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85세(1940년생) 생일 (Anniversary 85 birth day),
사제서품 53주년(1971년) (Priest ordination of 53 years),
감사미사 곡수공소 성당에서 봉헌 !2024. 31,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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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85세 변기영 몬시뇰 생일(1940년생)이 사제서품 53주년(1971년)과 겹치는 날입니다. 어려서는 시골서는 음력으로 생일을 기억하여, 평소에 주로 많이 먹던 보리밥이 아닌 힌 쌀밥을 엄마가 해주셨었는데, 7월 윤달이 들었던 서품식 하던 해는,생일 다음날 신품을 받았읍니다. 그래서 양력으로 8월 27일 서품일 하루 전날이 공교롭게도 음력으로 생일이어서, 신학생 때부터 생일과 서품일을 양력으로 통일하고, 또 직장에 나가야 하는 조카들과 학생들이 쉽게 내가 있는 이 시골까지 올 수 있게, 매년 8월 마지막 토요일을 서품기념일 겸 생일로 정하였으나, 은퇴 전까지는 이나마도 내가 기피하며 모이지 못하게 하여 아예 없었는데, 이제는 집안 어른들, 어머님과 형님들, 누님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못난이 이 막내가 최고령자가 되었읍니다. 조카들과 가족들이 찾아오면 반갑고 고맙지만, 이젠 나도 늙어서 만사가 모두 귀찮아, 금년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전처럼 아무런 연락이나 알림도 모임도 없이, 모두가 자유로이 오면 오고, 안 오면 안 오게 하면서, 그대로 지나게 하려고 합니다. 매일 살기 바쁜 조카들도 보다 완전한 자유로 오게 하고자 !<2024.08.31.오전11시, 미사와 다과하는 이하 사진들은 모두 허관순 세라피나 편찬실장이 모든 사진을 거의 다 혼자 촬영하느라, 본인 사진은 안보이고, 맛있는 것도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이 없었답니다.>
FR0M CONVERSATION WITH GOD, THEN, INTO CONVERSION WITHIN GOD !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alla conversione in Dio,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
Bisogna per noi, per l'unire con Dio,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poco a poco , alla conversione in Dio, e poi, finalmente, come il grande Teologo
Maestro S. Tomaso d'Acqino aveva parlato degia,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nella sua Summa Teologia ! Msgr. Peter Byon in Corea
변기영 몬시뇰 85세(1940년생) 생일 겸 사제서품 만 53주년(1971년) 되는 날,
최소한의, 그러나 정성껏 감사미사는 양평 곡수공소 성당에서 봉헌하였읍니다.
(2024.08.31. 오전 11시).
용인 시골 촌뜨기 가난한 집의 무식한 소년이 천주교의 거룩한 사제가 되도록, 또, 용감한 사제로 살아가도록, 늘 기도와 정성으로 함께 해 주시며 고생만 하시다가 이미 벌써 저 세상으로 가신, 제 사제성소 육성의 최대 주인공이신 잊지 못할 어머님은 생전에 매일 묵주신공 15단씩 3 회나, 그러니까 매일 밤 낮으로 틈만 있으며 하루에 모두 45단씩을 바치셨었읍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과 국내외 은인들을 위하여, 또, 이 험난하고 살벌한 현세에서 지금도 저와 함께 항상 주님이 쓰고 가신 주님의 피 묻은 가시관을 함께 교대로 같이 함께 쓰고, 주님이 지고 가시던 주님의 피에 젖고 주님의 살점이 말라 붙은 십자가를 함께 같이 지고 가며,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시던 말씀, [뒤는 돌아다보지 말고, 좌우로 한눈도 팔지 말고, 앞만 보고, 위만 쳐다보며, 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하한주 신부님의 시조 명구처럼, [너희들도 모두 어쩌면 나를 닮았구나 !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과만하겠기 때문입니다. 하시며, 뒤에서 밀고, 옆에서 붙들어주며, 앞에서 이끌어준, 먼저 가신 신앙의 모든 선후배, 특히 신부님들, 더우기, 저를 끔찌기 사랑해주시던 김효신 마지아 용인 본당 신부님,,,!
더우기, 시골에서는 더 어렵던 그 시절, 내가 여섯살 때 1945년 대동아 전쟁 말기와 해방 전후와, 그리고, 내가 열한살 때 일어난 1950년 6.25 난리 통에도, 압고지 본당(포곡면 전대리)과, 숨은 마을이라 부르던 은이본당(현재 양지본당)과, 그리고, 1951년 1.4 후퇴 이후, 서울서 조인환 신부님이 오셔서 건립한 용인본당, 등, 3개 본당 설립의 중심적인 평신도 주인공으로서, 늘 초대 총회장을 10 여년 이상씩 역임하였고, 지금은 대부분 다 본당들로 승격됐지만, 용인군 내의 12개 면의 천주교 신자부재의 17개 미신자 마을에 처음 전교하여, 천주교 공소를 설정하며, 3개 본당 총회장만 10여년 이상씩 차례로 50 여년을 맡아 수행한 포곡면 도사리 공소 권형규 요셉 회장님과 그 많은 대자들과, 열교촌 출신의 신문교우 소년 필자를 사랑하며, 동반동행 하시던, 이제는 모두 천국에 가신 회장님들과 여러 모든 교우님들을 기억하며 이 감사의 미사를 올립니다.!
