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Walter Kasper 추기경의 천진암 성지 연구소 변기영 몬시뇰 서재의 고문서 일부 열람 !
Daveluy 主敎의 비망기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친필 고문헌들의 관계는?
韓國 殉敎者 歷史를 위한 備忘錄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vol 4
(5 - 29 쪽)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vol 4
(5 - 29 쪽)
<한 국 천 주 교 회 창 립 사 연 구 원에서.>
(朝鮮에 있어서 천주교의 起源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을 우리가 얻어낸 자료들은 丁若鏞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丁若鏞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는데,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관계하였으며 거의 모든 천주교 지도자들과 인척이거나 친구 사이였다. 학문과 관직에 있어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천주교를 저버리는 나약함을 보였음에도 1801년 유배를 면치 못했다. 수년 후에 赦免을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심행위와 모범적인 苦行의 실천에 오랫 동안 온 힘을 기울였으며, 지극히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보이며 죽었다. 한 편으로 그는 天主敎에 관한 몇 가지 글을 남겼는데, 우리가 한 일은 대단히 잘 쓰여진,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나 짧은 그의 기록들을 단지 옮겨 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朝鮮王國에 天主敎의 胎動을 일으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는 字를 德祖라 하고 號를 曠菴이라 하는 李檗이었다. (李)檗은 慶州 李씨로, 高麗朝 때부터 이미 지위가 높았던 그의 조상들 가운데에는 학문이나 벼슬로 뛰어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의 家門은 증조부 이후로 武官職에 종사하였고, 이 새로운 부문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오고 있었다. 檗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資質을 갖추고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은 武官 벼슬을 얻는 데 필요한 활쏘기, 말타기 등의 훈련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檗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끈질기게 거부하였다. 이 일로 그는 부친의 애정을 잃었고, 부친은 지나치게 고집이 센 그의 성격을 가리키는 ‘벽’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자라면서 檗은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해졌다.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활달하고 잘 생긴 그의 風采는 당당하였고 당연히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의 재주도 이처럼 뛰어난 外樣에 지지 않을 정도여서, 유창한 言辯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견줄 만하였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智力을 타고난 그는 오직 事物의 理致와 學說의 참된 토대만을 추구하였다. 언제나 事物의 根本을 파고드는 데 몰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經典을 공부함에 있어 그 깊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처럼 좋은 소질은 개인적으로는 빛나는 미래를 그에게 보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고, 자신의 일에 성공을 기하기 위하여 학문에 있어 자신을 도와주고 이끌어주고자 하는 모든 지식인들과 交分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관습이나 예의에 거의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고귀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직업적인 학자들을 구별시켜주는 벼슬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이상이 당시 자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李檗의 모습이다.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鄭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자 어떤 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도처의 길은 눈에 덮여있었고, 거리는 백 리도 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들이 학문과 지혜를 그토록 갈망하는 열렬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길을 떠났고, 험난한 길들을 나아가면서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지는 해도 그가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으며,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에 다달았다. 그러나 자신이 절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모든 승려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山中의 외딴 건물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인간본성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 위에 偉人들의 倫理經典들을 연구하였고, 유럽사람이 漢文으로 쓴 철학서적과 수학서적 몇 권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마침내 연구와 토론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몇 권의 초보적인 서적에까지(이 책들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미치게 되었다. 이 서적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당시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攝理,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七罪宗을 그에 상대되는 일곱가지 德으로 물리치는 修行法 등을 다룬 몇 권의 槪論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中國經典들의 막연하고 모호한 학설에 익숙해있었어도 眞理를 渴望하던 그 곧은 사람들은 우리 聖敎의 기초원리를 검토하자마자 그 敎理에 담긴 위대하고 아름답고 확실한 모든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책이 없었으므로 이 교리를 더이상 깊이 연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즉시 감동되었고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렇듯 眞理는 언제나 그 標識를 同伴하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진리의 빛은 이를 찾는 모든 이들의 눈에 빛나고,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리가 행복의 싹처럼 심어주는 느낌에 무감각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 나라에서 학문에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된 것을 보자니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가!) 이리하여 지혜를 추구하던 우리 주인공들은 聖敎에 젖어들게 되었고, 그 명확한 원리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黙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영혼 수련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를 지켰다. 그들이 이러한 수련을 얼마동안이나 지속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비리에 이를 행하였다. 그런데 뒤이은 사실들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그들중 대부분은 이를 오래 지키지는 못한 듯하다.
檗의 열렬한 마음에 풍요로운 씨앗이 심어졌다. 이러한 시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는 느끼고 있었고, 그의 모든 생각과 시선은 시작된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中國을 향해 있었다. 이러한 조바심 가운데 몇 년이 흘렀고, 그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바친 노력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 1783년 초여름, 4월 보름날, 누이의 忌日을 맞아 마재 丁씨네에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檗은 丁氏 두 형제 若銓, 若鏞과 함께 배에 올랐다. 한양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철학적 대화와 연구였다. 조선의 책 몇 권을 검토한 다음, 그들의 정신은 서양인들의 學說에 이르렀다. 그들은 天地와 인간의 창조,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그리고 來世에 천당과 지옥에서 받는 賞罰 등의 道理에 대해 차례로 자세히 토론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 道理의 참됨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기분좋은 진리를 처음 듣는 여행객들도 모두 놀라고 기뻐하였다. 그 무렵에 이런 토론모임이 되풀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檗의 끓는 열정이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西學 서적들에 대해서, 그리고 또한 천주교에 관한 몇 권의 서적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보았거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문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北京에 연례적으로 가던 사절단을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천주교 敎理의 초보적 개념들이 널리 유포되어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의 서적들은 聖敎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天主를 찾는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天主께서는 그해를 곧은 영혼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는 해로 삼으셨다. 그해 1783년 겨울 李東郁이 北京 朝廷에 가는 書狀官으로 임명되었고, 아들 李承薰도 따라가게 되었다. 장차 여러 해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될 이 대단한 인물에 대해 소개할 시점이 지금이다. 李承薰은 字가 子述이고, 平昌 李氏 양반 가문 출신으로, 조상들은 文官의 要職을 자주 맡았었으며, 그의 家門은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1756년(丙子年)에 태어난 李承薰은 열 살때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열아홉, 스무 살에는 벌써 온 나라에 뛰어난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옛 聖賢들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李承薰은 학문과 品行이 더 나은 사람들과 교제하였으며, 學識을 높이는 일 뿐 아니라 品性을 가다듬는 데에도 애를 썼다. 李檗과도 아는 사이였지만 취향이나 성품이나 공부의 차이로 인해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지는 못하였다. 25세 되던 1780년(庚子年)에 進士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李檗은 承薰이 北京使節團에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承薰을 찾아갔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李承薰에게 이런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네가 北京에 다녀오게 된 것은 참된 道理를 알도록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호의 기회일세. 萬物의 創造主이신 上帝를 恭敬하는 데 대한, 그리고 여러 聖人들에 대한 道理는 西歐人들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네. 이 道理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心性을 바로잡을 수도 없고, 事物의 원리를 깊이 알 수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과 백성의 여러 가지 의무를 어찌 알겠는가? 그것 없이 생활의 원칙도 없고, 天地의 창조, 天體의 물리적 질서와 규칙적 運行, 兩極의 질서 등을 우리가 알지 못하네. 天使와 惡靈의 구별, 세상의 始初와 終末, 靈肉의 결합, 善惡의 理致, 죄를 赦하기 위한 天主聖子의 降生, 善人에 대한 천당 報償과 惡人에 대한 地獄罰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네.” 천주교 서적을 아직 보지 못했던 李承薰은 이러한 말에 크게 놀라고 감탄하면서 그런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는 천주의 존재와 標徵에 대한 초보서적들과 <七克>을 훑어보고 난 뒤, 행복감에 사로잡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檗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물었다. 檗은 承薰에게 이렇게 말을 계속하였다.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표시일세.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生死에 관한,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承薰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마치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으며, 공동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약속하였다. 檗이 한 말을 살펴보면, 檗은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똑같이 목말라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지 않은 말 속에서도, 그의 智力은 이미 천주교를 세계와 사회의 토대로 이해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이번 일이 그에게는 오직 唯一無二하게 긴요한 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가 곧 시작하게 될 大業, 즉 처음 천주교의 씨를 전파하는 大業을 天主의 恩寵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벌써 준비시키신 것이다.
承薰이 드디어 北京으로 떠났다. 北京에 도착하자 南堂을 찾아가 통(湯) 알렉산델 主敎를 만나 가르침을 청했다. (바로 알렉산델 구베아 主敎로서, 프란치스코회 제 3회원이었으며, 中國 儀禮에 관한 敎皇令을 北京 敎區가 따르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 분이다. 북경에서 감금생활을 할 때 알게된 유명한 Caradre de St. Martin 주교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중국이름이 湯인 구베아 주교는 중국이 자랑할 가장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요, 가장 위대한 주교 가운데 한 분이었으며, 포르투갈 國籍이었다.) 그는 또 索德超라는 서양사람을 만났는데, 나이가 90이 넘었는데도 아직 건강하였으며 태도가 상냥하였다. 그외에 梁이라는 이름의 젊은 사람도 만났다. 네 곳의 성당에 오륙십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열심히 천주교를 공부하여 세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고, (아마도) 梁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때, 조선인 가운데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동포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조선천주교회의 주춧돌이라는 의미에서 洗禮名을 베드로라 하였다. 아마 그 때가 1784년 초였을 것이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이 많은 책과 십자가와 像本 등과 몇 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주었는데, 이 물건들은 나중에 王宮으로 보내졌다. 1784년(甲辰年) 봄, 承薰은 이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가장 급한 일은 檗에게 책, 십자가, 像本 등을 보내는 것이었다. 檗은 초조함에 발을 구르며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책들을 받자마자 집을 한 채 빌려 꼼짝도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목타는 사람이 샘물을 만난 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영혼이 말그대로 배고프고 목말라하던 진리를 찾아 깊이 탐구하는 데 얼마동안 푹 빠져있었다.
다른 모든 생각은 멀리 내던져지고, 완전히 새로운 靈的 生命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천주교와 迷信排斥에 대한 새로운 증거와, 七聖事에 대한 解說, 基本敎理書, 福音書들에 대한 註釋, 매일매일 기념하는 聖人들의 行蹟, 그리고 꽤 완벽한 祈禱書 등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야 그는 천주교의 전체 모습과 상세한 내용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오직 온 나라를 更生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얼마간 연구한 다음 承薰과 丁若銓, 若鏞 두 형제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道理이고, 참된 길이 여기에 있네. 위대한 천주께서는 우리나라 萬百姓을 불쌍히 여기셔서, 세상 救贖의 善業에 널리 同參케 하고 싶어하시네. 이는 천주의 명령이니, 우리는 應하지 않을 수 없네. 천주교를 널리 傳播하고, 온 세상에 福音을 전해야 하네. 온 세상을 십자가 깃발 아래 불러모으려 十字軍 遠征을 외치던 隱者 베드로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 길로 그는 몇몇 친구들 집에 찾아갔는데, 이들은 中人계급이었지만 모두가 學識과 德行으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그 친구들 대부분은 설교를 듣자마자 즉시 檗의 활기있고 예리한 말에 굴복하였다. 이들은 崔昌顯, 崔仁吉, 金宗敎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를 통해 四方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檗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로운 종교에 관한 소문은 금방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모든 大事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반대자들이 나타났다. 많은 양반들과 선비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儒敎에 매여있고 젖어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교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뺏어가리라는 것을 잘 알았으며, 자신들이 지켜오던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또 바른 眼目을 가진 몇몇 사람은, 새 종교에 있어 얼핏 보기에 나쁜 길로 이끄는 황당무계한 迷信이라고 생각되어질 만한 부분이 소개되지 않도록 힘을 쏟았다. 한 편 모든 善의 적들은 眞理 때문에 자기 쪽이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자신의 정복자에 대한 崇拜가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편안한 눈길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께서 통치하는 데 반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李家煥은 조선에서 가장 지체높은 가문 가운데 하나요, 당시에도 여러명의 유명한 학자들로 빛나던 집안 출신으로,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학식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벌써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모든 계층에 천주교가 신속히 전파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이거 아주 큰 일이로다. 이 외국교리가 비록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으나, 우리 선비들의 道는 아니다. 李檗이 이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니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하리라.” 討論 日時를 정하고, 李家煥이 李檗의 집으로 나아가니, 그 굉장한 論戰을 구경하려고 양쪽의 친구들과 호기심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우선 李家煥이 자신이 誤謬라고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檗을 되돌리고자 시도하였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李檗은 그의 말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는 상대방의 주장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논리 전체를 무너뜨려 분쇄하였고, 外敎人 학자는 버티어보려고 애썼으나 헛일이었다. 檗의 명쾌하고 명석한 발언은 사방에 빛을 내뿜었다. 항상 前後가 일치하고 이치에 부합하는 한 편, 더욱 강력한 증거를 내세워 점점 더 드러나게 하기를 계속하였다. 상대방의 논리를 모두 뒤집어 엎는 李檗의 明哲함은 태양처럼 빛났다. 그의 공격은 하나하나 적중하였으며, 바람처럼 몰아치고 날카로운 칼로 가르는 듯 하였다.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드문 壯觀을 맛보았다. 그것은 難澁한 중국 학설들로 이루어진 구태의연한 學派의 우두머리가 공번된 眞理(福音의 光明)의 겸손한 守護者와 벌이는 싸움이었다. 사람들은 뛰어난 두 학자가 치열한 싸움을 갖가지 방법으로 번갈아가며 전개하는 것을, 그리고 온갖 기교와 재능을 동원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眞理의 支柱인 한 쪽은 조금도 휘어짐이 없이 꼿꼿한데, 다른 한 쪽은 그 柔軟性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막을 갑옷이 없어 끊임없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듯하다가 곧 또다시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천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은근히 몸을 떨었고, 반면에 천주께 충실한 마음들은 기뻐 두근거리고 행복한 기분으로 설레였다. 이렇게 유례없는 무대에서 승리를 거둔 신앙은 새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진실되고 곧은 영혼들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檗이 상대한 무서운 적을 완전히 항복시키기 위해서 하루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조목조목 거듭된 토론은 사흘간 계속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새로운 교리의 아름다움과 넓음과 단단함이 더욱더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지치고 무너지고 굴복한 李家煥은 더이상 내놓을 거리가 없어지자 이렇게 기억할 만한 말을 하였다. “이 道理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터인 즉, 어찌할꼬?” 그는 물러나 돌아가서 이후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이상 입을 여는 법이 없이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유명한 論戰의 모든 이익과 영예는 檗에게 돌아갔다. 眞理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나가 도처에서 새 추종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의 확장과 소문난 토론회의 결과를 접하고 또다른 적수가 나타나, 직접 이 종교의 원리를 들어보고 자기도 그 守護者들과 論爭을 벌여보고자 하였다. 그 사람은 李基讓으로, 당대에 두드러진 博識과 지체높은 가문으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 거둔 성공들보다도 진리에 의해 더 힘을 얻은 檗은 對面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기꺼이 討論을 받아들였다. 그는 論敵 앞에서 天地의 이치, 세계와 그 모든 부분들의 아름다운 秩序, 四元素의 調和, 그리고 天主 攝理의 여러 가지 원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또 인간 영혼과 그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한 교리, 각 사람의 이승에서의 행실과 來世에서 받게되는 賞罰 사이의 놀라운 일치를 설명하고, 그리스도교의 명백한 진리가 굳건하고 손상시킬 수 없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한 마디로 직접 만져보도록 해주었다. 李基讓은 토론을 더 지속할 수 없었고, 감히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믿는 듯 하였으나 이를 솔직히 고백하고 실천에 옮길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그가 물러간 뒤 檗은 두 학자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두 李씨는 대답할 말이 전혀 없으니 토론을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저들을 신용할 수 없다. 기대할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檗은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福音이 신속히 전파되는 것을 조만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이 거룩한 사업을 확장시키고 지속시키기 위하여 檗은, 그 학문과 명성으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여론을 휘어잡을 만한 인물 몇 사람을 토대로 삼으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거론된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기대하지 않고, 揚根의 한 집안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 집안은 신앙의 빛을 맨처음 받았으면서도 그 이후로 이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權씨 집안이었다. 이 이야기의 처음부분에서 소개된 바 있는 權씨 집안은 高麗 때부터 높은 벼슬을 지냈고, 왕조가 바뀔 때 새 임금 쪽에 가담한 가장 충성스러운 가문들 가운데 포함되었으며, 이후 文章이나 벼슬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을 계속 배출하였다. 그런데 그때 號를 鹿菴이라 하는 權哲身이 있었는데, 다섯 형제의 맏이로서 모두가 그 학문과 德行으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세째인 稷菴 權日身도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있었다. 이 집안은, 친척 중에도 뛰어난 사람이 많았을 뿐 아니라, 이들 곁에서 학문과 德望의 滋養分을 얻고자 전국 각처에서 몰려온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檗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끌어들이도록 노력하여 이 나라 천주교의 뿌리와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같은 해 甲辰年(1784) (음력) 9월에 檗은 말을 타고 揚根 고을 감산에 있는 그 집으로 갔다. 도착하자 마자 천주교 전반을 깊이 검토하고 폭넓게 토론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眞理가 환한 빛을 발하면서 드러났다. 나중에 本名을 암브로시오라 한 맏이 哲身은 나이가 쉬흔 가량으로, 중국 經書의 哲學과 倫理를 깊이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의 빛에 저항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엄청난 연구작업의 성과를 한 순간에 저버릴 결심을 할 수 없었고, 檗은 당장 그에게서 열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얼마 후에야 신앙을 실천할 결심을 하였는데, 일단 시작하고 나서는 변함없는 신앙심과 뛰어난 행동으로 빛을 발하여, 나중에 보게되는 바와 같이 영예의 冠을 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日身은 檗이 이 집에 올 때 기대했던 바대로, 대단한 열심으로 즉각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두 눈은 빛나는 열의로 가득찼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자 마자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어서 자기 집안 모든 남녀 식구들을 가르쳤고, 또한 친구와 친지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하였는데, 그의 학문과 덕행과 이름에서 비롯된 권위로 인해 전적인 성공이 보장되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열의와 열성을 바쳤던지, 揚根 고을은 가히 조선 천주교의 搖籃으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가 앞서 본 바대로 北京에서 영세했던 李承薰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李檗과 權日身에게 세례를 준 것도 분명히 이 무렵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건 완벽하고자 하였으므로, 本名도 숙고하여 재치있게 선택하였다. 檗은, 한 편으로 그 높은 생각과 고귀한 행동을 볼 때,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천주교 연구를 도처에서 시작하게 하고 그리하여 이 나라에 救世主가 오시는 길을 마련함에 있어 그의 열정이 그로 하여금 맡도록 한 역할을 볼 때, 두 사람의 使命에 어느 정도 타당한 유사성을 찾아본 듯, 本名을 洗者 요한이라 정하였다. 日身은 현명한 정신과 더불어 열렬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동포들에게 복음을 널리 전하는 데 몸바치고자 하였으므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聖人을 主保로 모셔, 동양 전체에 그 음성이 울려퍼졌던 이 성인을 表樣으로 삼아 따르려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 이름으로 그를 부를 것이다.
이 세 뛰어난 인물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고귀한 길로 꾸준히 나아갔으며, 신앙을 받아들일 만한 듯한 사람들의 눈에 신앙의 빛이 빛나게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朝廷으로부터 금지 조치가 없었고, 모든 것이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반대자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이 나라의 정신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진리가 싸움을 거치지 않고는 확산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뻔히 보이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온갖 종류의 폭력이 염려될 만하였다. 어찌 되었건 각자는 자신의 계획을 밀고나갔고, 신앙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때까지 진정한 敎人들은 주로 한양과 그에 인접한 지방에 몰려있었다. 그러나 攝理의 때가, 즉 숨겨져만 있을 수 없는 그 빛이 더욱 먼 지방에까지 전해져야만 할 때가, 그리고 수많은 장님들의 눈을 뜨게 하여 온순한 상태로 救世主 救贖者의 발아래 데려갈 때가 와있었다.)
특히 權 사베리오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자신이 직접 한 일이건, 제자들이 한 일이건,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나중에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本名으로 불리게 될 이단원 또는 李存昌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다.
李 루도비코는 정직한 농부 집안 출신으로, 內浦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넓은 평야 옆에 자리한 충청도 천안 여사울 마을에 살고 있었다. (內浦는 바닷물이 밀려드는 수많은 운하가 지나가는 드넓은 평야인데, 한양의 곳간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비옥한 穀倉으로 유명하다. 潮水에 대한 서술 참조)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자연의 비밀을 넓고 깊게 공부해보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어떤 위대한 스승 곁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자기 고장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權씨 家門의 名聲에 마음이 끌려, 權씨 형제를 찾아가 그들의 제자가 되었다. 權 사베리오는 이 제자의 훌륭한 정신과 뛰어난 자질이 마음에 들어 보살펴주고 있던 중 서양 교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제자에게 천주교를 전해주었고, 이 제자를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뿐 아니라 특히 그 모든 계율을 실제 실천하도록 단단히 교육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이 일에서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된 李 루도비코는 자기 가족과 친지들을 가르치고 온 힘을 다해 천주교를 전파할 사명을 스승으로부터 부여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스승의 이러한 지시에 충실히 따랐던 李 루도비코는 곧바로 자기 가족과 주변사람들과 수많은 親知들을 입교시켰는데, 이들은 그의 학식과 덕행에 끌려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이었으며, 루도비코는 이들의 정신과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權 사베리오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던 유명한 內浦지방 천주교회는 조선 교회 안에서 항상 커다란 빛을 발하여 왔는데, 이렇게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어, 뒤에 우리가 보게되는 바대로 빛나는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전라도 지방에 천주교를 전하고, 이 지방 천주교회를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운 영예도 權 사베리오에게 돌아갔다. 아우구스티노라 불리는 柳恒儉은 그 집안이 지체가 썩 높지는 않은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 지방에서는 상당한 평판을 누리고 있었고, 많은 재산으로 해서 꽤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이 지방 중심지인 全州에서 15리 정도되는 초남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글공부를 하여 능력있는 지식인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 새 종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또 이 종교를 믿는다고 알려진 유명한 인물들의 명성에 이끌려, 자기가 직접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름만으로도 그에게는 진리를 보장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천주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權씨 집안을 찾아갔다.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듣자 마자 그의 곧은 영혼은 승복하였고, 즉시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 곧바로 많은 수의 가족을 가르쳤고, 또한 친구와 친지와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열성 덕분에 그의 집안은 이 지방 천주교의 뿌리라고 할 만한데, 남쪽에 위치한 이 지방에서는 그 이후로 열심한 교인들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또 전라도 珍山 고을에 살던 尹持忠 바오로도 같은 시기에 金範禹를 통해 신앙을 전해받았는데, 金範禹에 대해서는 이제 곧 이야기할 것이다. 천주교 신앙의 용맹한 대표선수 尹持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미루었다가 나중에 그의 순교행적을 그릴 때 함께 하도록 하겠다. 한 편, 그는 적어도 生前에 자기 고장 傳敎에 큰 몫을 하지는 못했다.
좀 가까운 지역에서는 丁씨 집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若銓과 若鏞 두 형제가 檗과 함께 초기 講學會에 참여했음은 앞에서 보았다. 이 丁씨 집안은 本이 羅州이며, 경기도 廣州의 마재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장과 벼슬로 계속 명성을 드높여온 이 집안은, 당시에도 이름에 권위가 있으면서 천주교 활동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또한 양반인 봉산(豊山?) 洪씨 洪樂敏 루가 집안도 있는데, 당시 두 형제가 官職에 있었다. 이들은 그 즈음이나 또는 얼마 뒤에 李承薰에게 교리를 배웠다. 中人계급은 처음부터 가장 크게 참여했는데, 本名이 마티아인 崔仁吉은 譯官 집안 출신으로 李檗에게서 배웠고, 宮中樂士 집안 출신 池창홍 사바는 제발로 찾아가 교리를 배웠다. 성품이 순박하고 공손하며 부지런하여, 천주교를 잘 검토해본 다음에는 즉시 天主를 공경하는데 熱心 專念하였고, 항상 天主를 위해 죽기를 소망하였다. 또한 위험과 궁핍과 고통에 쉽게 몸을 내놓았고 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참아내었다. 다음은 冠泉이라는 號로 더 잘 알려진 崔昌顯 요한인데, 譯官 집안 출신으로, 역시 李檗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활동적이고 지칠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천주교에 대하여 듣자 마자 신앙을 받아들이고, 천주교 서적들을 전부 자기 손으로 직접 筆寫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종교서적들을 아주 많이 筆寫하였으므로, 이 방면에 어찌나 명성이 높았던지, 敎人들 중에 책을 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책방에 가듯이 그에게 찾아갈 정도였다. 모든 主日과 祝日을 위한 福音 解釋도 그가 조선말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그는 막 태어나는 교회를 위해 막대한 봉사를 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방금 소개한 이 사람들은 한양에 살았고 더 자주 등장하는 만큼, 먼저 언급해두어야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활동적이고 능력있는 인물들은 틀림없이 천주교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을 터이지만, 더 정확한 이해를 제공하고자 이곳의 사회관계 관습을, 특히 노동일은 하지 않고 글공부만 하는 (또는 하는 듯이 보이는) 계층 사람들 사이의 사회관계 관습을 조금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믿는다.
누구나 아는 바대로, 이 나라 여자들은 최하층에 속하지 않는 한 집안에 갇혀 지낸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눈을 피하고, 모든 일에 뒤로 물러나 있으며, 訪問이나 다른 사회관계는 남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런 만큼 남자들의 교제는 더욱 자유롭고 빈번하다.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들, 특히 양반들은 능력에 따라 집 앞쪽에 한 두 채의 집을 짓는데, 이것은 바로 응접실이다. 이곳의 출입은 남자들에게만 허용되며, 문이 길쪽으로 나있기 때문에, 집안으로 전혀 통하지 않고도 드나들 수 있다. 집주인은 통상 이곳에 기거하면서 친구와 친지들을 접대하는 일을 즐긴다. 게다가, 손님을 厚待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로 간주되고, 중요한 예절에 속하는 까닭에,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든 손님을 능력껏 접대하는 일을 명예로 생각하였다. 이런 사랑방 아무데나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日常 중에는 휴식을, 밤에는 잠자리를 請하면서 대접받을 수 있다. 네모난 나무토막이 베개로 쓰이고, 바닥에 깔린 이불이 침대로써, 모든 사람이 나란히 누워 함께 사용한다. 옛 풍습의 소박함과 다정함을 상기시키는 아주 아름다운 관습으로, 聖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후한 접대를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관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이 民族에게 있어 뛰어난 同胞愛를 조성하고 유지시켜왔는데, 온갖 찬사를 넘어서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관습에도 동전처럼 뒷면이 있을 터이지만, 여기서 자세히 논한다는 것은 우리 이야기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쨌건 知人과 친구들의 동아리가 얼마나 쉽게 확대되었을 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類類相從>이라는 속담은 이곳에서도 역시 들어맞기 때문에, 모든 계급의 사람이나 모든 過客들이 아무렇게나 어울리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조선 사람은 천성적으로 遊覽과 談笑를 좋아해서 항상 산넘고 개울건너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자기 집에서 할 일이 없는 경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사랑방에서 저 사랑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나라안 소식을 전해듣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 볼 일이 있거나, 여러 날 가야하는 곳에 있는 어떤 친척이나 친구, 친지를 방문해야 할 때면, 여행짐으로 담뱃대와 지팡이만 가지고, 또는 기껏해야 어깨에 거는 작은 봇짐을 등에 지고, 여비로는 엽전 몇 닢, 어떤 때는 빈털털이로 걸어서 떠난다. 저녁이 되어서도 길을 다 가지 못했으면, 여인숙에 가는 대신에, 길에서 멀지 않은 사랑방을 찾아 간다. 그리고 번잡한 절차없이 친구처럼 환대를 받으면서, “차린 것 없는” 상을 함께 나눈다. 피곤하거나 날씨가 궂을 때는 그 집에서 하루 이상 머물기도 한다. 주로 文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짤막한 作文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랑방에서는, 특히 여름철에, 친구들간에 모여서 몇 날 몇 주씩 각자 공부한 것을 서로 나누고, 作文을 통해 상호경쟁심을 불러일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이야기가 펼쳐지던 시대에는 특히 權씨 집안의 사랑방들이 수많은 親知들과 學文愛好家들로 북적대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드는 마치 여관과도 같은 곳이 되어있었다. 밤이 되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돌아가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거기서 하루밤이건 여러날이건 머무르곤 하였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 근처의 길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온갖 처지의 사람들로 항상 가득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오는 거대한 응접실이 되어버린 듯하였다.
