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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북한 공산정권이 처형한 주교5명, 사제82명, 수사,수녀59명,대신학생4명 등 150여명의 성직자들 무덤만이라도 우리에게 알려줘야 한다.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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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사변을 전후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 감금, 고문, 옥사, 처형된 천주교회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주교 5명, 신부 82명, 수사 25명, 수녀 34명, 신학생 4명,등 모두 150여명이다. 민족화해를 거론하는 현싯점에서 북한은 이 성직자들의 무덤이라도 우리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아래 통계도표 안의 교구별, 국적별,지위별 숫자 중, 使節은 교황청 파견 대사를 말하며, ( )은 한국인 출신 성직자 수도자들의 숫자이다.*

【북한 공산정권의 박해】

대한민국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얻어 천주교회가 날로 눈부신 발전을 보이게 되었으나, 한편 북한에서는 공산 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천주교회가 날로 심한 박해를 박게 되었으며, 이것은 6·25 전란으로 말미암아 한때 남한의 천주교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1945년 8월 9일에 벌써 만주와 북한으로 쳐들어와 이 지방을 차지하고, 곧 그 해에 연길 교구의 유·셀바시오 신부와 고(高)·보니파시오신부를 총살하고, 1946년 5월에는 브레헤르·백 주교를 비롯하여 독일인 신부 18명, 동 수사 17명, 동 수녀 3명을 잡아서 연길, 삼도구(三道溝), 무산(茂山) 세 곳에 나누어 가두었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함흥 성당을 빼앗아 공산군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직자들을 체포 감금】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유엔 총회의 승인을 얻게 되자, 소련군과 북한 공산정권은 교회에 대하여 보다 노골적인 박해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5월 8일부터는 덕원 교구의 사우에르 주교와 수도원장 및 늙은 두 신부를 잡아 나남(羅南)으로 보내어 가두고, 그 밖의 신부, 수사, 수녀들 55명은 평양의 정치 보위부(政治保衛部)로 보내어 가두는 한편,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하여 공산군 부대에서 쓰다가, 후에 사리원(沙里院) 농과 대학을 이곳에 옮기어 김 일성(金日成) 농과 대학이라 부르고, 원산에 있던 수녀원을 병원으로 삼으며, 해성(海星)학교는 소련 군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육소로 삼았다.

그리고 그래 5월 14일부터는 대한민국과 정보를 교환하였다는 이유로 평양 교구의 홍 용호(洪龍浩)·방지거 주교를 비롯하여 김 필현(金必現) 신부, 최 항준(崔恒俊) 신부, 강(姜) 전교회장 등을 잡아서 정치 보위부로 보내어 가두고, 해주 성당의 한(韓)·비리버 신부도 잡아 가두었다. 이어 그해 12월 6일부터는 박해가 더욱 심하여져서, 평양 성당의 박 용옥(朴龍玉), 서 운석(徐雲錫), 이 재호(李載虎), 장 두봉(張斗鳳) 신부와, 강계(江界)성당의 석 원섭(石元燮) 신부와, 신의주(新義州)성당의 홍 건항(洪建恒) 신부와, 영유(永柔)성당의 홍근도(洪根道)신부 등 7명 신부가 잡혀 갇히게 되니, 이 여러 곳의 성당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이리하여 3천여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던 평양에는 한 사람 신부조차 없게 되고, 평양 교구내에서는 진남포(鎭南浦), 안주(安州), 마산(馬山), 의주, 비현(碑峴)에만 각각 1명의 신부가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함흥 교구에서는 청진(淸津) 한 곳에 이 재철(李載喆) 신부가 남아 있고, 춘천 교구에서는 양양(襄陽)에 이 광재(李光在)신부가, 평강(平康)에 백 응만(白應萬)신부가 겨우 남아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 보위부로 보내진 신부, 수사, 수녀들은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은 후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에 나뉘어 수용되었으며, 신학생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 교우들도 이른바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많이 잡혀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게 되니, 북한 교우들은 이러한 생지옥을 벗어나 몰래 남한으로 계속 도망쳐 오게 되었다.

이 때 처형된 82명 사제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동창생 신부들(김수환 추기경님 반은 1950년도와 1951년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도 5명이나 참살되었다.