전 세계 평신도들의 모범이오, 교과서 내용이 되는 우리 용인 지역 평신도들의 장래 있을, 반드시 있어야 할 시복, 시성 추진과 한 조각 돌을 세워 기념하지 못하고 필을 놓아야 하는 한을 품고 가는 낡은 변 몬시뇰이,,,!!!
특히, 이미 천국으로 먼저 가신 성인다운 선인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 사레지오 수도회의 초창기 Don Martelli, S.D.B. 원장신부님과 더우기, 특히, Don Victor Miller, S.D.B., 수련장신부님은 1961년 당시 21세로 국민학교 졸업 학력 밖에 없던 나를 살레시오수도회 지원자로, 또 수련자로 받았고, 6.25사변 후부터 당시 문교부 임시행정 조치대로 직원들의 지시따라, 사립고등학교는 교감과 과목별 교사들 (당시 광주 살레시오 중.고는 서울 동성학교 출신의 동창(?)으로 마산 주교로 가신 대구교구 김수환신부와, 서울교구 라상조 신부 동창(?), 등의 추천으로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전국에 서울, 부산 대구, 등에 몇 안되는 한 두 곳 중.고등학교 뿐일 때, 손금만 선생이 전남 광주의 신설 사레지오고등학교 교감으로 추천 채용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었읍니다.
당시 이태리 출신 전남 사레지오 학교 창설자 마르텔리 신부님은 한국어보다 일본어로 통하는 전국 차원 교계 인사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학교의 중대사를 결정하였었다던 터에, 17명으로 구성된 별도 교무 심사 시험관들도 공동으로 필자 1명까지도 동시에 공개시험하여 채점한 후 내게 살레시오고등학교 2,3학년 1,2학기 말 시험 성적표를 작성, 심사, 인준케 하였다고 후에 들었읍니다. 그래도 당시 한국정부가 인가하지 않은, 전남 광주대교구의 정부 미인가 천주교 대건신학대학의 입학 응시 자격은 받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사레지오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 중 내가 가장 끝 번호를 받아, 붙여 끼어져서, 자랑스러운 [사레지오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러한 관계로 필자는 거기서 수련기 때부터, 한국인 허원 정회원이 일본가서 수련하고 온 박병달 사제지망 회원과 모이세 김성천 수사 2명뿐이었던 당시라, 전남 광주 사레지오 학교 교육재단법인의 한국인 이사직을, 미신자나 평신도 외에 맡을 사람이 없어, 필자가 지원자로 들어간 1961년(?) 경부터, 1968년 1월 수도회에서 나와서, 1971년 8월 수원교구 사제가 된 후에까지도, 꽤 여러 해 동안, 교구청에 2차례나 근무하며 인사 발령을 받아 어수선하던 때, 교육자 이사직 경력에 들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기도 하였읍니다. Deo Gratias !!
그런데 1963 년도 3월, 광주 대건신학대학 건립 당시에는 초대 입학정원 45~50명(?) 모집 선발에, 전국 여러 교구에서 105명(?) 여의 고교졸업생들이,주로 서울 동성.고와 대구교구 왜관 순심.고(?) 출신들과 당시 전남 광주대교구의 살레시오 고등학교 1,2회 졸업 출신들도 14 명이나 응시하였는데, 합격 순위 공개 서면 발표하는 넓고 긴 교무실 외벽 벽보판 발표문에는,1등 성염, 2등 김수복,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3등 변기영 학생의 이름이 약 40 여명 명단 맨 우편 앞에 나왔읍니다. 그날 합격자 발표문을 보러 간 동료들과 필자 본인도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그런데 사레지오 출신 응시자 14명 중엔, 9명의 합격자들도 들어 있어서, 전남 광주 대교구 체면도 어느 정도 세웠으며, 특히, 1등, 2등, 3등이 모두 사레지오 고등학교 출신이라 모두들 놀라워했읍니다. 더우기1등,2등 합격자들은 그 해 사레지오 고등학교 2회 졸업생들이었고, 유별난 3등 합격한 학생은 전남 광주대교구의 신설 사레지오고등학교 출신 1회 졸업생 명단 맨 끝에 매달린 비교적 나이가 많고 영어를 좀 곧 잘 한다고 알려진 변기영 학생이 차지하여, 사레지오회와 광주 대교구의 체면을 살려주었다고 수근거렸읍니다. 비록 당시 대건신학대학이 문교부의 비인가 신학대학이지만 교황청에서는 인준한 신학대학이라서, 정식으로 천주교 사제의 길을 준비하게 하였읍니다.
그리고 비록 문교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대건신학대학 신입생으로서도 합격한 다른 신입생들은 입학 후 바로 1년간의 라틴어 전공 별과로 들어갔으나, 나는 살레시오수도원에서 스페인 출신 Molero, 한국명 모신부님한테 배우며 자습한 라틴어 실력, 주로 자습으로 배웠던 Cicero와 Tacitus, 등의 고전 Latin 문학 실력을 미국인 교수 신부님 한분이 대강 질문 검사한 후, 바로 인정받아, 라틴어 별과 입학을 면제받고, 1년간의 월반 특혜로, 즉시 바로 철학과로 편입학하게 되었읍니다.