이상의 간단한 槪觀으로 聖敎理가 어떻게 그리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귀에 전해지고 모든 사랑방에서 반복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入敎했다거나 入敎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결론지어서는 않된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그대로 되돌아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儒敎를 고수하면서 새로운 교리를 깨트리려는 목적으로, 또는 새로운 교리에 끌려들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하였다. 몇몇 사람은 黨派心으로 인해 聖敎理에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 틈에 끼기를 원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미 예견할 수 있었던 불행에 대한 염려가 이들을 붙들었다. 당시 상황은 바오로 성인이 최고법원 앞에서 설교했을 때 벌어졌던 일의 再現이었고, 또는 우리 주님이 제시하신 씨앗의 비유의 완벽한 실현이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 스스로 알고 또 존중하는 善을 실천하지 못하게 막는 온갖 情念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朝鮮 兩班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여러 黨派들이 福音의 전파에 있어 엄청난 障碍였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초기에 신앙을 전파한 모든 사람들은 南人이라는 黨派 소속이었으므로, 다른 모든 黨派와 최근에 南人 자체 내에서 분열된 사람들은 당연히 신앙의 반대자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점은 뒤이은 사실들이 확인해주고 밝혀주게 될 터인데, 天主敎가, 당시 權力을 쥐고 있던 南人들을 공격하여 다시는 再起하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하는 口實이 되는 것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救贖과 그리스도교 설립의 위대한 사업을 완수하려는 순간에 우리 聖敎의 崇高한 창립자 예수께서는 어디서나 영원히 眞理인 다음 말씀을 하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이 天主敎 基本敎理는 일반사람들 눈에 언제나 誇大妄想으로 보여왔는데, 이제 物質에 푹 젖어있는, 그러나 信仰의 光明이 비추고 있는 이 民族 앞에 실제로 이루어져 드러나게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이미 우리 聖敎는 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뛰어난 훌륭한 인물들을 信徒로 가지고 있었고, 양떼 가운데에는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聖敎는 피의 시험을, 아니 차라리 피의 受胎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天主를 뒤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어디까지인지 가르쳐주어야 했으며, 또한 그때까지 책에서만 보아온 敎理가 어떤 암흑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起源 때와 마찬가지로 天主께서는 피가 내를 이루어 흐르는 것을 즉시 허락하지는 않으셨으니, 이곳에서도 단지 한 방울의 피가 뿌려졌는데, 이는 天主의 사업에 참 印章을 찍기에는 충분하였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위로해줄 그 어떤 牧者도 가질 수 없었던 이 새 信者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거나 信仰을 消滅시키키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天主敎에 대한 반대자와 적들이 일어난 지는 오래전부터였고, 天主敎가 도처에서 거두고 있던 成果는 이런 반대자들의 수효와 불평소리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까지는 왕이 무슨 뜻을 표시한 것 같지는 않으므로, 우리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사건은 政府內 협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私的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1785년(乙巳年) 봄, 天主敎가 정식으로 傳播되기 시작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刑曹判書 金華鎭이 (어느 黨派 소속인지?) 사람들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조치로 天主敎의 成長을 멈추게 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이름난 天主敎 指導者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本名이 토마스인 金範禹를 붙잡아 끌어 오도록 하였다. 金 토마스는 朝鮮에서 譯官 직책을 수행하는 中人階級 집안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初期에 李檗에게서 天主敎를 배웠고, 은총의 부르심에 응하여 지체없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또 그는 즉시 자기 가족에게 傳敎하여 入敎시켰으며, 그의 열성은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가서, 자기 친구들 가운데 여러 사람을 改宗시키고 譯官 계층에 신앙을 퍼뜨렸다. (北京 主敎의 書翰에는 이 사실이 1788년으로 되어있으나, 일련의 사실들로 미루어,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丁 요한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이를 이 시점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天主敎 傳播者 金範禹는 갑자기 天主敎 신앙의 告白者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 고귀하면서도 어려운 使命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1785년 乙巳年 봄에 체포되었다.) 형조판서 앞에 끌려갔을 때, 형조판서는 그를 背敎시키고자 하였으나, 토마스는 天主의 은총에 의지하면서 비열한 背反을 용감하게 거부하였다. 갖가지 고문이 가해졌지만 虛事였다. 그는 잘 참아내면서 한 순간도 굽히지 않았다. 權日身 사베리오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충직한 同敎人을 저버림은 자기 위치에 비추어 걸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기성, 李龍億, 홍익 등과 (이들은 누구인가?) 함께 형조판서 앞에 나아가, 용감하게 목소리를 높여 억압받는 眞理를 옹호하였다. (1785년 3월 太學生 (鄭)淑이 天主敎人들의 친척과 친구들은 이들과 絶緣하라는 通文을 돌린다. 이 通文은 큰 소란을 불러왔는데, 거기에 金範禹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鄭淑이란 사람은 南人이면서도 天主敎에 매우 敵對的이었다. 이 집안은 1786년에도 李承薰의 복귀에 반대하는 通文을 돌리며 들고 일어났다. 1785년의 通文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회에서 축출하기 위해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식 문서이다.) 그는 형조판서에게 말하였다. “우리 모두 金範禹와 같은 종교를 信奉하오. 그의 生死는 그 혼자만에 관계되는 일일 수 없으니, 우리는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처분을 그대로 함께 나누고 싶소.” 判書는 그토록 유력한 인물들을 공격할 힘이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義人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았고,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는 여러 가지 酷刑을 가한 다음, 여전히 이 천주교인의 신앙과 끈기를 꺾을 수 없자, 충청도 동쪽 끝에 있는 丹陽 고을로 귀양보냈다. 金 토마스는 丹陽으로 끌려가서, (그는 거기 도착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바쳤고,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약 2년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을 飜覆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상처의 후유증으로 衰盡해져 天主께 영혼을 바쳤다. 範禹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金 토마스는 이렇게 영예의 冠을 받았다.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해주신 救世主의 죽음을 救世主께 돌려드리는 영광을 이 나라에서 첫번째로 얻었던 것이다. 우리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天主께 대한 충성심과 진정한 孝心에서 비롯하는 의무는, 天主께 봉사하는 명예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데 주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이곳의 여러 고장에 피의 목소리로 외치는 영광을 그가 첫번째로 안았다. 拷問에 肉身은 무너질 수 있어도 靈魂은 소멸되지 않으며, 不滅性으로 가득찬 소망 속에서 天主께 봉사함을 이 동양 맨 끝 나라의 暴君들에게 알려주는 영광도 그가 첫번째로 안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때 金 토마스가 朝鮮의 수많은 殉敎者들이 이루는 영광된 합창단의 맨 선두에 놓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 殉敎者들은 그가 보인 模範이 引導하고 부추기는 대로, 刑吏들의 광기어린 칼날 아래에서도 소리높여 예수 그리스도를 告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다른 餘波는 없었지만, 天主敎人들로 하여금 그들의 敵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엿보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참 天主를 섬기기 위해서는 온갖 것에 대비하고 있어야 함을 깨우쳐 주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공포심이 특히 한양과 그 부근에 퍼져나갔고, 갓 태어나고 있는 교회의 기둥이라고 할만한 사람 가운데 몇몇을 흔들어놓았다. (많은 집안에서 자기네 가족 중 敎人인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들에게서 背敎를 얻어내기 위해 애원과 위협을 비롯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고, 여기저기서 영광스러운 信仰告白도 있었지만 또한 개탄스러운 變節도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天主敎의 主動者이자 우두머리로 특히 李承薰 베드로와 李檗과 丁若銓, 鄭若鏞 형제를 지목하고 있었고, 도처에서 위협적인 言辭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 세 집안에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부분의 가족들은 겁을 났다. 그리고 이 敎人들의 熱誠을 멈추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信仰實踐을 그치게 하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였고, 불행하게도 훌륭한, 또는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李承薰의 동생 致薰은 天主敎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형으로 하여금 天主敎에 싫증을 느끼게 하고 결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결국 李承薰은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모든 종교서적을 불태우고, 萬人 앞에 자신을 변명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李檗의 아버지는 天性이 激情的인 사람으로, 天主敎에 連累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었는데, 天主敎에 깊이 빠진 듯이 보이는 자기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종교적 心性을 뿌리뽑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달기에 이르렀다. 檗은 그러한 광경에 無感할 수 없었다. 더이상 버틸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굴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天主敎人이라고 부르기도 不當한 어떤 敎人 하나가 그에게 찾아와, 그가 느끼고 있는 듯 보이던 動搖를 完結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檗을 背敎시키는 데 성공하기 위해 가능한 온갖 수단을 다 썼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術數를 다 동원하였다. 檗은 지치고, 그토록 시달림을 받아 정신이 昏迷해졌어도 공개적으로 背敎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며, 자기 앞에 놓여있는 모든 불행을 물리치기 위하여 婉曲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오호라!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잃지 않고 간직한 신앙심은 그의 가슴속에서 자연적인 人情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한 편에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셨고 다른 한 편에는 친아버지가 계셨다. 어찌 天主를 否認하겠는가? 어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겠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싸움은 그를 筆舌로 묘사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서글프고 우울해졌으며 말이 없어졌다. 밤낮으로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시간마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衣冠도 더이상 벗지 않았고, 잠은 눈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직은 가끔 음식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입맛을 완전히 잃었으므로, 아무 맛도 없고, 몸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치열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불행하게도 本性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츰 悔恨과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았고, 은총의 마지막 노력이 간신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건강상태로 되돌아왔으며, 벼슬에 대한 욕심이 되살아났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에게는 아무 것도 시도해볼 시간이 없었다. 1786년(丙午年) 봄 당시 유행하던 黑死病(중국인들 말로 疫病)에 걸렸고, 8, 9일 후,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간호하던 사람들이 여러 겹의 이불로 덮었는데, 이 무거운 이불 밑에서 숨이 막힌데다가 땀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온갖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敎友들이 찾아가 悔改를 권하고 天主 앞에 나아갈 준비를 시킬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 열의와 열성과 재능으로 이 나라에서 天主敎에 문을 열었던 이 사람은 이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스러졌다. 그는 뛰어난 資質과 부정할 수 없는 德性을 지녔지만,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는 救世主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런 죄악의 돌에 걸려 넘어져서, 그가 일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 볼 때 매우 슬픈, 그리고 그에 대해 자주 존경심을 가졌던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최후를 보여주었는데 (그러나 우리 聖敎가 200여년 전부터 서적을 통해서만 소개되고, 聖敎를 부각시키고 더 자세히 알려줄 사람이 아직 없던 상황에서, 우리 聖敎에 대한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광을 얻은 것으로 그의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다.), 이는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작은 양떼의 신앙은 잠시 흔들리기는 했어도 아주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天主敎會가 한 편으로는 몇몇 구성원의 變節로 인해 초상집같은 분위기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 壓制者들의 迫害보다 때로 더 견디기 힘든 집안 迫害 가운데에서도 대부분 敎人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 또 날마다 여기저기서 새로 入敎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으로 위안을 받았다. 天主敎에 대한 이 첫번째 시위가 전반적인 열의를 많이 가라앉힌 듯 보이지는 않으며, 前進은 계속되었다. (이하 생략)-김형래 교수 초역-)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Copie des écrits de Mgr. Daveluy
Plan de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Titre: l'Extrême Orient ou les témoins du Seigneur au 19e siècle dans le royaume de Corée (ou bien tout titre quelconque)
Le titre n'est pas encore choisi. L'épigraphe du livre est Crux de Cruce. La croix se plante par la croix. En tête doit être placée la tirade en grand: Justorum animæ in manu Dei sunt, etc.... puis de St. Paul aux Hébr. XI, 39: alii distenti sunt, etc. L'ép. dédicatoire est au Cardinal Préfet de la Propagande. Dans une introduction ou chapitre préliminaire, il faut mettre l'histoire de quelques chrétiens coréens du temps de la guerre du Japon, rapporter l'introduction des livres chrétiens en Corée et finir par quelques mots de la vie de hong iou hani, le premier qui ait pratiqué dans ses derniers temps et mort probablement sans baptême et avant les grandes conférences de Ni Pieki.
L'histoire des chrétiens du temps de la guerre du Japon n'est pas ici, il faut en chercher des lambeaux dans les histoires ecclésiastiques en France. Les chrétiens d'ici prétendent tenir de Mgr. Imbert qu'il y eut alors un Coréen élevé au sous-diaconat ou diaconat. Il faut chercher d'où vient cette tradition... L'introduction des livres chrétiens en Corée est très obscure, je n'ai pu en trouver que peu de chose et n'aurai de ressource que dans les écrits anciens de quelques familles payennes; par conséquent ce sera long, peut-être même ce travail ne pourra se faire un peu bien qu'avec la liberté, étant impossible d'emprunter maintenant beaucoup de manuscrits aux payens.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nous en avons la suite à vue de clocher, et nous pensons que les lacunes ne seront jamais comblées, toutefois si on veut continuer les recherches, peu à peu on gagnera quelque chose. Il n'y a plus qu'à puiser dans les manuscrits qu'ont certain nombre de grandes maisons et surtout dans les archives des tribunaux criminels.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 광경.당시 언론과 보도기관에서는 100만여명으로 보도하였으나, 필자는 55만명~60여만명으로, 내한한 성청 인사들에게 보고 하였었다
(Sua Santità Giovanni Paolo II aveva concelebrato la messa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con molti Cardinali, Arcivescovi, Vescovi, sacerdoti e fedeli cattolici - circa 500.000 - a Seoul il 6 maggio 1984. Per quella canonizazione, il Rev. Byon, rettore di Chon Jin Am, il luogo natale della Chiesa, aveva servito per 5 anni (1980~1984) come segretario esecutivo generale della commissione episcopale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Photos by Baeck - Nam-Shick). |
Ces deux sources nous sont presque fermées pour le moment. C'est à grand peine que de loin en loin on peut en attraper quelque petite partie, mais si un jour la religion devenait permise, nous pensons qu'il y aurait alors de grands fruits à espérer de recherches intelligentes et constantes, recherches réservées sans doute à nos successeurs par la Providence. On nous a pressé à beaucoup de mêler à l'histoire des martyrs, des documents sur l'histoire et les moeurs de ce pays. Nous avouons notre ignorance sur ce point qui demanderait des travaux à part que nous n'avons ni le temps ni les moyens d'exécuter. Les moeurs d'un pays s'apprennent par l'oreille et par les yeux. Or notre position de proscrit dans ce pays et les travaux sans cesse pressé du ministère ne nous permettons pas d'user de ces deux sens. Nous ne pouvons voir presque rien par nous mêmes, cloîtrés comme nous le sommes, nos relations ne sont presque jamais avec les gens instruits qui pourraient nous mettre au courant des usages et coutumes et en outre nos relations même avec le peuple pratiquant sont toujours en passant et comme à la dérobée. Quel espoir avec cela de se former une idée nette et précise sur un pays? On a beaucoup écrit et anciennement et récemment sur la Chine et pays voisins. Chacun, nous n'en doutons pas, a dû le faire et de bonne foi et après recherches. Toutefois il faut avouer que mille et mille choses ont été peintes sous des couleurs fausses, reconnues en partie aujourd'hui. La crainte de tomber nous mêmes dans les mêmes défauts nous impose une grande réserve et nous fait trembler de dire un mot sur ces matières. On pourrait, si on le désire, faire préceder l'histoire de quelques mots sur ses anciennes dynasties et divisions, puis sur son organisation actuelle civile et militaire. Les quelques pages que nous avons traduites sur la suite des rois et le tableau des différents mandarins ou préfets, pourraient au besoin fournir quelque chose, mais bien sec et bien fade. Pour les quelques détails sur les moeurs, couchés par nous sur le papier à bride à battue, nous n'osons parler d'en faire usage, pour ne pas nous compromettre.
L'histoire des martyrs finirait par quelques lignes de récapitulation et ses derniers mots devraient être, te matyrum candidatus laudat exercitus, qui en sont le livre résumé.
On lit dans un livre de documents curieux qu'en l'année Sin-mi 1631, l'ambassadeur Tsieng tou-oueni vit à Péking l'Européen nommé Niouk Jean âgé de 97 ans et encore en parfaite santé, il semblait être, dit-il, un des bienheureux sin sien (les bienheureux immortels de la secte Laotse). Ce doit être un des compagnons du P. Ricci. Il en reçut beaucoup de livres de science faits par les Européens et aussi des objets curieux, tels que pistolets. lunette d'approche, pendules, etc.
Ni Siou, surnommé Sin poung, un des ancêtres du martyr Ni Charles et un des plus fameux savants qu'ait eu la Corée, parle dans ses écrits de l'ouvrage du P. Ricci, intitulé tien tsou sir ei (véritables principes sur Dieu). Il en donne l'analyse, et parle aussi de la constitution de l'Eglise sous la direction du Souv. Pontife.
L'ambassadeur Ni i mieng i, en l'année Kieng-tsa 1720, vit aussi à Péking plusieurs des missionnaires et parle de la religion. Il dit que notre manière de vouloir se reformer le coeur pour servir Dieu, est assez semblable à celles de la religion des lettrés et qu'il ne faut pas placer notre religion au rang de la secte de Laotse; puis il compare l'Incarnation aux doctrines de Foë.
Ni ik i, surnommé Seng-ho, grand-oncle de Ni Kahoani, parle aussi de la religion dans ses écrits et dit que le Dieu des chrétiens n'est pas autre que le Siang-tiei des lettrés (le xam-ti des Chinois), et que le paradis et l'enfer sont empruntés de la doctrine de Foë. Il parle aussi du livre des sept vertus pour vaincre les sept péchés capitaux. Dans des mémoires de cette m?e famille il est dit que les premiers livres de religion furent apport? avec téléscopes et autres objets curieux par une ambassade qui allant au Japon rencontra les Européens dans une He et les recût d'eux.
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s 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Vie de Hong iou-han i, appelé aussi Sa riang i
Il naquit en 1735 ou 36, branche de Poung-san; ses ancêtres avaient rempli des charges importantes et sa famille assez distinguée; dans son enfance il prit les leçons du fameux Ni iki et y apprit à se régler la conduite. Vers 1770, ayant rencontré quelques livres de religion, il en jouit lecture avec joie, laissa de suite ses livres d'étude et s'adonna à la pratique de la religion. Toutefois il n'avait pas les livres de prières et trop peu instruit des règles de l'Eglise, il avait vu seulement que les fêtes se succédaient de 7 jours en 7 jours et dès lors les 7, 14, 21 et 28 du mois, il ne se mêlait pas aux affaires du siècle et donnait tous ses soins à la prière et oraison. Ne connaissant pas non plus les jours d'abstinence, il s'abstenait toujours de prendre ce qu'il y avait de mieux sur la table, et si on lui demandait pourquoi, il répondait: Toute nourriture est bonne à manger, mais le coeur et les yeux se portent toujours sur ce qu'il y a de mieux; la cupidité étant mauvaise je cherche à la dompter.
Un jour il allait quelque part à cheval, voyant un vieillard lourdement chargé et fatigué par des chemins boueux, il en a compassion, descend de cheval, le force à y monter, y met aussi sa charge et marche à pied par ce chemin boueux, et quoique ses bas et autres habits en fussent tout mouillés, il n'avait aucun air de difficulté. Ayant vendu un champ, ce champ fut, deux mois après, ruiné un éboulement des montagnes; il n'est pas juste, dit-il, que les autres souffrent pour le malheur de mon champ et il en renvoya tout le prix. L'acheteur refusait de le recevoir, mais il fit tant qu'il le força à l'accepter.
Par un hiver très froid, il était seul dans son appartement, mais voyant un jour une esclave souffrant beaucoup du froid il la fit coucher dans sa chambre, sans que pour cela son épouse ni le mari de l'esclave en conçussent aucun soupçon, tant il passait pour sévère et intègre dans ses moeurs.
Habitant d'abord à Niei san, il émigra à Sioung-heung et vécut 13 ans retiré dans les montagnes de Paik san. Là séparé du monde, il se livrait obscurément à ses exercices religieux. Il retourna ensuite à Niei san et y mourut.
* * *
(Les documents dans lesquels nous avons puisé la plupart des faits relatifs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ée ont été réunis par Tieng Jak iong dont il est parlé souvent. Il fut nommé Jean au baptême. Il eut part à presque toutes les affaires de la religion ab initio et était parent ou ami de presque tous les principaux chefs. Homme distingué dans les lettres et les charges publiques, il eut la faiblesse d'abandonner la Religion, ce qui ne lui évita pas l'exil en 1801. Gracié plusieurs années après, il pratiqua avec ferveur, se livra longtemps à tous les exercices de la piété et d'une grande mortification exemplaire et mourut fort chrétiennement. Il a laissé en outre quelques écrits religieux. Nous n'avons fait que copier et relier ces notes malheureusement trop brièves, mais fort bien écrites.)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à la Religion dans le royaume de Corée fut Ni Pieki appelé Tektso et surnommé par lui-même Koang am.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s Kieng Tsiou et parmi ses ancêtres qui étaient déjà dans les dignités sous la dynastie Korie on comptait plusieurs membres distingués dans les lettres et par les dignités civiles qu'ils avaient obtenues. Depuis trois générations cette famille s'était livré aux exercices militaires et avait occupé des charges importantes dans cette nouvelle carrière. Pieki naquit doué de mille belles qualités du corps et de l'esprit. Dès l'enfance son père voulut l'appliquer aux exercices de l'arc, de l'équitation et autres qui puissent lui faire obtenir les degrés militaires; mais celui-ci s'y refusa constamment au point de dire que dut-il mourir il ne s'y livrerait pas. De là il perdit en partie l'affection de son père qui l'appela Pieki voulant par là désigner son caractère trop attaché à ses idées. En grandissant Pieki devint d'une force et d'une stature énorme. Il avait une taille de huit pieds(1) et d'une seule main pouvait enlever cent livres. Large et bien fait, son extérieur était imposant et attirait naturellement tous les regards. Ses talents ne le cédaient pas à un extérieur si avantageux. Sa facilité de parole pouvait se comparer à l'écoulement majestueux d'un fleuve et doué d'une intelligence supérieure en tout il ne cherchait que la raison des choses et les vrais fondements de la doctrine. Partout il s'occupait à pénétrer le fond des choses et dans l'études des livres sacrés du pays, dès sa jeunesse, il s'efforçait d'en saisir les sens profonds.
De si heureuses dispositions lui permettaient personnellement un avenir brillant. Il se livra de bonne heure à l'étude des livres des plus fameux docteurs de ce temps et pour assurer le succès de ses travaux il chercha à se lier avec tous les gens instruits qui voulaient l'aider et le diriger dans la science. Se souciant peu des usages et de l'étiquette, il avait quelque chose de grand et élevé, mais aimait les paroles plaisantes, il n'eut jamais la noble dignité qui distingue les docteurs de profession(hak tsia). Tel nous est représenté Pieki par les documents du temps.
C'était en l'année 1777(tie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é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r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Ni Pieki l'ayant appris en fut rempli de joie et heureux de pouvoir profiter des leçons de ces hommes remarquables il prend de suite son parti d'aller les trouver. C'était l'hiver. La neige couvrait partout les routes et la distance était de plus de cent lys: mais de pareils obstacles étaient loin de pouvoir arrêter ce cœur ardent et si avide de la science et de la sagesse. Il part de suite et à travers ces chemins difficiles et ardus il ne sent pas la fatigue. Le jour tombant ne peut le déterminer à retarder la réalisation de ses désirs et continuant sa route de nuit il parvient enfin à une pagode vers minuit. Quel n'est pas son désappoi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é de pagode et qu'il fallait aller de l'autre côté de la montagne. Sans se décourager il pousse sa pointe. C'est une énorme montagne qu'il faut franchir de nuit. Elle est couverte de monceaux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en défendent les abords. N'importe! Pieki fait lever tous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A la main il prend un bâton ferré pour se défendre des attaques des sauvages ennemis et poursuivant sa route à travers les épaisses ténèbres, il arriva enfin au lieu si désiré.
Une arrivée si étrange ré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On ne pouvait se figurer quel motif amener à une heure si indue des hôtes si nombreux: mais bientôt tout s'étant éclairci, la joie le bonheur succédèrent à la crainte et dans les épanchements suggérés par une rencontre si heureuse on s'apperçut à peine que déjà le jour avait point. Pendant plus de dix jours que dura cette réunion, on approfondit toutes les questions sur le ciel, le monde, la nature humaine etc., tous les doutes et les opinions des anciens furent mis sur le tapis. De là on étudia les livres de morale des grands hommes; puis on en vint à examiner quelques livres philosophiques et mathématiques composés en chinois par les Européens, et on mit tout le soin possible à les approfondir. Enfin les études et conférences se portèrent sur quelques livres élémentaires (D'où venaient ces livres?) du christianisme. On ne sait au juste d'où ces livres étaient venus. Ils avaient seulement alors entre les mains quelques traités sur l'existence et la providence de Dieu, sur la spiritualité et l'immortalité de l'âme et sur la manière de régler ses mœurs en combattant les sept vices capitaux par les vertus contraires. Accoutumés aux doctrines obscures et confuses des livres chinois, ces hommes droits désireux de la vérité n'eurent pas plutôt examiné les fondements de notre Sainte Religion qu'ils entrevirent tout ce qu'il y a de grand, de beau et de palpable dans cette doctrine; et sans pouvoir l'approfondir davantage, faute de livres, leurs cœurs furent aussitôt émus et leurs yeux s'ouvrirent à la Foi. Tant il est vrai que la vérité porte toujours avec soi son cachet. Sa lumière brille toujours aux yeux de tous ceux qui la cherchent et tout cœur droit ne peut rester insensible aux impressions qu'elle dépose comme un germe de bonheur. (Qu'il est beau et consolant de voir ces hommes qui dans leur pays marchaient à la tête de la science, parvenus à la connaissance de la vérité(1) ) Voilà donc nos amateurs de la sagesse imbus de la Religion et subjugués par l'évidence de ses fondements. Ils eussent désiré se mettre de suite à la pratique de toutes ses règles: mais les livres qu'ils avaient entre les mains ne suffisant pas pour les diriger, ils durent se contenter de se prosterner tous les jours matin et soir pour se livrer à la méditation. Puis ayant vu quelque part qu'il y avait de sept en sept jours un jour consacré au Seigneur, tous les 7, 14, 21, 28 du mois ils cessaient toute affaire du monde pour penser aux exercices de l'âme et y faisaient abstinence. On ignore combien de temps ils continuèrent ces exercices, mais ils les faisaient dans le plus grand secret sans en parler à aucun autre et il est probable par la suite des faits que la plupart du moins n'y furent longtemps exacts.
Le cœur ardent de Pieki avait reçu un germe fécond. Il sentait combien ce commencement était peu de chose, et toutes ses pensées et toutes ses vues se portaient vers la Chine où il espérait trouver les livres nécessaires pour compléter l'œuvre commencée. Plusieurs années se passèrent dans cette anxiété et les efforts qu'il fit pour parvenir à son but ne nous sont pas parvenus. Au commencement de l'été 1783, 15 de la 4ème lune trici mio, après avoir été à Matsai dans la famille Tieng, pour l'anniversaire de la mort de sa sœur, il monta sur un bateau avec les deux frères Tieng, Jak tsion et Jak iong pour se rendre à la capitale. Pendant le trajet les conversations et études philosophiques furent encore leur occupation. Après avoir étudié quelques livres du pays, les esprits se portèrent sur la doctrine des Européens. Ils discutèrent au long et en détail des dogmes de la création du ciel, de la terre et de l'homme, puis de la spiritualité et de l'immortalité de l'âme et des peines et récompenses dans le ciel et l'enfer au siècle futur. Tous convinrent de la vérité de ces dogmes et y ajoutaient foi, et tous les passagers qui entendaient pour la première fois ces vérités si belles et si consolantes en étaient tout hors d'eux-mêmes et saisis de joie. Il n'est pas douteux que de pareilles conférences ne se soient renouvelées souvent vers ces époques, et l'ardeur bouillante de Pieki ne sera pas restée dans le repos, mais les détails ne nous en sont pas parvenus. (Ce qui est certain, c'est qu'alors la plupart des gens instruits avaient vu ou entendu parler des livres de science des Européens, et souvent aussi des quelques livres de Religion qui étaient dans le royaume. C'était à la mode de s'en occuper et on remarque que dans les compositions littéraires que chaque année lors de l'ambassade à Péking les Coréens échangeant avec les Chinois on faisait souvent allusion à ces nouvelles sciences. On peut juger par là de la publicité qu'eurent ces premières notions du christianisme, mais les livres alors existant ne donnaient pas la religion en détails.)
Dieu qui n'abandonne jamais ceux qui le cherchent dans la sincérité de leur cœur avait fixé cette année pour permettre la réalisation des vœux de quelques âmes droites. Ce même hiver 1783 Ni Tong ouki fut nommé troisième ambassadeur à la cour de Péking, et son fils Sieng houni devait l'y suivre. C'est ici le lieu de faire connaître cet homme remarquable qui pendant quelques années va jouer un rôle si important dans cette histoire. Ni Sieng houni appelé aussi Tsa siouri était de la noble famille des Ni de Pieng t'sang. Ses ancêtres remplirent souvent des charges assez importantes parmi les mandarins civils et sa maison jouissait d'une haute réputation. Il naquit en 1756(année Pieng tsa). Dès l'âge de dix ans il passait pour capable dans les lettres et à peine fut-il arrivé à 19 ou 20 qu'il avait dans tout le royaume la réputation de lettré distingué. Voulant marcher sur les traces des saints de ce pays, il se lia avec ce qu'il y avait de plus distingué par la science et la conduite et s'appliquait autant à régler ses mœurs qu'à se perfectionner dans les lettres. Il fit aussi connaissance avec Ni Pieki, et toutefois la diversité de leurs goûts, caractères et études ne leur permit pas de vivre dans l'intimité. A l'âge de 25 ans en l'année 1780(kieng tsa) il obtint le premier degré de bachelier appelé Tsin sa, et de toute part les regards se portaient sur lui. Ni Pieki ayant appris que Sieng houni devait suivre son père à l'ambassade de Péking fut comblé de joie et alla de suite le trouver.
Voici d'après les monuments de l'époque le discours remarquable qu'il lui tint: "Ton voyage à Péking est une occasion admirable que le Ciel nous fournit de connaître la vraie doctrine. La doctrine des saints, du service de l'Empereur Suprême Créateur de toutes choses est au plus haut degré chez les Européens. Sans cette doctrine nous ne pouvons rien. Sans elle on ne peut se régler le cœur et le caractère. Sans elle nous ne pouvons approfondir les principes des choses. Sans elle comment connaître les différents devoirs des rois et du peuple? Sans elle point de règle fondamentale de la vie; sans elle la création du ciel et de la terre, l'ordre physique des astres, leurs cours et révolutions régulières, l'ordre des pôles, etc. ne nous sont pas connus. La distinction des bons et mauvais esprits, l'origine et la fin de ce monde, l'union de l'esprit et du corps, la raison du bien et du mal, l'Incarnation du fils de Dieu pour la rémission des péchés, la récompense des bons dans le ciel et la punition des méchants dans l'enfer, etc. etc. etc. Sans la doctrine des Européens tout cela nous reste entièrement inconnu." A ces mots Seng houni qui n'avait pas encore vu les livres de religion fut ému de surprise et d'admiration. Il demande à voir quelqu'un de ces livres et ayant parcouru les traités de l'existence et des attributs de Dieu et le livre des sept vices capitaux combattus par sept vertus contraires, il fut ravi de bonheur et ne possédant pas de joie il demande à Pieki ce qu'il y avait à faire. Pieki continue en lui disant: "Puisque tu vas à Péking, c'est une marque que le Dieu Suprême a pitié de notre pays et veut le sauver. En descendant de voiture va de suite au temple du maître du Ciel, confère avec les docteurs européens, interroge-les sur tout, approfondis avec eux la doctrine, informe-toi en détails de toute la pratique de la Religion et apporte-nous les livres nécessaires. Va, la grande affaire de la vie et de la mort, la grande affaire de l'Eternité est entre tes mains. Va et surtout n'agis pas légèrement." Seng houni écouta d'un air soumis ces paroles de Pieki qui le pénétraient profondément et les recevant comme la parole du Maître, il promit de faire tous ses efforts pour réaliser leurs communs désirs. En considérant le discours de Pieki il est facile de voir qu'il était également altéré de la soif des sciences et de la Religion, et le peu de mots qu'il prononça montrent que son intelligence avait déjà compris la Religion comme la base du monde et des sociétés. On voit que cette grande affaire était devenue pour lui la seule, l'unique nécessaire. C'est aussi que la grâce préparait déjà cet homme à la grande œuvre qu'il allait bientôt commencer en propageant le premier la semence de la Religion.
Seng houni partit donc pour Péking. Arrivé là il se rendit à l'église du midi et fut reçu par l'évêque Tong (c'est Mgr. Alexandre Govéa, du Tiers Ordre de St. François qui a tant travaillé à rassurer le diocèse de Péking à l'observation des décrets du St. Siège, pour ce qui regarde les rites chinois. Il était intimement lié avec le célèbre évêque de Caradre de St. Martin qu'il avait connu lors de sa captivité à Péking. Mgr Govéa en chinois Thong a été l'un des plus doctes et des plus grands évêques dont ait pu se glorifier la Chine, il était Portugais de nation) Alexandre ou Alexis auquel il demanda à s'instruire. Il trouva aussi là l'Européen Sak(So) Tektso âgé de plus de 90 ans encore plein de santé et d'un extérieur très affable, de plus un jeune homme nommé Niang. Dans les 4 églises se trouvaient environ de 50 à 60 personnes. Appliqué à s'instruire à fond de la religion il put pendant le séjour qu'il fit à Péking se mettre en état de recevoir le baptême qui lui fit conféré par le Père Niang (probablement) et comme il fut le premier Coréen baptisé et disposé à répandre la religion parmi ses compatriotes, il fut appelé Pierre comme se trouvant de fait la pierre fondamentale de l'Eglise Coréenne. C'était probablement au commencement de l'année 1784. A son départ on lui donna beaucoup de livres, croix, images, etc et même quelques objets curieux qui plus tard furent envoyés au palais. Au printemps de 1784(kaptsin) Seng houni rentra à la capitale avec tous ces objets. Il n'eut rien de plus pressé que d'envoyer à Pieki des livres, croix, images, etc. Celui-ci trépignait d'impatience et comptait les jours. A peine eut-il reçu ces livres qu'il emprunta une maison et s'y referma pour s'adonner entièrement à cette étude. C'était une eau de fontaine pour un gosier altéré. Il fut là quelque temps tout absorbé à chercher et à approfondir la vérité dont son âme avait littéralement faim et soif.
