑자기 상륙하여, 아산만 새만금 쟴보리 대 광장에서 진행중이던 세계 잼보리 대회가 기후급변으로 진행 계속이 불가능한 조치 직후였으나, 한국천주교회는 교황님의선포를 받고, 존경과 감사를 다하며, 은총을 받들어 모시며, 굳세고 바르고 용감히 즉시[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을,대한민국 서울에서 준비하라는 교황님의 말씀에 모든 교우들이 마음과 뜻을 합하여 우리 모두가 난생 처음보는 너무나 황홀하고 장중한 쌍겹 무지개가 한강 상류의 양여지간에, 양안 하늘을 채우며 신비롭게 떠서 우리를 격려하는 천상의 목소릴 듣게 하는듯, 하늘과 땅이 화답례 하듯, 이미 [2027 세계 젊은이의 날] 서울 대회 준비를 마음으로는 전국 신자들이 이미 힘차게 시작하면서, 현 교황님의 한국 첫 방문 때 우선 먼저 방문 당일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기억 지킴이-Memory Guard]주제의 강론 교훈을 따라, 250여 년 전 당시 10대 전후반의 우리나라 젊은 선비들의 자발적인 한국천주교회 창립정신과 불같이 뜨거운 그 신앙의 순교 열성을 계승하며 완성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
[어린이 날]에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관심과 애정을 다합니다. 또한 [어버이 날]에 우리는 아무리 돈이 궁해도 어른들 가슴에 꽃 한 송이라도 달아드리며 하루만이라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마음을 다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세계 천주교회가 제정하여 교황께서 선포하시는 [2027년세계 젊은이의 날]을, 한국 서울에서 한다는 이 거룩한 [2027년세계 젊은이의 날]에 우리는 교황님의 말씀 명심하고, 역사가 숨쉬며 살아나는 계기가 되게 해야만 하겠습니다.
250여 년 전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을 실천하여,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세운 10대 전후의 우리 선조 청소년들의,[우리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을 기억하라] (Memory Guard)는 현 교황 성하께서 처음 한국을 방문하시면서, 강조하시며, 첫 방한 당일부터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첫 강론으로, 주교님들 뿐 아니라 전국 모든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세례성사를 받기 전의 12사도들과 성모 마리아, 등 사도시대 신자들처럼,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 신자들은,성사생활 하기 전부터 천주교를 신앙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읍니다.천주교회는 천주교신자들의 단체이며,세례를 받아야 천주교 신자가 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사실은 천주교 신앙인,즉 신자라야 세례를 받는데(망부활 부활찬송), 12사도들과 성모 마리아가 세례성사 받았다는 기록은 없읍니다.
특히, 우리 모두가 명심할 것은 오는 [2027 세계 젊은이의 날]을 준비하면서, 지난 250 여년전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은 15세 전후의 소년들로부터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서,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천주교 신자가 1명도 없었고, 성당 하나도 없었으며, 성직자도, 수도자도, 어떤 선교사도 전혀 없던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진리 탐구의 강학을 계기로, 심산궁곡에서 천주공경가와십계명가를 지어서 부르고,달력의 양력과 요일이 전해지지 않아 아직 음력만 알고 쓰며 살던 그 시절,음력으로 매월 첫 7일, 14일, 21일, 28일을 천주공경하는 천주의 날로 정하여, 주일을 만들어 지키며, 힘든 일을 피하고 쉬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천주님만을 찾고자 신앙을 실천하던 우리 [선조 젊은이들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자, 광암 이벽은 자신의 대리자(delegate)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에 파견하여 세례도 받고 귀국하였음을 격찬하시는 현 교황님의 말씀에 감사드리며, 명심하고, 기억하면서, Memory Guard를실천하도록 합시다.