그 당시 서울에서 이미 서강대학교를 세우고 교편을 잡고 있던 7명의 미국인 예수회 신부님들이 광주 대건신학대학 설립을 맡아, 한국말을 배우기 전이라서, 철학과 신학 강의는 영어와 라틴어로만 하면서, 강의시간 끝마다 질의와 응답도, 서면과 구두로 영어나 라틴어로, Do you understand what I mean ?, 혹은, Capisne tu quod ego docui quid tibi et vobis dico ? 하는 현대 영어식 라틴어로 반복 질의 응답에 우리 신입생들은 모두가 반벙어리처럼 난감해 하였는데. 그러면 미국인 교수 신부님은 교단에서 내려와서 웃으면서 신학생의 입술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쥐고 흔들면서 Loquere ,domine ! (말 좀 해봐요!) 하기가 일수였고, 그래도, 필자는 이미 사레지오회 수련원에서 살레시오 수도원 동기생 15여명 내외의 수련생들에게 수련장 신부Victor Miller 신부님의 영어로 된 영성강의를 거의 매일 서면으로나 구두로 한시간씩 통역 해설하고 있었던 관계로, 엉터리 영어회화라도 좀 연습할 수 있어서, 나는 큰 어려움없이 당시 문교부의 인가가 안난 대건신학대학에서 논리학과 기초신학을 국제적으로도 저명한 미국인 예수회 교수신부님들로부터 수강하게 되었고, 따라서 미국인 교수 신부님들의 질의와 응답 전후엔 자주, 'excellent' !(아주 잘 한다) 라는 칭찬을 받았읍니다.
당시 우리 신학생들이 존경하던 예수회의 김태관 신부님과 특히 미국 내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여러 대학에서 선발되어 오신 교수 신부님들 중에는 자신이 집필한 논리학 영어 교과서가 미국 내 대부분의 많은 여러 대학에서 정식 논리학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도 다른 교수신부님들한테서 들을 수 있던, 저명한 논리학자 교수신부님도 있었읍니다.
그 후 약 2 개월 뒤에, 1963년 5월 군입대 소집영장이 나왔으나,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우리 대건신학대학생들은 군복무 입영 연기 허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즉시 입영하여 논산 제2훈련소로 입소하고, 6주 훈련을 마치기 전 3회 연속 실시하는 꽤 어려운 영어 시험으로 선발하던 40여명의 특수부대 요원 후보로 뽑혀, 바로 서울 국방부 본부로 와서 근무하다가, 몇달 후 육군본부 본부사령실로 전근되었고, 다시 미 8군 Support Comanding Batalion(?)으로 전근되어, 카투사로 선발되어 오는 후보들에게 군사영어를 1 개월씩 가르치는 군사영어 교관 임무를 약 10여 개월이상 하다가, 군생활 총 32개월 가량을 다 마친 후에 만기 제대하여 수도원으로 돌아왔읍니다.
그런데 1965년 말에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성신대학으로, 새로 입학시험을 보고 들어가라는 수도회 Roma 본부의 명을 받아, 군에서 제대한지 2 주일만에, 전국 여러 교구에서 뽑는 대신학교 신입생 40명 모집에 80여명이 각 본당주임신부의 추천으로 모여 응시한 입학시험에서 14 등 합격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이번에 여기서도 Latin어 별과 1년 전공과정은 면제를 받고, 1년간 월반 특혜를 계속 이어 받아, 즉시 철학과로 들어가서, 철학과를 2년간 마치고 난 후, 한국 살레시오회 제1기생으로서, 민족정신이 너무 강한 학생은 국제적인 수도회 소속 신부로 보다는 토착적인 교구소속 사제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수도회 신임 한국 관구장 Ruzzedu(룻제두 (?)신부님의 추천서와 함께, 자의와 무관한 장상들의 타의만으로 1968년 1월 경, 소속이 수도회에서 교구로 이동 변경되었읍니다. 다만 교구선정은 본인 의사와 교구장 주교의 교구입적 결정에 따르게 되어 있어, 사실 필자의 성소는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읍니다.
필자는 용인이 고향이라, 우선 필자가 입교 영세한 미리내 본당과 고향 지역 남사면이 속한 용인 본당 주임, 김효신 마지아 신부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후, 그 동안 제 성소에 관한 자초지종을 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수도회에서는 잘 나왔다]고 하시며, 교구장 윤주교님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어, 미리 전화로 말씀드리고 시간을 약속 받아 수원으로 고향 교구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을 찾아뵈왔는데, 필자가 윤주교님을 뵙는 것은 두 번째로 구면이었읍니다.
1967년 돈 보스꼬 성인이 지은, [성 도미니꼬 사비오 성인전]을 사레지오회 신학생으로서 필자가 이태리어에서 처음 번역하여 성 바오로출판사에서 발행할 때, 수원교구장 겸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계시던, 윤공희 주교님은 우리말로 처음 출판하는 내 번역서의 머리말을 게재하도록 써 주셨는데, 그 때 뵙고 두 번째 뵙는 구면이었으며, 그 후에도, 성 돈.보스꼬 성인전 새 역술 발행으로, 또, 1968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서리도 겸하실 때, 윤주교님은 나를 보시고 무척 기뻐하시며, 수원 고향교구 소속 대신학생으로 즉시 받으신다고 확인하여 주셨읍니다. 지금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 후에도,1969년도 봄에 성심수녀회 독일계 출신의 질린스키 (Sister Zielinski) 수녀님을 통하여, Karl Rahner 신부님의, [본성과 은총( Natur und Gnade), 오늘의 인간과 종교 (Der Mensch von Heute und Religion),] (성바오로출판사 발행), 및 카알 라너 신부님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무상 번역출판 전권을 받고 또한 같은 예수성심회 외국 수녀님들 5 명의 도움을 받아가며, 필자가 종합 편역한, 영.불.독.서.일. 한. 6개국어 실용 회화집,(지문각 발행), 등으로, 필자는, 수도회 소속 회원으로 있을 때보다 수원교구 소속으로 신학공부하면서도 동시에 훨씬 더 자유롭게 출판 일을 하게 되었읍니다. 용인본당 주임 김효신 신부님의 [수도회에서는 잘 나왔다]고 하시던 말씀이 옳았다고 느꼈읍니다.