【서울 교우들의 특별 기도 봉헌】

이리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교우 4백여명은 날로 비참한 모습을 띠어 가고 있다는 북한 교회의 소식을 듣고, 1949년 11월 6일에는 서울 명동 대강당에서 평양 교우 대회를 열고 많은 돈을 모아 신부를 양성하는 데 보태 주기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지 겨우 반년을 지나 뜻밖에도 갑자기 6·25의 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950년에 접어 들면서부터 북한 공산군은 남한을 치기 위하여 그 군대를 38선으로 모으고 있었으므로,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하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5월 15일에는 평양 서포(西浦)에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이 몰수되게 되니, 이 곳 수녀들은 살 곳을 잃고 헤매며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이었다. 이러한 북한 교회의 딱한 소식을 들은 서울 여러 성당의 신부들은 6월 14일에 회의를 열고, 북한 교회를 위한 특별기도를 성당에 따라 날을 달리 하여 차례로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6월 15일에는 명동 성당, 16일에는 중림동 성당, 17일에는 원효로(元曉路)성당, 18일에는 삼각지(三角地)성당, 20일에는 잠실리(蠶室里)성당, 21일에는 동자동(東子洞)성당, 22일에는 세종로(世宗路)성당, 23일에는 혜화동 성당, 24일에는 제기동(祭基洞) 성당, 25일에는 홍제원(弘濟院) 성당, 26일에는 신당동(新堂洞) 성당, 27일에는 미아리(彌阿里) 성당, 28일에는 가회동(嘉會洞) 성당에서 교우들로 하여금 각각 40시간의 성체 조배를 드리게 하였다.

【6·25 전란 발생】

이러한 서울 교우들의 특별 기도가 드려지고 있는 사이에 북한 공산군은 6월 25일부터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모두 잡아들이게 하였으니, 평양 교구의 조 인국(趙仁國), 이 경호(李京鎬), 강 영걸(康永杰), 김 교명(金敎明), 김 내철(金來哲)의 다섯 신부를 비롯하여 함흥, 덕원 교구의 김(金)·바오로, 이 재철(李載喆), 이 춘근(李春根) 신부와 춘천 교구의 이 광재(李光在) 신부와 황해도 은률(殷栗) 성당의 윤 의병(尹義炳), 장연(長淵) 성당의 신 윤철(申允鐵) 신부들이 잡히게 되었다.

이들 11명의 한국인 신부 중 김·바오로, 이 광재, 이 경호의 세 신부는 얼마 후에 총살된 것이 확실히 알려지고 있으나, 다른 신부8명은 어찌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성직자들을 살해】

이와 같이 공산군은 북한에 남아 있던 신부들을 모두 처치한 후 곧 남한으로 쳐내려와 먼저 남한에 있던 신부들을 죽이거나 잡아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6월 25일에는 강원도 묵호(墨湖) 성당에서 애란인 신부 레일러(Reiller)를 총살한 것을 비롯하여 동 27일에는 춘천 성당의 애란인 신부 콜리어(Collier)를, 7월 3일에는 서울 영등포(永登浦) 성당의 이 현종(李顯鍾) 신부를 총살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성직자와 수녀들을 잡아 가두고 성당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7월 2일부터는 춘천 교구에서 퀸란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애란인 신부가 잡히고, 7월 11일부터는 서울에서 교황 사절 번 주교를 비롯하여 미국인, 불란서인, 벨기인, 한국인의 신부, 수녀 등 수십명이 잡히고, 7월 25일부터는 목포에서 광주 교구장 브렌난(Patrick Brennen,安)신부를 비롯하여 2명의 애란인 신부가 잡히고 8월 3일부터는 대전 교구에서 불란서인, 한국인 신부 10여명이 잡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북한에서 공산군에게 잡혀간 성직자, 수녀, 신학생의 수는 1백 50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그들을 교구, 신분, 국가별로 표를 만들어 보면 위와 같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강요된 죽음의 행진】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공산군은 8개국의 국민으로써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에 대하여 잔인한 야만 행위를 마음대로 행하였으므로, 6·25 전란은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공산군에게 잡힌 외국인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서울 소공동(小公洞)에 있는 삼화(三和) 빌딩에 수용되어 문초를 받다가, 7월 19일부터는 기차로 평양으로 데려가져서 다시 신문을 받은 후 평양시 밖에 있던 유치원에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또한 잡혀온 서울 주재 불란서 영사와 영국 영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 1백명을 헤아리던 외국인 성직자들은 다시 9월 6일에는 평양을 떠나 죽음의 길을 걸어서 9월 11일에는 압록강가에 있는 만포진(滿浦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위에 적은 성직자 이외에도 연길 교구에 있었던 성직자로서 백·브레헤르 주교를 비롯하여 독일인 신부 18명, 동 수사 17명, 동 수녀 3명이 6·25 전란 이전에 공산군에게 잡히었는데, 이들 중 백 주교를 비롯한 몇몇 늙은 성직자 이외에는 그들의 간 곳을 알 도리가 없다.