Tout autre pensée fut rejetée au loin et il semblait qu'une nouvelle vie toute spirituelle pénétrait toutes les parties de son être. Il avait entre les mains de nouvelles preuves de la Religion et des réfutations de culte superstitieux, des explications des sept sacrements, des catéchismes, l'explication des Evangiles de l'année, les vies des Saints pour chaque jour et des livres de prières assez complets. Avec cela il pouvait à peu près voir la Religion dans son ensemble et dans le détail; et ses pensées ne tendaient à rien moins qu'à la régénération complète de tout le royaume. Après un certain temps d'études il rencontra Seng houni et les deux frères Tieng Jak tsien et Jak iong et leur dit aussitôt: c'est vraiment une grande doctrine. C'est là la vraie voie. Le grand Dieu du ciel a pitié des millions d'hommes de notre pays et veut les faire participer largement au bienfait de la Rédemption du monde. C'est l'ordre de Dieu. Nous ne pouvons ne pas y répondre. Il faut répandre en grand la religion et évangéliser tout le monde. Ne dirait-on pas un nouveau Pierre l'hermite prêchant une sainte croisade et voulant enrôler tout le monde sous les étendards de la Croix?
De ce pas il se rend chez quelques-uns de ses amis, hommes de la classe moyenne, mais tous distingués par leurs connaissances et leur conduite. Il les prêche aussi que leurs amis et un grand nombre se rendirent presque de suite à sa parole vive et pénétrante. C'étaient entre autres T'soi t'sang hieni, T'soi in kiri, Kim tsong kio etc. De là Pieki porta la bonne nouvelle de différents côtés avec passablement de succès; et fidèle à sa mission il ne se donnait pas de relâche.
Bientôt le bruit de la nouvelle Religion se répandit de tous côtés et comme toutes les grandes œuvres, elle ne manqua pas de rencontrer des contradicteurs. Les nobles et les lettrés l'embrassaient, il est vrai, en grand nombre, mais beaucoup d'autres, attachés ou même entichés de la Religion des lettrés virent bien que la nouvelle doctrine allait leur enlever bien du monde et craignirent même de voir saper par là les fondements de leur croyance. Quelques-uns aussi purent avec des vues d'abord droites s'efforcer d'empêcher l'introduction de ce que la nouveauté pouvait au premier abord faire considérer comme des rêveries superstitieuses qui entraîneraient dans une mauvaise voie. D'ailleurs l'ennemi de tout bien prévoyant les désertions et les vides que la vérité allait faire dans son parti ne pouvait d'un œil tranquille voir la propagation du culte de son vainqueur; et il mit en effet tout en œuvre pour s'opposer au règne de Jésus crucifié. Ni Kahoani descendant d'une des familles les plus distingués du royaume, et illustre à cette époque par plusieurs fameux docteurs, était lui-même un homme supérieur. Encore jeune il avait une réputation universelle de savoir et se voyait déjà entouré d'applaudissements et de respects. Apprenant la rapide propagation de la religion dans toutes les classes, il dit: c'est ici une très grande affaire. Quoique cette doctrine étrangère ne paraisse pas déraisonnable, ce n'est pas notre doctrine des lettrés; et puisque Pieki veut par là changer le monde je ne puis rester immobile. J'irai donc et le ramènerai dans la bonne voie. On fixa le jour de la conférence et Ka hoani se rendant chez Pieki, inutile de dire quelle foule de curieux et d'amis de chaque parti durent se réunir pour assister à cette solennelle discussion. Kahoani essaya tout d'abord de faire revenir Pieki de ce qu'il appelait ses erreurs et se croyait sûr de la victoire; mais chaque parole du docteur fut de suite relevée par Pieki qui réfutait chacune de ses assertions article par article et le poursuivant jusque dans les plus petits détails détruisait et réduisait en poudre tout l'édifice des raisonnements que le docte payen s'épuisait en vain à vouloir relever. Sa parole claire et lucide mettait le jour partout. D'une part toujours d'accord avec lui-même et conforme à la raison, de l'autre il ne cessait de conforter ses preuves et de les faire ressortir de plus en plus. Sa lucidité à renverser toutes les raisons de son adversaire était brillante comme le soleil. Chacun de ses coups portait. Il frappait comme le vent et tranchait comme un instrument aigu. Les nombreux spectateurs jouirent alors d'un spectacle peu commun. C'était en quelque sorte le coryphée de la vieille école des ténébreuses doctrines chinoises aux prises avec un modeste défenseur de la vérité catholique (lumière évangélique). On pouvait contempler ces deux grands champions se livrant tour à tour aux divers exercices d'une lutte acharnée et mettant à profit toutes les ressources de l'art et du génie. Mais l'un toujours droit, colonne de vérité ne courbe pas un instant, tandis que l'autre malgré toute sa souplesse se laissant percer au défaut de l'armure tombait sans cesse et ne se relevait un peu que pour tomber encore. A cette vue les incrédules frémissaient sourdement, mais les cœurs fidèles palpitaient de joie et tressaillaient de bonheur. La foi restait triomphante sur ce théâtre éminent, se fortifiait chez les néophytes et prenait racine dans les âmes droites et sincères. Une journée ne suffit pas toutefois pour faire rendre les armes au terrible adversaire que Pieki avait en tête. Les discussions reprises coup sur coup durèrent pendant trois jours et eurent pour résultat de faire voir plus en grand la beauté, l'étendue et la solidité de ce que l'on appelait nouvelle doctrine. Après ce temps Kahoani fatigué, vaincu, abbatu, n'ayant plus aucun subterfuge à mettre en avant dit ces mémorables paroles: cette doctrine est magnifique, elle est vraie, mais elle attirera des malheurs à ses partisants; que faire? Il se retira et depuis cette époque il ne se représenta plus, n'ouvrit plus la bouche et ne s'en occupa aucunement. Tout l'avantage, toute la gloire de cette célèbre conférence restait donc à Pieki. La vérité triomphait et le bruit ne manqua pas de s'en divulguer au loin et amena de toutes parts de nouveaux adeptes. Mais voici un nouvel adversaire qui apprenant les progrès de la foi et les résultats de la fameuse conférence voulut aussi entendre par lui-même les fondements de cette Religion et entra en lice avec ses défenseurs. C'est Ni Kei iangi non moins remarquable par la haute position de sa famille que par la vaste érudition qui le distinguait à cette époque. Pieki fort de la vérité qui le soutenait plus encore que de ses premiers succès n'était pas homme à éviter la rencontre et accepta volontiers la discussion. Il développa devant son docte adversaire la raison du Ciel et de la terre, le bel ordre du monde et de toutes les parties qu'il renferme, l'accord des quatre éléments et les divers fondements de la Providence. Il lui expliqua la doctrine de l'âme de l'homme avec ses différentes facultés, l'admirable correspondance des peines et des récompenses dans l'autre vie avec les actes de chacun pendant sa vie, et lui fit en un mot, toucher au doigt la vérité et l'évidence de la Religion Chrétienne appuyée sur des principes solides et inattaquables. Kei iangi ne put soutenir la discussion et n'osait plus ouvrir la bouche. Il semblait croire au fond du cœur mais ne pouvait prendre son parti pour l'avouer franchement et se mettre à la pratique. Aussi quand il se fut retiré Pieki dit en parlant de ces deux savants: Ces deux Ni n'ont rien à répondre et ne peuvent soutenir la discussion; mais n'ayant aucun désir de pratiquer on ne peut se fier sur eux. Il n'y a rien à espérer.
Cependant Pieki voyait croître de jour en jour le nombre des croyants. Il pouvait espérer voir sous peu une propagation rapide de l'Evangile, mais il songeait toujours pour assurer l'extension et la durée de cette sainte œuvre à lui donner pour fondement quelques personnages dont la science et la réputation pussent imposer le respect et captiver les opinions. Ne comptant plus sur ceux dont nous avons parlé plus haut, il jetta les yeux sur une famille de Jang Keun qui déjà avait reçu les premières lueurs de la foi, mais qui semblait depuis ce temps n'y plus penser. Il s'agit de la famille des Kouen dont il a été parlé au commencement de cette histoire. La famille des Kouen était dans les hautes dignités du royaume dès la dynastie Korie. Au changement de dynastie elle fut comptée tout d'abord au nombre des plus fidèles maisons qui s'attachèrent au nouveau roi et depuis cette époque compta toujours des hommes remarquables soit dans les lettres soit dans les charges qu'ils remplirent avec distinction. Or à cette époque Kouen T'siel sini surnommé Nok am se trouvait l'aîné de cinq frères tous renommés par leur science et leur belle conduite. Il avait la réputation d'un des plus grands docteurs du siècle, et son troisième frère Il sini surnommé Tsik am passait aussi pour un homme supérieur. Cette famille avait, outre beaucoup de parents distingués, une grande quantité de disciples qui venaient de toutes les parties du royaume sucer auprès d'eux le lait de la science et de la vertu. Pieki pensa donc qu'il fallait travailler à les enrôler sous les drapeaux du Christ pour en faire ensuite la racine et la base de la Religion dans ce pays.
A la 9e lune de cette même Kaptsin 1784 il se rendit donc à cheval dans cette maison à Kam san district de Jang Keun. Dès son arrivée on se mit à examiner à fond et à discuter en grand de toute la Religion; et bientôt la vérité parut dans tout son jour. L'aîné T'siel sini nommé plus tard Ambroise au baptême était un homme d'environ 50 ans qui avait passé sa vie à approfondir la philosophie et la morale des livres sacrés des Chinois. Sans résister à la lumière de l'Evangile, il ne put se décider à quitter en un instant tout le fruit de ses immenses travaux qui avaient fait sa réputation, et pour le moment Pieki ne trouva pas d'entrain chez lui. Ce ne fut qu'un peu après qu'il se détermina à la pratique, et après avoir une fois commencé il brille par une foi constante et une conduite remarquable qui lui méritèrent sa couronne comme nous le verrons plus tard. Mais son frère Il sini embrassa tout d'abord la Religion avec une ferveur remarquable jointe à un zèle élairé qui lui fit remplir entièrement les vues que Pieki s'était proposées en venant dans cette famille. En effet, à peine eut-il acquis la conviction de la vérité de la Religion qu'il se mit non seulement à pratiquer lui-même, mais il intruisit de suite les divers membres des sexes de sa maison, et la communiqua aussi à ses amis et connaissances avec tout le succès que lui assurait l'autorité de son nom, de sa science et de sa conduite. Il y mit tant de zèle et d'empressement que le district de Jang Keun peut à juste titre être considéré comme le berceau de la Religion en Corée.
Ni Seng houni baptisé à Péking comme nous l'avons vu croyait conférer le baptême à ceux qui embrassaient la Religion, et c'est probablement vers cette époque qu'il baptisa Ni Pieki et Kouen Il sini, mais comme ces hommes distingués ne voulaient rien faire à demi, le choix même d'un nom de baptême se fit avec tact et réflexion. Considérant d'une part les idées élevées et la belle conduite de Pieki et de l'autre le rôle que son zèle lui avait fait embrasser en donnant partout le branle à l'étude de la Religion et préparant ainsi les voies à la venue du Sauveur dans ce royaume, on sembla voir quelque ressemblance fondée entre sa mission et celle du Saint précurseur et il fut décidé qu'il serait appelé Jean Baptiste au Baptême. Il sini ayant un cœur ardent joint à un esprit éclairé et voulant se consacrer à l'évangélisation en grand de ses compatriotes prit pour patron St. François Xavier dont la voix était retenti dans toutes les parties de l'Orient, afin d'en faire son modèle et de marcher sur ses traces. Et c'est sous ce nom que nous le désignerons désormais.
Ces trois hommes remarquables marchaient d'un pas également constant dans la noble voie qu'ils s'étaient tracée et ne manquaient pas l'occasion de faire briller la lumière de la foi aux yeux de ceux qu'ils espéraient devoir l'embrasser. Jusqu'ici il n'y avait pas de prohibition de la part du gouvernement. Toutes les choses se traitaient librement, mais déjà il était facile de voir par les contradicteurs qui s'élevaient et par la connaissance de l'esprit de ce royaume que la vérité ne se répandrait pas sans combats et on pouvait même craindre toute espèce de violence. Quoiqu'il en soit chacun poursuivit son plan et la foi se répandit au loin. (Jusqu'ici les vrais pratiquants étaient surtout concentrés à la capitale et dans la province qui lui est adjointe, mais les temps marqués par la Providence étaient venus où cette lumière qui ne doit pas rester sous le boisseau devait être portée dans des régions plus lointaines et en ouvrant les yeux à tant de malheureux aveugles les amener souples et dociles aux pieds de leur Sauveur et Rédempteur.)
* * *
Kouen Xavier surtout eut ici un succès dont les suites furent immenses soit par ce qu'il fit lui-même, soit par les travaux de ses disciples. Il avait alors chez lui un jeune homme nommé Ni Tan oueni ou encore Tson T'siangi, appelé plus tard Louis de Gonzague au baptême.
Ni Louis était d'une famille honnête de cultivateurs habitant le village de Je sa ol de T'sien an, province de T'siong t'sieng, sur les bords de l'immense plaine connue sous le nom de Nai p'o. (Le Nai p'o est une immense plaine entrecoupée par mille canaux qui reçoivent le flux de la mer et renommée par sa fertilité en grains qui lui a fait donner à bon droit le nom de grenier de la capitale. Notes sur les marées.)
Ayant reçu de la nature des talents peu communs il se livra d'abord chez lui à l'étude des lettres, mais bientôt le désir de travailler en grand et d'approfondir les secrets de la nature lui firent naître la pensée d'aller auprès de quelque grand maître, et attiré par la réputation de la maison des Kouen fort éloignée d'ailleurs de son pays, il se rendit auprès d'eux et se fit leur disciple. Kouen Xavier charmé du bon esprit et des belles qualités de cet élève lui donnait ses soins déjà depuis un certain temps quand il eut connaissance des doctrines européennes. Bientôt après il lui fit connaître la Religion et s'appliqua à le former solidement non seulement sur les principes fondamentaux du Christianisme, mais surtout à la pratique réelle de tous ses devoirs. Il y réussit au delà de tout espoir et bientôt Ni Louis devenu capable d'enseigner les autres retourna chez lui chargé par son maître de soigner la mission d'instruire sa famille et ses connaissances et de répandre la Religion de tout son pouvoir. Ni Louis fidèle à ses instructions convertit immédiatement sa famille, ses proches et une multitude de connaissances que son savoir et sa belle conduite lui attiraient de toutes parts, et dont il savait parfaitement captiver les esprits et les cœurs. Aussi fut tout d'abord jeté par Kouen Xavier le fondement de la célèbre chrétienté du Nai p'o qui a toujours jeté un si grand lustre dans l'Eglise de Corée, devint la pépinière de la Religion et lui donna de si illustres martyrs comme nous le verrons par la suite.
Kouen Xavier devait aussi avoir la gloire de communiquer la foi et d'établir sur des bases solides la chrétienté de la province de Tsion la. Niou hang kemi appelé Augustin était d'une famille noble non pas très élevée, mais jouissant d'une grande considération dans sa province et d'une assez grande influence qu'augmentait encore une fortune magnifique. Il habitait à T'so Nami au district de Tsien tsiou environ à 15 lys de cette métropole de la province. Appliqué à l'étude des lettres il y eut quelques succès et pouvait passer pour un homme instruit et capable. Ayant eu bruit de la nouvelle Religion et attiré par la réputation des hommes fameux que l'on disait l'embrasser, il voulut examiner les choses par lui-même et vint chercher la famille Kouen pour pouvoir l'étudier avec des hommes dont le seul nom lui était un garant de la vérité. A peine eut-il entendu les principes du christianisme que son âme droite se rendit et il voulut commencer de suite à la pratiquer. De retour chez lui il instruisit immédiatement sa nombreuse famille, et communiqua aussi la bonne nouvelle à ses amis, connaissances et voisins. Sa ferveur, son zèle et sa constance peuvent faire signaler cette maison comme la racine de la Religion dans cette province méridionale du royaume où il y eut toujours depuis de ferventes chrétientés et de nombreux martyrs. Ce fut aussi environ à cette époque que Joun Paul appelé Tsi t'sioungi demeurant dans la province de Tsien la au district de Tsin san reçut la foi par le moyen de Kim Pem ou dont nous allons parler immédiatement, mais nous remettons à parler de cet intrépide athlète de la Religion un peu plus tard en traçant les actes de son martyre. D'ailleurs il eut peu de part, du moins de son vivant, à la propagation de la foi dans cette province.
Dans des pays plus rapprochés nous devons signaler la famille Tieng dont nous avons déjà vu deux frères Jak tsien et Jak iong prendre part aux premières conférences avec Pieki. Cette famille originaire de Na tsiou demeurait à Ma tsai district de Koang tsiou province de Kieng kei. Renommée soit dans les lettres, soit par les charges qu'elle avait toujours remplies avec distinction, elle avait alors plusieurs membres dont le nom faisait autorité et qui secondèrent à cette époque le mouvement religieux. Puis encore la noble famille de Hong Lucas dit Nak mini originaire de Pong san dont les deux frères remplissaient alors quelques charges. Ils furent instruits par Ni Seng houni à cette époque ou peut-être un peu plus tard. Dans la classe moyenne ceux qui prirent le plus de part dès le commencement furent T'soi in kiri nommé Mathias au baptême, d'une famille d'interprètes, instruit par Pieki; Tsi Sabas dit T'siang hongi d'une famille de musiciens attaché(s) à la cour, qui se présenta lui-même pour se faire instruire. D'un naturel simple, respectueux et diligent, après avoir bien examiné la Religion, il s'appliqua de suite avec ferveur à l'amour de Dieu et désirait toujours de mourir pour lui. Aussi s'exposait-il facilement aux dangers, privations et souffrances et les supportait avec joie. Puis T'soi Jean dit T'siang hieni plus connu par son surnom Koan t'sieni d'une famille d'interprètes, instruit aussi par Pieki. Il était actif et infatigable. A peine entendit-il parler de la Religion qu'il l'embrassa et copia de sa propre main tous les livres qui en traitaient. Il copia aussi pour d'autres une multitude de livres religieux et sa réputation sur ce point se répandit au point que quand quelques chrétiens désiraient des livres c'est à lui que l'on recourait comme au grand magasin. C'est à lui aussi qu'on attribue la traduction en coréen de l'explication des Evangiles pour tous les dimanches et fêtes de l'année, par où il rendit un service incalculable à cette chrétienté naissante. Il y en avait beaucoup d'autres encore, mais tous ceux-ci résidant à la capitale et devant paraître plus souvent, nous avons cru devoir en faire mention dès à présent.
Des personnages si capables et si actifs devaient sans doute donner une grande publicité à la Religion, mais pour en donner encore une idée plus exacte nous croyons devoir mettre ici quelques détails sur les rapports de société tels qu'ils sont en usage ici surtout parmi les classes qui ne se livrent pas aux œuvres serviles et s'adonnent ou sont censés s'adonner aux lettres.
Tout le monde sait que dans ce pays les femmes qui ne sont pas de la dernière classe se tiennent renfermées. Elles fuient même la vue des hommes, restent étrangères à toutes les affaires, et les visites ou autres rapports de société n'ont lieu que parmi les hommes; mais ils en sont d'autant plus libres et plus multipliés. Sur le devant de la maison les personnes un peu à l'aise et surtout les nobles établissent un ou deux appartements, selon leurs facultés. Ce sont les salons de réception. Les hommes seuls y sont admis et les portes qui donnent sur le chemin permettent à chacun de s'y présenter sans communiquer aucunement avec l'intérieur de la maison. Le maître de la maison fait là sa résidence habituelle et se plait à y recevoir et traiter ses amis et connaissances. Bien plus, l'hospitalité étant considéré comme un devoir sacré et faisant partie essentielle de la civilité, chacun se fait un honneur de recevoir et traiter selon ses moyens tous ceux qui se présentent connus ou inconnus, et il est reçu d'aller demander indifféremment l'hospitalité dans ces salons extérieurs, assuré d'y rencontrer et le repos aux heures habituelles et un gîte pour la nuit. Un morceau de bois carré sert d'oreiller et la natte étendue par terre vous offre un matelas que tous partagent côte à côte. Usage bien beau qui rappelle la simplicité et la cordialité des mœurs antiques et fait penser involontairement aux réceptions hospitalières d'Abraham ou de Lotte dont l'Ecriture fait mention. Usage qui outre les services éminents rendus aux indigents, a introduit et conservé chez ce peuple une fraternité remarquable et que nous dirions au dessus de toutes louanges, s'il n'avait comme toutes choses le revers de la médaille qu'il est hors de notre sujet de discuter ici. On voit de suite combien par là doit facilement s'étendre le cercle des connaissances et des amis. Toutefois le proverbe étant vrai ici comme ailleurs, on conçoit que toutes les classes et tous les passants ne se réunissent pas indifféremment. Le Coréen naturellement flaneur et jaseur est presque toujours par voie( s) et chemins, par vaux et par monts. N'ayant rien à faire chez lui il va de salon en salon pour passer son temps et se mettre au courant des nouvelles du pays. A-t-il quelqu'affaire en quelque lieu éloigné, ou, doit-il aller visiter quelque parent, ami ou conaissance à plusieurs journées de route, il part à pied ayant pour tout bagage sa pipe et un bâton, ou tout au plus un petit paquet suspendu aux épaules et porté sur le dos, pour tout viatique quelques sapèques, et quelquefois pas du tout. Si le soir il n'a pas atteint le terme de sa course, souvent au lieu d'aller à l'auberge il se dirige vers quelque salon ouvert non loin de sa route. Là il est reçu à bras ouverts et traité sur le pied des amis, sans fatras de cérémonies, mais en partageant comme on dit la fortune du pot. S'il est fatigué ou que le temps soit mauvais il y passera quelquefois un jour ou plus. Souvent on y causera de littérature, ou bien même s'exercera à quelque petite composition, car, c'est aussi dans ces salons que l'été surtout les amis se réunissent et passent plusieurs jours ou plusieurs semaines à se communiquer leurs études et à exciter leur émulation réciproque par des compositions journalières.
A l'époque dont nous parlons les salons de la famille des Kouen en particulier déjà si fréquentés par de nombreuses connaissances et par les amateurs de la science devinrent un véritable hôtel où la foule se pressait sans cesse. Les personnes des environs se retiraient le soir et les plus éloignés y faisaient un séjour plus ou moins long. Les routes avoisinantes étaient, assure-t-on, continuellement couvertes d'une nuée de personnages de toutes les conditions et cette maison semblait convertie en une immense salle de réception où connus et inconnus se pressait le jour et la nuit.
Ce simple aperçu suffira pour faire juger comment un peu de temps la doctrine de la Religion put frapper mille et mille oreilles et se répéter dans tous les salons, mais il ne faut pas en conclure que tous l'aient embrassé(e) ou en aient eu le désir. La curiosité amenait les uns et ils s'en retournaient tels quels; d'autres attachés à la religion des lettrés qui a dans ce pays une racine bien profonde venaient dans le dessein de combattre la nouvelle doctrine ou avec la résolution ferme de ne pas s'y laisser entrainer. Quelques-uns par principe de parti ne pouvaient avoir la pensée d'y prêter l'oreille, et beaucoup eussent bien désiré, il est vrai, se mettre au nombre des disciples, mais la crainte des malheurs, que déjà on pouvait soupçonner les arrêtait, et ce fut bien alors la représentation de ce qui se passa lors de la prédication de St. Paul devant l'Aréopage, ou plutôt la réalisation parfaite de la parabole des semences proposée par Notre Divin Maître et sans parler de toutes les passions qui les mêmes chez tous les peuples lient le cœur des hommes et les empêchent de pratiquer le bien qu'ils connaissent et estiment, nous ferons dès ce moment remarquer que les divers partis politiques qui partagent la noblesse coréenne durent être un obstacle formidable à la propagation de l'Evangile. Tous les propagateurs de la Foi dans les commencements étant du parti appelé Nam in, plusieurs autres partis et les Nam in eux-mêmes récemment divisés entr'eux ont dû naturellement se porter pour adversaire de la Foi. Réflexion que la suite des faits confirmera et mettra dans un grand jour, puisque nous verrons la Religion devenir un prétexte pour attaquer les Nam in alors au pouvoir et en forces et leur porter un coup dont peut-être jamais ils ne se relèveront.
Sur le point de consommer la grande œuvre de la rédemption et de l'établissement du christianisme, le divin fondateur de la Religion proféra ces paroles mémorables qui seront vraies partout et jusqu'à la fin des siècles: Qui amat animam suam perdet eam et qui odit animam suam in hoc mundo in vitam aeternam custo dit eam.> Cette doctrine fondamentale de la Religion qui a toujours paru folie aux yeux des gentils il était temps de la faire paraître en action devant ce peuple tout enfoncé dans la matière à qui la lumière de la Foi était présente. Déjà notre sainte Religion avait été publiée au loin dans le royaume; déjà elle comptait au nombre de ses disciples des personnages éminents distingués sous tous les rapports et chacune des classes de la société avait ses représentants parmi le petit troupeau.
Il fallait ici comme partout qu'elle passât par l'épreuve du sang, ou plutôt par la fécondation du sang. Il fallait apprendre à ceux qui voulaient suivre le Dieu crucifié jusqu'où vont les devoirs du vrai chrétien et leur expliquer à eux aussi une doctrine qui jusque là vue dans les livres pouvait leur présenter quelque obscurité. Mais de même qu'à l'origine du christianisme Dieu ne permit point immédiatement que les ruisseaux de sang coulassent, ici aussi ce sera seulement une goutte de sang suffisante pour imprimer son vrai cachet sur l'œuvre divine, et trop peu abondante pour éteindre la foi et abattre le cœur de ces néophytes qu'aucun pasteur ne pouvait même encourager ni consoler.
Les ennemis et contradicteurs de la Religion s'étaient élevés depuis longtemps et les progrès qu'elle faisait de toutes parts augmentaient de jour en jour leur nombre et leurs murmures. Toutefois il ne paraît pas que jusqu'alors le roi eut rien manifesté et l'affaire dont nous allons parler semble avoir particulière(privée) et sans la coopération du gouvernement. Au printemps de l'année 1785 (Eulsa) moins d'un an après que la Religion eut vraiment commencé à se propager, le ministre des crimes Kim hoa tsini (de quel parti est-il) voulut en arrêter les progrès par quelque coup capable de jeter la terreur dans les esprits. Toutefois n'osant pas s'attaquer directement aux chefs bien connus des chrétiens, il fit saisir et traduire à son tribunal Kim Pem ou, nommé Thomas au baptême. Kim Thomas né d'une famille de la classe moyenne ayant des charges parmi les interprètes du royaume, habitait la capitale. Il fut instruit de la Religion dès l'origine par Pieki, et répondant de suite à l'appel de la grâce, il se mit sans retard à la pratiquer avec ferveur. Il en fit part aussi immédiatement à sa famille qui l'embrassa, et son zèle allant plus loin, il convertit encore un certain nombre de ses amis et répandit la foi parmi la classe des interprètes. (La lettre de l'Evêque de Péking met ce fait en 1788, mais la suite des faits nous engage à le placer ici avec Tieng Jean qui a tout vu.)
Propagateur de la Religion, il fut appelé tout d'un coup à en être le confesseur et ne recula pas devant cette noble mais difficile mission. (Au printemps de l'année Eulsa 1785 il fut donc saisi.) Arrivé devant le ministre celui-ci voulut le faire apostasier, mais Thomas appuyé sur la grâce divine refusa courageusement une si lâche défection. On le mit à diverses tortures inutilement. Il tint bon et ne fléchit pas un instant. Kouen Xavier ayant appris l'état des choses crut indigne de sa position d'abandonner son fidèle coreligionnaire. Accompagné de Ni Kei siengi, Ni liong eki et hong Iki, (qui sont-ils?) (1785 3e lune nous trouvons une circulaire du t'ai hek saing siouki pour engager les parents et amis de ceux qui se feraient chrétiens à rompre avec eux. Elle fit grand bruit. Il y parle de Kim Pem ou. Ce Tsieng est Nam in mais très hostile à la Religion. En 1786 cette famille s'éleva par une circulaire contre la réintégration de Ni Seng houni. C'est la première pièce publique comme attaquant la Religion pour mettre ses adhérents au ban de la société.) il se rendit devant le ministre et eut le courage d'élever la voix en faveur de la vérité opprimée. Il lui dit: Nous professons tous la même Religion que Kim Pem ou. Sa vie et sa mort ne peuvent pas n'avoir de suites que pour lui seul. Nous voulons partager en tout le sort que vous lui réservez etc. etc. Le ministre ne se sentait pas la force d'attaquer des personnages si puissants. Il ne voulut pas les écouter et les fit renvoyer. Il n'en continua pas moins de persécuter le juste, et après diverses supplices que l'histoire ne nous a pas conservés, ne pouvant triompher de la foi et de la constance du chrétien il l'envoya en exil à la ville de Taniang à l'extrémité est de la province de T'siong t'sieng. Kim Thomas y fut conduit, (on dit qu'arrivé là il fit ses prières à haute voix et intruisit plusieurs personnes qui ne continuèrent pas. Quelques-uns mettent sa mort environ après deux ans. Il ne se démentit pas un instant.) et c'est là que peu après il rendit son âme à Dieu, consumé par les suites de ses blessures. Ainsi reçut la couronne Kim Thomas plus connu sous le nom de Pem ou. Le premier dans ce pays il eut la gloire de rendre au Sauveur la mort que le Sauveur daigne souffrir pour nous sur le Calvaire. Le premier il eut la gloire de dire à ces contrées par la voix de sang que Dieu étant notre roi et notre Père, le devoir imposé par la fidélité et la vraie piété ne permit pas d'hésiter à tout souffrir même la mort pour l'honneur de son service. Le premier il eut la gloire d'apprendre aux tyrans de cette extrémité de l'Orient que si le corps peut succomber aux supplices l'âme ne périt pas et lui servit dans une espérance toute pleine d'immortalité. Il nous semble donc que Kim Thomas doit à juste titre être placé en tête du nombreux et glorieux chœur des martyrs de la Corée que son exemple a guidés et encouragés à confesser hautement Jésus-Christ sous les coups de la rage des bourreaux.