그런데 사실 수도회 소속 대신학생으로서 수원교구 소속으로, 소속이 바뀔 그 때만 해도, 나는 입교 1957년 영세한지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아서,천주교회 상식이 충분치 않아, 내 고향 마을 각궁말 윗 산골 동네 아리실 장로교 촌 산골에 사시며, 20여리 떨어진 미리내 천주교 성당으로 개종하시고, 당시 경향잡지사 윤형중 신부님이 주선하여 발행하신, [18인의 개종실기]에 글을 올린 윤석근 바오로 회장님은 훗날 필자의 영세 대부님이 되신 한약방 의원으로, 필자는 회장님의 안내로 1957년 9월 27일, 토요일 저녁 미리내 성당을 처음으로 찾아가던 그 날 저녁 18세의 소년으로 요셉 신종호 주임 신부님한테 단독 영세한지 얼마 안되어 수도회와 신학교에 입문한 사실 신문교우 소년이였읍니다.
천주교 신부가 되면 족하므로, 그 당시 필자는, [교구신부]나 [수도회신부]의 구별이나, 특히, [시골 수원교구 소속신부]나, [수도 서울 대교구 소속 신부]의 분별 의식이 적은,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에 대한 상식이 함량미달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하여간, 그래도, 용인 고향을 관리하는 수원교구장님을 진심으로, 또 전심으로 존경하여, 당시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시는 [수원교구장] 윤주교님이 정하시는 대로, [수원교구 소속 대신학생]으로 받아주시는 윤공희 주교님께 공손하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기쁘게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전적으로 고향교구 수원교구에 의탁하며 전심으로 순종할 뿐이었읍니다.
그래도 자의든 타의든 간에 약 10 여명이 넘는 살레시오회 대신학생들이 3, 4년에 걸쳐 하나 둘씩 교구 소속으로 나왔는데, 수도회 출신들은 일반 교구 신학생들의 기피대상같은 약간 좀 어색한 분위기였고, 살레시오회에서 1961년 한국의 제1회 수련자 출신 필자를 시작으로, 계속하여 살레시오회에서 나온 학생들 중에, 출신교구 소속 교구장이 자기네 교구 소속으로 받은 대신학생은 필자가 당시 유일하였으니, 이것은 내 고향 용인본당 주임 김효신 신부님의 추천과 주선 덕택이었읍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수원교구 소속 신부가 되지 않고, 사레지오수도회 신부가 되었더라면, 또는,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가 되었더라면, 하고 지금 가정해 보니, 1971년 사제가 된 후, 훗날 1979년 이벽 성조의 묘를 찾아 천진암 성지로 1979년 6월 24일 이장한 일과, 천진암 성지 개척이나 교회 창립선조들의 묘와 후손들을 찾아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함께 모신 일들은, 좀 어려웠을 것이고, 혹시, 나 아닌 다른 어떤 신부에 의해서 될 가망도 당시의 교회 내외 사정과 분위기로서는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보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을 것이니, 김수환 추기경님도, 또, 필자와 역사적 견해를 달리하시던 우리 스승이셨던 최석우 신부님도, 교회창립선조들의 묘를 찾아 천진암 성지 한곳에 모시는 그 일만은 변신부가 매우 잘하는 것이라고 지지하셨으며, 선조들의 묘가 여기저기 사방에 흩어져 산재한 채로는 창립선조들의 시복 시성 추진도 어려움이 더 많고, 후대 교회의 관리가 매우 어렵다고 늘 말씀하셨었읍니다.
또한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님 1인 시성추진과 달리,103위 순교 복자 모두 동시 시성추진이나, 로마 교황님의 한국방문 같은 일 등, 1980년 200주년 기념사업 준비 출발의 모든 일도, 다른 신부님들에 의해서 더 잘 될 수도 있었겠지만, 전혀 다른 모양으로 될 수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대와 비난과 최대의 혹심한 비협조까지도 공개적으로 아끼지 않고 베풀어주던 목소리 크고 영향력 있는 분들이 적지 않던 시절, 젊은날 반대와 비판 속에서 살아남은 김남수 신부님 같은 분들이 주교가 되시어 방어벽을 쳐주시는 힘도 전에 없던 새로운 일을 성사시키는데는 큰 힘이 되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겪던 혹심한 가난과 고독, 누님 말씀따라 천주교로 개종과 수도회 입회, 군복무 30 여개월 국방부 본부와 육본 및 미8군 지원사 근무, 특히, 수원교구 대신학생이 되어 사제로 55년 근무하면서, 천주교회 토지 단 1평도 없던 천진암 계곡에 275 필지의 부지 매입, 정리하며, 정년 은퇴까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과 103위 시성추진, 이벽성조 묘를 찾아 천진암 성지로 이장과 성지개발, 특히, 30 여차례이상 유롭 여러나라 교회와 로마를 방문하면서 자료를 수집하며,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계획 수립 및 위원회 결성, 추진,교황 성요한바오로2세의 천진암성당 건립 머릿돌 축성문 하사받고, 정부의 건축허가 받아 착공식 거행), 창립선조들의 소중한 유물과 역사자료 수집 및 3층 건평 1천500여평 철제 석조 박물관 건립 준공, 성모성당 건립, 등, 모두가 주님의 안배와 섭리의 손길따라, 성모 마리아의 보살피심으로,10여년간에 걸친 엄청난 무사고 난공사 토목공사, 완료, 등,용인군 변두리 시골 촌뜨기가 걸음마다 주님의 손을 쌍수로 맞잡고 매달리며 걸어온 기적의 일생 과정일 따름입니다. 천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늘 주님처럼, 주님과 함께 살게 하옵소서 ! 아멘.