한국 천주교회를 출발시킨 젊은 창립선조들은 아마 당시 50여세 전후의 대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주교 신앙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잘못 짐작하고 있는 오늘의 지성인들이 허다하나, 사실은 당시 모두 10대 후반의[젊은이들]이 하는 새 종교를 막지 않고, 극소수 한두명 부모 벌 되는 어른들의 심려와 우려에도 불고하고, 주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인공들]이었으니, 이 젊은이들이 대내외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힘입어,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기적적으로 창립되었읍니다.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으로 순교하신성 Antoine Daveluy 주교가 그의 [한국 순교자 비망록]에서 밝히는 바를 소개하면, 천진암 계곡의 이벽 독서처에서 첫 강학 모임이 시작되던 정유년(1777년), 당시, 중심적인 주동 중심인물 이벽은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권상문 22세, 이총억 13세,등이었는데, 모두 그 당시 조혼 관습으로 이미 11세 전후에 결혼하였거나 양반가에서 크게 약혼한 젊은 신랑 선비들이었습니다.
10대 후반~20대 초반의 갖 결혼하였거나 거창하게 약혼한 양반집 젊은 선비 신랑들이,엄동설한에 모두 자발적으로 평균 서울서부터 주로100 여리씩 되는 눈길 산고개와 얼음 강 위를 걸어서, 심산 궁곡에서,불교 암자의 불상을 모신 대웅전이나 스님들이 거하시는 같은 한 방에서 새로운 도를 닦으면서 찾기 시작하며 심신을 연마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숙식하며 강학을 며칠씩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니, 다만 학자다운 선비들 한 둘이 거하며 책 속에 파묻혀서 촛불 아래 밤을 지새우며 과거준비나 강학대비 글을 읽던, 이벽 독서처 같은 별동 가옥을 사용하며 10여일 간씩이나 강학회를 하였다고 볼 수 있는 각종 문헌 기록을 보면, 李檗讀書猶有處라는 훗날의 문장에서도 보듯이, 이 모임에 함께했다는 정약용 형제들의 기록은 비교적 매우 구체적이며 상세한 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기록들을 차분히 읽으면, 마치 베들레헴 주막거리 주막집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시작하셨던, 매우 청빈낙도한 성가정 식구들이 거룩히 기도하며 매우 소박하게 살아가던 성가정 생활의 한 단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탐구에 굶주린 이 젊은 한국인들이 성현군자들이 아니라면 사실 누가 시성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누를 수가 없으니,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오늘의 한국천주교회는 저 위대한 젊은이들을 뿌리와 줄기와 가지로 삼아잎을 내고, 꽃을 피워, 마침내 보기 드문 열매까지 맺게 한 열매들입니다. 우리나라 한국 젊은이들은 천주께로부터 부여하시는 선천적인(apriori) 자질도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천주교회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전의 삼국시대 초기에, 특히, 신라 때 불교에 처음으로 접하던 18세에 입문한 이차돈 대선사는 입교 후 3년을 전후한, 21세(?) 경에, 신라에서 불교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자원치명으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차돈 대선사는 운명 전 자신의 말대로, 칼에 목이 떨어지자 목에서는 젖빛 백혈이 높히 솟구쳤다고 전하며, 또한 훗날 그 시대 신라의 17세 소년 혜초는 당시 위험한 적국 고구려와 당나라를 거처 흔히 '서천축국'이라고 부르며 말로만 듣던 동인도부터 시작하여, 남인도,서인도,북인도,인도 중앙지역, 등 5개 인도국과 중앙 아시아의 여러나라를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게 처음으로 순례하고나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습니다. 인도의 중앙과 동서남북 5개 인도국 전역을 10여 년간 천신만고를 다 겪으며 순례하면서 쓴,[왕오천축국전]은 당시 젊은 한국 순례승이 기록한 인류 역사상 보기드문 최상의 보배로운 수도순례 기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의 대 학자로 파한집에까지 많은 명문장을 남긴, 당시로서는유교, 불교, 도교에 매우 드물게 박학다식하였던 젊은최치원이 12세의 젊다기보다 어린 나이에(결혼 직후?) 망망대해 서해를 건너 남송 지역(?)