백 주교는 6·25 전란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석방되어 홍콩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전후 5년 동안에 걸쳐 겪은 고생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말미암아 1950년 11월 2일에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나남에서 평양 감옥에 옮겨졌던 덕원 교구의 신 사우에르 주교도 오래 동안 앓던 해소병과 고생으로 말미암아 그해 2월 7일에 77세의 낡은 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포진으로 끌려간 성직자들 중에서도 굶주림과 추위로 옥사한 이가 11명이나 나오게 되었다. 서울 바오로 수녀원의 원장이던 베아뜨릭스 수녀는 1950년 11월 3일에 75세로 옥사하고, 동 수녀원의 지도 신부이던 우·빌모(Marie-Pierre Paul Villemot, 萬一模)는 11월 9일에 81세로 옥사하고, 서울 혜화동에 있던 갈멜(Carmel) 수녀원의 지도신부이던 공·공베르(Antoine-Adeadot Gombert, 孔安國)는 다음날에 76세로 옥사하였다.

공 신부의 동생으로서 인천 바오로 수녀원의 지도신부로 있던 공베르(Julien-Marie Emile Gombert, 孔安世)는 그 다음날에 74세로 옥사하고, 교황 사절이던 방·번 주교는 11월 25일에 옥사하였다. 이 밖에 불란서 신부 2명, 독일 신부 1명, 애란 신부 1명, 벨기 수녀 2명이 1951년을 전후하여 옥사하였다.

【평양 수복과 중공군 침입】

이러는 사이에 한때 낙동강(洛東江) 지대까지 쳐내려왔던 북한 공산군은 유엔군의 공격을 받고 물러가기 시작하여, 1950년 9월 27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10월 19일에는 평양조차 내놓으면서 북쪽으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에 서울의 노 기남 주교는 평양 교구의 신부이던 캐롤을 거느리고 11월 12일에는 평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노 주교는 평양 교구장이던 홍 용호 주교가 그해 5월 14일에 공산군에게 잡혀간 후 간 곳을 모르게 되었으므로, 11월 20일자로 캐롤 신부로 하여금 평양 교구장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이리하여 캐롤 신부가 부서진 성당을 수리하면서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11월 27일부터 90만의 중공군(中共軍)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때 국경 지방까지 다다랐던 유엔군이 하는 수 없이 작전상 물러서게 되니, 노 주교 등도 많은 피난민의 뒤를 따라 평양을 버리고 12월 1일에는 서울로 돌아오고, 12월 12일에는 노인 성직자들과 늙고 어린 교우들을 기차편으로 대구 및 부산 지방으로 피난케 한 후, 1951년 1월 4일에는 그 스스로가 대구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대구조차 위태롭다는 정보를 듣고 그는 성직자, 신학생 및 늙고 어린 남녀 교우 1천 80명을 부산으로 모아 1월 17일에는 이들을 제주도로 옮기고, 1월 20일에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휴전과 전교 개시】

바로 이 때 미국에 있던 장면 대사가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1월 28일에 귀국하게 되니, 노 주교는 2월 4일에 부산 중앙 성당에서 많은 교우들이 모인 가운데 나라를 구제하여 주기를 바라는 뜻깊은 대미사를 드리고, 장 총리의 환영회를 열었다.