그 후에 윤주교님은 1971년 8월 말, 우리 반 4명에게 사제품을 주셨고, 또, 서품 후 필자를 즉시 비서신부로도 쓰셨는데, 2023년 지난 해 10월 초, 수원교구설정 60주년 기념미사에, 그 동안 광주대교구 대주교로 계시다가 정년 은퇴하시고도, 전에 10여년간 재임하시던 수원교구 행사에는, 전임지를 방문하지 않는 천주교 성직자들의 관례를 따라, 거의 한번도 오시지 않으시다가, 아마 최덕기 신부가 수원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될 때 오셨었는지? 이번에 교구장 이용훈 주교의 초청으로 60 여년만에 오셨읍니다. 100세 장수의 노익장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님께서 오시어, 이미 우리 수원교구 옛날 신부들도 모두 늙은이들이 된, 몇 안 남은 수원교구 늙은 은퇴신부들은 현재 은퇴하신 윤대주교님을 모시고 감격에 넘치는 감사의 미사를 올렸읍니다.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제단의 사진을 보면서 왼편부터, 최윤환 몬시뇰과 변기영 몬시뇰, 사진 우편의 금년 100세 노구로 전남 광주 광역시에서 오신 노익장으로,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 (1963년~1973년) 빅토리노 윤공희 대주교(은퇴)와 수원교구 전임 교구장 최덕기 주교(은퇴).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미사(주교좌 정자동성당, 2023.10.06.오후 2시)
FR0M CONVERSATION WITH GOD, THEN, INTO CONVERSION WITHIN GOD !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alla conversione in Dio,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
Bisogna per noi, per l'unire con Dio,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poco a poco , alla conversione in Dio, e poi, finalmente, come il grande Teologo
Maestro S. Tomaso d'Acqino aveva parlato degia,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nella sua Summa Teologia !
Msgr. Peter Byon in Corea
60년먄에 고옥자 로사 자매를 만나서 기뻐하시는 100세의 윤공희 대주교님 - 수원교구 설정 초기 가난이 자갈처럼 깔린 구석구석 가난과 아쉬움이 넘치던 시절 수원교구를 꾸려나가던 신앙인들의 만남은 더욱 뜻깊어 교회 사랑의 본보기로 후대에 교과서가 되게 합시다 !
Belgium의 Madammes De Jonckeeres Marie et Marthas 두 분 형제 여교사들은 동정을 지키며, 나와 한국의 가난한 신학생들 15 명 정도의 기숙사비와 도서비, 등 학비를 보내어, 신학대학 공부를 마치게 한, 정말 고마우신 교우들입니다. 필자가 장상들의 뜻에 따라, 살레시오회에서 내 고향 용인 관할의 수원교구 소속 대신학생이 되던 1967년 말 경만 하더라도 아직 테레비가 없고, 라디오에서 날마다가 아닌, 거의 매 시간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 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뿐이도 금순이도 단보짐을 쌌다네" 노래 소리가 반복 울려나오던 시절이었읍니다.
우리나라 시골 가난이 최고조에 달하여, 특히 수원교구 농촌의 농민 이농현상이 극심하여, 수원 교구신자 4만여명 중에 매년 9천여명 이상의 국내 교구 중 최다수 대인영세자를 내는 수원교구도 1년에 8천여명이 시골 집과 땅과 가족들을 시골에 그냥 두고, 서울로 우선 식구 1명씩이라도 이사하고 본다는 시절이었읍니다.그래서 당시 통계를 눈여겨 보면, 자랑스러운 대인 영세자 신자 수만큼, 교구 신자 통계 수는 증가 표시가 안되는 해도 있었읍니다.
전국의 모든 시골 교구들도 너무 가난하여, 모든 대신학생(당시 전국에서 서울교구 다음으로 대신학생이 가장 많은 수원교구 소속은 28명)들의 가정에서 대신학생 학비를 전담하라고 하나, 모두가 시골의 빈농 출신 신학생들 가정에서는 할 수가 없어서, 교구에서 개인 학비 분담액이 너무 많아 교구지원 금액이 70% 정도였기에, 수원 고색동 본당 방회장(방상복 형제신부 아버지)이, 농사짖는 큰 소를 팔아가지고 교구에 와서, 소를 팔았으니, 이제 농사를 어떻게 짖느냐고 걱정하였고, 평택 아래 신설 안정리 박회장도 신학교 보낸 아들 학비로 땅 다섯마지기를 팔아가지고 왔는데, 이제, 농토가 줄어 살아나갈 걱정에, '아들 낳아서 신부로 보내는 일'은 좀 생각해봐야 하겠다며, 내년 학비를 걱정하던 시기였읍니다. 필자역시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하여 신학과 1학년부터 학비문제로 어머님과 형님들은 집안에 갑자기 대학생이 1명 생겨 학비걱정이 조석 때마다 주 화제였는데, 살레시오수도회에서는 학비를 받지 못하고, 가난한 수원교구에서는 기숙사비까지 신학생 각 가정에서 전액 내야 한다고 강권하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래서 병환으로 모국 벨지움으로 귀국하여 요양 중이던 옛 수련장 신부님에게 안부 겸 내 신상에 관한 편지를 하였더니, 내 편지를 받은 벨지움의 Victor Miller 신부님은 바로 미화 $400.oo.를 Bank of Ameerica를 통하여 나를 위해서만 쓰도록 모금하여 바로 수원교구 우리 윤주교님께 보내주셨는데, 당시 국내에서 US $ 환율이 아주 높고, 미화 달러가 귀하여, 미화 $100불이면, 대신학생 1년 기숙사비 포함 1년간 학비가 되고도 남았읍니다. 결국 벨지움의 밀러 신부님은 사레지오회를 나오게 되는, 내가 학비가 없어서 신부가 되지 못하고 중도하차하는 일이 없도록, 내 4년 간 학비를 소속이 확정된 수원 내 고향 교구장 윤주교님만은 전적으로 존경하며 신임하시므로, 윤주교님에게 내가 사제가 될 때까지 나의 4년간 학비와 기숙사비 전액을 선불 입금하여 주셨읍니다. Deo Gratias !