의 당나라를 거쳐 유학하여, 거기서 10 여년 유학한 후, 그곳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지방 고위 관직을 받아 근무하다가 24세에는 모국 신라로 귀국하여, 신라 조정에서 임금을 보필하며 당나라에 보내던 임금명의로 된 국서도 집필하여 오늘날까지 양국 역사서에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교구 설정의 주역이었던 젊은 정하상 회장의 제자들로서, 15세의 김대건 안드레아와 14세의 최과출 방지거와15세의 최양업 토마는 1836년 한양에서 의주와 북경을 거쳐 마카오까지, 엄동 설한에 스승 정하상 회장과 여항덕 중국인 신부와 함께,1836년 말,12월 6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6개월 후 다음 해 6월 6일에 마카오에까지 걸어서 갔으니,거의2만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간 우리 어린이들은, 급기야 마카오 토착병 말라리아에 걸려, 함께 간 나이 어린 동료 최과출 방지거가 말라리아로 병사하는 고통과 충격을 받은,김대건과 최양업 두 소년들은 굳세게 공부하여,10 여년 후 사제가 되어 귀국하고 엄청난 전도활동을 하였으니, 일일히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운, [한국 젊은이들]이 이룩한 국가와 민족과 종교를 위한 놀라운 위업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본보기로 인류의 귀감]이 아닐 수 없으며. 바로 오늘의 [전세계 젊은이들의 본보기]가 되는, 자랑스러운 바로 [한국의 젊은이들]입니다.
오는 [2027 세계 젊은이의 날]한국을 찾는 전 세계 젊은이들은 한국에 와서, 반듯이 만나 보고 가야 할 전 세계 젊은이들의 선배들이오, 스승들이며, 거울이고, 교과서적인 한국젊은이들이 있으니,한국의 이 젊은이들을 만나보지 않고, 어디 다른데 가서 무엇을 먹고 마시며 누구를 만나보고 구경이나 하다가 각자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실로 역사적인 대축제의모범적 기원이 되는,10 여 일 간의 자발적인 엄동설한 앵자산의 촛불 아래 추운 밤을 지새우던 우리 젊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신랑 선비들]은 자신들이 시작하여 10여 년 이상 지속하며 실천한 새로운 종교,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신들의 대리자(Delegate) 이승훈 진사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여 세례를 받고 귀국하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천진암 산골 이벽 독서처의 촛불강학의 의미와 가치와 교훈을,전 세계에서 이번에 한국에 모이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알게 하고, 배우게 하고, 본받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세계 모든 젊은이들이 개인과 가정과 마을과 나라와 세계 안에서 매사에 천주를 찾는 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진암 강학이라고 흔히 부르는 앵자산의 [이벽 독서처 강학]은 1784년 봄, 광암 공의 천학 독서처가 천진암 계곡에서 우선 서울 수표동 자택으로, 몇달 후,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으로, 재차, 또, 제3차 옮길 때까지, 광암 공이 1770년 약 15세 경에 입산한 산골에서 한양과 마재와 포천으로 출타하는 길목 마재로 출가한 누님댁 강건너 두미에 향저를 마련하고 거치며,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은 [독서처]가 기록상으로도 천진암 계곡에 있었습니다.<1797년정사년,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 2분 형님들과 천진암에 와보니,[이벽의 독서처]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 !>
그 후, 이승훈 진사의 북경파견이 성공을 거두자 수도 서울로 이전하여 전국 8도를 대상으로 포교활동 계획을 세우던 우리선조 [한국의 위대한 젊은 신앙인들]의 발걸음에 내리시는 주님의 풍성한 축복의 첫 걸음으로, 1785년 을사년 봄에,성직자 없이, 목자 없이 갖 태어난 평신도 교회가, 한국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을사년 박해]를 목자없이 당하고 견디며,가정을 이용하고, 문중을 악용하며, 장안 선비 사회의 우정과 이웃을 선동하는, 정권이 총 동원된 사회 다방면에서 총체적으로 전력 집중하던 박해를 맞았으나, 이를 용감한 우리 [한국의 젊은 순교선조들]은 신앙의 젊은 피를 뿌리며 극복하고,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남아, 우리 한국의 위대한 젊은 신앙인들은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주인공으로서 뿐 아니라, 내일의 세계 천주교회를 지키고, 아끼며, 키우는, 천상천하의 선조들과 후손들과 함께,주님 앞에서 거룩히 발전시키도록, 엄숙히 기약하고 있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 Msgr.Peter Byon of Corea-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just like for blessing !
