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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最初의 講學 場所가 天眞菴이라는 史實의 再確認 -2..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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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最初의 講學 場所가 天眞菴이라는 史實의 再確認-1"에 계속>

石徑細如線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昔我童時游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
紅葉題詩處 일찍이 “붉은 잎”을 題目으로 받아 詩를 짖던 이곳을,
重來愴客心 이제는 나그네로 다시 찾아오니 내 마음 한없이 슬프기만 하도다.
豪士昔講讀 이곳은 호걸(豪傑)과 명사(名士)들이 일찌기 講學하며 讀書하던 곳이지,
尙書此燒鍊 우리는 여기서 尙書를 한권씩 외운 후 불살라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寅緣慙講德 이제 전처럼 새벽부터 德目 외우기는 부끄러워 차마 못해도(三德誦?),
書帙見隨陰 산그늘지니 마음놓고 책(祈禱書,?)만은 전처럼 읽어본다오(晩課?).
[…]
前?凄迷不可求 옛날처럼 그대로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고나.
破瓦耕?壘壘丘 집터도 耕作하려나 기와 조각은 모아다가 수북수북 쌓았는데,
禪房無處舊人求 그 때 함께 勉學하던 禪房親舊들은 다 죽어서 어딜 가도 다시는 찾아서 구해올 곳이 없네.
樓前寮舍半墟丘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절반이 문허져 모두 빈 터인데,
三十年來重到客 삼십년만에 지금 내가 나그네 신세가 되어 다시 찾아오니,
猶然苦海一孤舟 나는 아직도 괴로운 바다에 뜬 외로운 배 한 척의 신세로세.

嚴冬雪寒에도 天眞菴에서 10여일씩 講學會를 열던 젊은 先覺者들

1777년과 1778년 1779년에 당시 10代의 少年 선비들은 천진암에서 겨울에도 講學을 하였다. 당시에는 宗敎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天主敎도 天學이라고 불렀다. 기록자들에 따라 天眞菴에서의 겨울 講學會 개최년도를 다블뤼 주교는 丁酉年(1777년)이라 하고, 다산 丁若鏞은 己亥年(1779년)이라 하고,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年(1778년)과 己亥年(1779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결국 천진암에서의 講學會는 수차례 자주 개최되었음이 분명하다. 丁酉年을 놓고 보면 당시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총억 14세, 이벽성조 23세, 이승훈선생 21세, 등이었다. 산너머 41세의 권철신 대학자도 관여하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부터 온종일 저녁까지 글을 읽고 토론을 하였으며 朱子의 性理書 76권에 나오는 敬齊箴 四勿箴 등의 글을 講學 자세 紀綱을 위하여 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학은 練修會 성격을 띤 講學會였다.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天眞菴에서 講學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雪中인데도 李檗이 밤중에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키고 經書를 談論하였다. 그후 7년(1785년),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성대한 잔치는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 7년은 명례방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1785乙巳年의 秋曹摘發事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천진암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겨서 그 후 7년부터는 다시는 못했다함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7년까지는 종종 천진암 모임이 있었다는 뜻과, 그 천진암 강학, 즉 그 모임이 허구 많은 유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생소한 天學에 관한 것임을 말하고 있으니, 안산, 여주, 양근, 등에서 儒林들이 개최하는 유교적인 강학이나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嚴冬雪寒 深夜에 廣州山脈을 넘던 李檗聖祖의 天眞菴 講學會 參席熱誠
- 聖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천진암 강학회를 기록하고 있는 또다른 역사 기록은 바로 다블뤼 주교의『朝鮮殉敎史 備忘記』인데, 그 번역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丁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다른 스님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e)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edifice.:譯註 天眞菴을 말함)에 居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人間本性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 主日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음력으로 7일,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靈魂 修練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 즉 禁肉齋를 지켰다.”

여기서 ‘l'edifice isole et perdu’란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凶家나 廢家屋을 의미하는데, 茶山 丁若鏞 先生은 그후 天眞菴을 찾아와 지은 詩에서, “寺破無舊觀, 즉 천진암 절간은 그나마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에 저술된 洪敬謨(1774~1851)의 『南漢志』에서도, “天眞菴은 鶯子山에 있는 오래된 헌 절인데 지금은 製紙工場이 있어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在鶯子山 爲古寺 造紙物 今屬司饔院)”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동시대에 茶山도, 다블뤼 주교도, 洪敬謨도 모두 天眞菴은 폐허가 된 옛 헌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講學 당시 天眞菴은 鶯子山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뿐인 거의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가는 시설물이었다.