Cette affaire n'eut pas d'autres suites, mais elle suffisait pour laisser entrevoir aux chrétiens ce qu'ils devaient attendre de leurs ennemis et les persuader que pour servir le vrai Dieu il faut être prêt à tout. Aussi la terreur se répandit surtout à la capitale et dans ses environs et ébranla même quelques-uns de ceux qui étaient en quelque sorte les colonnes de l'Eglise naissante. (Nombre de familles firent alors tous leurs efforts par prières et menaces pour empêcher ceux qui leur étaient liés de pratiquer désormais et obtenir leur apostasie, et de toutes parts il y eut de glorieuses confessions, comme aussi des défections déplorables. Mais) La voix publique désignait surtout comme fauteurs et chef(s) de la Religion Ni Pierre dit Seng houni, Ni Pieki et les deux frères Tieng, Jak tsien et Jak iong, et éclatait partout en paroles menaçantes. Ces trois familles dont bien des membres n'avaient pas embrassé la foi furent intimidées et mettant tout en œuvre pour arrêter le zèle de ces chrétiens et leur faire cesser la pratique n'y réussirent malheureusement que trop bien, du moins en partie. Le frère cadet de Seng houni appelé Tsi houni témoignait surtout une haine violente contre la religion et employa tous les moyens possibles pour dégoûter son aîné et le faire désister de sa détermination. Il fit tant qu'à la fin Seng houni n'y pouvant plus tenir brûla tous ses livres et fit un écrit pour se justifier devant le public et lui donner satisfaction.
Le père de Ni Pieki homme naturellement vif et emporté qui d'ailleurs n'avait jamais voulu se mêler à la Religion fit de son côté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arracher du cœur de son fils les sentiments religieux qu'il y voyait profondément imprimés, et ne réussissant pas dans ses projets il en vint jusqu'à se lier le cou pour se donner la mort. Pieki ne pouvait être insensible à de pareilles scènes. Il n'y tenait plus et toutefois ne s'était pas rendu. Un chrétien, indigne de ce nom, vint près de lui pour tâcher d'achever l'ébranlement où il semblait se trouver. Il employa toutes les ressources possibles et usa de toutes les ruses imaginables pour réussir à le faire apostasier. Pieki fatigué, abasourdi de tant de vexations n'apostasia pas ouvertement, mais il usa de paroles de détours pour écarter tous les malheurs qu'il avait devant les yeux. Son cœur avait failli. Hélas! Depuis ce temps on l'empécha de mettre les pieds dehors. La foi qu'il n'avait pas perdu livrait dans son cœur des assauts continuels à ses affections naturelles. D'une part, il voyait son Dieu, de l'autre, c'était son père. Comment renier son Dieu? Comment faire périr son père? Ces assauts continuels le jettèrent dans un état que la plume ne peut décrire. Il devint morne, silencieux, mélancholique. Jour et nuit ses pleurs ne discontinuaient plus, ses gémissements se faisaient entendre d'une heure en heure. Il n'ôtait plus ses habits et le sommeil fuyait loin de sa paupière. Il mangeait encore quelquefois, mais tout appétit étant perdu, c'était sans goût et sans profit pour le corps. Cet état violent ne pouvait durer et par avance on entrevoyait que la nature avait malheureusement pris le dessus. Peu à peu les remords, les agitations de la conscience se calmèrent, les derniers efforts de la grâce étaient à peine sentis. Il se remit en son état ordinaire de santé, et on prétend même que le désir des dignités vint à renaître chez lui. Quoiqu'il en soit il n'eut pas le temps de rien essayer. Au printemps de l'année 1786(Piengo) il fut pris de la peste courante (le Jo ping des Chinois) et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Il est impossible de savoir comment se passèrent ses derniers moments. On croit que des chrétiens purent pénétrer jusque près de lui, l'exhorter au repentir et le disposer à paraître devant Dieu. Mais on n'a pu le savoir clairement. Ainsi périt d'une manière bien peu consolante cet homme dont l'ardeur, le zèle et les talents avaient ouvert la porte à la Religion dans ce royaume. Avec de grandes qualités et des vertus incontestables, il n'avait pas assez compris la parole du Sauveur qui dit: Qui amat patrem aut matrem plus quam me non est me dignus, et pour avoir heurté contre cette pierre de scandale il finit, soit dit sans vouloir porter aucun jugement, d'une manière bien affligeante pour ceux qui l'avaient vu à l'œuvre, *(son nom restera toutefois comme ayant eu la gloire de donner l'entrain à l'étude de notre Religion qui connue par quelques livres depuis près de 200 ans n'avait encore trouvé personne qui la fît ressortir et connaître plus en détails.)* et peu rassurante pour nous tous qui l'avions si souvent admiré.
Cependant la foi du petit troupeau un moment ébranlée était loin d'être anéantie. Si d'une part la chrétienté se trouvait dans le deuil à l'occasion de la défection de quelques-uns de ses membres, de l'autre elle était bien consolée et par la constance de la plupart au milieu des persécutions domestiques souvent plus difficiles à supporter que celles des tyrans et par les recrues que chaque jour amenait d'un côté et de l'autre, car il ne paraît pas que cette première démonstration ait beaucoup ralenti l'ardeur générale et les progrès continuaient. La foi faisait alors surtout de nombreuses conquêtes dans la grande plaine de Nai p'o où était retourné Ni Louis dit Tan oueni que nous avons vu sortir de la maison et de l'école de Kouen Xavier pour y diriger ses pas. Là ce ne sont plus des familles doctes et distinguées qui recrutent nos rangs; ce sont des familles honnêtes, des hommes de labeur, classe qui domine surtout dans cette région, mais la sève qu'ils reçoivent étant la même, ils produiront aussi en leur temps des fruits non moins remarquables. (Détails à la vie de Tan oueni) (Les talents distingués de Tan oueni joints à un don particulier de captiver les cœurs lui attiraient de jour en jour plus d'admirateurs et peu savaient résister à l'influence de sa parole. Aussi le nombre des chrétiens augmentait considérablement dans ses environs puis la réputation de son érudition se répandant on vit bientôt arriver des personnes de tous les districts d'alentour et la foule était telle chez lui qu'il se forma à cette époque un dicton populaire: On va chercher la science dans la maison de Ni Tan oueni comme on va se rassasier dans celle de Ouen tong tsi, chrétien riche habitant non loin de là et renommé pour bien traiter ses hôtes que nous verrons bientôt mourir pour Dieu.)
N'ayant pas de détails circonstanciés sur ces premiers développements, il ne nous est possible de satisfaire sur ce sujet aux désirs des lecteurs.
Kouen Xavier occupé sans relâche aux travaux d'une vaste évangélisation qu'il s'était imposée en partage au Baptême, sentit toutefois le besoin d'un peu de retraite et de repos. Il avait compris sans doute à l'école de la grâce qui fut son seul maître qu'avant tout il faut se sanctifier soi-même, et qu'on ne peut servir utilement les autres qu'en leur communiquant de sa surabondance propre. Dans cette pensée, il conçut le `1dessein d'une retraite en règle; et pour pouvoir l'exécuter paisiblement, il quitta momentanément famille et amis et se retira secrètement dans une pagode vide située dans les montagnes appelées liong mun san, accompagné d'un seul de ses amis, Tsio Justin, dit Tong seumi, lui aussi de famille noble et distinguée. Arrivés là, ils convinrent de ne pas se dire un seul mot pendant tout le temps de la retraite et ils y passèrent huit jours pleins, uniquement occupés à la méditation des vérités de la Religion et à tous les exercices que put leur suggérer l'Imitation de Jésus et des Saints. Il n'est pas douteux qu'une pratique si conforme au véritable esprit de la Religion ne leur ait obtenu de Dieu des grâces abondantes de vertus soit pour eux-mêmes soit pour ceux qu'ils voulaient instruire. Mais ces résultats comme tant d'autres choses nous seront toujours cachés.
Les clameurs et contradictions s'étaient un peu calmées avec le temps.
En l'année 1787(Tieng mi) (Cette année Hong Nak ani commence ses lettres contre la Religion) Ni Seng houni que nous avons vu succomber par faiblesse, mais dont la foi était toujours subsistante vint de nouveau trouver Kouen Xavier et les frères Tieng Jak iong et Jak Tsien pour traiter encore des affaires de la Religion. C'est à cette époque, il paraît, que pour presser et assurer d'avantage l'extension et développement de la foi et aussi pour mieux confirmer et diriger les néophytes de ce pays, ils formèrent le dessein d'établir entre eux la hiérarchie sacrée. Cette pensée extraordinaire qui aux yeux de plusieurs sera d'abord considérée comme une extravagance, était néanmoins fort naturelle.
N'ayant pas le bonheur comme les chrétiens de Chine qu'ils avaient pour modèle de posséder parmi eux des pasteurs venus de l'Occident, ils voyaient très bien qu'une chrétienté ne peut subsister sans chef, et dans leur ignorance, n'ayant pas encore pu apprendre que le sacerdoce descend nécessairement de Dieu et que son caractère divin doit se communiquer nécessairement aussi par une chaîne qui remonte jusqu'à Jésus-Christ Sauveur Prêtre, il était naturel qu'ils essayassent de créer des Prêtres conducteurs du troupeau et d'assurer ainsi l'avenir de leurs travaux. A nos yeux ce projet des premiers propagateurs de la Religion en Corée est au contraire une pensée grande et féconde qui révèle et la hauteur de leurs conceptions, et la foi qu'ils avaient en la vérité du christianisme, et le désir sincère qui les pressait d'établir la Religion sur une base stable, solide et pour ainsi dire indestructible. Du reste leur humble soumission que nous verrons plus tard et les biens réels que la Providence permit être produits par leur ministère fantastique, semblent pouvoir être des garants de leur bonne foi et les faire excuser.
Ni Seng-houn i avait été à Péking où il fut baptisé. Il avait vu là en action la hiérarchie catholique, l'Evêque, ses Prêtres et autres clercs inférieurs. Dans l'Eglise de cette ville il assista aux saints Mystères, aux cérémonies religieuses et avait vu conférer la plupart des Sacrements. Aidé en outre par les diverses explications qui se trouvent dans les livres liturgiques ou dogmatiques à l'usage des chrétiens, il se trouvait en état d'organiser à peu près les choses et de simuler l'administration des sacrements.
(La prédication de Ni Louis surtout se fit remarquer par ses fruits abondants. Se voyant désormais tout consacré à l'oeuvre de la Religion, il s'y livra en grand et semblait n'avoir plus d'autre pensée. Le danger des persécutions probables ne l'arrêtait pas. Il allait partout remplissant de son mieux toutes les fonctions de son ministère et y eut un grand succès. La Religion devint alors très répandue dans sa vaste région du Nai-p'o; elle s'exerçait avec une liberté et publicité presqu'entières, et il eut le bonheur comme la gloire d'y déposer alors en grand le germe de la foi qui jusqu'à nos jours n'a cessé de produire ses fruits, et a rendu cette contrée incontestablement la pépinière du catholicisme en Corée.)
Tout fut donc réglé le mieux que l'on put et on procéda à l'élection des pasteurs. Kouen Xavier, que sa position, sa science et sa vertu mettaient hors de rang, fut désigné Evêque. Ni Pierre, dit Seng-houn i, et Ni Louis, dit Tan-ouen i, furent nommés prêtres avec plusieurs autres peut-être. (T'soi Jacques de Ie-sa-ol au Nai-p'o semble avoir été prêtre de second ordre. Il était sous les ordres de Tan-ouen i que quelques-uns prétendent avoir été Evêque. Nous ne le pensons pas.) (Niou Augustin et T'soi Jean, dit T'siang-hien i furent prêtres aussi. (note d'Eur.)) Mais la tradition n'est pas assez claire pour en faire mention. Il est probable toutefois qu'un prêtre fut encore désigné pour la province de Tsien-la, car Ni Louis était chargé du Nai-p'o, l'Evêque et Seng-houn i restant pour soigner la Capitale et la province.
On ignore du reste s'il y eut quelque cérémonie pour consacrer ces prêtres improvisés au service des autels. Tout étant ainsi établi et réglé, chacun se rendit au poste qui lui était confié et se mit à faire une espèce d'administration des chrétiens, prêchant, baptisant, confessant, donnant la confirmation, célébrant les saints mystères et distribuant la communion aux fidèles. (La grand-mère du P. André, nièce de Ni Louis, et baptisée par lui rapportait qu'ils se servaient d'un calice d'or. Les ornements sacrés étaient confectionnés avec de riches soiries de Chine. Leur forme n'étaient pas celle des chasubles, mais la forme des habits de sacrifice en usage dans le pays. Ils se servaient du bonnet permis en Chine pour les cérémonies religieuses. Pour la confession, ils étaient placés sur un siège posé sur une estrade, et les pénitents se confessaient debout à peu près comme j'ai vu en Espagne. Les pénitences ordinaires étaient toutes en aumônes, et pour les plus graves le prêtre battait lui-même le pénitent sur les jambes. On peut présumer que les autres prêtres étaient sur ce pied. Accoutumés à fuir la vue des femmes de condition, ils ne voulaient pas les confesser, toutefois on les tourmentaient tant qu'ils y consentaient. Les prêtres étaient alors regardés et traités comme des êtres surhumains et des hommes célestes. Ils circulaient peu et on venait chercher les sacrements. Mais devaient-ils sortir, ils le faisaient à pied et s'excitaient toujours à l'humilité.) Ces sacrements sont les seuls que nous trouvions consignés dans les mémoires. Le baptême donné par ces pasteurs pouvait être certainement valable et conférer la grâce de la régénération aux néophytes, mais malgré la nullité et le néant des autres fonctions qu'ils remplissaient, leur ministère donna un grand élan à la chrétienté et réchauffait partout la ferveur. On parle encore de l'enthousiasme et de la sainte ardeur avec laquelle se passaient toutes les cérémonies; et pasteurs et brebis semblent avoir été dans une telle bonne foi que le moindre doute ne s'élevait en l'esprit de qui que ce soit.
A la Capitale aussi les réunions se faisaient bien en règle et nous voyons T'soi Jean surnommé Koan-t'sien i louer une maison exprès pour pouvoir y recevoir les prêtres et faire conférer les sacrements aux fidèles. Avec son caractère actif et capable, il disposait toutes choses, préparait les chrétiens convenablement et était alors occupé jour et nuit pour le service des prêtres et des chrétiens, sans redouter l'embarras et les fatigues. Ne semble-t-il pas qu'il fût installé catéchiste? Son père qui ne pratiquait pas du moins entièrement, non seulement ne s'opposait pas à ses nombreuses réunions qui se faisaient à sa maison, mais les couvrait au dehors de tout son pouvoir, en sorte que tout le monde en était dans l'étonnement et l'admiration. (En 1788, adresses au roi de Tsieng en ni, puis de Hong Nak-an i.) (C'est à cette époque que Xavier perdit sa femme.)
Ce clergé impromptu remplit ainsi ses fonctions pendant environ deux ans avec des succès plus ou moins marqués, quand en l'année 1789 (Kei-iou) quelques passages des livres de Religion lus avec plus d'attention leur firent naître quelques doutes sur la légalité de leur élection à la charge de pasteurs. Aussitôt ils furent saisis de crainte et de confusion, et examinant les choses de plus près la licéité de leur conduite devint de plus en plus problématique. De là on conclut qu'il fallait cesser de suite toute administration devenue téméraire et s'adresser à l'Evêque de Péking pour en obtenir une solution claire. (On doit bien admirer ici la simplicité et la droiture d'intentions qui dominait les chefs des chrétiens. Après s'être ainsi avancés vis-à-vis de toute la chrétienté, il devait bien leur en coûter pour quitter leur position au risque de se voir diffamés, et l'amour propre n'aura pas manqué de leur suggérer mille prétextes pour attendre au moins la décision définitive. Mais non, il s'agit d'une affaire sacrée et sur un simple doute fondé en raison chacun se met de côté, preuve bien claire de la droiture de leurs vues et de la bonne foi où ils étaient.)
Chacun rentre donc dans sa vie privée, sauf la prédication et l'instruction des nouveaux et anciens chrétiens qui paraît avoir été continuée, et on ne s'occupa plus que de faire la lettre consultative et des moyens de la faire parvenir sûrement. L'ambassade annuelle offrait une occasion naturelle, mais les relations sûres n'ayant pas encore été organisées, il fallait trouver un homme capable et dévoué qui voulût bien se charger de la mission et offrît quelque chance de succès. N'ayant pas de chrétien parmi les gens qui font habituellement partie de l'ambassade, on jeta les yeux sur Ioun Paul, appelé Iou-iri pour essayer de lui faire jouer ce nouveau rôle aussi important que délicat. Ioun Paul descendait d'une famille tant soit peu noble du district de Nie-tsiou. Il avait été l'élève des Kouen et instruit de la Religion par Kouen Xavier. D'un caractère doux, affable et très discret, on pensa qu'il pourrait réussir; et déguisé en marchand, il se mit en route pour Péking à la 10ème Lune de cette même année 1789, porteur de la lettre consultative adressée simultanément à l'Evêque de cette ville par Ni Seng-houn i et Kouen Xavier. Cette longue route de plus de 3,000 lys qui font plus de 300 lieues faite en hiver à travers un pays étranger offre de véritables dangers par les fatigues inévitables et les maladies qu'il est facile d'attraper. D'où il n'est pas rare de voir succomber un ou deux de la bande. Paul appliqué dès l'enfance à l'étude des lettres et livré à une vie sédentaire, n'était pas accoutumé à supporter la fatigue. D'ailleurs sans expérience, sans connaissances et sans aucun appui il était plus exposé que personne, et dut encore faire la route à pied comme tous ceux dont il simulait la profession. Toutefois soutenu par la grâce et confiant en la bonté de la cause pour laquelle il avait entrepris ce voyage, il en subit joyeusement les fatigues et arriva heureusement à Péking. Il se rendit de suite près de l'Evêque et lui remit la lettre dont il était le porteur; puis entrant dans le détail des divers événements survenus dans la nouvelle chrétienté, il conféra avec lui des moyens de lui porter secours. (Paul fut alors confirmé et reçut les autres sacrements.) Après le séjour ordinaire, au printemps de l'année Kieng-sioul 1790, il reprit à la suite de l'ambassade la route de sa patrie; et adroit à répondre à tout et à se tirer des mauvais pas, il arriva sans exciter de soupçons ni susciter aucune affaire.
La réponse de l'Evêque était adressée à Ni Seng-houn i et à Kouen Xavier. Il les reprenait d'abord fortement de leur folle conduite en s'ingérant dans l'administration des sacrements et ajoutait que non seulement ils ne pouvaient célébrer les saints mystères, mais qu'ils ne devaient pas non plus sacrifier aux ancêtres, faire les prostrations d'usage, ni se mêler aucunement aux superstitions quelles qu'elles fussent. Enfin il les encourageait et exhortait à exciter continuellement les chrétiens. L'Evêque dans cette même lettre ou peut-être de vive voix avait promis aussi d'envoyer le Père Tsiou pour secourir et administrer les chrétiens, et commandait de prendre toutes les mesures nécessaires et de faire choix d'hommes capables pour l'introduire sûrement. Cette réponse attendue si longtemps avec impatience ne laissait plus aucun doute sur la grande affaire en question. Elle fut reçue avec calme et soumission entière. Chacun se félicita de la prudence avec laquelle on avait cessé les fonctions du saint ministère et jamais plus désormais la pensée ne vint à l'esprit de qui que ce soit de s'ingérer aux affaires du sanctuaire. La joie, la ferveur et l'union des néophytes n'en fut pas troublée. Mais l'article concernant les sacrifices et les superstitions fut un coup de foudre pour plus d'un. (Jusque là, les fidèles de Corée assidus à toutes les observances de la Religion dont ils avaient connaissance, n'en avaient pas moins continué à participer au culte superstitieux que l'on rend dans ce pays aux parents défunts. L'ignorance et la bonne foi pouvaient jusqu'à une certain point les excuser, mais dès ce moment apprenant que la moindre coopération en cette matière était réprouvée par l'Eglise, chacun prit son parti et jaloux de conserver sa foi, s'abstint de tout ce qui était décidé lui être contraire. C'était blesser à la prunelle de l'oeil toutes les classes de la population. Dans ce pays la Religion des lettrés qui serait même appelée Religion des ancêtres est loi de l'Etat. Toute omission des cérémonies en usage sur cet article est punie sévèrement, et toute infraction est reçue avec une violente répulsion par l'opinion du pays sans exception. Ces usages traditionnels dont l'origine remonte très haut et inviolablement transmis de race en race sont aux yeux de tous la base de la société, le fondement de l'Etat, le point d'appui de tous les rapports naturels; et malheur à celui qui aurait l'audace de les attaquer même en paroles. D'après cela il était facile de prévoir l'orage que l'on allait s'attirer et tout le parti que les adversaires de la Religion ne manqueraient pas d'en tirer pour essayer de nouveau de la détruire et renverser de fond en comble. Beatus qui non fuerit scandalizatus in me a dit la première victime des persécutions suscitées contre la vraie foi. Quelques chrétiens faibles cessèrent dès ce jour de se mêler aux pratiques religieuses et de ce nombre nous avons la douleur de compter Ni Seng-houn i, que la crainte avait déjà fait tomber d'une manière si déplorable quelques années auparavant. Il se retira chez lui et cessa tout rapport avec les chrétiens. Bien plus cédant au désir des dignités, il obtint différents mandarinats, et désormais nous ne le verrons plus paraître que de loin en loin poursuivi malgré sa défection et ne pouvant malgré mille efforts se laver auprès de ses ennemis du crime d'avoir introduit la Religion, espèce de péché originel à leurs yeux, qu'ils reprocheront encore à ses descendants. Malgré cette seconde chute de ce chef influent, la foi des néophytes ne paraît pas en avoir été ébranlée et la presque totalité des chrétiens, soumise d'esprit et de coeur à tout ce qui émanait de la véritable autorité, continua de pratiquer avec ferveur, et témoigna de son éloignement à toute pratique superstitieuse.
Dès lors, Kouen Xavier resté seul des trois premiers fondateurs ne fit que redoubler de zèle et sembla se multiplier pour diriger et entretenir les différentes parties du troupeau fidèle. Il fut merveilleusement secondé par le jeune T'soi Jean, surnommé Koan-t'sien i, alors âgé de 30 et quelques années. Et de leur côté Ni Louis au Nai-p'o et Niou Hang-kem i dans la province de Tsien-la continuèrent à employer leur temps et leurs forces à travailler au bien spirituel de leurs frères dans la foi. Cette même année 1790 en septembre, Ioun Paul et le catéchumène Ou allèrent à Péking pour demander des prêtres. (voir la lettre de l'Evêque de Péking.)
En cette même année 1790 eut lieu la conversion de T'soi P'il-kong i, appelé Thomas au baptême. T'soi Thomas était d'une famille de la classe moyenne à la Capitale. Ses ayeux avaient occupé quelque place auprès du gouvernement parmi la classe des médecins, mais à cette époque n'ayant pas d'amis qui pussent le faire avancer, il était très pauvre et n'avait pu même se marier. Instruit de la Religion par T'soi Jean, son caractère franc et ardent l'embrassa immédiatement et dès le premier jour il fut en ferveur, et ne pensant plus à autre chose, il oubliait même de subvenir aux nécessités du corps. Cet enthousiasme ne tomba point et inaccessible à la crainte, sans s'occuper des malheurs qu'il pouvait s'attirer, il lui arrivait de temps en temps au milieu de la foule des rues de s'écrier à haute voix: Il faut nécessairement servir le grand roi du Ciel et de la terre. Comment ne pas servir le grand Seigneur de toutes choses? Aussi quoiqu'il fût nouveau chrétien, il était partout connu comme tel et son nom était répété par toutes les bouches. On voit que la terreur n'avait pas encore atteint tous les coeurs ni fait fermer toutes les bouches.
Cependant les ennemis de la Religion dont les clameurs avaient été moindres pendant quelques années, étaient loin de se tenir en repos. Ils tramaient toujours sourdement leurs affreux complots, et sans doute ne préparaient leurs batteries dans le secret que pour les rendre plus formidables. Dès l'année 1788 (mou-sin), Ni Kei-kieng i, d'abord ami de Seng-houn i et compagnon de ses études, qui jusques là avait été porté pour la Religion, se retira, fit même quelque écrit contre les chrétiens et alla grossir le parti de Hong Nak-an i (Hong Nak-an i était bien du parti des Nam-in. Nous ne savons pourquoi il se mit toujours à la tête de leurs ennemis. Toujours le premier à attaquer la Religion et ses partisans, il fut cependant impliqué dans leur ruine et nous le nommons à dessein. Plus tard il changea son nom et s'appela Hei-oun i. (La raison en est dans la division des Nam-in, voir la lettre de Hoang Alexandre.)), ennemi déclaré de la foi et l'un de ses plus haineux adversaires. Appliqués sans cesse à recueillir tout ce qui pouvait les faire parvenir à leur but, ils épiaient la conduite et les paroles des chrétiens et n'attendaient qu'une occasion favorable pour éclater et tâcher de les faire périr.
L'année 1791 (sin-hai) la leur fournit bientôt, lorsqu'à la mort de la mère de Ioun Tsi-t'siong i, ce chrétien ne fit pas les sacrifices aux parents défunts selon l'usage. Ioun Tsi-t'siong i qui va nous occuper maintenant, appelé encore Ou-iong i et nommé Paul au baptême, descendait d'une famille illustre de l'île Hai-nam. Ses ancêtres tinrent souvent une place distinguée parmi les dignitaires du royaume, et certain nombre d'entre eux se firent aussi un nom dans les lettres. Son père était venu s'établir dans le district de Tsin-san povince de Tsien-la au village de Tsang-kou-tong. C'est là qu'il naquit en l'année Kei-mio 1759. Dès l'enfance, son intelligence et sa bonne conduite se firent remarquer et bientôt il acquit une réputation de talent. (Sa famille se livrait à l'étude de la médecine et y avait de la réputation.) En l'année 1783 (kei-mio), à l'âge de vingt-cinq ans, prenant part aux examens publics il fut couronné et reçut son diplôme de bachelier dit tsin-sa. L'hiver de l'année suivante, s'étant rendu à la Capitale, il y trouva chez Kim Thomas dit Pem-ou deux livres de Religion qu'il emporta avec lui et dont il tira copie, mais ne pratiqua pas encore. Ce ne fut qu'environ trois ans après qu'ayant appris de Tieng Iak-tsien i, tout l'ensemble de la Religion il l'embrassa sur l'heure et la pratiqua avec ferveur. (Tsi-t'siong i était cousin germain de Tieng par sa tante paternelle. Ce qu'il dit de Kim Pem-ou déjà mort pourrait bien être une ruse pour cacher la famille Tieng qui peut-être l'aurait instruit la première.) Plus tard, ayant appris que la Religion était proscrite, il brûla une partie de ses livres par précaution, sans toutefois cesser de lui être dévoué et d'en remplir exactement les pratiques. Nous ne voyons nulle part qu'il se soit beaucoup répandu parmi les chrétiens. Il paraît probable que par précaution ou pour d'autres raisons il eut assez peu de rapports avec eux, et qu'il s'occupa peu de la propager. En 1790, il apprit que la lettre de l'Evêque de Péking défendait les sacrifices et prostrations aux parents défunts et n'en continua pas moins de rester attaché à sa foi et à ses devoirs religieux, et il brûla les tablettes de deux générations conservées dans sa famille selon la coutume. Sur ces entrefaites sa mère, nommée Kouen, vint à mourir pendant cet été de 1791 (sin-hai).
La position était délicate. Paul, chez qui le décès de sa mère allait attirer successivement tous ses parents et amis pour faire condoléance et assister aux sacrifices, se trouvait placé entre deux abîmes. Il devait ou violer sa foi et renier son Dieu du moins en action ou se tenir prêt à affronter les reproches, injures et peut-être plus de la part de mille personnes connues et inconnues. Pour tout autre, l'hésitation eût pu avoir lieu. L'âme noble et droite de Paul lui a bientôt fait prendre un parti. Il revêt le deuil, pleure sincèrement sa mère, fait pour elle tout ce que peut suggérer en pareille occasion une piété filiale éclairée et bien entendue. Rien ne manquait à ce qu'exige l'amour et la convenance; seulement pas de sacrifices. Tout aussitôt, les murmures s'élèvent et se font entendre. Partout les conversations roulaient sur un attentat jusqu'alors inouï dans la personne d'un enfant de noble; la critique se répand de village en village, redouble avec le nombre de ceux dont la nouvelle frappait les oreilles, et en peu de temps une rumeur d'indignation retentit dans toute la contrée et ses échos sont répétés fort loin. Signalé comme impie pour tout ce qu'il avait de plus cher, montré au doigt par ses voisins comme un être qui a renié tout sentiment et principe naturels, injurié et menacé d'être traduit comme rebelle à son roi, Paul se trouvait déjà comme mis au ban de la société. Qu'on se figure, si l'on peut, la douleur, les angoisses, l'amertume dont son coeur était abreuvé.
Lui, il n'y a qu'un instant entouré de l'estime et des applaudissements de tous les environs, se trouve tout à coup en butte à tous leurs traits envenimés, foulé aux pieds de tous et déchiré par d'affreuses imputations. Toutefois le juste ne se laissera pas abattre et vaincre par l'adversité. Il avait pour soutien et consolation sa conscience calme qui ne lui reproche aucun crime, l'exemple du divin Sauveur que les injures et les calomnies ont le premier poursuivi, et puis la grâce de son Dieu qui peut bien éprouver mais n'abandonne pas ses serviteurs. Et aussi persista-t-il dans la noble profession de sa foi.
Cette nouvelle parvint aux oreilles de Hong Nak-an i. Et aucune autre n'eût pu lui causer tant de joie. Aussitôt il adresse une pétition au premier ministre T'sai, alors tout-puissant, et il ne demandait rien moins que de faire poursuivre et condamner à mort le chrétien. La réponse du ministre à cette époque ne nous est pas connue. Il paraît toutefois qu'il donna des ordres au gouverneur de la province. (Le 22 de la 10e lune, le ministre T'sai demanda au roi que ceux qui seraient convaincus du crime de la nouvelle Religion fussent punis du dernier supplice pour effrayer et faire revenir tout le monde, le roi le permet (manscrits). Voir plus bas les notes du 6 et 9 de la 11e lune.) Mais Hong Nak-an i ne s'en tint pas là. Il écrivit aussi au mandarin du district de Tsin-san qui était alors Sin Sa-ouen i pour le presser de faire des perquisitions et de pousser vivement l'affaire. Ce fut vraisemblablement cette lettre qui détermina Sa-oueni à faire les premières démarches.