Holy Father, The Pope Francise proclaimed,
[2027 World Youth Day in Seoul of Corea]<2023년 8월 6일 PM. 17:30 at the end after the last Solemn Holy Mass in Lisbon of Portugal>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praying and for 3 days after,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on the sky of the eastern part area 50 km upper stream far from Seoul of Han River],
<2023년 8월 6일 PM. 17:30 in Fatima of Portugal>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praying and for 3 days after, <2023년 8월 9일, PM. 19:20 in Seoul of Han River> ! 2023년 8월 9일, 오후 7시 20분/-사진은 변기영몬시뇰사랑방홈페이지 [우리겨레가 나아갈 길] 269번 참조-한국천주교회창립사 관계 문헌 용어 이해 위한 참고 주해 -<무지개 사진 촬영 고옥자, 허관순>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nous en avons la suite à vue de clocher, et nous pensons que les lacunes ne seront jamais comblées, toutefois si on veut continuer les recherches, peu à peu on gagnera quelque chose. Il n'y a plus qu'à puiser dans les manuscrits qu'ont certain nombre de grandes maisons et surtout dans les archives des tribunaux criminels.
조선 천주교회 창립의 진정한 역사는 [이벽의 강학]으로 시작되었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Tieng Jean, dit iak-iong, dit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s 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정약용 요한은 말하기를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는 이벽의 강학 200여년 전에 이미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고 하였다. 즉, 임진왜란 때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군종신부가 왜병들과 함께 남해안 진주성에 들어와 곰내(웅천)에 주둔하던 왜병 부대 안에 거주하며 약 6개월 가량 성사를 거행한 소식을 전해들은 이야기로 보인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à la Religion dans le royaume de Corée fut Ni Pieki appelé Tektso et surnommé par lui-même Koang am.
천주께서 조선왕국에 천주교를 알려주기 위하여, 마치 [새 벽시계의 시계추]를 맨 처음 좌우로 흔들어 시계를 움직이게 하려고, [최초로 선택한 천주님의 도구]는 경주이씨 가문의 [덕조 이벽]이라는 인물로, 스스로 지은 자신의 호는 [광암]이라고 하였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s Kieng Tsiou et parmi ses ancêtres qui étaient déjà dans les dignités sous la dynastie Korie on comptait plusieurs membres distingués dans les lettres et par les dignités civiles qu'ils avaient obtenues.
(이벽은 경주이씨 가문의 후예로서, 그 집안에는 저명한 인물들과 고관대작들이 많았다.(예,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온 서장관 이경상, 그 앞에는 이정형, 및 임진왜란 시기 오성과 한음, 등.,,)
天眞菴記(端午日陪二兄游, 副護軍 丁若鏞, 1797년)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정약용 승지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극심하던 정사년 봄(1797년), 정조는 정약용 승지를 당분간 황해도 곡산군 부군수 급으로 좌천시키자, 떠나기 전 정약용은 이른 새벽 서울을 떠나, 먼저 연락해 놓은 고향 마재에 와서 2 형, 정약전과 정약종과 함께, 노젖는 작은 배로 마재 앞강의 쪽풀섬에 가서, 때마침 산란기를 맞은 큰 암잉어들이 강가로 나오는 것을 긴 나무가지로 때려서 그물로 몰기도 하여 150여 마리나 아주 많이 잡아, 섬에서 여럿이 천렵국을 끓여 점심을 먹은 후, 형들과 모두 뜻이 같아, 천진암에나 가기로 하고 떠나서, 귀여리 골짜기로 들어가 고개길을 넘어, 퇴촌의 화랑방 주막거리에 들려, 술을 한두병 더 사가지고, 천진암에 오니 해가 뉘였 뉘였 넘어가고 있었다. 천진암에는 광암 공이 머물던 이벽 독서처가 아직 그대로 있었으나, 광암 공의 흔적은 사라져 없는데, 10여년 전 광암 공의 풍류와 문채는 신비로운 경지에 이르렀었지 ! 20 여수의 시를 더 지으며, 3일을 더 묵은 후 돌아왔다.
