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날]의 말뿌리 고찰.
그리하여, 우리 말 명사의, 얼, 을, 슬, 설, 물, 술, 불, 돌, 풀, 울, 별, 절, 골,고을, 쇠울, 등의, [을]이나 [얼]이나 [울]은 [하느님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의미를 뜻하는 얼과 을로 이루어진 말들의 씨앗을 품고 있는 우리겨레의 종교와 신앙의 정신이었읍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얼이나 을이 살고 있는, 울고, 불고, 웃고, 하는 얼이 깃들어 있는 굴을, [얼굴]이라 불렀으니, 선사시대 초기나 원시부족 생활 시절 후기까지에는 지구상의 대부분 인류가 문명 수준이 너무 낮아, 거의 옷도 없이, 추위와 더위를 막는 짐승 가죽이나 날짐승들의 날개 깃털이나 몸 가리개 큰나무 잎이나 풀로 엮은 짧은 치마같은 것을 걸치고, 안정적으로 거하는 집도 거의 없었고(산해경(山海經)과 예기(례긔(禮記) 고문헌 참조),대부분 사람들이 굴 속에서나 큰 나무 위에서 먹이를 따라 흔히 잠시 우거하고 ,많이 거하며 자주 이동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도 낱말 수가 지금처럼 발달한 문명으로,마치 지금의 아프리카 중앙의 원시림이나 남미 대륙의 아마존 강 주변에서 생존하는 소수 종족들처럼 말 단어가 매우 적었었기 때문에, 얼이나 을이라는 소리가 붙은 움직이는 사람의 몸의 부분이나 겉이나 끝을, [살], [발], [볼], 등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입니다.그래서,지금 한글 문법을 따라,우리가,[설],[설날],혹은,[슬],혹은,[슬날]이라고 발음하는 [설]은, 적어도 선사시대 그 이전부터, 오랜 세월을 거치며,글짜와 날짜와 달력 같은 것들이 생기기 훨씬 전에,적어도 수 천년이나 수 만년 전 선사~원시 시절부터, 우리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또는, 엄마 품에 안겨서부터 듣던 말 소리로서, 우리 마음에서 마음으로 옮겨지며 전해지고, 심겨지던 것이니, 이 [말 소리]는 아직도 그 흔적이 우리네 말투에 지금까지도 조금씩 남아서, [새롭고], [처음]이라는 의미와 느낌을 갖게 하고 있읍니다. 예컨데, [낯 설은] 타향에서, 과일이 아직 [설 익어서], [슬 익어서],,등의 말 소리 속에는 아직도, 처음과 새로움의 뜻을 지닌 [설],혹은, [슬]이라는 말뿌리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읍니다.,,. -<계속>
<국가와 교회의 전 세계적인 위기극복 민군 합동 주일미사를 마치고,
닭튀김 7 상자로 감사의 회식도 ! (2026. 02.15. 오전 10시 주일 미사 후)>
계엄이 내란이라고라 ? ! 그러면 채송화도 백일홍이라고라 ? !
Is the lilly, a rose ! ? 그럼 장미도 백합이라고라 ! ?
교하육두출<橋下肉頭出>이란다더니, 이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무식한 틀린 문장이다. !
(교하어두출<橋下魚頭出,> 다리 아래 흐르는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머리가 물 밖으로 나타난다 !) 이라야 맞는데!
그러니, 함혈분인<含血吩人>이면 ,선오기구 <先汚其口>가 아니랴 ? ! Msgr. Peter Byon Corea.
1963년 5월, 당시 서울에서 둘째 형님과 함께 서울시민으로 있던 필자는 24세 나이로, 육군에 입대하라는 소집 영장을 받고, 논산 제2훈련소에 입소하여, 제23연대에 들어가 처음 군사 훈련, 특히 제식훈련부터 받았는데, 그 때만 해도, 전국에서 모인 우리 신입 훈련병들 중에는 국민학교조차 없는 심산궁곡에서 호적상 나이만을 따라 징병소집 통지를 받고 왔거나, 몇명 안되는 산골 국민학교를 교사부재로 다니다 말고, 지게질만 할만하다하여 날마다 지개지고 산에 가서 땔 나무나 하러 다니던 심산 궁곡 산골 젊은이들도 없지 않았다.