D'après les usages de ce pays la visite domicilière chez un noble est une chose délicate et dangereuse; mais au courant des moindres détails par le bruit public, il était sûr de son coup. Il se rendit donc chez Ioun Paul dit Tsi-t'siong i, et trouvant la boîte extérieure des tablettes, il fut un peu interdit; mais trop bien renseigné il examina de très près et s'apercevant qu'elle était vide (la boîte extérieure des tablettes est formellement prohibée aux chrétiens, mais alors comme aujourd'hui il paraît que quelques-uns se faisaient illusion sur sa licéité avec la différence toutefois qu'alors l'ignorance pouvait excuser ce que des instructions formelles ont rendu si clair par la suite. C'est du moins ce que la conduite franche et décidée de Tsi-t'siong i dans toute cette affaire nous donne à supposer.) il fit à l'instant saisir (Il paraît par les interrogatoires que Ioun Paul et Kouen Jean s'étaient retirés l'un à Koang-tsiou, l'autre à Han-san, probablement pour éviter les grands coups. Le mandarin n'a donc fait que donner ordre de les saisir. Cet ordre étant parvenu à leurs oreilles avec la nouvelle de la prise de l'oncle de Paul, ils vinrent de suite se livrer, faisant route jour et nuit. Nous ignorons si cet oncle de Paul était chrétien. Il paraît avoir été relâché de suite.) et emmener le chrétien, et envoya en donner avis au gouverneur de la province. Ioun Paul arriva à la préfecture de Tsin-san le soir du 24 de la 10e lune de sin-hai 1791. Les interrogatoires y commencèrent ce même jour et furent continués les suivants jusqu'à la réponse du gouverneur qui l'appelait à son tribunal où il fut envoyé le 29 de cette même lune. Le gouverneur de la province de Tsien-la résidant à Tsien-tsiou était alors Tsieng Min-si. Paul interrogé sur ce qu'il avait fait de ses tablettes répondit d'abord les avoir enterrées, réponse qu'il fit sans doute pour choquer moins les idées du pays. Mais ayant creusé la terre au lieu indiqué par lui et ne les trouvant pas, on se mit à lui faire subir différents supplices et tortures atroces. C'est alors qu'il fit sa profession de foi claire et solide en ces termes: "Après la mort de l'homme son corps retourne dans la terre et son âme va soit au Ciel soit dans l'Enfer. Il n'y a pas d'âme qui puisse et doive rester dans la maison du défunt. Ceci est une vérité claire et démontrée que je connais certainement. Prendre une tablette de bois pour lui offrir des sacrifices et des nourritures, c'est témoigner aux parents sa piété et son amour par une voie fausse. Que sont ces tablettes sinon un morceau de bois, coupé sur la montagne et livré à l'ouvrier pour le tailler et y parer (par) le ciseau. Mais ce travail de l'ouvrier peut-il faire que l'âme des parents vienne y résider? Ces tablettes ne sont donc pas le père ou la mère. C'est un simple morceau de bois; et dès lors comment pourrais-je les honorer comme père et mère? Notre vraie Religion du Maître du Ciel défend à bon droit une pareille superstition. Or, je suis chrétien et observe tous les commandements de Dieu. J'ai donc brûlé ces objets." C'était la première fois sans doute qu'un gouverneur assis sur son tribunal rencontrait une telle liberté de paroles. Chacune d'elles taillait dans le vif et attaquait les affections les plus intimes de ces peuples-ci, en dévoilant le vide de leurs croyances religieuses dont les fondements étaient sapés et chancelants. Le gouverneur, après une déclaration si formelle, fit immédiatement son rapport et l'envoya au roi. Il nous reste quelques détails sur les interrogatoires que Paul eut alors à subir. Ils roulent uniquement sur le crime d'avoir détruit les tablettes des ancêtres et de ne pas sacrifier aux parents défunts; ils n'offrent du reste rien d'un peu intéressant. Paul aussi présenta sa défense que nous avons non en caractères chinois qui formaient l'original, mais traduite en coréen. Qu'on ne se figure pas ici un plaidoyer tels qu'ils sont en usage en Europe avec toutes les précautions oratoires et les diverses ressources que fournit l'éloquence. Ce sont uniquement quelques pays où il rend compte de sa conduite et s'efforcer sans blesser aucunement les principes de sa foi, de la présenter sous un jour moins odieux et moins révoltant pour l'opinion publique dont il avait été forcé par devoir de choquer les idées. Elle peut à peu près se résumer ainsi: .........
Le roi était alors Tsieng-tsong, âgé de 40 ans. Il gouvernait le royaume depuis environ 15 ans et l'histoire le signale comme un prince sage, modéré, prudent, ami de la science et juste appréciateur des belles qualités de ses sujets. Il avait reçu le rapport du gouverneur de Tsien-la, et la suite fait présumer qu'il n'était pas décidé à porter les choses si loin. Mais son premier ministre T'sai le poussa à faire mourir le chrétien et à ordonner d'exposer sa tête pendant cinq jours devant le public, pour effrayer les populations du midi et les empêcher de suivre la religion. Le roi finit par donner son consentement et la dépêche en fut immédiatement expédiée.
Il faut croire que les ennemis de la Religion se montraient alors bien menaçants, car le ministre T'sai, homme supérieur et non hostile aux chrétiens était lui-même du parti des Nam-in et parent ou ami de presque tous les hommes éminents alors connus pour chefs de la Religion. Cette conduite de sa part surprit beaucoup et on l'explique en pensant que par crainte de donner prise sur lui et sa famille il préféra abonder dans le sens des accusateurs les plus violents; ce qui toutefois ne le sauva pas entièrement comme nous le verrons.
Très peu de temps après l'expédition de la condamnation à mort, le roi se repentit d'avoir cédé aux instances qui lui étaient faites; (par la pensée que ce premier acte deviendrait loi de l'Etat et qu'on continuerait à mettre à mort tous ceux qui suivraient cette religion) des ordres pressants furent donnés et il envoya un courrier extraordinaire avec ordre de surseoir à l'exécution et d'attendre de nouvelles délibérations. Il était trop tard.
A la réception des premières dépêches, on avait tout consommé et Paul portant sa tête sur l'échafaud avait obtenu la couronne le 13 de la 11e lune. Dans la trente-troisième année de son âge. Ainsi eut lieu la première exécution publique d'un chrétien, que le roi lui-même avait voulu éviter, mais qui depuis ce jour n'en servit pas moins toujours de point d'appui à nos ennemis pour faire considérer la condamnation à mort des chrétiens comme loi de l'Etat, et fut par le fait la cause des ruisseaux de sang qui tant de fois inondèrent la Corée. Ioun Tsi-t'siong i y gagna la palme du martyre dont Kim Pem-ou lui avait courageusement montré la route. Sa réputation et son influence morale devint alors bien grande dans toute la chrétienté et nul doute que son intercession aussi n'ait bien contribué à attirer dans l'arène et à soutenir dans le combat la nombreuse troupe de ses imitateurs. Nous ne voyons nulle part que Tsi-t'siong i ait eu de fils; mais il laissa une fille qui parvenue à l'âge nubile fut mariée selon sa condition. (La fille de Paul avait alors 13 ans, elle se retira momentanément dans la maison du père de Kim Thomas, prétorien et élève de Tsi-t'siong i. Le jour elle se cachait dans le jardin et la nuit venait dans la maison. Elle fut mariée à un Song à Sout- pangi, district de Kong-tsiou. Sa mère la suivit chez son beau fils et continua, dit-on, à pratiquer. Mais aucun chrétien n'a eu depuis de rapports avec cette famille.) En effet, les persécutions n'étaient encore qu'à l'état d'essai et la haine de la Religion n'avait pas encore eu le temps de compléter son système infernal et d'en organiser les nombreux réseaux. Plus tard les chrétiens, proscrits, poursuivis par d'indignes traitements et placés de fait bien au dessous du dernier conspirateur contre le roi ou la sûreté de l'Etat, ne seront plus même censés faire partie de la société, et leurs enfants ne purent plus nulle part espérer trouver un parti convenable à leurs naissance ou à leur position.
Tsi-t'siong i eut près de lui un généreux compagnon de ses combats et de sa gloire dont nous n'avons pas parlé pour ne pas couper la narration de son martyre. Il s'appelait Kouen Sian-ien i, nommé Jean (Jacques d'après la lettre de l'Evêque de Péking) au baptême. Sa famille originaire de An-tong, province de Kieng-siang, s'établit ensuite à T'an-Pang au district de Kong-tsiou, et sans être de très haute noblesse comptait parmi ses membres quelques personnages assez distingués. Jean qui était parent de la mère de Tsi-t'siong i se livrait à l'étude des lettres et s'appliquait à la fois à régler sa conduite et ses moeurs, quand il fut instruit de la Religion par Tsi-t'siong i lui-même: et se rendant de suite à l'appel de la grâce, il ne cessa plus de la pratiquer fidèlement.
A la mort de sa tante, mère de Tsi-t'siong i, il ne se montra pas moins généreux que celui-ci et il ne fit aucun des sacrifices superstitieux prescrits par l'usage. Nous n'avons sur lui aucun document détaillé, ces deux chrétiens purent se fortifier et consoler mutuellement. Kouen Jean partagea avec Ioun Paul les reproches et injures de ses parents et amis et de tout le voisinage. Il fut pris avec lui et emprisonné à Tsien-tsiou. Il y subit avec lui et d'une manière non moins constante les interrogatoires et les supplices de la question et fut décapité en même temps pour la foi à Tsien-tsiou le 13 de la 11e lune (8 décembre 1791 à 3 heures après-midi) de l'année Sin-hai 1791, à l'âge de 41 ans.
Il paraît que l'on fit alors afficher dans chaque village la mort des deux martyrs pour intimider le peuple et le détourner de la Religion. L'effet que les ennemis de la Religion attendaient d'une exécution publique des chrétiens se répandit bientôt au loin. Les mandarins enhardis et peut-être poussés par les méchants se mirent à faire écho dans beaucoup de districts. malgré le défaut de documents, nous voyons alors beaucoup de chrétiens saisis au district de Koang-tsiou avec T'soi Marcellin et racheter leur vie par l'apostasie. (Tout cela au Nai-p'o.)
Pendant que la Religion était ainsi attaquée et si glorieusement défendue devant le premier tribunal de la partie méridionale du royaume par deux athlètes qui scellaient la vérité de leur sang, plusieurs de ses principaux membres étaient appelés aussi à la Capitale sur le théâtre des combats. L'affaire de Tsin-san en fut encore l'occasion. Hong Nak-an i, Mok Man-tsiong i, etc. présentèrent une accusation contre Kouen Xavier, dit Il-sin i, qu'ils désignaient comme le principal chef et fauteur de la Religion. (Nous avons sous les yeux plus de 30 adresses au roi, pétitions aux ministres, etc. qui parurent de la 9e à la 12e lune; quelques-unes parurent encore l'année suivante. Que l'on juge de là du bruit et du soulèvement d'alors, car chaque pièce représente une coterie d'après l'usage.) Celui-ci n'avait pas été inquiété à l'affaire de 1785 malgré son courage et ses réclamations publiques. Cette fois il ne put davantage échapper à l'envie de ses ennemis qui d'ailleurs ne pouvaient pas ignorer l'influence que son nom, sa science et ses efforts avaient chaque jour sur la propagation de l'Evangile.
(Le 6 de la 11ème lune, le ministre des Crimes Kim Tsang-tsip i demande au roi de faire des perquisitions pour détruire tous les livres de Religion; que ceux qui les livreraient d'eux-mêmes ne soient pas punis, mais que ceux qui ne les auraient pas livrés soient jugés selon la loi. Le roi répond que cet ordre a déjà été donné précédemment et il intime de fixer un délai de 20 jours, à partir de la publication dans chaque district, après quoi tout infracteur surpris devra être poursuivi selon la loi. Il commande que la publication se fasse en règle pour que personne ne puisse l'ignorer. 9 de la 11e lune, dans un ordonnance, le roi dit qu'il ne s'agit pas ici seulement d'une affaire d'enterrement de la part des deux nobles mais qu'il s'agit du crime de porter la main sur les tablettes. Or si on supporte de tels faits, que ne devra-t-on pas supporter? Il commande de rabaisser le rang de la préfecture de Tsin-san, dans le district de laquelle le mal a pris naissance et de la mettre au dessous des 53 préfectures de la province de Tsien-la, puis veut que le mandarin en soit cassé pour ne pas avoir pris l'initiative par lui-même et puni les coupables. Il ordonne que dans tout le royaume on pousse les lettrés à l'étude des vrais principes dans les livres classiques, recommande de faire un choix plus consciencieux pour les examens de chaque province qui approchent et témoigne vouloir y récompenser le mérite et la vertu.)
Il fut donc arrêté et traduit devant le tribunal des crimes à la 11e lune. Ne pouvant pas obtenir une rétractation de la part de cet homme dont les convictions étaient si fortes, on le mit successivement plusieurs fois à la torture, et des supplices extraordinaires furent employés pour y réussir. Mais Xavier ferme dans les tourments ne se laisse pas un instant ébranler. Il fit clairement sa profession de foi, sous le fer et le fouet des bourreaux comme auparavant. il est impossible, dit-il, de ne pas servir le grand Dieu Créateur du Ciel, de la terre, des Anges et des hommes. pour tout au monde je ne puis le renier, et plutôt que de manquer à mes devoirs envers lui, je préfère subir la mort. Les tortures avaient réduit son corps à un état affreux qu'il serait difficile de peindre. Le roi qui connaissait Il-sin i pour un homme éminent et doué de mille belles qualités ne pouvait se décider à le faire mettre à mort, et toutefois il désirait le faire changer de sentiments. Il commanda donc d'employer tous les moyens imaginables pour le gagner. D'après ses ordres recommença un nouvel assaut plus terrible que les précédents. Ce ne sont plus les supplices et les menaces, mais tous les moyens d'insinuations qui sont mis en jeu, les caresses, les flatteries, les promesses de toutes espèce sont successivement déployés avec toutes les ressources que l'amitié et la compassion peuvent suggérer, et aucune des affections propres au coeur humain ne fut laissée sans passer par l'épreuve. Mais tout étant inutile on revint encore aux supplices et tortures. Xavier se montra aussi insensible d'un côté comme de l'autre, soutint avec une constance admirable toutes ces manoeuvres tentatrices; et tous les moyens étant épuisés sans succès, le roi cependant ne pouvant le sacrifier entièrement, il fut condamné à l'exil à l'Ile de Tsiei-tsiou (Quelpaert) avec ordre au gouverneur de le mettre à la question trois fois par mois jusqu'à soumission. Xavier restait donc victorieux de ces épouvantables menées de l'Enfer et avait conservé sa foi intacte. Il sortit de prison et l'état de ses blessures étant par trop inquiétant, il lui fut permis de rester quelque temps avant de partir pour l'exil. Il passa ces jours-là dans la maison de Ni Ioun-ha. Pendant ce séjour tout occupé à soigner ses blessures et aux préparatifs du long voyage qu'il allait entreprendre pour se rendre au lieu de l'exil, il ne s'attendait pas à une dernière attaque qui allait encore l'assaillir. A l'instigation du roi encore, des personnes du tribunal des crimes vinrent lui représenter que sa vieille mère, alors âgée de 80 ans, ne pouvait tarder à mourir et que lui allant au delà de la mer ne pourrait supporter d'en être séparé et de ne pas assister à ses derniers moments. On ne lui parla pas directement d'apostasie qu'il repoussait toujours avec indignation, mais on l'engagea seulement à une toute petite soumission vis-à-vis du roi qui ferait commuer son exil et lui éviterait le voyage d'outre-mer. Xavier fut sensiblement ému à cette pensée et soit qu'il ait fait lui-même quelque signe, soit, comme d'autres l'assurent, qu'un des assistants l'ait fait pour lui, à l'instant on dépêcha vers le roi et on commua son exil à la ville de Niei-san. Hélas! il n'eut pas même le temps de s'y rendre. A peine se fut-il mis en route que la violence de ses blessures le fit succomber et il mourut dans une hôtellerie.
Nous voudrions déchirer cette page de l'histoire que la vérité nous force à écrire. Eh quoi! Cet homme que nous avons vu si grand dans sa vie, si grand au milieu des supplices encore, vient de flétrir ses derniers moments par une tache que nous ne pourrons effacer; et quoique le peu de précision des documents ne nous permette pas d'apprécier la portée de sa faiblesse, nous en sommes réduits toutefois à rester le coeur navré de ce doute insoluble et d'une crainte fondée. Heureux si après avoir (refusé) perdu la couronne du martyre que les Anges tenaient déjà suspendue sur sa tête, il a pu trouver grâce devant le Dieu dont il eut le bonheur d'établir le culte dans ce royaume sur des bases solides et définitivement stables! C'est le second exemple notoire que nous rencontrons de chutes occasionnées par un regard trop naturel jeté sur les auteurs de nos jours, pour apprendre à la postérité qui dans ces pays surtout aura besoin de cette leçon, que l'amour des parents d'ailleurs si juste et si raisonnable, doit lui-même être contenu dans des bornes qui lui permettent l'harmonie avec d'autres devoirs non moins sacrés.
Ni Seng-houn i que nous avons vu se retirer si honteusement et qui sans même avoir vu le feu avait voulu se mettre à l'abri des coups, était alors mandarin de la ville de P'ieng-t'aik. Malgré sa défection connue du public, la haine l'y poursuivit encore. Hong Nak-an i et ses partisans présentèrent à la cour une requête où il était signalé comme chef des chrétiens, ajoutant qu'on l'avait vu à la préfecture lire les livres de cette secte. Puis ils soudoyèrent des gens pour l'accuser de ne pas faire les prostrations en usage au temple de Confucius et finissaient par demander qu'il fût traduit et jugé selon les lois. On ne put ne pas examiner des faits en apparence si graves. Des perquisiteurs furent envoyés sur les lieux; mais n'ayant pas trouvé de preuves de la vérité des accusations Seng-houn i fit alors un écrit pour se défendre échappa pour cette fois aux mains des comploteurs, qui furent même punis pour leur odieuse calomnie. Dans cette même requête, nous trouvons les paroles suivantes: "Parmi les dignitaires du royaume et les personnages en réputation, déjà sept ou huit sur dix ont embrassé et sont perdus dans cette doctrine. Où arriverons-nous donc?" Personne sans doute ne se laissera tromper par la malice des auteurs dont l'exagération était manifeste; mais nous croyons pouvoir y trouver la confirmation de la propagation réelle de la Religion à cette époque, du grand nombre de ceux qui peut-être sans la pratiquer la voyaient du moins de bon oeil, et surtout de la crainte fondée que concevaient ses ennemis de la voir sous peu envahir la masse et l'opinion si on n'y portait de suite quelque remède violent.
(Nous trouvons dans les monuments de l'époque la prise et le procès de T'soi In-t'siel i, Tsieng In-hiek i, Son Kieng-ioun i, Iang Tek-nioun i, T'soi In-kiri, T'soi P'il-tiei et autres, tous apostasièrent alors et tous furent martyrs plus tard.)
Au district de Hong-tsiou de même (famille de Seng-hoa).
Au district de Tang-tsin, Pai François avec beaucoup d'autres se laisse aller à la même lâcheté que plus tard il doit racheter de sa mort. Le district de Mien-t'sien se fit remarquer par le grand nombre des emprisonnements. Pak Laurent voyant les chrétiens emprisonnés depuis plusieurs mois les plaignait au fond du coeur et avait eu plusieurs fois le courage d'aller les consoler. Un jour alors qu'on venait de leur servir le déjeuner, il va frapper à la porte du mandarin, entre vis à vis de lui et crie d'une forte voix: "Battre violemment un peuple innocent, le tenir en prison pendant plusieurs mois, qu'est-ce donc que de tels principes?" Le mandarin en colère demande quel est cet individu. On répond que c'est un homme de Hong-tsiou, frère de Pak Il-teuk i, alors enfermé pour la Religion. De suite il est saisi, on lui passe une lourde cangue au cou et le bat violemment. Laurent ne se laisse pas ébranler ni intimider et dit au mandarin: "Cette cangue de bois est trop légère, faites m'en mettre une de fer." La position du mandarin devenait difficile, toute la ville était en émoi et les rumeurs se formaient comme lors des grands événements. Laurent fut envoyé au tribunal criminel de Hai-mi, puis de Hong-tsiou où il fut violemment bastonné sans se démentir. Après un mois et quelques jours, une dépêche de la cour arriva et il fut relâché. Une telle constance dut bien consoler les vrais fidèles, ainsi que la conduite de Kim Pie, arrière-grand-père du P. Kim André, qui ne paraît pas s'être laissé ébranler devant les juges et commença alors une vie suite continuelle de vexations et d'emprisonnements.
Ni Tou-ouen i dont le nom était si répandu ne pouvait échapper non plus à la haine des perquisiteurs. Il subit diverses vexations et finit par être pris et renfermé à Kong-tsiou; nous ignorons tous les supplices qu'il eut à y supporter, mais lui aussi se laissa ébranler. Oh que les vrais confesseurs sont rares! Nous trouvons une lettre du gouverneur de cette ville Pak Tsong-ok i, datée du 2 de la 12ème lune, annonçant au roi la soumission de ce coupable. "Il apostasia, dit cet acte, de la manière la plus forte, témoigna sa douleur de s'être laissé entraîner dans une mauvaise doctrine, mêlée de magie, etc., s'engagea à aller dissuader tous ceux qu'il avait endoctrinés et à les ramener à la vraie voie et en fit serment." Le roi dit de ne le relâcher qu'après retour complet, sa résipiscence étant bien récente. Toutefois il fut relâché le 5 de cette même lune et retourna chez lui. Malgré une apostasie si éclatante il paraît qu'il reprit de suite la pratique de ses devoirs; mais trop connu dans le pays et les environs il prit le parti d'émigrer pour être moins en butte au traits de ses ennemis et tromper leur surveillance. Dans la nuit du dernier jour de cette année il fit ses adieux à son frère aîné. Non seulement tous ses parents dont plus de 30 familles habitaient ce lieu, mais encore tous les habitants de 300 et plus de maisons de ce village se réunirent alors autour de lui. Aucun ne pouvait se résoudre à la séparation, et toutefois la perspective de sa position empêchait de le retenir. Ce fut une scène aussi touchante que déchirante. Chacun semblait perdre en lui un père, un frère, un ami, et on ne peut la comparer qu'aux circonstances du départ des missionnaires des chrétientés. Il alla s'établir au district de Hong-san et recommença à travailler pour le bien de la Religion avec ferveur et constance quoiqu'avec moins d'éclat et de publicité.
Cette année encore T'soi Thomas dit P'il-kongi que nous avons vu ne pas craindre de crier tout haut dans les rues qu'il fallait nécessairement servir le grand Dieu du Ciel et de la terre, fut aussi saisi, probablement sur le bruit de la réputation qu'il s'était lui-même attirée, puis traduit devant le tribunal des Crimes. Interrogé sur sa Religion et ses sentiments, il répondit hardiment et à haute voix, là comme ailleurs qu'il fallait absolument suivre la Religion du Maître du Ciel et qu'il était disposé à en remplir toujours les devoirs. Les supplices auxquels il fut d'après cela soumis ne lui firent changer ni de sentiments ni même de ton. Il répondit toujours avec une simplicité, une franchise et une conviction qui mettaient tout le monde dans l'admiration. Le roi l'ayant appris admira et aima cette franchise, et ayant pitié de lui, il voulut lui conserver la vie et en conséquence commanda d'essayer d'obtenir de lui par la persuation quelques paroles qui pussent au moins pallier les choses. On s'appliqua donc à le séduire. Les ruses, les caresses et tout ce que l'on peut faire en pareille circonstance fut employé près de lui, mais en vain. Toujours la même constance et les mêmes réponses. Le roi cependant ne voulut pas permettre de poursuivre. Sur ces ordres le vieux père et le frère de Thomas furent appelés et par leurs larmes et supplications ils essayèrent d'émouvoir ce coeur généreux insensible à tous les efforts. Thomas fut fort impressionné. Tous les sentiments de la nature étaient révoltés. Toutefois il ne se rendit pas et dit encore que quoiqu'il en fût il ne pouvait se résoudre à renier son grand roi et son grand père. Tous les moyens et toutes les ressources était épuisés sans succès, il ne restait plus qu'à sévir selon toute la rigueur des lois, et plusieurs fois le ministre des Crimes demanda à poursuivre l'exécution et le roi ne voulut jamais y consentir. A la fin, le ministre, ayant lui-même compassion de P'il-kongi, fit dire au roi qu'il avait fait une toute petite soumission quoique ce ne fût pas, et aussitôt le prince louant beaucoup son bon esprit et son obéissance lui fit donner une belle place parmi celles que peuvent occuper les familles de médecins, et dans une autre affaire encore se félicita du changement d'idées de P'il-kongi. Celui-ci, soit qu'il eut réellement fait une légère soumission comme le prétendent quelques autres, soit qu'il eut enfin senti qu'il était de son devoir de réclamer contre des paroles qu'il n'aurait pas proféré, tomba bientôt dans une grande tristesse, se mit à pleurer sa faiblesse et se laissa même aller quelque temps au découragement. Mais peu après, touché d'un vrai repentir il reprit sa première ferveur avec la fidélité à tous ses devoirs et nous le verrons encore appelé à confesser de nouveau sa foi.
Ici se termine ce qui nous a été conservé sur cette année 1791, qui vit prendre naissance à la première persécution véritable que la Religion eut à subir en Corée. Quoique le nombre des combattants n'ait pas été considérable chaque parti commença dès lors à s'y montrer à découvert. La position du catholicisme était toute faite. ici comme toujours c'est la vérité mais pure et entière. La devise du Chrétien, c'est la fidélité, l'amour, le dévouement pour Dieu, le grand roi de l'Univers, le père de tous les hommes, et cela au prix même de son sang propre. Ses adversaires y entreprennent la défense de leurs vielles traditions dont les fondements mis à découverts ne présentent déjà que vide et faiblesse mais qu'ils veulent soutenir par la ruse, le mensonge et la calomnie qu'ils mettent en jeu pour faire donner la mort aux chrétiens.
Le combat est réellement engagé. Nous voyons au milieu des partis un roi non partisan de la Religion, il est vrai, mais loin de partager à son égard les opinions violents des accusateurs. Sage, réservé, juste appréciateur des grands hommes et avare du sang de ses sujets, il n'a pas encore pris un parti définitif et il continuera sur ce pied. Et quoique sa faiblesse n'ait pu empêcher l'effusion du sang, il ne fut pas persécuteur.
Le triomphe de nos deux glorieux martyrs ne fut pas effacé aux yeux du public par la faiblesse de quelques-uns des combattants. Cette faiblesse elle-même, par toutes les circonstances qui l'accompagnèrent, fut aux yeux de presque tous un triomphe pour la foi, et vaincus ils ont été dans ce pays regardés comme vainqueurs. Aussi la chrétienté intimidée de toutes parts ne fut pas découragée, et se remit presque aussitôt sur son premier pied. On ne signale pas de nouvelles défections, tandis que les rangs se resseraient peu à peu de toutes parts.
Ni Pieki et Kouen Xavier n'étaient plus; Ni Seng-houn i avait déserté les drapeaux. Les chefs éminents avaient donc disparu. Il est vrai que Kouen T'siel-sin i, frère aîné de Xavier, et l'illustre famille des Tieng étaient toujours là et se montraient fidèles; mais peu mêlés aux affaires extérieurs ils ne dirigèrent jamais à proprement parler la chrétienté. A partir de ce moment T'soi Jean (Voici ce que dit Hoang Alexandre de T'soi Jean: "Le catéchiste en chef T'soi Jean était neveu éloigné de T'soi Mathias décapité en 1795, appliqué à bien instruire sa maison, il fut quand la Religion pénétra en Corée, un des premiers à l'embrasser; calme, prudent, éclairé et diligent, il passa ses 20 ans sans varier un instant, et à la beauté de ses exemples il joignait une parole toujours droite et douce. Aussi quelqu'un se trouvait-il dans la peine ou la tristesse à raison de quelque doute, ou contrariété, à peine avait-il vu Jean que ses doutes ou sa tristesse diminuait, toute difficulté disparaissait, et après avoir entendu quelques mots de sa bouche, il avait le coeur au large et tout était résolu. Expliquait-il les vérités de la Religion, il le faisait avec précision et clarté et savait les faire goûter. Il parlait sans apprêt et sans chercher à plaire et toutefois chacun l'écoutait avec plaisir et sans se lasser, toutes ses paroles pénétraient bien avant dans le coeur et les auditeurs en retiraient un grand fruit. Très résigné à la volonté de Dieu, l'humilité lui était comme naturelle et quoiqu'il n'y eût dans sa conduite rien de frappant, on ne pouvait jamais y voir rien de répréhensible, aussi était-il le premier des chrétiens pour la vertu et l'estime qu'on en faisait, personne qui ne l'aimât et n'eût confiance en lui." Ce tableau montre bien qu'en tout pays la vraie vertu est la même et toujours aussi appréciée.) surnommé Koan-t'sien i, et T'soi In-kiri nommé Mathias, hommes zélés et capables mais de la classe moyenne, et qui n'avaient pour eux ni les talents ni l'influence des hommes éminents qui n'étaient plus. Cependant la Religion n'en souffrira pas et continuera ses pas progressifs d'une manière non moins réelle quoique peut-être moins éclatante aux yeux des payens. Et s'il est permis de sonder la conduite de la Providence, ne semble-t-il pas qu'après avoir excité le premier ébranlement par le moyen de quelques grands noms environnés de science, elle a voulu presque aussitôt les faire disparaître pour montrer que la Religion n'en a pas besoin. Leçon bien nécessaire dans ce pays surtout, où en égard à l'enthousiasme et à l'entrain qu'attire tout ce qui est docte et savant, et au respect qu'impose une haute naissance, il eut été à craindre que le christianisme ne fut considéré lui-même que comme une de ces belles doctrines philosophiques, purement naturelles qui après avoir jeté quelque éclat et ébloui quelque temps les yeux doivent nécessairement passer, ut non evacuetur Crux Christi. C'est donc sur ce nouveau pied que nous allons désormais essayer de suivre la marche des événements.
Après 1791. (1791. Le Père Jean à remediis vint sur les frontières de Corée, mais ne rencontrant pas les chrétiens il s'en retourna et mourut bientôt après.)
L'Evêque de Péking avait promis un prêtre et ordonné de tout préparer pour l'introduire sûrement. Il était désiré par tous les chrétiens au delà de ce que l'on peut se figurer. Mais la persécution et la mort du grand chef empêchèrent pour le moment d'essayer de le recevoir. (Lettre de l'Evêque de Péking)
Après ce que nous avons rapporté il ne paraît pas qu'il y ait eu de grandes vexations à la Capitale. Le roi n'était pas pour les partis extrêmes et sa modération contint sans doute ceux qui auraient voulu frapper des coups plus décisifs. La province où les choses ont moins de retentissement et où chaque grand mandarin est un peu son maître ne fut pas aussi traquille, et il paraît que le Nai-p'o en particulier (1792) ne cessa guères de supporter la persécution. Quoique peu de données nous soient restées, le district de Hong-tsiou devait donner le branle et ouvrir l'arène aux braves.
Dans le courant de l'année 1792, la famille Ouen très connue pour sa Religion devait entrer au tribunal criminel de Hong-tsiou sans que l'on sache positivement la cause de cette prise.
(Ouen Jean, petit-fils de Pierre, âgé de 64 ans, dit que son grand-père fut martyrisé de suite après l'affaire de Ioun Tsi-t'siong i en sin-hai 1791, mais étant contredit par un autre parent de 78 ans, nous ne savons quel parti prendre et laissons les choses telles qu'elles.)
(En 1793 Tsi Sabas et Jean Paik (Po) vont à Péking et obtiennent un Prêtre. On ne le fit entrer que l'année suivante.)
(Copier la vie de Ouen Pierre telle que je l'ai mise dans 'le choix des martyrs'.)