(闢衛編, 李基慶, 1801) - 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也共知也(사특한 천주교에 맨 처음 빠진 [이벽은, 조선 천주교의 최초 1세 시조]라는 것을 만인이 모두 다 알고 있지 않는가 !? 벽위편의 이 기록은 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나온다)
(朝鮮王朝實錄, 1801) - 被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招狼…. 若論邪黨之渠魁則李檗…(저 이벽이란 자는 이 사특한 무리 중의 가장 큰 괴수이며, 다른 예하 두목들 중 으뜸이며, 조선 천주교의 시조 1세다)
(墓誌銘, 丁若鏞, 1816) -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權哲身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潄, 誦夙夜箴, 日出誦敬齊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强,,,權日身嘗從李檗, 李檗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일찌기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할 때, 주어사는 설중인데도 불고하고 이벽이 밤에 와서,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는데, 그 후, 일찌기 한 때나마 잠시 권철신이 우거하였으며, 강학에 모인 사람들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몇이었으며, 녹암 공이 직접 규칙을 만들어 주어, 새벽이면 일어나 빙천으로 세수하고나서 숙야잠을 외우고, 해솟으면, 경제잠을, 정오가 되면, 사물잠을, 해가 지면 서명을 외웠다. 모두가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임하였다.)
(天眞消搖集,丁若鏞, 1827) - 天眞菴, 余蓋三十年重到也, 石徑細如線, 昔我童時游, 豪士昔講讀, 暗泉劣一線, 重來愴客心, 入山非喜佛, 寅緣慙講德, 書帙見隨陰, 禪燈廢少林, 尙書此燒鍊, 寺破無舊觀, 芬芳旣沈歇, 禪房無處舊人求, 前躅凄迷不可求, 樓前寮舍半墟丘, 粥鼓斜陽念舊游, 三十年來重到客, 猶然苦海一孤舟, 我欲來此住, 無人示方便(1827년). 정해년에 지나간 정사년(1797년) 이후,30년만에 천진암에 와서 보니, ,돌무더기 길을 거쳐 천진암에 오르는 길은 가느다란 실같은 오솔길인데, 일찌기 내가 어려서 아이 때 놀던 길이다. 호걸다운 선비들은 여기서 강독하고 독서하였었지 ! 그런데 땅속으로 숨어나오는 샘물은 한줄기 물줄기를 이루고 졸졸 흐르는데, 오랜 만에 찾아온 객의 마음만 서글프게 하는구나 ! 昔我童時游, 여기서, 정약용 승지가,"童時" 라고 말하는데, 그 당시 10세 미만은 童時(아이 때)라고 말하고, 11세부터는 [소년]이라고 부르며, 장가를 들게 하고,15세 이상은 호패를 차게 하기도 하였다.이 시문을 보면 정약용 승지는 10세 미만, 즉, 7세, 8세 때부터 자신의 형 약종과 약전 등과 함께 광암 공이 가르치는 이벽 독서처에 자주 놀러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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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산한 것은 부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 함이 아니니, 지금 우리는 새벽부터 덕닦는 주문을 외웠으며(조과?), 산그늘 내려오면 책을 펴기 시작하고 읽으니(만과?), 참선하던 등불을 꺼서, 젊은 열사들을 막았나보다, 상서는 여기서 약을 다려 환을 만들고, 절은 다 무너져 옛 모습 없어졌구나.,, 저 쪽 선방 터에서 참선하던 벗들은 다 사라져서, 이 세상 어디를 간들 그런 훌륭하던 옛 벗들을 구해 올 수 있으랴? 그 옛날 소시적 우리의 학업과 수도의 삶은 아련한 옛 일이라 다시는 그 생활 또 해볼 수 없네 그려! 누각 앞에 있던 객사도 반이나 무너져버렸구나! 그 시절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에 해질력에 같이놀던 옛 동무 그리워지네 ! 30년만에 다시 찾아온 이 나그네는, 그 때나 지금이나 괴로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조각 배의 신세로구나 ! 아주 여기 와서 머물고 싶은 맘이야 간절하지만, 오고 가고 머무는 일을 챙기며 보살펴줄 사람이 보이지 않네 !