그리고 노 주교는 유엔군이 중공군을 38선 북쪽으로 몰아냄을 기다려, 3월 25일에는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 장 금구(莊金龜)를 먼저 서울로 보내어 남은 교우들을 다스리게 하고, 6월 23일에는 소련이 전쟁을 그만두자는 주장을 내세움을 보고, 그 스스로가 7월 22일에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휴전 교섭이 2년 동안을 끌어오다가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 겨우 그 조인을 마치게 되니, 그 사이에 경향 잡지사 사장이던 윤 형중(尹亨重) 신부는 서울로 돌아와 2년 동안 발행을 멈추고 있던 「경향 잡지」를 1953년 6월부터 다시 박아내어 수십만의 교우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하게 되었다. 이 잡지는 1909년부터 한 달에 한번씩 발행하던 것인데, 일제의 말기와 이번의 전쟁으로 두 번이나 발행을 멈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잡지에서는 그달 그달의 교회 소식을 묶어서 발표하여 왔으므로, 특히 해방 이후의 교회 역사는 이를 이용하여 쓰게 되었다. <이상은 유홍렬 박사 저술, 한국천주교회사의 제112장 6·25 전란 때의 교난 참조>

2005년 오늘의 북한 공산정권과 우리가 할 일.

* 한국천주교회는 북한 공산군에 의해 체포, 감금, 拷問, 獄死, 處刑, 流配, 失踪된 주교들과 신부들의 무덤이라도 알려주도록 이른 바, 親北司祭들을 통하여서라도 북한 정부에 요청해야 한다.

* 오늘의 북한 공산정권은 그 당시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 북한에 신앙의 자유가 없어, 성당이나 사제나 수녀의 入北 활동이 엄금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 오늘의 한국천주교주교회가 북한동포를 도와주되, 그 實體의 本質만은 제대로 정확히 알고서 돕도록 해야 한다.왜냐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천주교회에 대한 북한의 정책이 달라진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북한의 핵무기보다 더 걱정해야 할 것은, 唯物論 共産主義 無神論 思想으로 武裝한 자들이 본색을 감추고 變裝하여, 民主化鬪士, 人權運動家, 平和運動家, 慈善事業家, 環境保護運動家들 틈에 끼어, 民族自主니, 祖國統一이니 하는 표어를 내걸고, 남한 내 젊은이들, 특히 교회 내부에까지 침투, 그 조직을 확산하고, 先統一後信仰 자세로 信仰과 敎會를 弱化시키고, 無力化시키며, 瓦解시키고, 破壞시키며, 오히려 하느님 백성의 조직을 이용하려하고 있음을 정신차려서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민족화해니, 뭐니하고 떠드는 마당에 북한에서 무자비하게 처형된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만은 알려주면서 남북의 화해니,협력이니,민족 공조니니 하는 말들을 해야만 씨가 먹힐 것이다.

민족화해라는 말과 주장을 반대하거나 싫어할 자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화해의 내용이며, 최대의 장애물은 사상과 제도가 아닌가? 즉, 동족이라는 면에서 화해와 일치를 서로가 외치고 있지만 막상 화해나 통일로 들어서려는 문턱은 사상과 제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신론과 무신론의 화해나 일치는 극난한 것이다. 한쪽이 자신들의 무신론이나 유신론을 버려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협력하는 차원에서 공존하는 길밖에 없는데, 그 길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뿐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로 다종교 사회국가다. 그러나 북한은 말만 신앙의 자유니, 종교의 자유보장이니 할뿐, 성당부재, 성직자부재 사회임은 전 세계가 다 잘 알고 있다.

단일 사상체제의 탈레반처럼 한가지 사상이나 신앙만을 강요하고
여타의 신앙이나 사상이나 제도를 부정, 억압, 타도할 때,화해니, 공조니, 공존이니하는 주장은 속임수임을 천하가 다 알기 때문에 우리나라 남북화해의 길은 우선 북한이 과거 반세기 전에 처형한 천주교 성직자들의 무덤이 없어졌다면 그 처형장소라도 알려주고, 각 도시에서 몰수한 천주교회의 성당들이나 그에 상응하는 교회용 대지라도 제공하면서 적어도 남한의 천주교 신부 5천여명 중 1%에 해다아하는 50명의 사제들만이라도 받아들이고, 남한의 1만여명 수녀들의 1%인 100여명의 수녀들만이라도 입국활동을 보장하여야 진정한 의미의 화해나 공조나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그런데 화해나 공조나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에서의 신앙자유까지 포기하도록 추진하는 것은 천주교신자 500만, 기독교신자 1500만, 약 2천만명의 인명피해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입력 : 2005.03.10 오전 10: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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