Tel fut le premier martyr connu à la ville de Hong-tsiou et probablement ce fut la seconde exécution publique. Il est resté en grande vénération surtout dans le Nai-p'o d'où il était et il marche dignement à la tête des nombreux imitateurs qu'il eut dans cette partie de la Corée.
Il est vraisemblable qu'il eut à cette occasion d'autres vexations; elles ne nous sont pas parvenues. Nous trouvons encore une persécution à Hong-tsiou en 1794. La violence et l'étendue de cette affaire sont inconnues. Pak Paul dit Kieng-hoa eut le malheur d'apostasier. Nous le verrons se venger en 1827.
Hoang Paul qui n'obtiendra sa couronne qu'en 1813 paraît avoir généreusement confessé sa foi devant ce même tribunal. (Un chrétien a entendu dire à un ou deux vieux payens que les famines n'étaient fréquentes en Corée que depuis l'année 1794. Il faudrait des recherches pour l'assurer. Si le fait est vrai ce serait une punition de la Providence sur les Coréens qui rejettent la Religion.) Natif du village de Ouni au district de T'sieng-iang, il pratiquait avec ferveur quand tout à coup il fut saisi et conduit devant ce mandarin qui lui dit: "Renie Dieu, injurie-le et je te permets de te retirer." Paul répondit: "Injurier Dieu, c'est ce que les animaux eux-mêmes ne pourraient faire, comment un homme qui a une âme spirituelle pourrait-il l'oser?" Il fut battu à mort avec la terrible planche à voleurs. Ses forces étaient entièrement épuisées et il fut remis mourant à la prison sans avoir faibli. Il revint à la vie par les soins des prisonniers. Le mandarin surpris qu'il ait survécu lui imposa le métier de fustigateur, puis trois mois après le relâcha. Des douze chrétiens pris alors avec lui, il paraît avoir été seul fidèle à son devoir et à son Dieu.
A la capitale, quoique nous ne voyions ni martyrs ni emprisonnements, les ennemis de la Religion ne dormaient pas. Il y eut cette année divers conciliabules de nobles fort significatifs et qui montrent où on voulait en venir. (On signalait surtout Kim Ni et Kong Ni-t'sien i comme partisans de la Doctrine perverse et le roi nomma Ioun Haing-im i ministre des Crimes pour s'informer de tout.) Ils ne firent pas toutefois grand éclat et quelques défections seulement s'en suivirent par les vexations particulières des parents et amis.
La jeune chrétienté avait grandi seule et sans le secours d'aucun ministre du Seigneur. Par une disposition peut-être inouïe elle avait su ainsi se fortifier sans aucun conducteur et elle avait pu faire ses preuves jusque sur les échafauds. (Dès les premières années, dit un ancien mémoire, beaucoup de chrétiens s'étaient élevés au dessus des choses du monde, beaucoup aimaient vraiment le prochain comme eux-mêmes, beaucoup aussi amateurs de la chasteté ont su la conserver précieusement. Tout ceci est autant de traces frappantes des lumières de la protection et de la conduite directrice du St. Esprit; mais....) Il était bien temps que Dieu l'encourageât et la récompensât par la présence d'un pasteur. Les difficultés qui avaient arrêté jusque là aplanies sans doute et le désir de posséder l'envoyé de Dieu doublant de jour en jour, T'soi Jean dit T'siang-hieni et ses amis se concertèrent pour envoyer à Péking des conducteurs sûrs. Il fut décidé que Ioun Paul dit Iou-iri qui avait déjà fait (2 fois?) le voyage de Péking se mettrait à la tête de l'expédition et serait acompagné par Tsi Sabas dit T'siang-hongi, pendant que l'on préparait à la Capitale une maison dont T'soi Mathias dit In-kiri devait être le chef. Tous ces noms sont déjà connus. (Pai Mathias du Nai-p'o est signalé aussi comme ayant fait partie de l'expédition. Il était sans doute en sous ordre. Vraisemblablement son séjour en province et son nom moins connu lui firent échapper la mort en 1795. Il ne fut saisi et exécuté que six ou sept ans plus tard. Les courriers n'allèrent pas jusqu'à Péking. Ils introduisirent le Prêtre dans la nuit du 23 décembre 1794.) Les deux vaillants courriers partirent donc à la grâce de Dieu vers la fin de cette année 1794. Ils purent heureusement éviter les nombreux dangers de la route. (Ils) Rencontrèrent le P. Tsiou à Péking et on convint de le faire entrer au moment du retour de l'ambassade vers la 3ème lune de l'année suivante. Arrivés à Pien-mien un chrétien de cette ville prêta sa maison et son concours pour tout préparer. Le Prêtre y changea d'habits, arrangea ses cheveux à la Coréenne et franchissant avec le fleuve Apno la terrible barrière, on rencontra de nouveaux chrétiens qui condusirent le Prêtre jusqu'à la Capitale. C'était à la fin de la 3ème ou au commencement de la 4ème lune 1795. (Une lettre d'Europe dit que les courriers n'allèrent qu'à Pien-mien pendant l'hiver et y introduisirent le Prêtre dans la nuit du 23 décembre 1794. D'autres notes semblent contredire. c'est obscur. Du reste il peut se faire qu'étant entré en décembre et resté caché jusqu'à Pâques, les chrétiens aient cru qu'il n'était entré qu'au printemps.)
Il fut reçu dans la maison qu'avait préparé T'soi Mathias au quartier nord de la ville et fut regardé et traité comme un Ange descendu du Ciel.
Le Père Tsiou, appelé Velloze ou Vellozo par les Portugais, (Le P. Tsiou est dit dans quelque lettre d'Europe avoir changé son nom en celui de Ni, nous n'osons nier le fait, mais il n'est connu des chrétiens d'ici que sous le nom de P. Tsiou et les actes civils de son procès l'appellent de même, nous le nommerons toujours ainsi.) était originaire de Sou-theou au Kiang-Nan en Chine et avait exercé le ministère dans le diocèse de Péking sous l'Evêque Tang qui l'envoya en Corée. Quoique Chinois et ayant la figure peu différente des Coréens, dans les commencements ne pouvant parler ni manger comme les autres et ne sachant pas porter ses habits, il ne pouvait paraître devant les payens.
Les chrétiens étaient au comble de leurs voeux, ils possédaient enfin le pasteur attendu depuis tant d'années et chacun brûlait du désir de le voir comme de recevoir les Sacrements. Bientôt l'affluence fut extrême. Le Prêtre peu au courant des choses du pays et les chrétiens n'ayant pas de chef parmi eux, tout se faisait sans ordre et sans garder les précautions que la prudence devait suggérer; chacun ne pensait qu'à son bonheur et à réaliser ses désirs, et en telles circonstances le Coréen est un véritable enfant. (Voir les lettres édif.)
Peu de temps s'était à peine passé que le bachelier Han Ieng-ik i de famille noble et commençant depuis peu à pratiquer la Religion sans avoir la foi consolidée, voulut aussi voir le Prêtre et parvint à se faire introduire chez lui, mais aussitôt des desseins pervers s'élevèrent dans son coeur. Il alla rapporter tout ce qui se passait au frère de Ni Pieki ennemi de la Religion et en faveur à la Cour. (Le président des ministres était alors Hong Nak-sieng.)
Le grand ministre T'sai fut informé de tout par celui-ci et bientôt le roi lui-même. De suite l'ordre fut donné au grand juge criminel T'sio Kiou-tsin i d'envoyer à l'instant des satellites prendre l'étranger sans aucun bruit. (Le 27 juin) Heureusement les chrétiens, qui se défiaient un peu du traître, épiaient toutes ses démarches, et ayant connu toutes ses déclarations et les ordres qui s'en étaient suivis, on vola avertir le Prêtre, qui sortit sur l'heure et se réfugia chez quelqu'autre chrétien. T'soi Mathias, maître de maison du Père, resta seul pour la garder. Sans se déconcerter et sachant bien qu'il ne pourrait y échapper, il conçut la pensée de mettre le père entièrement en sûreté en se faisant passer pour le Chinois et se coupant immédiatement les cheveux pour contrefaire l'étranger, il attendait paisiblement. Peut-être aussi étant d'une famille d'interprètes, pouvait-il parler facilement le chinois. Les satellites vinrent en effet aussitôt et le saisissant lui demandèrent: "Où est le Chinois?" "C'est moi", répondit-il. On l'emmène mais bientôt on s'aperçut de la méprise, car le père Tsiou avait désigné comme ayant une belle barbe dont Mathias ne pouvait se flatter d'être bien pourvu. On se mit donc en devoir de rechercher le Prêtre, et il n'aurait sans doute pu échapper si le roi craignant de léser beaucoup d'innocents n'avait recommandé de faire les choses sans tumulte et avec modération.
Ioun Paul et Tsi Sabas et 5 autres chrétiens ayant été bientôt pris l'ordre du roi fut de tuer les trois introducteurs (Tsi Sabas avait 29 ans. Ioun Paul 36 et T'soi Mathias 31.) immédiatement et de s'arrêter là. (T'soi Mathias, dit In-kiri, joignit à la gloire du martyre celle se s'être livré en place du Prêtre pour essayer de conserver son pasteur au troupeau, car s'il eût fui, il eût pu avoir quelque chance de se conserver la vie. Il doit participer aux mérites d'un pasteur qui donne sa vie pour ses brebis.) (Aussi les 5 chrétiens qui avaient généreusement confessé la foi au milieu des plus cruelles tortures furent mis en liberté comme n'ayant pas participé à l'entrée du Prêtre. Sabas, Paul et Mathias excitèrent contre eux toute la fureur du juge par leur fermeté et déconcertèrent ses ruses par la sagesse de leurs réponses. Une profession de foi claire et généreux était la seule réponse qu'ils faisaient aux questions concernant l'étranger, son arrivée et son domicile. Pour leur arracher des aveux compromettants on les accabla de coups, on leur disloqua les bras et les jambes, on leur écrasa les genoux, mais rien ne put fléchir leur courage ni lasser leur patience; une joie toute céleste anima leurs coeurs et leurs visages au milieu de ces affreux tourments, jusqu'au moment où ils consommèrent leur glorieux triomphe.) On les fit mourir la nuit de ce même jour dans la prison et leur corps furent jetés à la rivière le 12 de la 5e lune (28 juin 1795).
Ce qui ne laissa pas de faire grand bruit. Un dignitaire nommé Kouen Iou voulut profiter de la circonstance pour faire périr Ni Ka-hoani et autres chefs du parti Nam-in. Mais le roi sachant que c'était une calomnie ne permit pas de poursuivre. un autre fit une adresse au roi pour demander de lâcher les satellites et de pousser les choses; il n'y consentit pas non plus. Pendant trois jours il y eut hésitation sans que l'on pût en savoir la cause et les choses en restèrent là. (On se borna à prendre des mesures sévères pour empêcher toute communication avec la Chine et la conversion de nouveaux néophytes. Mais à cette occasion nous trouvons encore beaucoup d'adresses au roi et de circulaires des nobles entr'eux qui dénotent combien l'agitation fut grande et montrent en même temps la haine décidée à porter les choses à l'extrêmité.)
Ainsi recuillirent la palme du martyre les trois chrétiens qui s'étaient donnés tout entiers à l'introduction et au service du Prêtre. Dieu permit que T'soi Jean dit T'siang-hieni échappât et pût encore continuer de rendre à la mission les services qu'il lui avait déjà consacrés depuis bien des années.
Le traître Han Ieng-iki fut loin d'être content des suites de sa honteuse conduite. A l'automne de cette même année, il mourut d'une manière assez misérable, hors de chez lui. A l'heure de la mort il pleurait et poussait sans cesse de grands gémissements et disait lui-même se repentir de ses péchés.
Le P. Tsiou ainsi proscrit et poursuivi dès son entrée avant même d'avoir pu s'habituer au lanage et aux usages du pays dut désormais se tenir entièrement caché et prendre les plus grandes précautions. Les chrétiens eux-mêmes ignorèrent sa retraite pendant la plus grande partie du temps. C'est Kang Colombe qui eut le courage et le mérite de le retirer chez elle et nous devons faire ici connaître cette femme célèbre qui joua à cette époque un si grand rôle dans l'histoire de la chrétienté.
Kang Colombe, appelée Oan-siouki dans les actes de son procès, naquit dans quelque partie du Nai-p'o d'une famille payenne descendant de nobles bâtards. Elle montra dès l'enfance une pénétration d'esprit remarquable, jointe à un caractère ferme, droit et courageux, ne se permit jamais une mauvaise action et supportait avec une rare patience le caractère acariâtre de sa mère. Remplie de vues élevées, son âme aspira de bonne heure vers quelque chose de grand et elle songeait à devenir une sainte femme (style payen). Mais n'en connaissant pas d'autres moyens, elle suivait les autres, s'adonnait à la Religion de Foe et avait le dessein de quitter le siècle pour se livrer toute entière aux pratiques de cette secte. Quand parvenue à l'âge de dix et quelques années, ses connaissances s'étant développées, elle découvrit la futilité de cette religion et cessa de la suivre. Arrivée à l'âge nubile elle fut donnée en mariage en secondes noces au noble Hong Tsiengi vivant au district de Tek-san, et alors veuf. Il était d'une famille bâtarde et parent éloigné de Hong Nak-min i dont il a été parlé plus haut. Son mari était un homme simple et un peu stupide. Colombe avait peine à vivre en harmonie avec lui et se trouvait souvent dans l'anxiété; et cependant elle savait par ses prévenances et sa douceur gagner l'affection de sa belle-mère dont le caractère était assez difficile. La Religion chrétienne se répandant alors beaucoup dans les environs, Colombe en entendit parler à un des parents de son mari. Le mot seul de 'Religion du Maître du Ciel' la frappa tout d'abord. Elle se dit: le Maître du Ciel, ce doit être le Maître du Ciel et de la terre, le nom de cette Religion est juste, sa doctrine doit être vraie. Elle demande des livres et à peine en a-t-elle pris connaissance que son intelligence en saisit la vérité, son coeur la beauté et son âme toutes les grandeurs. Elle s'y attache pour toutes les puissances de son être et du premier pas aspirant aux vertus héroïques, son assiduité, sa ferveur et sa mortification surpassèrent tout ce qu'on en pourrait croire. De suite elle s'applique à la conversion de sa maison et des villages voisins. Son mari auquel elle ne manquait pas de sonner son soins, n'avait aucune portée d'esprit. Quand Colombe l'exhortait il disait "C'est vrai, c'est vrai.", et se rendait à elle, puis quand les ennemis de la Religion la décriaient, il remuait la tête en signe d'approbation et croyait leurs paroles; que sa femme l'en réprimandât il versait des larmes et regrettait ses fautes, puis si de mauvais amis revenaient, il faisait encore comme auparavant. Colombe donc malgré tous ses efforts n'aboutissait à rien et elle vit bien qu'elle ne pourrait parvenir à le faire pratiquer ni en tirer aucun parti. Sa belle-mère aussi fut l'objet de son zèle, mais quoiqu'elle eût commencé à savoir craindre Dieu et à réciter les prières chrétiennes elle ne pouvait se résoudre à quitter le culte des ancêtres. Colombe l'exhorte sans cesse et surtout prie avec ferveur; Dieu fera un miracle pour seconder les efforts de sa généreuse servante. Un jour la belle-mère balayait elle-même la salle des ancêtres, tout à coup un fracas horrible s'y fait entendre, les poutres et les colonnes en sont ébranlées; saisie de frayeur, elle alla se jeter dans les bras de sa bru et comprit enfin la vanité de ses superstitions. Après cette victoire, Colombe convertit encore son père et sa mère qui moururent tous deux d'une manière très édifiante. En l'année (1791) sin-hai, la persécution ayant fait éclat dans le pays où elle était, Colombe fut même arrachée et conduite près du gouverneur de Kong-tsiou, nous ignorons comment les choses se passèrent. Mais il ne paraît pas qu'elle eût alors de tourments à subir ni qu'elle ait apostasié et fût rendue à la liberté. Peu de temps après, soit par désir de vivre dans la continence comme quelques-uns le prétendent, soit pour vivre au milieu de chrétiens plus fervents ou pour d'autres raisons, elle se sépara de son mari (la sentence de Colombe porte "chassée par son mari", si ces mots sont exacts, il serait permis de présumer que celui-ci effrayé par la persécution et n'ayant pas envie de pratiquer lui aurait dit de se retirer de chez lui, ce qui se fait quelques fois dans ces pays.), lui confia le soin de ses terres et monta à la Capitale accompagnée de sa belle-mère, de sa fille (Il est certain qu'une fille de Colombe fut exilée en 1801 après apostasie, quelques-uns prétendent qu'une fille aînée fut alors martyre, mais nous n'en retrouvons aucune trace.) et de Hong Philippe, fils qu'avait eu son mari d'un premier lit, et celui-ci prit une concubine en sa place. Elle aida beaucoup Tsi Sabas pour ses voyages de Péking et à l'arrivée du Prêtre en 1795, elle se fit bientôt baptiser. Le Prêtre l'eut à peine vue qu'il apprécia son mérite, fut rempli de joie et la nomma catéchiste chargée de tout ce qui concernait l'instruction des femmes, emploi dont elle s'acquitta avec autant d'activité que d'intelligence. Cette même année à la 5ème lune, le Prêtre ayant été trahi et courant les plus grands dangers, Colombe forme le projet de le cacher et arrangeant tout à elle seule, le cacha dans son bûcher et le nourrit pendant trois mois à l'insu de sa belle-mère et de son fils Philippe. Il paraît toutefois que les satellites en eurent vent car ils allèrent jusqu'à la porte de sa maison, puis n'osant en franchir le seuil ils se retirèrent. Colombe affligée de ne pouvoir offrir au Prêtre un asile plus commode parce qu'elle voyait bien sa belle-mère très éloignée de ses généreuses dispositions, entreprit toutefois de toucher son coeur. Elle se mit à pleurer et gémir presque continuellement, puis en vint à perdre l'appétit et ne dormait plus. La belle-mère craignant pour les jours de sa bru, voulut savoir la cause de son chagrin; Colombe répondit: "Le Père est venu au péril de sa vie pour sauver nos âmes, nous n'avons rien fait pour reconnaître ses bienfaits et il est sans aucun asile; l'homme n'étant pas de pierre ou de bois, comment pourrait-il ne pas en être vivement affligé? Je vais donc m'habiller en homme et parcourir le pays pour tâcher de le trouver et de le secourir." La belle-mère répondit en pleurant: "Si vous agissez ainsi, qui aurai-je pour appui? Je vous suivrai donc et mourrai avec vous." "Vénérable Mère. reprit Colombe, je suis bien consolée de voir à quel degré de vertu vous êtes arivée; je ne craindrais pas certainement d'exposer ma vie pour trouver le missionnaire. Cependant vu les circonstances du temps nous nous exposerions inutilement et ne pourrions le rencontrer. Mais le Seigneur du Ciel sait tout et pénètre le coeur des hommes, il voit notre bonne volonté, y aura égard et permettra peut-être que le Père vienne près de nous. Vénérable Mère, s'il se présentait oseriez-vous le recevoir dans votre maison? Si vous me donnez votre parole d'honneur que vous y consentez, votre fille aura de suite l'âme en paix, reprendra sa joie et s'acquittera envers vous, jusqu'à la mort, des devoirs de la piété filiale." La mère répondit: Je ne veux pas me séparer de vous, faites tout ce que vous voudrez. Aussitôt Colombe, tressaillant de joie, se rend à la cachette du Prêtre, le fait entrer à la salle d'honneur et il y demeura pendant 3 ans en toute sécurité, protégé par l'usage qui défend aux étrangers l'entrée des maisons des nobles.
Après un certain temps le danger paraissant moindre, le P. Tsiou s'occupa de l'administration des chrétiens; il semble toutefois avoir eu jusqu'à la fin la maison de Colombe pour domicile habituel et quand il en sortait elle seule savait où il allait. On prit des précauions extraordinaires pour cacher ses pas et ses démarches, il ne communiquait qu'avec les chrétiens réputés les plus sûrs et beaucoup de pratiquants surtout en province soupçonnaient seulement sa présence sans en avoir la certitude. Il se montrait même peu aux différents membres des familles dans lesquelles il se trouvait et plusieurs des serviteurs même chrétiens pouvaient seulement deviner sa présence sans qu'on leur avouât. Aussi la tradition n'a rien laissé sur ses travaux apostoliques; on sait seulement qu'il allait de temps en temps à la Capitale chez Tieng Augustin, appelé Iak-tsiong, chez Hoang Alexandre, dit Sa-iengi et chez Hong Antang (Antoine). Il fut aussi plusieurs fois et probablement séjourna quelque temps au palais Iang-tsiei-kong, autrement appelé Hiei-kong. Ce palais appartenait à un frère bâtard du roi, appelé Ni In ou encore Il-oang-son. Son fils nommé Tam ayant, dit-on, pris part à une conspiration, avait été mis à mort et le père Ni In avait été envoyé en exil à l'île de Kang-hoa, mais malgré des instances réitérées de la part des grands pour le faire mettre aussi à mort, le roi ne l'avait pas permis. La femme et la belle fille veuve de l'exilé étaient restées dans ce palais. Vers 1791 ou 92, une chrétienne ayant pitié de leur triste position leur parla de la Religion et elles se convertirent, mais personne ne voulaient communiquer avec elles, sous prétexte que cela attirerait des affaires dangereuses. Colombe ne craignit pas tant, elle alla les trouver et leur fit même recevoir les sacrements. L'épouse du prince exilé s'appelait Song Marie et sa belle fille veuve Sin Marie; toutes deux ferventes chrétiennes s'agrégèrent même plus tard à la confrérie dite Mieng-to et beaucoup de chrétiens concevaient toujours de l'inquiétude sur les rapports avec ce palais. Le Prêtre allait donc là de temps en temps; les princesses avec plusieurs de leurs esclaves qu'elles avaient converties disposaient tout pour le service du Prêtre, il y était caché dans une chambre séparée attenante par le mur à la maison de Hong Antang où se trouva aussi la famille Tsio de Siou-heng, et on avait pratiqué un trou à ce mur pour pouvoir communiquer secrètement; c'est même de ce palais et par cette maison que sortit le Prêtre quand il alla se livrer en 1801. On croit généralement que le prince exilé eut connaissance de ce qui se passait ainsi à ce palais mais on assure de toutes parts qu'il ne pratiqua aucunement.
En province le P. Tsiou alla dans la famille de Ioun Paul, son introducteur, au district de Nie-tsiou. Il alla aussi chez Niou Augustin, dit Hang-kemi, à T'sonami, district de Tsien-tsiou, province de Tsien-la et semble y être resté un certain temps; c'est sans doute lors de ce voyage qu'il alla au district de Ko-san près de là, puis dans les districts de Nam-p'o, Kong-tsiou, On-iang et dans le Nai-p'o où il paraît bien avoir fait une apparition. Il ne nous reste d'ailleurs aucun détail sur ces courses et leurs dates, il est seulement certain que la plupart des pratiquants ne purent alors avoir part à la réception des sacrements.
A la Capitale, Colombe se chargeait de tous les soins à l'intérieur pour l'entretien et la nourriture du Prêtre et il n'avait qu'à se féliciter de ses services. La confiance qu'il avait en elle fit qu'elle prit part en outre à l'extérieur à toutes les affaires importantes de la chrétienté et ses entreprises n'étaient jamais sans réussir. Dans l'arrangement des affaires, elle avait de la détermination et de la fermeté et de plus quelque chose de sévère et d'imposant qui la faisait respecter de tous. Son zèle était dirigé par une prudence qui savait mettre en toutes choses un ordre parfait, aplanir les obstacles et éclaircir les affaires les plus obscures. Elle se portait de tous côtés pour répandre la Religion, y employant la nuit comme le jour, se réservait rarement le temps de dormir tranquillement et joignant à une instruction solide une grande facilité de parole, elle persuada et convertit beaucoup de monde. Dans ce nombre se trouvait beaucoup de femmes de familles mandarines. La loi du royaume ne faisant subir aucun supplice aux femmes de maison noble hors le cas de rébellion, ces femmes ne s'inquiétaient pas de la prohibition du gouvernement et le Prêtre espérant trouver là un grand appui pour propager et faire fleurir la Religion les traitait avec une liberalité toute spéciale, au point, dit un mémoire de l'époque, que toute l'influence semblait avoir passé entre les mains des femmes. Colombe réunissait aussi grand nombre de jeunes filles et les instruisait solidement. Elle fut aidée dans cette tâche par Ioun Agathe, vierge qui s'était retirée près d'elle et dont nous verrons l'histoire plus tard. Ces jeunes filles après leur maiage se répandant dans beaucoup de maisons, instruisaient d'autres personnes et les amenaient à la foi. Tous ces travaux mettaient de fait Colombe à la tête de la chrétienté, tous ceux qui la connaissaient s'inclinaient devant la supériorité de ses vertus et de son caractère, et tous l'appelaient le bouclier, la forteresse de la chrétienté. Mais en même temps le bruit de tant de conversions se répandait de plus en plus et l'affaire de la Religion devenait pour la Religion une affaire des plus graves.
Tels sont les seuls détails qui nous soient restés sur les travaux que fit ou dirigea le P. Tsiou, et ne pouvant espérer les lier à quelqu'époque, nous avons dû les réunir ici tels quels. Une tradition assez respectable rapporte aussi qu'un jour se trouvant au quartier T'san-kol à la Capitale, il s'éleva dans la ville un incendie qui durait déjà depuis près de 24 heures. Le Prêtre désolé de ses affreux ravages et ne pouvant aller lui-même sur les lieux envoya le jeune Song, père de Song Philippe, avec de l'eau bénite avec ordre d'en jeter sur le feu et lui cependant se mit en prière. Le jeune homme arrivé sur les lieux jeta de l'eau bénite sur les flammes du côté où il ne restait que des ruines et les ravages cessèrent par le seul fait.
En 1796, le P. Tsiou écrivit à l'Evêque de Péking pour lui rendre compte de sa mission et lui faire connaître sa position. Jusqu'alors les perquisitions et l'état de surveillance ne lui avaient pu permettre de le tenter. Le courrier fut cette fois Hoang Thomas, dit Sim i, d'une famille honnête de Liong-meri au district de Tek-san. Quelques-uns disent qu'il avait été du nombre de ceux qui attendaient le Prêtre à Ei-tsiou (1ère ville frontière vis à vis de Pien-men) lors de son entrée. Il fut obligé d'acheter à prix d'argent une place de domestique auprès d'un des membres de l'ambassade. Le voyage fut heureux et les lettres furent remises à l'Evêque le 28 janvier 1797. Dans ces lettres le Prêtre parlait des moyens de procurer la paix à l'Eglise coréenne. Le meilleur lui paraissait être de faire demander un ambassadeur au Portugal pour venir saluer le roi pacifiquement, et faire alliance avec lui. Il devrait être accompagné de prêtres fort instruits en mathématiques et en médecine que l'on se flattait de faire rester et traiter honorablement par égard pour l'ambassade; nous ignorons si la demande en fut faite au Portugal. Mais tout le monde sait que cette ambassade ne fut jamais envoyée, on l'attend encore aujourd'hui.
Ni Louis de Gonzague, malgré son apostasie de 1791, avait repris une partie de sa ferveur et chercha de nouveau à augmenter le nombre des néophytes. Il paraît certain qu'il vit le P. Tsiou et fut même probablement un certain temps près de lui. Le Prêtre lui répétait, dit-on, souvent: "Après tous tes méfaits et avoir follement administré les sacrements sans autorité, comment pourrais-tu assez faire pénitence? Le martyre seul pourra te les faire pardonner." Aussi Louis se livrait volontiers à toutes les fatigues et travaux pénibles et pensait sans cesse à se préparer au martyre pour expier ses fautes. Nous ignorons les circonstances qui excitèrent une nouvelle tempête contre lui, mais des ordres du gouverneur étant survenus, il fut repris probablement vers la fin de 1795 par son propre mandarin et envoyé à T'sieng-tsiou, chef-lieu militaire de la province. Il y subit la question et de violents supplices et ne se rendant pas il fut renvoyé à sa propre ville de T'ien-an, peut-être mis au rang des fustigateurs, punition en usage dans ce pays et très dégradante pour un homme de condition. Le mandarin toutefois ne lui fit pas exercer ce vil métier et se contenta de le placer chez un particulier sous caution. Il resta ainsi mi-prisonnier pendant 5 ou 6 ans, c.à.d. jusqu'à l'époque où reprit son procès en 1801. Il enseignait les lettres à beaucoup d'enfants des prétoriens et ses talents supérieurs joints à une vertu éclatante le firent aimer et respecter de tous. Ordre était donné de le mettre à la question le 1er et 15 de chaque mois jusqu'à ce qu'il se rendit et ces ordres durent être exécutés, toutefois il est plus que probable qu'étant fort ami des prétoriens, on ne dut pas l'y faire beaucoup soufrir, du moins la plupart du temps. Du reste Louis ne paraît pas avoir failli, dans ces épreuves il pratiqua constamment sa Religion ostensiblement et put faire quelque bien dans ce pays. Ayant un jour obtenu permission d'aller visiter sa famille à Ie-sa-ol, il s'y informa de l'état de la Religion dans le village. Il apprit alors que poussé par la crainte on avait réuni tous les livres de Religion et en formant un bûcher les avait brûlés publiquement sur la place. A cette nouvelle il ne put retenir ses larmes et pleura amèrement tant de défections. puis s'informant si aucun volume n'avait échappé au funeste incendie un de ses parents apporta deux volumes qui avaient été secrètement soustraits, c'est tout ce qu'il en restait. D'où on peut juger de la position déplorable où était tombé ce grand village qui comptait autrefois tant de fervents chrétiens. La captivité de Louis le retenant ainsi, nous ne le verrons plus prendre part à aucune afaire, nous le suivrons seulement plus tard au moment de son dernier procès.
L'année 1796 nous offre un généreux confesseur qui pour n'être pas mort dans les supplices n'en eut pas moins de mérite devant Dieu et est bien digne aussi de trouver place sur nos tablettes édifiantes. Kim Thomas était son nom, connu aussi sous le titre de Kim P'ong-hen qui veut dire chef de canton. Né d'une famille du peuple au district de T'sieng-iang, province de T'siong-t'sieng, il avait un caractère droit et ferme, n'était pas sans quelque instruction et sur la demande du peuple fut nommé chef de canton. Ayant embrassé la Religion, il resta dans sa charge, pratiquait avec ferveur, se livrait assiduement à la prière et aux lectures, instruisant soigneusement sa famille et vivait en parfaite harmonie avec tout le monde. En l'année Pieng-tsin(1796), saisi et conduit à la préfecture de T'sieng-iang il eut de violents supplices à supporter, et on alla jusqu'à lui brûler du moxa sur l'anus sans pouvoir lui faire renier sa foi. Ayant fait rougir au feu un soc de charrue, on lui dit de monter dessus pieds nus et il se disposait à le faire, mais on l'arrêta en disant qu'il était fou. C'était la sainte folie de la croix! Condamné à mort trois jours avant l'exécution on lui barbouilla le visage de chaux et lui fit faire le tour du marché au son de la caisse. Mais sur ces entrefaites le mandarin ayant été cassé, la cause fut suspendue et quoique Thomas demandât que l'exécution ne fût pas différée, on la remit après l'arrivée du nouveau mandarin. Quand il eut pris possession, toutes les pièces du procès lui furent présentées et il dit de ne pas le garder à la prison, mais de le mettre sous caution chez un particulier, puis quelques jours après lui fit dire de s'en aller, et de sortir du territoire de cette préfecture. Il partit donc en gémissant et retourna près de sa famille où il témoigna son regret de n'avoir pu obtenir le martyre, disant que pour lui maison et famille n'étaient rien et qu'au fait il n'avait pas de chance.