(무술년-1778- 기해년-1779-에 광암 이벽은 주유 천하하다가 광주 땅에 이르러, 원앙산사(앵자산 천진암)에 은거하시니, 정씨 이씨네들과 현우현사들과 더불어 학문에 힘썼으며, 천문, 지리, 의학, 달력, 수학, 기하, 신교의 가르침(천주교) 등과, 또, 기묘한 학문에도 박학다식하여, 도를 닦는 벗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들어, 웃어른으로 모시며, 총림을 이루자 공이 [성교요지]를 하필하여 받아쓰게 하시였다.)
(丁學淵, 1850) - 天眞山 寺之遊, 等….
(정약용 승지 문도공의 아들 정학연이, 천진산에 있는 절에 모여, 절놀이라도 하고자하는 알림 서한문이 강진지역에 발견되어 여기 소개한다.)
(Lettre du P. Maubant, 1838) - Il (Ni-Pieki)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YiSeung-Huni),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이벽은 천주교라는 새 종교를 진심으로 품에 모시고, 몇몇 새 입교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자신을 [대리-Delegate]하는 대표자를 1783년에 북경에 보내어, 1984년 2월에 프랑스인 파리외방전교회원 신부 한테서 베드로 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게 하였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C'était en l'année 1777(tie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é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r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Une arrivée si étrange ré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L'histoire proprement dité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érences de Ni Pieki.” -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이 조선 천주교회의 출발이었다.
(Compend. Histr. Pulo-Pinang, 1881) - In illo tempore, non 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erant in solitudinem…. inter eos eminebant Ni-Tek-Tso, cognominatus Pieki, Kuen-Tsiel-Sin-i, Tieng-Jak-Tsien et Tieng Jak Iong….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동남아 지역, 마카오, 홍콩,대만, 등의 천주교 신학교에서는 이미 1801년 신유박해 후로, 조선 천주교회 창립사를 사실대로 전해 듣고, 신학교 교회역사 교과서에 증보판으로 첨가하여 가르치고 있었으니, 광암 이벽이라는 출중한 선비가 양반층의 젊은이들을 모아,천주교 교리 탐구 동호인회Coterie)를 만들어 교회를 시작하였음을 전하고 있었다.-동남아지역 천주교신학교 교회역사교과서)
Story of Korea (Joseph H. Longford, 1911) - In 1720…. The Korean Ambassador in Peking…. For fifty years(1770) after their importation of the books. Then they were studied and debated by a small coterie of noble Koreans. For thirteen years he pondered over them…. At last, in 1783, Pieki…. to go on in Peking…. to confer with the priests…. and learn the ceremonies of their religion.