6.25 사변으로 전사한 많은 젊은 장병들 수를, 기초 군사훈련이라도 받은 신병으로, 채우기 위하여, 그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 우선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를 차리고, 만일 대구와 임시수도 부산까지 점령되더라도, 마치 대만으로 옮겨앉은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처럼, 제주도만이라도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서, 민주주의 남북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온 국민과 함께, 9.15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바로 뒤이어서, 9.28 서울 수복과 더불어, 평양 수복, 및 압록강과 백두산까지 아군이 진격하자, 논산에, 육군 제2훈련소를 바로 차리게 하였고, 그 후로, 필자가 논산 제2훈련소에 입소할 때만해도, 논산 읍내는 물론 신설 육군 훈련소 내에도 포장도로가 전혀 없어서, 비만 오면 논산 읍 내외의 모든 길이 황토 진흙길이라서, 논산 부인들은, 비가 오면 남편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 산다고 할 때였다. 1 m 짜리 작은 느티나무 묘목을 부대장님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구입해 오면, 우리 훈련병들은 훈련소 내의 가로수로 영내에 처음 식목할 때였다. 지금은 그 나무들이 모두 기둥감으로 자랐다.
훈련 중 저녘 취침시간에는,고향에 계신 부모님들께, [아버님 전 상서, 아버님 그동안 기체 일양만강 하옵시며,,,]로 시작하는 편지를 대신 써 달라던 신입 훈련병들이 꽤 있어서, 정말 산골의 순진한 새끼 노루나, 하늘의 힌 구름 타고 내려온 천사들처럼, 아주 천진하고 착한 시골 산골에서 입소한 신입 훈련병들을 가르치는 훈련소의 선임하사나 조교로부터, M1 소총의 분해, 부품 명칭, 등을, 외우게 하는 교육을 받으면서, 조교 선임하사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여, 종종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야, 이 녀석아, 너는 그래, 채송화가 그 백일홍이냐 !? " 하며, 말도 안되는 반문적인 질책 야단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그래서,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는 순진하고 소박한 신입 훈련병들을 놀리듯, 야단치며 빗대는 별칭 말투로서, [야, 임마, 그래, 너도, [채송화가 백일홍이냐 !?] 하는 말이 한 때 부대 내에 유행처럼 퍼지기도 하였었는데, 이것은 순진하고 좀 무지한 훈련병의 좀 모자라는 단순한 말 솜씨의 수준 미달 문제요, 언어 수준 문제며, 국어지식 발언 문제지, 윤리 문제는 아니고, 법적인 문제도 아니며, 더구나 정치 문제는 더 더욱 아니었다!
우리 집의 4 형제 중에 내가 막내인데, 1951년 초부터 1.4 후퇴로 훗 날, [굶은 병]이라고 불리던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큰 형님과 마을 한 동네 출신의 형들은 매일 점심도 주지 않고, 굶어가며 걸어서 가던 행군에 하도 배가 고파서, 죽더라도 밥이라도 좀 싫건 먹으며 싸우다가 죽자고, 같은 우리 마을 형님 친구들과 함께, 현역으로 입대하면 바로 최전방 전투부대로 가서 총알 받이가 되는 군에 지원 입대하기로 하고, 그 당시 신설되던 제주도 제1훈련소에 자원 입소하여, 군번 0671897, 포병 군번을 받고 훈련을 마친 후, 바로, 춘천과 원주 지역 8사단과 6사단을 수시로 이동하며 싸우는 포병 지원부대로 대포를 수시로 이동하면서, 쏴야 하기 때문에, 가는 귀가 먹도록 몇년 싸우다가, 휴전 후 이등상사로 제대하였다.
그리고, 둘째 형님도 1951년 같은 해 봄에까지 굶어가며 죽지 않고 행군하며 내려가서, 대구에서 현역에 자원 입대하여 대구 수성동 수도육군병원에서 제주도 훈련소 군번보다 빠른, 대구 군번 0241262 위생병 군번으로 근무하다가 의병제대 하였고, 셋째 형님은 휴전 후, 논산 제2훈련소 창설초기에 논산 군번 9694996번 보병입대하여, 의정부 보충대에서 근무하다가 의병제대하였고, 필자는 더 훗날 논산 제2훈련소 제23연대에서 당시 선배 상급자들이, 와리바시(111~) 군번도 군번이냐 하며 놀리던 군번 11169540으로 훈련을 마치고 서울지역 부대에서 31개월 넘게 근무하다가, 병장 진급한 후, 180원 월급을 받는 병장으로 몇개월 더 근무한 후, 1965년 11월에 만기제대하였다.