De là il alla s'établir au district de Pou-ie, puis peu après à celui de Keun-san où il s'appliqua uniquement à instruire les chrétiens ses voisins et vivant dans un dénuement complet de toutes choses. Si les chrétiens lui donnaient quelque habillement ou des souliers, ils répondait que les beaux habits entretiennent l'orgueil, et s'il rencontrait quelque pauvre endeguenillé, il changeait aussitôt avec lui. Sa nourriture était tellement vile que personne autre n'en eut voulu et souvent il ne prenait qu'un seul repas dans le jour. Il émigra plus tard au district de Ko-san, et quoique toujours dans le même dénuement il conservait le même calme et la même gaieté. Ayant conclu le mariage de sa fille, il se rendait un jour au marché pour faire quelque emplette avec de l'argent reçu d'un de ses amis pour cet effet, quand sur sa route il rencontra une femme éplorée et hors d'elle-même; lui en ayant demandé la cause, il apprit qu'on venait de ravir tout son petit mobilier pour payer des dettes à la préfecture et que toute sa famille était réduite à mourir de faim. De suite il lui donne tout l'argent qu'il avait en mains en disant: "Va payer tes dettes et recouvre tous tes meubles." Tous les payens en était dans l'admiration et de fait qui pourrait ne pas la partager.
En 1801, lors de la grande persécution, il alla cacher sa famille dans les montagnes et lui dit: "Attendez ici l'ordre de la Providence, pour moi j'ai toujours sur le coeur le martyre qui m'a échappé et l'occasion étant belle je vais me livrer." On lui représenta que sans lui toute sa famille mourrait de faim et que d'ailleurs lui aussi devait attendre l'ordre de Dieu, et à grand peine on parvint à le retenir, mais il conservait toujours l'espoir que Dieu lui accorderait cette grande grâce. Il était alors à An-koki, district de Liong-tam quand à la 7e lune il fut pris de maladie; la veille de sa mort, il prédit devoir mourir le lendemain, et le moment arrivé, il se fit porter dans la cour, s'y agenouilla et rendit le dernier soupir sans que l'on s'en aperçut. Pretisa in conspectu mors sanctorum ejus.
Mais revenons à la suite des faits et suivons la conduite du gouvernement et des partis. Après la mort des introducteurs du Prêtre les clameurs des ennemis de la Religion augmentèrent beaucoup et leur position devint menaçante. Le roi malgré sa modération n'y put tenir et malgré lui il se trouva obligé à y donner quelque satisfaction et à céder à l'opinion. Il envoya donc par disgrâce Ni Ka-hoani comme mandarin de la ville de T'siong-tsiou et Tieng Iak-iong comme surveillant des postes à Kim-tseng, district de Hong-tsiou (c'est un usage dans ce royaume d'envoyer par disgrâce les hauts dignitaires dans des postes inférieures à leur dignité, c'est toutefois une punition légère.), puis enfin excita Ni Seng-houni à la ville de Niei-san, d'où il revint après un an. Tous ces endroits étaient signalés comme repaires de chrétiens et on avait pour but d'en effrayer les populations. Ces trois noms nous montrent évidemment que les fauteurs voulaient se servir du prétexte de la Religion, les Piek-p'ai pour renverser les Si-p'ai, et les No-ron pour abattre le parti Nam-in. Ni Ka-hoani, principal chef des Nam-in, est celui que nous avons vu entrer en lice avec Ni Pieki et jamais il ne pratiqua. Il avait été ministre des travaux publics. Etant mandarin de Kang-hoa, il avait déjà vexé les chrétiens, arrivé à T'siong-tsiou il fit de même, et on rapporte qu'il réunissait exprès les lettrés les jours d'abstinence et leur faisait servir de la viande pour éprouver s'ils pratiquaient ou non. Tieng Iak-iong avait eu aussi une dignité approchante de celle de ministre; il était bien chrétien, mais avait presque déserté depuis les grandes affaires et arrivé à Kim-tseng il tourmenta aussi quelque peu les chrétiens pour se laver aux yeux du public et entr'autres tracassa la famille d'où est sorti le P. T'soi Thomas. Enfin Ni Seng-houni, comme nous l'avons vu plus haut, avait tout à fait renoncé à la Religion et avait même fait part de sa défection au public et arrivé au lieu de son exil il publia encore un écrit pour se disculper de christianisme, écrit auquel le siècle ne voulut pas toutefois ajouter foi. Ceci suffit pour nous dévoiler le but réel, quoique non avoué, des déclamateurs et de leurs partisans et confirme ce que nous avons annoncé dès le commencement.
Toute la conduite du roi à cette époque est expliquée par quelques lignes de Hoang Alexandre: "Le feu roi, dit-il, malgré ses soupçons et appréhensions, ne voulait cependant pas faire naître une grande affaire, mais comme il semblait y avoir des conséquences vis à vis de la cour de Péking, et la position devenir difficile. Aussi depuis 1795, quand plusieurs fois tous les grands demandèrent la prohibition sévère de la Religion, il se contenta de renvoyer l'affaire aux mandarins subalternes, sans avoir l'air d'y prendre part. La persécuion en provinces venait aussi d'ordres secrets, et il faisait semblant de l'ignorer, tout cela était pour capter le coeur des chrétiens, saisir et tuer seulement le Prêtre en secret, mais sans avoir pu réaliser ses projets, il mourut inopinément." De telles dispositions de la part des grands et du roi étaient bien de nature à encourager les gouverneurs et mandarins de la province, aussi plusieurs d'entr'eux essayèrent d'assouvir leur haine contre la nouvelle Religion comme nous le verrons à l'instant.
A cette époque, Hong Luc, dit Nak-mini, avait une dignité importante au palais et se trouva obligé par office de faire une adresse au roi relativement aux événements et à la Religion. Chrétien pratiquant, mais trop faible et irrésolu, il la fit, mais en termes ambigus et sans se prononcer ni pour ni contre. Il n'eut pas lieu de s'en féliciter. Le roi qui n'ignorait pas qu'il était chrétien lui reprocha son peu de franchise et de droiture ajoutant qu'un dignitaire public devait parler à son roi selon sa pensée tout net. Celui-ci forcé de répondre au roi eut la bassesse de placer dans sa réponse les odieuses calomnies répandues contre la Religion et y engageait le roi à poursuivre les chrétiens. Il paraît que le roi ne fut guères plus satisfait et donna encore bien à penser au chrétien apostat par la réponse peu flatteuse qu'il lui fit parvenir.
En 1797, le gouverneur de la province de T'siong-t'sieng résidant à Kong-tsiou était Han Iong-hoa. Il donna des ordres à tous les mandarins d'anéantir la Religion et de prendre les chrétiens et lui-même se mit en devoir de ne pas rester en arrière. D'après cela il y eut nécessairement beaucoup d'arrestations.
Le 8 de la 8ème lune intercalaire T'soi Ioun-t'sieni, mandarin de Tieng-son fit saisir Ni paul, dit To-kei et bien d'autres chrétiens. Tous, excepté Paul, furent relâchés après plus ou moins de supplices et une détention plus ou moins longue.
A la 8ème lune, Pak Laurent est pris par le mandarin de Hong-tsiou.
Pendant l'été, Tieng Iak-iong toujours poursuivi par ses ennemis ne put plus y tenir et pour se justifier complètement il fit une adresse au roi où sa défection et son apostasie étaient clairement exprimées, ce qui lui permit de respirer un peu, à ce qu'il paraît.
En 1798, nous voyons des chrétiens prisonniers dans les villes de Kong-tsiou, Hai-mi, Hong-tsiou et Tek-san. (Il est parlé dans la notice de Ni To-kei de la mort de Ni Tson-t'siang à cette année. Je ne vois pas comment arranger cela avec la tradition la plus générale. Ce doit être ou une erreur ou un mensonge que le mandarin aurait fait pour obtenir plus facilement l'apostasie de Ni Paul dit To-kei ou bien la date de la prise et de la mort de Ni Paul serait erronée.)
Le 12 de la 6ème lune, mort de Ni Paul dit To-kei au marché de T'si-seng district de Tieng-son. Mettre ici sa vie telle qu'elle est en Europe.
Ouen Jacques fut pris cette année à Tek-san, 2ème ou 8ème lune. Nous trouvons aussi des prisonniers à Hai-mi, à Kong-tsiou. Une partie du Nai-p'o était donc en persécution.
Nous avons déjà dit que la présence du Prêtre soupçonné par beaucoup de chrétiens n'était pas réellement connue. Nous en voyons la preuve dans les mémoires de Sin Pierre dit T'ai-po et ce que nous en détachons ici fera connaître ce qui a dû se passer chez mille autres chrétiens sans que rien nous en soit parvenu. Mais auparavant disons un mot de ce célèbre chrétien qui rendit souvent service à la Religion et finit par la sceller de son sang en 1839. Sin Pierre appelé T'ai-po était un noble de condition moyenne habitant à Tong-san-mit au district de Ni-t'sien, province de Kieng-kei. Dans le village de Tong-san-mit, son caractère ferme et droit joint à quelque peu d'éducation le mettait à même de se mêler avantageusement aux affaires, et guidé par un de ses parents nommé Ni Jean dit Ie-tsin i, branche des Ni de Tien-ei, habitant au même endroit, ils furent ensemble instruits de la Religion et désiraient vivement se rendre utiles. Ni Jean est celui que nous verrons plus tard renouer les communications avec Péking. Les mémoires que nous allons citer furent rédigés par Sin Pierre, probablement en 1838 dans sa prison et sur un ordre de M. Chastan.
«En 1791, quand parut la première prohibition formelle, je connaissais aussi la Religion sans cependant la pratiquer. Plusieurs nobles chrétiens du parti des Nam-in alors dans les charges et qui m'étaient auparavant attachés battirent à froid. Il n'y avait plus moyen de se parler ni communiquer de livres; ils baissèrent la tête, fermèrent leur porte et ne se souciaient plus d'avoir des relations. Moi aussi effrayé par l'exécution des martyrs Ioun et Kouen, je pensai qu'il n'y avait rien plus à faire, et quoique dans le coeur j'eusse la foi, au dehors je rompis naturellement avec mes amis et n'avais plus de force de me relever. Les prières journalières se récitaient ou ne se récitaient pas. J'étais sans savoir à quoi m'arrêter. Heureusement je conférai de tout avec Ni Jean dit Ie-tsin i. Liés par la parenté nous avons été instruits par le même maître et vivions l'un près de l'autre. En un mois tous deux nous perdîmes nos parents et restés seuls, devant nous soutenir mutuellement, notre attachement à la Religion sembla revivre. Ce n'était guères toutefois qu'en paroles.
Il y avait à la Capitale un chrétien alors dans les charges chez lequel nous allions tous deux fréquemment. Quoique notre demeure en fût à 140 lys, chaque mois nous faisions cette route deux ou trois fois, le voyant ou ne le voyant pas, et par suite peu de communications surtout en matière de Religion. Nous désirions surtout avoir des nouvelles du Prêtre, et s'il y en avait un, de nous mettre en rapport avec lui. Mais ce chrétien sur la route des dignités était plus réservé que tout autre. S'il ne disait rien je me taisais. A la 12e lune de l'année mou-o (commencement de 1799) par une nuit très froide, je couchai chez lui. Au chant du coq, la neige couvrant plaines et montagnes, cet ami se lève, tire d'une armoire une paire de bas d'enfants et me la donne en disant de la chausser. Les ayant regardés, il me parut qu'un enfant lui-même ne pourrait les mettre et tout étonné je dis: "Pourquoi engagez-vous une grande personne à mettre des bas d'enfants? C'est là une de vos farces." Il me répond: "La Religion étant très équitable, il n'y a vis à vis d'elle ni grands ni peits, ni nobles, ni roturier, à peu près comme ces bas qui souples et élastiques vont aux grands comme aux petits. Dans la Religion avec de la ferveur on peut voir le prêtre, comme ces bas avec un peu d'efforts entrent bien à un grand pied." C'étaient des bas venus d'Europe. Travaillés avec de la laine ils s'élargissaient selon le pied de celui qui les chausse. J'interrogeai alors beaucoup sur le Prêtre, mais cet ami me dit: "Ce que je vous ai dit suffit. Tout dépend de vos actes. Rien de plus." Ce jour-là je m'empressai d'aller de tous côtés chercher des chrétiens pour savoir ce fin mot, mais partout aucune réponse. Il n'y a pas mèche. Devenu semblable à un malade, je tournai, avançai de ci de là, puis enfin sans espoir je tourne chez moi et fais part de cet événement à mon parent Ni Jean. Dès le lendemain il se rend à la Capitale et après environ quinze jours il revint en disant: "Il y a bien quelque chose en dessous, mais pour le voir aucun espoir. Dix jours après je remonte de nouveau. Mes connaissances semblent plus froides que jamais et cachent tout, sans même me permettre d'ouvrir la bouche. Enfin n'ayant plus où chercher et interroger, je vais chez un ami, y séjourne quelques jours et le conjure de dire quelque chose. Il répond: "Quoiqu'il y ait peut-être maintenant des personnes qui reçoivent les Sacrements, il n'y a aucun moyen de le voir. Selon moi vous ne gagnerez rien à rester ici, retournez chez vous, attendez un peu et préparez-vous aux Sacrements. C'est le meilleur parti. Au surplus, agissez comme vous voudrez."
Il me parut aussi que c'était ainsi, je redescendis et rapportai le tout à mon parent avec une joie mêlée de soupirs. Tour à tour, nous fîmes la route sept à huit fois, mais sans aucun succès. Alors nous décidâmes qu'il fallait que l'un de nous s'établît à la Capitale pour voir la tournure des choses, et aussitôt Ni Jean laissant une partie de sa famille en province se procure quelqu'argent et va s'établir dans cette ville.... et toutefois nous ne pûmes avoir la consolation de voir une seule fois le Prêtre. La nouvelle de sa mort nous arriva plus tard et ne fit qu'augmenter nos regrets et notre désolation.»
Qui ne serait attendri à voir des efforts si sincères et si constants que Dieu ne permit pas d'être couronnés de succès. Mais surtout quand il faut penser que de telles démarches devaient être faites à cette époque par une multitude d'âmes affamées de la vérité, que pourront répondre tant de chrétiens qui environnés de mille grâces, en abusant tous les jours? Le secret était alors des plus stricts. la présence du Prêtre était connu du gouvernement, des arrestations et exécutions avaient lieu journellement de côté et d'autre. Faut-il s'étonner si les précautions les plus sévères étaient prises pour conserver l'unique pasteur sur lequel semblait reposer tout le salut du troupeau.
L'année 1799 ne vit qu'aggraver la posiion des chrétiens. A la Capitale et en province eurent lieu, disent les mémoires, beaucoup d'exécutions et toutefois bien peu nous sont parvenues. (Tous les faits suivants se rapportent à la persécution de T'sieng-tsiou suscitée par le traître Tsio Hoa-tsin i, elle est indiquée dans la lettre de Hoang Alexandre, mais une lacune de copiste nous prive des détails précieux qui pourraient s'y trouver.)
Le premier qui se présente est Pak Laurent, dit T'soui-teuki, pris à la 8e lune précédente par le mandarin de Hong-tsiou et assommé dans cette ville le 29 de la 2de lune 1799. (Les martyrs que nous allons placer ici sont peut-être de 1798, au moins plusieurs. On ne s'étonnera pas que les chrétiens ignorants aient oublié l'année. Ils reportent tout à l'année Sin-iou 1801 qui est plus fameuse et est selon eux la première persécution, de même qu'ils reportent à l'année Kei-hai 1839 les exécutions qui ont suivi pendant deux ans. Il faut s'étonner au contraire que le jour du martyre ait été si bien conservé pour beaucoup. Dans les martyrs que nous allons donner pour 1799, les dates de la mort semblent ne pas s'accorder avec les faits; nous ne pouvons les débrouiller. Du reste les faits nous paraissent appuyés et dignes de foi.)
Mettre ici sa vie en omettant l'anecdote rapportée plus haut.
Ouen Jacques dit Tong-tsi, Tsieng Pierre, dit Tong-tsi (c'est une petite dignité du peuple) et Pang François, dit Pi-tsang (autre dignité plus élevée, car ici chacun appelé par le titre de sa dignité, s'il en a) étaient très liés avec Laurent et semblent s'être promis de se dénoncer l'un l'autre pour être martyrs ensemble. Il ne paraît pas qu'ils se soient dénoncés. Mais Dieu permis qu'ils fussent tous saisis à des époques peu éloignées et tous eurent l'honneur de verser leur sang glorieusement pour la Religion dans le cours de cette année.
Ouen Jacques pris dès l'année précédente mourut le 11 ou le 12 de la 3ème lune 1799 à T'sieng-tsiou, chef-lieu militaire de la province de T'siong-t'sieng. Mettre ici sa vie.
Tsieng Pierre fut aussi exécuté alors, on ne sait quel jour à la ville de Tek-san, et Pang François à la ville de Hong-tsiou le 16 de la 12ème lune.
(L'année 1799 Kei-mi est citée par les ravages que fit une espèce de grippe violente.)
Vie de Tsieng Pierre dit Tsieng Tong-tsi.
Vie de Pang François dit Pang Pi-tsang.
Nous avons anticipé les époques pour ne pas séparer ces amis inséparables et que la foi a pour ainsi dire unis sur les échafauds. Cependant nous voyons que les arrestations ne cessaient pas. Beaucoup de chrétiens se trouvaient en prison avec Tsieng Pierre et ses compagnons de supplices ne nous seront pas sans doute jamais connus non plus que les deux com-martyrs de Pang François.
L'été de cette même année le Tai-sa-kan Sin Heu-tso présenta une requête au roi dans laquelle il indiquait Kouen T'sien-sin i et Tieng Iak-tsong comme les pilliers de la Religion européenne et demandait qu'on les poursuivît. Le roi avait à peine entendu ces deux noms qu'il fit de graves reproches à l'auteur de la requête, le cassa de sa dignité et défendit de donner suite à cette affaire, de sorte que pour le moment les manoeuvres des ennemis de la Religion ne réussirent pas.
Le roi qui était avare du sang de ses sujets et voyait beaucoup d'hommes éminents embrasser la Religion voulait tout examiner avec calme. Il fit cette année plusieurs fois les interrogatoires des chrétiens par lui-même, afin de mieux connaître les choses et de ne pas suivre aveuglement la passion qu'il voyait excitée contre la nouvelle doctrine et le parti Nam-in.
A la 8ème lune de Kei-mi (1799), dit Hoang Alexandre, tout à coup le roi fit appeler par le tribunal des Crimes T'soi Thomas, dit P'il-kong i, et lui demande s'il pratique encore sa mauvaise religion. Thomas, qui pensait continuellement à souffrir la mort pour réparer sa faute passée, trouvait là la réalisation de ses désirs. Aussi tout en sachant qu'il y allait de sa vie, il déclara franchement la doctrine de la Religion et les vrais sentiments de contrition dont il était animé. Sa parole claire, brillante et élevée toucha vivement tous ceux qui étaient présents.
L'interrogatoire suivant conservé par Sin Pierre dans ses mémoires est, pensons-nous, celui de Thomas et son caractère semble s'y révéler.
Le roi: Moi aussi j'ai lu les livres de la Religion, mais comment te semble-t-elle comparée à celle de Foe?
Le chrétien: La Religion chrétienne ne doit pas être comparée à celle de Foe. Le Ciel, la terre et les hommes, tout n'existe maintenant que par le bienfait de Dieu et ne se conserve que par le bienfait de l'Incarnation et de la Rédemption de ce très-haut et très-grand Dieu, maître et gubernateur de toutes choses; comment pourrait-on mettre la Religion en comparaison avec cette autre doctrine dénuée de fondements et sans principes. Ici c'est la véritable voie, la vraie doctrine.
Le roi: Celui que vous appelez très-haut et très-grand maître de toutes choses, comment a-t-il pu venir dans ce monde, s'y incarner et qui plus est le sauver par la mort infâme qu'il subit de la main des méchants? Ceci est difficile à croire.
Le chrétien: Autrefois le très-saint roi Seng-t'ang, voyant une sécheresse de sept ans et tout le peuple réduit à la mort, ne put y rester insensible. Il coupa ses ongles, se rasa les cheveux et le corps couvert de paille, il offrit son propre corps en victime et allant dans le désert de Seng-lim, se mit à pleurer et regretter ses péchés, puis composant une prière il s'offrit en sacrifice. La prière n'était pas achevée qu'une pluie abondante tomba sur un espace de plus de deux mille lys. Depuis ce temps tout le monde sait qu'on l'appelle le saint roi. (Tiré de l'histoire de la Chine) Or combien plus grand n'est pas le bienfait de la Rédemption? Tous les peuples anciens, modernes et futurs, toutes les choses de ce monde sont imprégnés du bienfait de la Rédemption, et ne subsistent que par elle. Aussi je ne puis concevoir comment vous dites que c'est difficile à croire.
Le roi: La doctrine de Foe (le nom de Foe signifie qui sait et connaît tout, sans égal. Ce nom ne se donne qu'à Siek-ka-ie-rai, fondateur de la secte qui paraît l'avoir pris et peut-être forgé lui-même.) n'est pas non plus à traiter légèrement. Le nom seul de Foe très-haut et très-grand est sans égal; comment le regarder légèrement et avec mépris?
Le chrétien: Si ce n'était ce nom de quoi eut-il pu se couvrir? Aussi le vola-t-il? Mais par le fait que Siek-ka-ie-rai est un homme fils du roi Tsieng-pan et de la Dame Mai-ia. Or de la main droite montrant le Ciel et de la gauche la terre, il dit: Au Ciel et sur la terre moi seul suis grand. N'est-ce pas là un orgueil et une vanité extrêmes et ridicules? Quelle vertu et mépris?
Le roi: La vérité se soutient par elle-même et chaque chose à la fin tourne au vrai côté. Nous verrons la suite.
Et sans rien décider il fit reconduire le chrétien au tribunal des Crimes. (Les ministres firent plusieurs adresses au roi pour faire mettre ce chrétien à mort, mais le roi répondit indirectement et laissa voir son intention de l'épargner. Les choses en restèrent là et peu après Thomas fut relâché.)
Ceci sufit, ce nous semble pour montrer combien ce roi modéré était loin de partager la haine aveugle et emportée qui poussait les ennemis de la Religion, aussi tant qu'il vécut, s'il n'empêcha pas toute vexation, il en arrêta beaucoup et ne poussa pas à la persécution. Cependant la province moins contenue que la Capitale continuait à faire couler le sang.
Pai François dit Koan-kiem i, natif du village de Tsin-mok au district de Tang-tsin, instruit de la Religion presqu'aussitôt qu'elle se répandit en Corée, après avoir, comme nous l'avons vu, subi de la part de son propre mandarin une persécution dont il sortit peu honorablement, émigra à Tou-roum-pa-hoi, district de Sie-san et y pratiquait avec ferveur. D'accord avec quelques autres chrétiens, il avait encore émigré à Iang-t'ei, district de Mien-t'sien et y avait préparé même un oratoire pour tâcher de recevoir le Prêtre. Ils étaient dans une ferveur brûlante quand le 3 de la 10ème lune de l'année Mou-o 1798, le traître Tsio Hoa-tsini vint avec les satellites de Hong-tsiou, et François saisi par eux fut conduit à cette ville. On voulut lui faire dénoncer ses complices et livrer ses livres, mais malgré de violents supplices il répondit toujours ne pas en avoir et ne pensait qu'à se préparer à la mort. Pendant plusieurs mois, il dut subir de fréquentes tortures, puis fut transféré à T'sieng-tsiou, chef-lieu militaire et criminel de la province où il partagea les nombreux supplices de Ouen Jacques et autres. Toutes ses chairs étaient en lambeaux, ses os ressortaient de toutes parts, mais le courage et la patience ne lui manquèrent pas. Il survécut à Ouen Jacques et sans que l'on sache comment se sont passés les mois suivants. La tradition de la famille place sa mort au 13 de la 12ème lune de cette année 1799 à T'sieng-tsiou où il mourut sous les coups à l'âge de 60 ans. Il était frère aîné de Pai Mathias que nous avons vu coopérer aux voyages pour l'introduction du P. Tsiou.
Au même temps deux généreux athlètes confessaient glorieusement le nom de J.C. dans la ville de Hai-mi, célèbre aussi dans nos sanglantes annales.
Vie de Ni François, dit Po-hien i
Il eut un digne compagnon de son triomphe dans In Eun-min i, appelé Martin.
Vie de In Martin, appelé Eun-min i et Tsong-kan i
Les détails sur cette année mémorable ne nous sont pas pavenus en plus grand nombre. Mais déjà nous ferons remarquer combien le pays du Nai-p'o, évangélisé par Ni Tan-ouen i, commençait à se distinguer comme nous l'avions annoncé. Ouen Pierre et Jacques, Ni Paul, Pak Laurent, T'sieng Pierre, Pang François, Pai François, Ni François et In Martin étaient tous de différents districts de cette vaste plaine. Faut-il s'étonner qu'une terre si grassement fécondée dès le commencement ait continué à produire des fruits admirables et soit restée proverbialement la terre classique du christianisme dans ce royaume.
Enhardi sans doute par la vue des exécutions que nous venons de rapporter, le madarin de la ville de Nie-tsiou, province de la Capitale se mit aussi à poursuivre les chrétiens de son district.
Vers la 3ème lune de l'année Kieng-sin 1800, Ouen Jean avec deux de ses cousins, Ni Martin et un autre encore étaient allés pour passer la fête de Pasques chez le chrétien nommé Tsien Tsong-ho au district de Nie-tsiou. Celui-ci dont le nom de baptême nous est inconnu mais dont toute la famille pratiquait avec ferveur les reçut avec grande joie. (On tue un chien, on prépare du vin et réuni avec les chrétiens des environs sur le bord de la route, on récitait à haute voix l'Alleluia et le Regina, puis battant la callebasse on chantait en accord; le chant terminé, on buvait le vin et mangeait la viande, puis les chants recommençaient encore et alternant ainsi tout le jour se passa; mais peu après ayant été accusés par des familles ennemies, ils furent pris et conduits devant le mandarin au nombre de onze. (Hoang Alex.))
Pendant le trajet on passa devant la maison de Ouen Jean et sa vieille mère qui alors seulement apprit la prise de son fils se présenta en larmes devant les satellites en les conjurant de la laisser voir son fils un insant avant de l'emmener, mais elle ne fut pas écoutée et on continua la route. Arrivés devant le mandarin il leur dit: Dénoncez ceux qui vous ont instruits et vos complices, puis reniez Dieu. Jean répondit au nom de tous: Il nous est sévèrement défendu de dénoncer personne et devrions-nous mourir, nous ne pouvons nuire à qui que ce soit, encore moins pourrions-nous renier Dieu. Le mandarin en colère leur fit subir l'écartement des os et la poncture des bâtons. (Dans le nombre il y avait bien des faibles, mais soutenus par la fermeté et les exhortations de Martin tous tinrent bon dans ces violents supplices plusieurs fois répétés et ils furent enfermés à la prison.)
Ce Ouen Jean dit Sa-sin i était de la ville de Nie-tsiou et le second beau fils de T'soi Marcellin dont il sera bientôt parlé. Fort lié avec Kim Yosaphat dit Ken-siouni, il fut instruit par lui de la Religion et en fit part de suite à sa famille qui se mit toute entière à la pratiquer. Ni Martin dit Tsong-pai, branche des Ni de Tsien-tsien d'une famille bâtarde du parti Sio-ron était du district de Nie-tsien. Son caractère était droit, ferme, mais violent et il avait des connaissances solides en médecine. (Sa force et son courage sortaient du commun et il était grand dehors ses vues et résolutions.) Quand il faisait quelque route longue ou courte, il avait pour manie de se reposer le jour et de marcher seulement la nuit et commettait fréquemment des violences fort opposées à la justice, mais à peine se fut-il mis à pratiquer qu'il dompta la violence de son caractère et ne conserva que sa droiture et sa fermeté. Il vivait seul avec son père et sa femme, et tous trois remplissaient tous leurs devoirs avec ferveur. A la même époque vivait à Tiem-teul, district Nie-tsiou, canton de Kim-sai, un noble nommé Im hei-ieng i, de la branche des Im de Pong-tsien. Ses père et mère, ses frères et soeurs tous pratiquaient la Religion excepté lui. Il disait, rapporte-t-on, que pour la pratiquer il faudrait n'avoir ni yeux, ni oreilles, ni aucun autre sens. Son père l'exhortait fréquemment à se convertir. Il y employait la douceur, puis les reproches et jamais Hei-iengi ne répondait un seul mot. Plusieurs années après, son père tombant malade et étant près de sa fin le fit appeler et lui dit: Si je te voyais pratiquer avant de mourir, je n'aurais plus aucun regret en quittant ce monde. Le fils ne répondit rien encore. Un autre jour son père l'appelle de nouveau, le fait asseoir près de lui et lui dit: Je dois mourir demain. A voir ton air, je pense bien qu'après ma mort, tu me fera les sacrifices d'usage pour les parents. Pendant ma vie tu n'as guères écouté mes paroles, eh bien! Si après ma mort tu fais les sacrifices, je ne te regarde plus comme mon fils et te défends de porter mon deuil. (parole foudroyante et anathème désespérant surtout pour ces peuples-ci) Ici encore Hei-iengi ne répondit rien. Qui pourrait savoir ce qui se passait au fond du coeur?
Deux jours après son père mourut en effet. Ce fils donna des marques non équivoques de sa désolation; il se revêtit des habits de deuil, mais ne fit aucun des sacrifices d'usage. Toute la famille et les connaissances le regardaient avec étonnement et de mauvais oeil et des murmures furent excités de toutes parts. Au printemps de l'année Kieng-sin 1800 arriva le premier anniversaire, et là encore aucun sacrifice. Bientôt après le mandarin de Nie-tsiou qui l'avait fait épier envoya ses satellites et il fut pris avec Tsio Tsiei-tong i et son fils Iong-sam i, chrétiens qui vivaient chez lui. Le mandarin lui dit: Je sais clairement que tu ne suis pas la Religion du maître du Ciel. Mais on dit que tu ne fais pas les sacrifices aux parents. Je dois donc te faire mourir comme les chrétiens. Hei-iengi resta muet encore comme vis à vis de son père, et le mandarin le fit déposer à la prison avec et sur le pied des autres chrétiens prisonniers.