수원교구청 신부님들은 모두가 놀라워하였다며. 우리 수원교구 경리국장 김신부님은 바로 당시 은행에 가서 환전하여, 신부될 때까지 변기영 학생의 학비가 다 되고도 남는다며, 아직 3, 4학년 학비는 학기가 지나고 내도 되니, 미리 학비를 선불할 필요는 없다고, 나머지를 나에게 준다기에, 교구에서 가난한 다른 신학생들 교육비에 보태시라고 필자는 사양하여, 결국 필자는 내 학비를 해외 후원금으로 선납할 수 있어서, 수원교구에 부담을 주지 않는, 당시 우리 교구 신학생들 중에는 유일하게 교구신세를 지지 않으면서 4년간의 학비 전액을 선불 완납하였읍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란과 가난을 겪으며,자라면서 공부한, 우리들은 모두, 주교님이 되신 선배 분들을 포함해서 당시의 [구호물자 사제들]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버릇없이 언론의 자유를 홀로 만긱하려는듯, 농담과 익살이 좀 심하다는 필자는 한 고향 용인 한터(대대리) 출신 김옥균 신부님이 프랑스 서북 지방 도시 CAEN(?) 대학에서 신문방송과 유학을 마치고 오셔서 후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되시어 천진암에 오시면 종종 함께 웃으며, [구호물자 주교님]이라는 좀 뼈있는 농담을, 그리고, 때로는 10여차례 이상 기사만 데리고 천진암 성지를 찾으시던 김수환 추기경님께도, 버릇없이 몇번 함께 웃어넘기며, '구호물자 성직자 시대'라는 표현으로 모두가 웃으며 말씀을 나누덕 적이 종종 있었읍니다.
그 후, 1971년에 사제가 된 후, 1981년, 이미 지금은 모두 천국으로 떠나신 서울대교구 경갑룡 주교님은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을 설득시켜, 해외유학도 하지 않은 나를 주교회의 200주년 기념준비위원회의 초대 사무국장으로 임명하시어, 필자가 한국주교회의와 교황청 업무에 접하게 하였으며, 이태리 유학도 하지 않은 필자가 1983년 2월 말, 처음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St. John Paul II세 교황님)는, 1, 2 년 전에 문서로 미리 먼저 몇차례 보내드렸던 우리 103위복자들의 시성추진 간청서와 관계 서류들을 다 읽어보신듯, 나의 부족한 이태리어를, 내가 입을 열자마자 모두 단번에 즉시 알아들으시며, 103위 시성을 약속하셨는데, 사실 꿈만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교황님, 우리 한국천주교회를 처음 세우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성인으로 모시도록, 시성하여 주십시오." 하자, 교황님께서는, [Si, Si, Preghiamo ! Si, Preghiamo, Si, ! ,그래, 암, 그래야지, 기도하자, 나도 기도할께 ! ] 하시며, 내 손을 꼬옥 쥐시고, 한동안 진솔하게 기도하시며 놓지 않고, 실제로 또 기도하시며, 엄숙하고 묵묵히, 한동안 그리고,,, ! 3개월 후 그 해 6월 초(10일) 로마에서는 전 세계 교회를 놀라게 하는 기적의 소식이 나왔읍니다.
시성 결정에 가장 큰 문제는 제출된 시성후보 복자의 기적 심사인데,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을 위해 한국 주교회의 우리 시성추진부에서 로마 시성부에 제출한 7건(?)의 기적 중 채택된 3건의 기적 중 2건 기적심사를 관면한다는 Romana Rota 성청 최고위 추기경, 대주교, 등 총회의 절대다수(97% ?) 찬성을, 총회를 시종 일관 참석하신 교황님은 회의 마치며 동시에 즉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성하의 동의 인준 서명 발표]로, 실로, [기적적인 기적심사 관면]이었읍니다. 1983년 6월 11일 서울에서도 한국주교회의 명의로 장충동 분도회관 시성추진부에서 공식 발표.