정약용이 기록한 기해년(1779년)의 講學會나, 다블뤼주교가 기록한 정유년(1777년)의 講學會나 모두 한겨울에 폭설이 덮힌 앵자산을 이벽성조께서 힘들게 넘으셨다는 것을 보면, 講學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시작했던 것이고, 또 폭설로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또, 광암공이 道場을 차리고 있는 天眞菴에 曠菴이 으레 있으리라 믿고 모두 모였으나, 광암공이 뜻밖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 보다는 이왕에 왔으니, 講學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녹암 권철신에게 공부할 겸 무슨 가르침을 들으러 정약전 이승훈 등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權哲身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 執贄請敎於鹿菴之門[…]) 曠菴公은 權哲身이 잠시 寓居하던 주어사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다시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天學 공부와 天主敎 신앙의 열성으로 嚴冬雪寒에 숨박꼭질을 하면서 廣州山脈을 넘나들던 젊은 선비 광암공의 열의와 노력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강학 모임은 폭설이 쌓이기 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설중에 주어사로 찾아간 광암공은,자신보다 연장자이며,당시 저명한 대학자 녹암 선생이 천진암에 와서 계시다는데,아무리 산이 높고 험해도, 그 밤으로 넘어야만 하였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李檗聖祖께서는 1770년부터 1783년까지 山 속 隱遁處에서 天學 硏究와 實踐에 專念
-풀로피낭 대신학교 역사 교과서(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천진암 강학회에 대한 기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자료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1885년 Pullo-Pinang의 『天主敎大神學校 歷史 敎科書』와 1911년에 英國 Longford 교수가 집필하여 발행한 『The Story of Korea(鷄林八道誌)』이다. 曠菴 李檗聖祖를 중심으로하는 自發的인 天主敎 硏究와 講學會 개최 및 信仰實踐 試圖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Pullo-Pinang의 교과서는 李檗, 丁若銓, 權哲身, 등의 天學 硏究期間을, 1770년부터 10년간으로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일부 博士들은 조용한 산골에서 隱遁생활을 하면서 哲學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중에 널리 알려진 가장 저명한 학자 중에는 李檗이라고 부르던 李德祖와 權哲身, 丁氏네 형제들, 특히 丁若銓과 丁若鏞, 등이 있었다. 이들은 人間本性과 하늘과 땅에 대한 갖가지 의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서적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영혼과 德行과 惡習과 神의 攝理에 대한 천주교 교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훌륭하다고 판단하고 나서, 즉시 자신들의 생활관습까지도 십계명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게 일치시켜 살아나가도록 결정하고 실천하였으니, 이는 1770년경부터였다.”

Longford 교수는 李檗, 丁若銓, 등이 隱遁處에서 天學硏究와 修練에 몰두하였던 기간은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으로 斷定하여 記述하고 있다.

“1720년에 朝鮮 使臣이 北京에 와서 선교사들과 많은 對話와 討議를 하였고[…] 그들이 사가지고 간 책들을 50년간 조선의 양반 학자들이 단체별로 읽고 토론하게 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남은 일생을 그 교리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 중에 훌륭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조상대대로 벼슬에까지 올랐던 집안의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李檗이라는 분이고, 별명이 “돌로 된 담벼락”이라고 하였다. 李檗은 1783년 이승훈을 北京에 파견할 때까지 13년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며 실천하여 거기에 아주 깊이 深醉되어 있었다.“

광암 이벽성조를 주축으로 이렇게 천주교 신앙실천운동을 하던 천진암의 공동체가 세례를 받아오도록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다블뤼주교의 기록, 모방신부의 편지 등에서 보았었다. 특히, 이 파견은 단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천주교회역사의 독특한 특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즉, 다블뤼 주교는 “李檗이 여러 해동안 갖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 虛事였고([…]plusieres annees[…]infructuoses[…]), 李承薰先生 파견의 경우 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聖 모방신부도 “또 다른 代表者(un autre delegue)로 이승훈을 보냈다”는 말, 특히 [다른 代表者]라는 문장의 앞뒤에서 “[…]autre(다른)[…]autre(또 다른)[…]autre(또 다른)를 3번씩이나 이어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번 사람들이 왕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代理者(representant)”가 아니라, 한 組織的인 團體의 代表者(delegue)”라는 말은 외국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天主敎信仰人들의 共同體가 있어서 이를 代表하는 資格을 주어 보내었다는 뜻이다. 즉, 공동체의 首長이었던 광암 공이 자신을 대리하여, 자기들 총림의 대표자로 보낸 것이다. 이는 교회창립 면에서의 독특성과 함께, 세계 宗敎史에 없는 실로 감탄할만한 역사이다.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의 來歷