그래서 우리 4 형제는 모두 입대할 때처럼 무사히 모두 건강한 몸으로 제대하였다. 아들들이 모두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고, 어머님께서는, 내가 아직 국민학생으로 어려서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어머님께서는 날마다 갑자기 집에 돌아올 군인간 형님들을 날마다 자나깨나 늘 기다리시며, 밥을 풀 때 형님들의 밥그릇에 꼭 밥을 조금씩 담아 솥에 넣어 남겨두어서, 잠시 후 솥을 열고, 형님들의 밥 사발 뚜껑을 열어 제치면 더운 밥에서 나오는 더운 김이 밥그릇 뚜껑과 뚜껑 가에 서려서 물방울이 되어 주르르 흘러 내리는 것을 보시고, 전쟁에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전사한 혼령이 자기 밥을 와서 먹지 않았다고 믿고 있어서(당시 시골 주부들의 신앙), 우리는 늘 찬 밥을 먹어야 했으며, 매일 밤낮으로 기도해주셨다.
어머님의 기도 덕택으로 무사한 형들과 같은 마을에서 같이 제2국민병 아닌, [굶은 병]으로 입대한 마을 청년들 중에는 비록 수 천석씩을 한다는 우리 면 내 최고위 층 부자집들의 아들들도 매일 굶어가며 피난 길 행군하다가 쓰러져서, "배 고파, 밥 좀 줘 !" 하는 헛 소리를 하면서 신음하며 굶어죽었다는 소식만이 탈영한 인편에 전해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우리 형들이 군복무를 다하고 마침내 무사히 아주 돌아오자, 어머님은 자식들을 위한 기도신심을 더욱 굳게 하시는듯 보였다.
그리하여, 당시 국민학교 4 학년생이던 필자가 커서 훗날 천주교 수도자가 되고, 나아가 사제가 되려고, 필자가 영세한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와 계시던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언론가라 할 수 있는 윤형중 신부님의 추천서를 받아 품에 안고, 서울 성북동 순교복자수도원 방유용 원장신부님께, 동창이셨던 윤형중 신부님의 추천서를 드리고, 입회하여, 후에 살레시오회를 거쳐, 서울 혜화동 성신대학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머님과 형님들이 처음에는 함께 울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얼른 허락을 하지 아니하시다가 나중에는 마침내 허락하시게 되었다. [지나간 전쟁 때, 죽음의 세월 그 난리통에도,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무사히 살려주신 아들들이니, 막내동이 하나쯤은 천주님의 일꾼으로 바쳐야지 ! 그래, 신부님 되러 가거라 !] 하시었다.
나는 어머님의 이 말씀을 듣고 함께 머금고 흘리고 있던 눈물을 씻으며, 불교의 스님들처럼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천주교 수도원이나 천주교 신학교 입학을 신자가 전무한 미신자 촌에서 가려고 한다고, 극구 말리시던 작은 형님의 손을 놓고, 마침내 그 길로 상경하여, 마침내 당일은 4,19 학생의거 함성이 서울을 진동시키던 날이었는데도, 군중들 속을 뚫고, 성북 구청 앞을 지나 성북동 천주교 복자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후, 살레시오회를 거쳐, 경기도 용인 출신이라 1971년 내 고향교구 수원교구 소속으로 천주교 사제가 되어, 벌써 사제생활 55주년이 지나고 있다. 어머님과 형님들도, 누님도, 그 동안 나를 가르치신 스승님들도, 김창렬 교수 주교님 외에는 모두 거의 다 돌아가시고, 나에게 사제품을 주신 윤공희 주교님은 전남 광주대교구장이 되시어 지금은 은퇴하시고, 금년 105세이신데, 노익장의 모범으로 엄존하신다.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으로서 재작년 10월 7일, 수원교구 설정 60주년 기념식에 오시어, 서품 후, 첫 주교 비서였던 필자는 감격속에서 교구 내 500여명이 넘는 선후배 동료 사제들과 함께 윤대주교님 모시고 기념미사를 바쳤다.
그래서 결국 87세로 나 혼자 남은 느낌인데, 우리 형제들은 우리 주님과 우리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어머님의 마음도 알고, 믿고 있으며, 천상에서 지상의 이 못난이를 모두가 잊지 않고 기다리시기에, 나역시 지금도 천주님께 감사기도를 잊지 않고 올리고 있다 ! Deo Gratias !!!! 4 형제들 중 막내가 역전의 용사로 기적적으로 남아 아직도 살고 있다. Msgr.Peter Byon Corea. 202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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