이 Romana Rota의 중차대한 최고위 성직자들 모임이 현직 교황님이 임석하시는 가운데 매우 장시간 진행되는 동안(필자의 계산으로 그날 오후 약 3시간 동안) 한국인 고위성직자는 바티칸에 전무할 때이므로, 그래도 로마 유학 중이던 장익 신부님이 투표권이 없는 옵서버로 참석이 초청,허가되어, 즉시, 아주 상세하게,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 4층에 있던 우리 시성추진부 사무실 필자에게 큰 일은 바로 후에 그때 그때 전화로 알려주었읍니다. 그러나 나중에 회의 전체사진을 보면, 옵서버 신부는 맨 끝에 어깨부터 머리가 상부만 아주 작게 조금 나와 있는 것이 유일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실로 역사적이며 기적적인 신속한 이 관면이야말로, 실로 기적적인 기적 심사 관면이었읍니다. 세계 천주교회의 시복시성 추진 역사에 기적적인 영향을 주는 대사였읍니다.
한국의 103위 순교복자 시성을 위해서 가장 극난한 고개를 넘었다고 하는 [기적심사 관면]이었읍니다. !!. 103위 시성 후, 계속된 시복추진에 Benedictus XVI세 교황님까지 모두 우리 한국교회 대은인 교황님들의 기념비를 관련 성지 천진암 성지와 미리내 성지에,그리고 서울 새남터 성지와 대전 솔뫼 성지에 세우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필을 놓게 되어 한스러우나, 후대들이 분명 더 잘 완수할 것으로 기대하며 믿습니다.
지금 필자가 은퇴 후 머무는 곡수공소는 신도들의 평균 연세가 80여세로 모두 매일 성당보다 병원출입을 더 자주해야 하는 것을 마치 부업으로 삼듯하는 노인들이라서, 평일 미사에는 1년 내내 단 한분도 참석치 못하고, 주일미사에도 요즈음은 5명 미만 내외 할머니들만 오시고, 1년 내내, 심지어, 성탄절과 부활절에도 어린이를 1명도 보지 못하는 공소로, 주일헌금은 매주 여전히 10여만원 남짓에 불과하며, 그나마 외지에서 지나가는 신도들이 보태고, 종종 미사 독서까지 해주며, 오죽하면 60여 년 역사의 전통을 가진 곡수마을 초등학교가 전교생이 평균 900여명 의 학생 수를 유지하다가 매년 신입생이 1, 2명 뿐이라서, 10여년 전부터는 전교생이 50여명으로 줄고 있었으나, 얼마전 지난 해 새로 부임하신 곡수초등학교 여자 새 교장 선생님과 일행의 곡수성당 방문을 받고, 신입생 수 부족을 걱정하는 필자에게, 신임 교장 선생님 부임 이후로, 신입생들의 수가 한자리 수 너머로 증가하려 한다고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읍니다.
그런데 주일도 아닌 엊그제 8월31일 토요일 11시, 변기영 몬시뇰 85회 생일(1940년생)과 53주년 신품일(1971년 서품) 감사미사에는 의외로, 서울과 수원, 안성과 평택, 용인과 광주, 여주, 이천과 양평, 포천 등지에서 일당백의 천주교 본당 회장급의 교우들과 친,외조카들이 거의 골고루 섞여, 꾸역꾸역 한데 모여 들어서, 처음으로 모두 40여 명 내외 신자들이 감사미사를 올렸습니다. 시골 공소지만 그래도 우리 직원들이 Musica Sacra Gregoriana의 De Angelis 곡을 택하여, 103위 순교성인 미사에, 극소수의 우리 직원들 명창 로사와 세라피나 성가대는, Kyrie, Gloria, Sanctus, Agnus Dei 를 라틴어로 아주 거룩하고도 우렁차게 불렀답니다. 로마에까지, 천국에까지 들렸을 것입니다. !!!
또, 계속되는 30도가 넘는 폭염 무더위 속에서, 그래도 양평본당 주임 이형동 신부님의 주선으로, 에어콘으로 냉방되는 곡수공소 성당에서 미사 후, 숨이 막힐듯한 밖을 아예 나가지는 못하고, 성당 내 후미의 시원한 냉방 실내 구석의 코너와 코너에 나뉘어서, 서울에서도 맛보기 쉽지 않은 푸르고 신선한 젊은이들의 신나는 메뉴로 점심겸 다과를 하였답니다. 맛있는 끝물 찰 옥수수와 수박, 청자두와 청포도, 빠나나와 현미쌀 설기떡, 약밥과 신규 수국 음료차, 케이크와, 특히, 이천 회장님이 보내신, 서울서도 구경하기 쉽지 않은 맛있는 샌드위치와 부드러운 바람떡, 등으로 싱싱한 점심 다과를 하는 동안,,,,!
뜻밖에도, 그 옛날 인기 데뷔 작품, [긴머리 소녀]의 통기타 이철식 베드로 명가수의 아직도 젊음이 넘치는 목소리를 본인과 함께 나누며, 정말 80 고개 마루턱에서 더 늙어가며 기어서 오르다시피 하는 Msgr. 직책까지 받은, 변 몬시뇰의 인생 길이,,!, 올라온 산 아래 저 아랫 길을 내려다 보며, 고개 마루 너머에서 또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내려가는 길도 굽어보는 이 길을,,,너머질라 조심하며, 내려가며, 더욱 낡아가는 늙은 마음이 오늘은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 속에서 푸른 연기되어 오른답니다 ! 이제 아직도 젊음과 희망이 서려있는 인생이 아니라고 ! 누가 알며 말하리오 !?
Chi sa ? Chi-ssa ?! Msgr. Byon의 작사 무곡 넉두리-
변기영 몬시뇰 85세(1940년생) 생신 겸 사제서품 53주년(1971년), 감사 미사 봉헌, 양평본당 곡수 공소 성당에서, 축가를 부르는 7080 시대, 통기타 가수 둘다섯(대표곡 긴머리 소녀) 멤버인 이철식 베드로(대표곡 1985년 가수 김연숙 그날 작사 작곡자), 천진암성지 매주일 10여간 성가 봉사(2024.08.31)
변기영 몬시뇰 85세(1940년생) 생신 겸 사제서품 53주년(1971년), 감사 미사 봉헌, 양평본당 곡수 공소 성당에서(2024.08.31).
