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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韓民族 10대 少年들의 宗敎 創始 資質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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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郞徒는 삼국시대 귀족의 子弟들 중에 15세에 들어가서 18세에 마치는 修德 精神 수련운동으로 삼국통일의 精神戰力의 하나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愛國愛族의 정신에서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自然 宗敎心이 깃들어 있는 신앙적 요소도 적지 않았다.

新羅 때 불교를 처음으로 시작한 이차돈은 22세에 순교하는데, 이역시 17세 경에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며, 더욱이 혜초도 17세 경에 입교하여 19세에는 맨발로 高句麗와 唐나라를 거쳐 희말라야 산맥을 넘어 10여년간이나 인도에까지 求道의 巡禮 길을 걷고나서 往五天竺國傳을 썼다. 특히 崔致遠은 12세 경에 당나라에 들어가 10년 공부 끝에 大科에 及第하여 官職에 10여년간 머문 뒤 20대말에 귀국한다.

東學을 시작한 崔濟愚역시 17세에 早失父母하고 가산을 정리한 후 名山의 道師들을 探訪하며 求道修德의 길을 시작한다.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에서는 200여년 전 廢刹이 되었던 庵子 天眞菴을 道場으로 삼고, 당시 天學이라고 불리던 오늘의 天主敎를 硏究, 實踐하며 隱居하던 李檗 曠菴公역시 大科에 뜻을 두지 않고, 儒林들의 書堂에서 나와 벼슬 길을 강요하는 嚴父 李簿萬 공의 명을 피하여, 1770년 이미 17세 때부터 深山窮谷 天眞에 入山하여 求道와 天學 硏究 實踐에 專念한다. 戊戌년(1778년)과 己亥년(1779년)에는 42세의 저명한 權哲身 鹿菴 公이 참석할 정도의 天眞菴 講學會가 자연스레 열릴 정도였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 이 때,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李寵億 15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2세, 權相學 19세, 曠菴 李檗 25세, 등이었다.

더욱이 丁若鍾의 아들 丁夏祥은 아버지 丁若鍾이 순교하던 辛酉迫害 때 7세였는데, 17세 때 이미 北京 3천리를 종의 신분으로 가장하여 使臣團을 따라 유진길과 함께 교대로 20여차례나 왕래하며 朝鮮敎區를 설립한다.

丁夏祥의 제자인 金大建(1821∼1846), 崔良業(1821∼1861), 崔과출(1822∼1837)은 14세와 15세의 나이로 1836년 12월 9일에 漢陽을 떠나 개성과 해주와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영하 30도이하로 내려가는 엄동설한에 만주 벌판을 눈보라 속을 뚫고 북경까지 약 2개월을 걸어간 후, 거기서 제남을 거쳐 상해로 해서 이듬해 한 여름에 즉 1837년 6월 6일에 무더운 남쪽나라 마카오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집에 도착하였다. 겨울과 여름을 거쳐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약 2만리를 걸었으니, 하루 평균 70리 정도씩 걸어간 셈이다. 세 아이들은 병이 나서 달포를 몹시 앓았고, 김대건과 최양업 두 어린이들은 10여년 후에 사제가 되어 돌아왔으나, 최과출 프란치스꼬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약 8개월 후에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보기 드문, 실로 경탄할만한 한민족 10대들의 신앙정신 자질이다. 或者들은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에 관하여 南人學者들이 정권에서 소외되어 산속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연구하였다는 등 南人係 云云하며 거론하지만,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정치 당파들과 결부지어 말할 것이 아니다. 이차돈이나 최제우가 남인학자들이 아니고, 어린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이 남인학자들이 아니다. 필자역시 사제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던 나이가 18세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필자는 남인학자들과 무관하며 정권에서 소외되어 사제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 한민족 신앙의 선조, 선구자들을, 남인들이 정권에서 소외되어 낙향해서 천주교를 연구했다는 둥, 남인이니, 북인이니 하며, 정치적 당파의 채색된 시각으로 보지 말아야 하겠고, 함부로 피상적인 표현들을 삼가야 하겠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제 지망자들이 너무나 감소하여 신학교들이 통합되거나 또는 폐교되는 유롭 교회와 달리, 현재 우리나라에는 대신학교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민족 10대들이 先天的으로 타고 나는 종교적 특수한 資質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 성지는 실로 한민족 젊은이들의 聖地로서 전 세계만민에게 우리 겨레의 젊은이들에게 素朴하고 純粹하고 眞率한 心性으로 眞理를 찾고 天主를 위하는 자질이 있음을 만방에 알리고 본받게 하는 자랑스러운 성지이다.

이 天眞菴 성지 입구와 바로 옆 500미터 거리의 두 계곡에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에서 하는 청소년 야영장과 경기도에서 하는 청소년 야영장이 건설되어 운영되고 있으니, 바로 오늘의 花郞徒 硏磨道場이다. 이곳에 초.중.고학생들이 수백명씩 서울과 경기도에서 와서 야영하면서 천진암 성지를 순례하고 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오 하늘의 섭리이다.

이들 속에서 장차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송이 꽃으로 散花할 줄 아는 제2의 김유신, 김춘추, 이순신, 이벽,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 같은 훌륭하고 위대한 겨레의 기둥감들이 정치, 사회, 교육, 종교, 예술, 등 각 분야에 대거 배출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천진암 성지 100년계획의 동기요, 목적이오, 철학이며, 사상이고, 방향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겨레이니, 하느님은 우리 겨레의 순수하고 소박하고 진솔한 10대의 젊은이들로부터 영원히 찬미를 받으소서. 천진암 성지 변기영 신부
입력 : 2003.11.05 오후 11: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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