조선사신으로 북경에 갔던 이이명이 서양책들을 많이 사가지고 1720년에 귀국하여 국내에 전파하고 50여년간 1770년경까지 경기 광주 지역과 호남 전주 지역에서도 젊은 학동들이 천주교를 알고 실천하게 하였다고 전하나,적어도, 13년 후, 즉 1783년에는 이벽 독서처의 젊은 양반 동호인들 스승 이벽이 자신의 대리자(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를 북경에 보내어 영세하고 오게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黃嗣永 帛書 - 主恩之於東國,可謂廻越尋常,初未嘗有傳敎者來,而主特擧斯道,而親舁之繼,又以授聖事者預之,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忍死延生,(주은지어동국,가위회월심상,초미상유전교자래,이주특거사도,이친여지계,우이수성사자예지,종종특은지불승굴,죄인 등, 이차자위이위인,인사연생,,) - 순교자 황사영 진사는 백서 후미에서, 조선천주교회는 주님의 특은으로,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같은 예를 볼 수 없는, 선교사의 발자국이 나기 전에, 주님 친히 이 천주교를 드높히 보이시고 가르쳐주시어,성사를 줄 성직자까지 미리 안배하여 마련하시었으니, 그 모든 은혜 일일히 세기에는 열손가락도 모자랍니다.(1801) 黃嗣永 帛書
李德懋(1741~1793)와 羅東善의 광암 이벽 言及-1778년 戊戌年 11월 26일, 李德懋(1741~1793)의 言及, 李德懋言 近日京中 以西學數理專門者 徐命膚及子浩修 而又有李檗 卽武人格之弟也 廢擧不出 偉人高潔 方居紵洞 又有鄭厚祚 卽文官喆祚之弟也 專意於天下輿圖之學 嘗言 大淸一統志輿圖固精 而猶不如大淸會典所載者云(頤齊亂藁) 27책 戊戌 1778, 정조 2년, 十一月 二十六日壬子 - 정조와 함께 인재를 찾던 이덕무 등 북학파의 지도자들이, 이벽의 인품과 자격과 천재적 학식을 듣고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1785년 을사년 박해로 광암공이 집안에 감금되어, 달포이상 갖은 시련을 당하여 극복한 후에 최종적으로, 10여일간의 아사벌을 받고나서 계속된 음독사벌을 받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최후의 질식사벌로 순교하신 후였다.
黃胤錫의 질문에 羅東善의 대답, 1786년 丙午年 5월 5일-
余問 羅君曰 今世都氏 亦有聽明特達之士乎 曰有李蘗者 月川君廷馣之後 兵史鐽之子格之兄也 看苦十行俱下繙閱如飛 目能一上視一下視 一左視一右視 甓骨不雙 而單能三次回斡 能上跳二丈 平生酷好西洋之天主實義 爲一時其徒之冠 年三十而夭 近年上命西洋文學 自律曆數學三種以外 其爲天主實義之學者 自刑曹聚其書焚之 嚴禁中外 李君時入桂坊別薦 上疏自列天主之說云(頤齊亂藁)38책 병오(1786, 正祖 10), 5월5일 丁未. 광암 이벽의 형제들, 이격과 이석도 모두 20대 초반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벽은 아버지 명도 거스르며, 무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나, 이벽의 무술은 초인적 수준으로, 길을 가다가 훌쩍 공중으로 뛰어 공중에서 두세바퀴 돌아서 사뿐히 지상에 내려 서기도 하고, 장정 한두명의 키를 뛰어 넘기도 하며, 독서역시 한눈으로는 윗칸 글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눈으로는 아랫칸 글들을 읽고, 한쪽 눈으로는 한쪽 글을 읽고, 다른 쪽 눈으로는 동시에 다른 쪽 글을 읽는 초인적인 재주를 가졌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무술실력을 알게 하는 글은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서종태 박사의 발굴 공헌이다.
-Msgr. Byon
<醒言> 백두산의 緯度-成大中과 徐命膺이 이벽의 白頭山 北極高度(=緯度) 언급 기록-北極出地 漢陽則三十七度十五分 滑原則四十度五十一分 舊聞諸李檗 白頭山則四十二度强 徐奉朝賀命膺云<靑城雜記> 권5.북극고도가 한양은 37도15분이 지나가고, 백두산은 42도가 좀 넘는다는 이야기를 이벽한테서 들었다고 서명준, 서봉조한테서 들었노라고 하니, 이벽선생은 당시에 벌써 천문학, 지리학을 지금의 우리보다 더 알고 있었다.
….
여타생략 ,,,.
입력 : 2024.08.24 오전 9: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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