그러면 광암이벽성조의 讀書處가 있었고,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약 10여년 간 修學하고 講學을 하던 天眞菴에 관하여 살펴보자.

천진암은 本來 檀君影幀 [天眞]을 모시고 山祭祀, 堂山祭, 山神祭 등을 올리던 天眞閣 혹은 天眞堂이라는 작은 草家 堂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天眞庵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廢刹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丁若鏞 선생의 글에, “天眞菴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다(寺破無舊觀)”하였고, 1797년 丁巳年 당시 洪敬謨의 南漢志에서는, “天眞菴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寺饔院)”고,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聖다블뤼 主敎는 젊은 선비들과 함께 李檗선생이 講學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廢家이었다(isole et perdu)고 1850년경에 기술하였다.

1779년 당시 李檗 聖祖 25세,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3세, 李寵億 15세, 權哲身 43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특이한 天主敎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儒敎 書堂에서나 正常的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되어가는 天眞庵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etudes profondes), 天主敎眞理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天眞菴은 바로 儒?佛?天이 合流한 곳이고, 朝鮮天主敎會가 시작된 韓國天主敎 發祥地이다.

그런데 丁若鏞 선생은 종종 [天眞菴]에서 [菴]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共詣天眞” 또는 “天眞之遊”, “天眞消搖集”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韓.日.中, 동양 3국에서는, 불교의 암자를 항상 [庵]이라는 한문 글자로 쓰고 있는데, 유독히 정약용 선생만이, 또 정약용 선생도, 유독히, [천진암]에 대해서만, 종종, [天眞庵]이라고 하지 않고,[天眞菴]이라고 하는 이유는, 필시, 당시 남인계 선비들,특히, 천진암에 자주 모이거나, 관련이 있는 이들의 號가 [菴]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즉, 俟菴(丁若鏞), 巽庵(丁若銓), 曠菴(李檗), 鹿菴(權哲身),稷菴(權日身), 順菴(安鼎福), 伏菴(李基讓), 등에서 볼수 있듯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曠菴 李檗 聖祖께서 천진암을 根據地로 활동하신 바가, 丁若鏞 선생의 글에도 보이는데, “己亥年(1779년)에 天眞菴에서 講學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李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丁巳年(1797) 端午날에 둘째 형님(丁若銓)과 天眞菴에 와보니, 李檗의 讀書處, 곧 이벽의 修學 道場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端午日陪二兄遊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하였고, .

1827년 65세로 천진암을 찾은 茶山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 聖祖께서 講學하시고 讀書하시던 天眞菴의 講學堂, 讀書處, 寄宿舍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이미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賢豪氣相投/豪士昔講讀/尙書此燒鍊/樓前寮舍半處丘/寮院無逾?/荒寮草色深/破瓦耕?疊疊丘).

이렇게 천진암 1770년부터 1784년초까지, 약 15년간 젊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서 독서와 강마(講磨)에 열중하던 성지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하여, 특히 이벽성조와 천진암 성지에 관하여는 천진암 성지에서 발행된, [간추린 우리나라천주교회 창립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역사적 현상이나 사실은 갑자기 돌출하는 것이 아니라, 先後, 左右, 上下, 內外, 표리(表裏)의 모든 史實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하면서 이루어내게 되어 있기에, 역사학도는 항상 종합적으로 전체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발상지는 그 종교의 창시자나 혹은 창업의 주역 인물들이 창업준비나 실천을 위하여 거하던 본거지를 말하는 것인데, 천진암은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주역인 이벽 광암 공의 [讀書處], 곧 연구 실천의 道場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완하는 정학술의 李檗傳과 다불뤼 주교의 강학회 장소 설명, 등으로 충분히 확인되므로, 모를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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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1.17 오후 10: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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