변기영 몬시뇰 85세(1940년생) 생신 겸 사제서품 53주년(1971년), 감사 미사 봉헌, 양평본당 곡수 공소 성당에서, 축가를 부르는 7080 시대, 통기타 가수 둘다섯(대표곡 긴머리 소녀) 멤버인 이철식 베드로(대표곡 1985년 가수 김연숙 그날 작사 작곡자), 천진암성지 매주일 10여간 성가 봉사(2024.08.31)
변기영 몬시뇰 85세(1940년생) 생신 겸 사제서품 53주년(1971년), 감사 미사 봉헌, 양평본당 곡수 공소 성당에서(2024.08.31).
변기영 몬시뇰 위암 치료는 마무리 단계에 이른듯 합니다 !
말기위암 유일치료수단 수술하더라도 수명은 1년 미만이라는 의료진 선고와, 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님 병자성사와 노자성체까지 모셨는데(2019년 6월 12일), 그후 매 3주 1회씩 병원 가서 항암주사만 무통증 30분하고 맡고오다가,지금까지 수술은 하지 않고, 4년전부터는 아무런 치료나 투약없는 각종 검사만을 3개월마다 1회씩 1년 하다가, 6개월마다 1회씩으로 역시 검사만 하다가, 금년 지난 3월부터 지금은 1년에 1회씩, 검사만 계속하게 되어, 체내의 모든 수치가 3년전부터 정상인 수준으로 불변이므로, 의료진과 더불어 기도와 성원을 다하신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미사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위출혈과 빈혈이 극심하여, 위암 말기라서, 수명은 1년 미만정도로 본다는 의료진의 언급을 가족들과 직원들이 다 함께 듣고 있는 변기영 몬시뇰에게,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님이 서북원 신부를 대동하고 곡수리 성당 기념서재에 오셔서, 변기영 몬시뇰에게 주는 병자성사를 받고 있는 변기영 몬시뇰(2019.06.12).
지금은 정상인 체질이 되어(2024/8/31.현재),거의 완치에 가깝다고 할만큼, 병원에서도 항암 치료 용 주사(Keytruda)는 3년전 중단하고, 3~4년째계속 수십 차례에 걸친 정기적 혈청검사, C.T. 촬영 검사, P.E.T. 촬영 검사, 내시경, 조직검사, 초음파 검사, 등을 실시하며 면밀히 계속 검사만 하는데도, 위암 세포나 위암 균은 발견되지 않고, 체중을 비롯한 체내의 혈액, 등의 모든 수치가 5년 째 계속 정상치를 유지하며 변함이 전무하여, 항암투쟁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용기를 내자고 삼가 한 말씀 드립니다. 모든 환자들과 의료인들을 위해 성모님께 겸손히 기도 올리면서! 2024/8/31.곡수성당에서. Msgr. Byon
수원교구,총대리 이성효 주교님이 서북원 신부를 대동하고 곡수성당 서재에 내방하여(2019.06.12), 거행하시는 병자성사를 받는 변기영 몬시뇰.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님, 서북원 신부님 내방(2019.06.12), 병자성사를 받고 계신 변기영 몬시뇰
위출혈로 빈혈까지 극심한 변 몬시뇰에게 베푸시는 병자성사를 받고 난 후 (2019.06.12), 사색이 완연하여, 몸의 균형도 잡지 못하던 변몬시뇰의 모습 !
참고 사항 - 용기를 냅시다 ! 성모님께 기도를 바칩시다 !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님이 성직자국장 서북원 신부를 대동하고,곡수리 공소 서재에 오셔서, 위출혈로 빈혈까지 극심한 변 몬시뇰에게 베푸시는 병자성사를 받고 난 직후 (2019.06.12), 사색이 완연하여, 몸의 균형도 잡지 못하던 변몬시뇰의 모습! 처음엔 3주마다 1 회씩 병원에 가서 항암 치료주사 30분씩 맞고 오다가, 다음에는 3개월에 1회씩, 치료 없는 검사만 하다가, 그후 1 년 후부터는 역시 치료없는 검사만 6개월에 1회씩 하다가, 금년 2024년 3월 초 지금부터도 역시 치료는 없고, C.T. 검사와 혈액검사, X Ray, 등, 각종 검사만 앞으로, 1년에 1회씩 병원에 와서 하기로 되어, 1년 후, 즉, 2025년 3월 초에 병원 검사가 예약되어 있습니다.
<2024.08.31.오전11시, 이하 생일미사 사진들은 허관순 세라피나 편찬실장이 모든 사진을 거의 다 혼자 촬영하느라, 본인 사진은 안보이고, 맛있는 것도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이 없었답니다. 다 그런거지 뭐, 그러길래 미안 미안 해요 !!> -Msgr. Peter Byon-
FR0M CONVERSATION WITH GOD, THEN, INTO CONVERSION WITHIN GOD !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alla conversione in Dio,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
Bisogna per noi, per l'unire con Dio,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poco a poco , alla conversione in Dio, e poi, finalmente, come il grande Teologo
Maestro S. Tomaso d'Acqino aveva parlato degia,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nella sua Summa Teologia ! Msgr. Peter Byon in C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