(* 원본 83쪽부터)
(* 원본 83쪽부터)
Tsio Tsiei-t'ong i était un noble du district de Iang-keun et de la branche des Tsio de Han-iang. Sa famille d'abord originaire de Hai-tsiou était venue s'établir à pai-se-kol district de Iang-keun et lui devenu veuf vivait avec ses deux fils Iong-sam i et Ho-sam i. Tous trois pratiquaient la Religion avec ferveur. Mais ne pouvant plus suffire aux besoins de leur subsistance ils se retirèrent dans la famille de Im Hei-ieng i à Tiem-teul district de Nie-tsiou. Iong-sam i, appelé Pierre, arrivé presqu'à l'âge de 30 ans, n'avait pu encore prendre le chapeau et se marier. Ayant tout le corps malade il était faible et grêle et tout l'extérieur fort peu avantageux. Ignorant de toutes les affaires du monde chacun riait de lui et n'en faisait aucun cas. Mais, remarque Hoang Alexandre, il était toujours fort bien traité chez Tieng Augustin qui admirait et louait beaucoup sa grande ferveur. Quand Im Hei-ieng i fut pris vers la 4ème lune de 1800, Ho-sam i sut s'évader, mais Iong-sam i et son père furent pris avec lui. Pendant la route le père dit à son fils: Cette fois je suis décidé à donner ma vie pour Dieu et serai certainement martyr, pour toi que feras-tu? Pierre répondit: Pour le martyre on ne peut se fier à ses résolutions ni à ses forces; comment oserai-je bien, me fiant à moi-même, m'avancer en parole? Ils sont conduits au mandarin et dès le premier interrogatoire le père fait une chute déplorable. Le mandarin dit à Pierre: Toi aussi renonce à ta Religion. Pierre: Je ne le puis. Le mandarin: Ton père veut se conserver la vie et toi tu voudrais mourir, n'est-ce pas là un manque de piété filiale? Pierre répond: Il n'en est pas ainsi. Si les parents viennent à dévier et que les enfants continuent à remplir tous leurs devoirs, dira-t-on pour cela que les enfants manquent à la piété filiale? Mais de plus quoique chacun doive honorer et servir ses père et mère selon la nature il y a en outre le grand roi et père commun de toutes les créatures du Ciel et de la terre, c'est lui qui a donné la vie à nos parents, c'est lui aussi qui me l'a donnée, comment dès lors pourrais-je bien le renier? Le mandarin rempli de colère et d'aversion contre lui fit subir deux ou trois interrogatoires accompagnés de supplices atroces dans lesquels son genou fut brisé et détaché de la jambe et tout son corps réduit à un état affreux. Pierre eut une autre tentation à supporter. Le mandarin, après l'avoir beaucoup cahoté sans succès, fit appeler son père et lui dit devant le fils: Je dois vous faire mourir à cause de votre fils, mais serait-il juste que par votre faute le père et le fils mourussent, parlez-lui donc, une seule de vos paroles peut sauver la vie à tous les deux, tout dépend de vous, exhortez-le donc à se repentir; et en même temps il fait battre le père sous les yeux de son fils. Le père se met donc à exhorter son fils et celui-ci de dire: Je ne puis rompre avec les sentiments naturels, veuillez nous sauver tous les deux; puis il fait sa soumission et le mandarin tressaillant de joie les relâche et renvoie tous deux. Mais quand Pierre sortit il fut vivement réprimandé et exhorté par Ni Martin et pendant la nuit fut touché de douleur et d'une vraie contrition. Le lendemain matin retournant vis à vis du mandarin, il dit: Ce que j'ai dit hier est maintenant pour moi la cause d'un regret mortel, j'espère que le Mandarin voudra bien faire mourir le fils pour sa faute, et traiter le père selon ses désirs; comment pourrait-on pour la faute du fils, faire mourir aussi le père? Donnez à chacun selon ses voeux et le mandarin ne voyant plus aucun moyen à mettre en oeuvre le fit enfermer secrètement. Chaque fois qu'il faisait des interrogatoires, quoiqu'il fît battre les autres chrétiens d'une manière ordinaire, il faisait battre Pierre longtemps et très violemment, c'est que voyant sa tournure il le méprisait souverainement et s'était dit: D'un tel homme il sera facile d'obtenir soumission; mais contre toute attente voyant qu'il était au contraire très ferme il le prit en grippe, le haïssait tout particulièrement et voulait absolument le faire mourir.
Enfin à la 4ème lune fut pris encore par le même mandarin T'soi Marcellin que nous avons vu plus haut subir une légère persécution à Koang-tsiou en 1791. Marcellin dont le nom vulgaire est Ie-tsiong i et le nom légal T'siang-tsiou était un noble du district de Nie-tsiou pratiquant avec toute sa famille, il regrettait toujours d'avoir manqué une fois l'occasion du martyre et quand cette persécution de 1800 s'éleva il répondit en riant à sa femme qui l'exhortait à fuir et à se cacher: "Quand je n'y serai plus tu vivras bien tout de même." Sa mère lui fit aussi des instances pressantes, et par respect pour ses ordres, il fit semblant de fuir disant aller à la Capitale. Il sortit en effet, mais revint le même jour et ce soir-là même les satellites de Nie-tsiou vinrent et se saisirent de sa personne. Arrivé devant le mandarin, celui-ci lui dit: "De qui as-tu appris la Religion et quels sont tes complices? Dénonce tout." Marcellin répond: "Ce que vous me demandez me ferait violer le 5ème commandement, je ne puis donc rien déclarer." Le mandarin irrité le fait mettre aux tortures, lui commandant de plus l'apostasie, il répond: "Devrais-je mourir sous les coups, je ne puis ni trahir mon Dieu, ni dénoncer personne." Après de cruels supplices il est aussi déposé à la prison avec les autres confesseurs, dont nous reprendrons l'histoire un peu plus bas.
Pendant que ceci se passait au disrict de Nie-tsiou, le district de Iang-keun son voisin était loin d'être tranquille. Déjà pendant l'été de 1799 une bande de méchants s'était liguée pour prendre la famille Kouen dont la réputation était si grande, elle fut couverte de calomnies et accusée devant le mandarin. Cette famille se trouva alors dans une position fort critique et l'affaire devenait de plus en plus grave. Mais la sagacité et la bonté du mandarin lui fit arranger les choses et rendant les accusés à leur liberté, les projets des méchants ne purent cette fois réussir entièrement. Dès lors ils tramèrent secrètement leur affreux complot, s'unirent à quelques méchants dignitaires à la Capitale et à la 5ème lune 1800, allèrent devant le roi et lui dirent: "La mauvaise doctrine se répand en grand dans le district de Iang-keun, il n'est personne qui le sache et cependant le mandarin ne se met pas en peine de faire des perquisitions, il mérite donc d'être sévèrement puni." Le roi ayant accepté l'accusation, le mandarin de Iang-keun dut donner sa démission et son successeur à peine installé fit renaître le procès et saisit grand nombre de personnes. (Ce fut probablement Tsieng Tsiou-seng i qui est noté comme ayant demandé lui-même des pouvoirs plus étendus pour pouvoir étendre le cercle de ses persécutions.)
Kouen Ambroise appelé T'siel-sin i, déjà vieux, fut saisi de crainte et se retirant à la Capitale il parvint à éviter pour le moment. Le mandarin fit emprisonner son fils en sa place. Mais quoique celui-ci eût demané plusieurs fois se subir aussi les peines en place de son père, le mandarin ne le permit pas et voulait absolument saisir Ambroise lui-même et par suite l'affaire traîna longtemps sans dénouement et on finit même par relâcher le fils. Malgré ces escarmouches très significatives et les nombreux emprisonnements opérés dans plusieurs parties des provinces les chrétiens ne restaient pas inactifs.
Le Père Tsiou, vers la 4ème lune de cette année, établit la confrérie nommée Mieng-to. Elle avait pour but de s'encourager mutuellement à l'étude de la doctrine religieuse et de s'efforcer de la répandre parmi les chrétiens et les payens. Le président de la Confrérie fut Tieng Augustin appelé Iak-tsong, que ses talents et ses vertus mettaient au premier rang parmi les chrétiens et dont nous parlerons bienôt plus au long. Cette érection fit assez de sensation et eut alors un heureux succès. Les confrères étaient assidus à leurs exercices, dit Hoang Alexandre, et ceux même qui n'en faisaient pas partie, entraînés par le mouvement général, se remuant et s'appliquant à la conversion des payens, pendant l'automne et l'hiver le nombre des nouveaux catéchumènes augmentait jour par jour. Les femmes en formaient la plus grande partie, les simples et les ignorants venaient après, et les nobles craignant les malheurs qui se préparaient n'arrivèrent qu'en très petit nombre.
L'orage qui menaçait de fondre en grand sur la chrétienté n'était contenu que par la modération du roi, et quoiqu'il eût déjà cédé en partie aux clameurs du parti turbulent, il ne s'était pas encore prononcé directement contre la Religion; d'autre part il voulait épargner le sang de son peuple et surtout avait un amour et une estime profondes pour quelques-uns des hommes éminents qu'il savait l'avoir embrassée et ne pouvait se déterminer à sévir contre eux. Tant que vécut ce roi, les ennemis du nom chrétien qui connaissaient assez ses sentiments, n'osèrent pas découvrir en grand le fond de leurs projets et plusieurs chrétiens haut placés conservaient l'espérance de faire enfin triompher la vérité; l'un d'eux quelques années auparavant demandait seulement une dizaine d'années pour y parvenir. Malheureusement Dieu ne permit pas que la vie de ce prince se prolongeât et une large plaie s'étant formée sur le dos, il mourut le 28 de la 6ème lune de cette année 1800, après 24 ans de règne.
(On pourrait mettre ici quelques détails sur l'usage de ne pouvoir toucher le corps du roi en maladie pour le guérir.)
Cette mort si imprévue fut un coup terrible pour tout le royaume qui perdait un prince sage, modéré, ami de son peuple et qui pouvait encore espérer de nombreuses années, pour tomber au milieu des difficultés d'une minorité; mais c'était un véritable coup de foudre pour les Nam-in et pour les chrétiens qui voyaient en lui tomber le dernier obstacle qui pût s'opposer au torrent de leurs ennemis. Voici comment Hoang Alexandre dépeint la position actuelle: "Depuis 200 ans, les nobles étaient divisés en 4 partis, nommés No-ron, Sio-ron, Nam-in et Sio-pouk. Vers la fin du règne actuel les Nam-in se divisèrent eux-mêmes en deux (camps) branches; l'une était composée de Ni Ka-hoani, Tieng Iak-iong, Ni Seng-houni, Hong Nak-mini et quelques autres; tous avaient d'abord cru en Dieu, puis avaient renié leur Religion pour se conserver la vie; au dehors quoiqu'ils fissent semblant d'être hostiles à la Religion, au fond du coeur ils croyaient encore; leurs partisans du reste étaient fort peu nombreux. L'autre branche avait pour chef Hong Ei-ho et Mok Man-tsiong, ennemis acharnés de la Religion et pendant 10 ans ils avaient fortement invétéré leur haine mutuelle, ceux-ci étaient en outre de la couleur Piek-p'ai. Les No-ron se divisaient aussi en deux couleurs, l'une appelée Si-p'ai, composée de sujets vraiment dévoués au roi et très soumis à toutes ses intentions; l'autre appelée Piek-p'ai, formée d'hommes très attachés à leurs idées particulières et contrariant volontiers les vues du roi (les Piek-p'ai et les Si-p'ai se trouvent aussi quelque peu dans divers autres partis et surtout chez les Nam-in). Vieux ennemis des Si-p'ai, nombreux et puissants, le roi les redoutait, et depuis quelques années leur parti grossissait de toutes parts. Ni Ka-hoani était le premier lettré du royaume, et Tieng Iak-iong avait des talents bien au-dessus du commun. Avant 1799, le roi les chérissait et les employait beaucoup, mais depuis il se refroidit et les laissa de côté. Ces deux hommes étant très redoutables aux Piek-p'ai, on cherchait surtout à leur nuire et quoique les partisans de Ka-hoani eussent renié la Religion et même la persécutassent, tous les Piek-p'ai continuaient à les signaler toujours comme attachés à cette doctrine perverse, et accumulèrent sur eux des accusations odieuses avec force calomnies. Le feu roi les ayant toujours couverts et protégés un peu, on n'avait pu réussir à les abattre entièrement, mais celui-ci venant à mourir, son fils (nommé plus tard Sioun-tsong) (Les rois en Corée n'ont pas de nom, ils reçoivent toutefois de l'Empereur de Chine un nom représenté par un caractère chinois qui sert seulement dans ses rapports avec l'Empereur, très peu de Coréens en connaissent la prononciation et d'ailleurs on ne peut prononcer ce nom du roi, ce n'est qu'après la mort qu'on leur donne un nom sous lequel ils sont désignés dans l'histoire. Cet usage doit leur venir de la Chine.) lui succéda et le nouveau roi étant enfant, la régence tombait de droit entre les mains de son arrière-grand-mère, Kim Tsieng-siouni (branche des Kim de T'sieng-p'ong, famille différente de celle qui a donné les reines aujourd'hui existantes). Aussi abaissa-t-elle la grille (cette expression vient de ce que la reine dans ses rapports avec les dignitaires se met toujours derrière une ouverture fermée par une espèce de claie qui la cache un peu, car quoiqu'appelée mère du peuple les usages ne permettent pas qu'elle soit assise près des hommes comme en Europe) et prit en main l'administration du royaume. Cette reine était grand-mère marâtre du feu roi (seconde épouse de son grand-père) et étant du parti Piek-p'ai, sa famille avait été laissée de côté par le roi et par suite de cela la haine fommentée pendant longues années n'avait pu se produire au dehors, mais contre toute attente l'administration tombant entre ses mains, elle s'unit étroitement aux Piek-p'ai et commença de suite à déverser son venin.
L'occasion était donc favorable pour les fauteurs, une minorité avec l'autorité entre les mains d'une femme et surtout d'une femme dont les sentiments étaient bien connus, devait seconder merveilleusement leurs projets d'attaque et de désordre. Le parti No-ron se confirma dans sa résolution de renverser le parti Nam-in, et les Piek-p'ai se préparèrent à redoubler d'efforts pour supplanter les Si-p'ai, et comme la plupart des hommes éminents nouvellement convertis étaient du parti Nam-in, la nouvelle Religion devait servir de prétexte pour s'en défaire plus sûrement, outre que la haine contre le christianisme que l'on prévoyait devoir ruiner la religion des Ancêtres, poussait encore les uns et les autres. Malheureusement tous ces projets fort adroitement combinés, réussirent et sans une protection toute spéciale de Dieu, le seul fait de la mort du roi eut anéanti la Religion à jamais dans ce pays. Toutefois l'éclat n'eut pas lieu immédiatement, nous l'attribuons à l'usage de ce pays qu'est de ne pas commencer des affaires aussi graves avant l'enterrement du roi défunt. Est-ce respect ou superstition? Peut-être tous les deux. Toujours est-il que jusqu'à l'enterrement chaque parti sait assez bien se contenir et nous en avons des exemples sous les yeux récemment encore. D'ailleurs les nombreuses cérémonies qui doivent se faire régulièrement près du corps du défunt et les immenses préparatifs pour ses obsèques ne laissent pas le temps de se livrer à tous les détails de bataille et procès. Or l'enterrement ne se fait pas ici au gré des survivants, les règles sont là et elles sont suivies. Le temps fixé pour l'enterrement de l'Empereur de Chine étant de sept mois, le roi de Corée qui est son vassal, ne doit attendre que 5 mois et pour les nobles ou personnages importants le terme est fixé à trois mois. Pendant cet espace de temps, chaque parti peut bien préparer ses batteries, mais nous ne voyons pas qu'il y ait eu d'événements bien graves.
Revenons aux confesseurs que nous avons laissés à la prison de Nie-tsiou. Pendant ce temps, deux fois par mois, on leur faisait subir de nouveaux interrogatoires accompagnés de violents supplices, on assure que le corps de Ouen Jean plusieurs fois mis en lambeaux par les coups se trouvait entièrement guéri dès le lendemain. Ce chrétien avait une vieille esclave qui venait sans cesse le visiter et lui représentant la triste position de sa famille elle mettait tout en oeuvre pour le séduire et l'ébranler. Jean restait insensible à tout. Un jour ses paroles furent des plus touchantes et Jean en paraissait violemment ému, mais Ni Martin lança alors de travers un regard sévère à la vieille et celle-ci tremblante se retira sans oser même achever. Depuis lors elle ne se présenta pas et disait que craignant l'oeil terrible du noble Ni elle ne pouvait plus y aller.
Ni Martin eut à supporter aussi une terrible tentation. Son père vint le trouver à la prison et le prenant par la main lui dit en pleurant: "Veux-tu donc mourir et abandonner là ton père en cheveux blancs?" Martin répondit avec calme: "Mon père ce n'est pas que j'ignore les vrais principes de la piété filiale; si on considère seulement la nature, ma conduite paraîtra bien peu généreuse envers vous, mais si on regarde les choses de plus haut, serait-il juste, dites-moi, pour des affections naturelles de renier le Seigneur suprême de toutes choses, notre grand roi et père commun à tous?" et il ne se laissa pas ébranler. Quelle foi vive, quel courage héroïque! Martin avait bien quelque connaissance en médecine, mais il était loin d'en avoir fait une étude complète. Depuis son entrée à la prison, quand on venait le consulter pour quelque maladie, il commençait toujours par implorer le secours de Dieu, puis employait selon les circonstances soit les médecines, soit l'acuponcture et tous se retiraient guéris. De là sa réputation se répandit au loin et tant le voisinage que les pays éloignés affluaient pour le consulter, au point que la porte de la prison ressemblait à une place de marché, sans que le mandarin osât le défendre. Bien plus, s'il y avait quelque malade à la préfecture, on venait aussi le consulter, et par suite de cela la disette de vivres ne se fit pas sentir dans cette prison. Kim Ken-siouni, quand il était interrogé sur les guérisons opérés par Martin, répondait pour ne pas faire trop de tapage, que sur dix, huit ou neuf guérissaient, mais il avouait que réellement c'était dix sur dix, cent sur cent et que pas un ne se retirait sans succès. Les préposés à la prison demandèrent à voir ses livres de médecine, Martin répondit: "Je n'ai aucune formule à moi spéciale, seulement je sers le Maître du Ciel; si vous voulez étudier la médecine il faut d'abord commencer comme moi par croire en Dieu." Les préposés lui dirent: "Vous prétendez avoir brûlé tous vos livres avec quoi pourrions-nous apprendre?" Martin répondit en riant: "J'ai dans le coeur des écrits qui sont incombustibles et ils suffisent bien pour vous instruire et faire pratiquer la Religion. (Hoang Alexandre)
Parmi les prisonniers que nous avons vus entrer à cette prison, quelques-uns s'attendrissaient beaucoup et laissaient craindre une défection. Ni Martin les consolait, encourageait et exhortait jour et nuit, il leur disait: "Nous avons été pris le même jour, si nous mourrions aussi tous le même jour pour Dieu, ne serait-ce pas une bien belle chose?" En entendant ces mots la pensée se reporte naturellement vers la prière de ces 40 martyrs plongés dans une eau glacée. Toutefois la prière et les efforts de nos confesseurs n'eurent pas le même succès, plusieurs d'entr'eux firent leur soumission et furent relâchés, il ne resta que Ouen Jean, Ni Martin et Tsieng Tsong-ho, auxquels il faut ajouter T'soi marcellin, Tsio Pierre et le payen Im Hei-ieng i traité sur le pied des chrétiens. Dans la prison ils s'occupaient par distraction à faire des compositions littéraires, puis on récitait les prières, et s'adonnait à la prédication et exhortation des payens. Hoang Alexandre nous apprend même qu'un des geôliers fut alors touché de la grâce, crut en Dieu, se mit à la pratique et devint un fervent chrétien.
A la 10ème lune, les prisonniers furent cités devant le gouverneur qui commença par tâcher (de) les attirer par la douceur, ajoutant qu'une seule parole d'apostasie les ferait de suite relâcher et mettre en liberté. Marcellin répondit au nom de tous: "Après avoir servi le grand roi et père commun de tous les hommes est-il convenable de renier par crainte de la mort? Non, j'en serai quitte pour mourir." Voyant que toute tentative était inutile, on leur fait donner une volée de coups sur les jambes, prononce leur sentence de mort que chacun d'eux signe et ils sont renvoyés à la prison. Ils n'eurent plus guères dès lors de tortures à endurer; mais au milieu des souffrances et privations de toute espèce, ils s'appliquaient par la pratique de la patience à mériter la grâce de rester ferme jusqu'à la consommation de leur sacrifice.
Cependant le payen Im Hei-ieng i avait subi régulièrement avec les autres chrétiens deux interrogatoires par mois, sans jamais y proférer une parole; comme eux il avait dû subir de violents supplices et toujours les supporter sans pousser aucun cri. Le mandarin étonné lui disait: "Promets seulement de faire les sacrifices d'usage et je te renvoie immédiatement; mais si tu refuses de le faire je te ferai mettre à mort." Là encore pas un mot de réponse. Quelque temps après l'interrogatoire de la 10ème lune, les chrétiens ses co-prisonniers lui dirent: "Toi qui n'adores pas notre Dieu, les supplices que tu endures ne te servent à rien, il vaudrait bien mieux faire ta soumission, te conserver la vie et t'en aller." Alors seulement il répondit: "Mon père à l'heure de la mort en déclarant ses derniers volontés m'a dit: Si tu fais les sacrifices pour moi, tu n'es plus mon fils et je te défends de porter mon deuil; maintenant que j'ai pris le deuil, comment pourrais-je pour me conserver la vie promettre de faire les sacrifices? Si on me tue, j'en serai quitte pour mourir, mais faire les sacrifices, jamais." Les chrétiens lui dirent: "Puisque tu es si déterminé, maintenant encore il n'est pas trop tard, commence dès à présent à honorer et à servir Dieu et fais en sorte de bien mourir en confessant son saint nom." Ces paroles furent bien reçues, dès lors il se mit à apprendre les prières, à observer les dimanches et fêtes et ne forma plus qu'un seul coeur avec les autres chrétiens prisonniers et nous les suivrons tous ensemble lors de leur exécution en 1801. Ce respect pour les ordres du père mourant et cette obstination à ne pas les enfreindre pourront paraître bien étonnants, mais pour qui connaît l'esprit de ce peuple dont toute la religion se résume pour ainsi dire dans l'honneur et l'obéissance dûs aux parents, l'étonnement sera moindre et nous pouvons assurer que des faits analogues à celui-ci ne sont pas rares dans ce pays.
Le temps fixé par notre divin maître pour tomber entre les mains de ses bourreaux approchant, il voulut bien permettre qu'un traître perfide prît part aux complots de ses ennemis et donnât le premier signal des scènes sanglantes dont il devait être la victime. Des circonstances à peu près semblables se sont rencontrées à toutes les époques, déjà par deux fois cette histoire a dû en faire mention et nous les voyons encore aux approches de la crise qui se préparait.
Kim Ie-sam i était originaire du Ho-tsiong (le mot de Ho-tsiong s'applique à une vaste partie de la province de T'siong-t'sieng à l'ouest) et le cadet de trois frères qui tous avaient été baptisés et étaient allés s'établir à la Capitale pour fuir la persécution. peu à peu Ie-sam i se refroidit, renia sa Religion et se lia avec de mauvais sujets et tous les efforts de ses aînés ne purent le rappeler de ses écarts. Il y avait encore un autre chrétien nommé Ni An-tsieng i, originaire du même endroit, établi aussi à la Capitale et qui avait quelque fortune; Ie-sam i, fort pauvre, espérait toujours recevoir de lui quelque argent et celui-ci ne satisfaisant pas assez ses désirs, il en avait conçu une haine violente qui le faisait même grincer des dents. An-tsieng i recevait les sacrements habituellement et Ie-sam i qui le savait secrètement se disait: Si le Prêtre l'exhortait à faire l'aumône, il ne pourrait pas ne pas la faire, et s'il ne la fait pas, c'est que le Père ne l'y pousse pas. De là sa colère se reporta sur le Père et voulant lui nuire, il alla déclarer toutes ses affaires aux chefs des satellites. Ceux-ci qui après cinq ou six ans de perquisitions n'avaient pas encore pu pénétrer les secrets des chrétiens furent transportés de joie et lui dirent: "Si l'affaire réussit nous te ferons obtenir une place grassement rétribuée, tâche seulement de savoir où est maintenant cet homme." Le Prêtre restait chez Colombe et Ie-sam i s'en doutait; il fait accord avec les satellites et leur dit de venir tel jour chez lui et qu'il leur ferait connaître (savoir). S'étant ainsi séparés, et Ie-sam i ayant été par hasard chez quelque connaissance y tomba malade, au point de ne pouvoir revenir chez lui. Au jour convenu les satellites s'y présenèrent, mais ne le trouvant pas s'en retournèrent tels quels. Heureusement un chrétien fut informé de tout et en avertit le Prêtre qui se retira dans un autre lieu. (c'est peut-être alors qu'il fit séjour dans le palais de Ni In.) Puis Ni an-tsieng i ayant aussi porté quelque somme d'argent chez Ie-sam i fit sa paix avec lui et dissipa (calma) sa haine pour un temps; peu de jours après le roi mourait, et de toutes parts les affaires s'étant multipliées, on n'eut pas le temps d'exciter alors la persécution, mais Ie-sam i qui avait déjà fait ses déclarations, ne pouvait reculer, il continua à fréquenter ses mauvais compagnons, et trama fortement son complot avec eux, décidé à ne s'arrêter qu'après avoir vomi son poison. (lettre d'Alexandre)
(Ni Seng-hoa dans ses mémoires parle sans le nommer d'un traître chrétien à la Capitale qui désigna alors au gouvernement la marche à suivre pour détruire la Religion et indiqua tous les chefs. Ce malheureux, dit-il, vécut toujours depuis dans une grande misère et ne pouvait même pas parvenir à se convertir. Nous pensons qu'il parle de Kim Ie-sam i.)
Les cérémonies de l'enterrement du roi étant terminées, de suite, à la 11ème lune on cassa tous les dignitaires Si-p'ai et la moitié de la cour en fut vacante. Les grands ministres en fonction furent changés et choisis dans le sens de la réaction qui se fomentait; les trois grands ministres en charge furent dès lors Ni Pieng-mo, Sim Hoan-tsi et Kim Kouen-tsiou, tous du parti des No-ron et Sim Hoan-tsi en outre de la couleur Piek-p'ai. (On lit dans les lettres d'Europe qu'un ministre eut alors le courage de défendre les chrétiens en plein conseil et que nouvel Apollonius il reçut aussi la palme des martyrs en récompense de sa généreuse apologie. Toutes nos recherches n'ont pu encore nous faire rencontrer de traces de ce fait et nous ne voyons pas à qui il pourrait s'appliquer. Ce ne pourrait être que Ni Ka-hoan, mais sauf nouveaux renseignements, nous ne voyons malheureusement pas moyen de le compter au nombre des martyrs.)
(Ici on ne peut improviser des ministres à volonté, leur dignité est à vie et on ne peut mettre en fonction que ceux qui possèdent déjà cette dignité. Pour en créer de nouveaux il faut suivre les règles et remplir une foule de formalités longues et difficiles.) De concert avec la reine régente, ils songèrent à mettre à exécution leurs affreux projets. En même temps les méchants qui depuis plusieurs années s'étaient joints aux Piek-p'ai pour attaquer la Religion, voyant ce grand changement dans l'état du temps, se relevèrent de concert avec eux et poussant vivement les choses. Dès la 12e lune de cette année Kieng-sin parut au nom de la régente le décret impie qui prohibait la Religion dans tout le royaume, mettait au ban de la loi tous ses sectateurs et ordonnait de les saisir et juger sans miséricorde.
Dès la 11ème lune un mandat d'arrêt avait été lancé contre T'soi Thomas de la part du tribunal des Crimes et il avait été jeté en prison. Son affaire de l'année précédente n'ayant pas eu de dénouement formel, sa prise ne devrait pas paraître étonnante; d'ailleurs ceci n'était qu'un fait personnel où la cour ne semblait pas concourir, les chrétiens quoique sur leur garde n'en furent pas très effrayés. Le 19 de la 12ème lune, fête de la Purification au chant du coq T'soi Pierre appelé P'il-tiei, cousin germain de Thomas, faisait ses prières avec quelques autres dans une pharmacie donnant sur le bord d'une grande rue. Par hasard les sergents chargés de prohiber les jeux de cartes entendirent au dehors de la fenêtre le bruit qu'ils firent en se frappant la poitrine, et croyant entendre le bruit de jeu de cartes enfoncèrent la fenêtre et se précipitèrent dans l'appartement. Ils ne virent aucune trace de cartes, mais ayant fouillé chaque personne, ils trouvèrent un calendrier ecclésiastique. Ne sachant pas lire et ignorant ce que c'était, ils le portèrent à leurs camarades plus savants et voyant que c'était un écrit de Religion ils retournèrent pour saisir les personnes. Le jour paraissait alors. Tous les autres chrétiens s'enfuirent, on ne put prendre que T'soi Pierre et O Etienne qui furent conduits au mandarin et enfermés avec T'soi Thomas.
Alors les chefs des satellites réunis au traître Kim Ie-sam i et aux mauvaises bandes de la Capitale firent de toutes parts leurs perquisitions et scrutaient tous les endroits qui leur paraissaient suspects. Les chrétiens furent dans une grande agitation, mais les circonstances de la fin de l'année calmèrent un peu bientôt les choses. (Alex.) Ce fut sans doute par suite du décret de la reine, que cette même 12ème lune, Tsio Justin, dit Tong-siem i, noble chrétien du parti des Nam-in et que nous avons vu autrefois se livrer aux exercices de la retraite spirituelle avec Kouen Xavier, fut saisi au district de Iang-keun par son propre mandarin et déposé à la prison après un léger interrogatoire. Et peut-être encore à cette époque que Ni Kei-ien i, aussi noble du parti Nam-in et demeurant à la ville de T'siong-tsiou, fut pris de même par le propre mandarin et envoyé en exil après apostasie. Il paraît certain du moins que ce fut avant la fin de cette année Kieng-sin.
La circonstance de la fin de l'année mettait donc encore un petit sursis aux grands coups qu'on était résolu de porter. C'est qu'il fallait bien laisser passer la grande fête du jour de l'an, le plus grand des jours de l'année et non moins célèbre que dans les pays d'Europe. on serait peut-être étonné de trouver à cette occasion aux dernières extrêmités de l'Orient des usages assez semblables à ceux de nos pays en pareille circonstance, si on ne savait que la nature étant partout la même, les rapports de société ne sont pas différents et doivent se reproduire sous des formes à peu près analogues. Dès les 3 derniers jours de l'année la plupart des travaux extérieurs cessent, et on se livre au repos ou à quelque divertissement. Les enfants éloignés de leurs parents songent à se rendre près du foyer paternel, chacun retourne chez soi et il est bien peu de personnes qui passent cette époque hors de sa maison, on ne trouve guères que quelques portefaix ou commissionnaires qui par des retards malencontrueux les passent à regret dans quelque auberge, et dans ce cas la plupart des aubergistes ne reçoivent rien le jour de l'an et donnent la nourriture gratis. Il y a plus, un usage assez suivi met à cette époque en liberté les détenus pour affaires non graves, ou leur assigne quelques jours de congé pour aller rendre leurs devoirs aux parents vivants et morts et le temps fixé étant écoulé, ils doivent se reconstituer d'eux-mêmes prisonniers. Dans ces jours encore les mandarins évitent de faire des saisies et souvent on refuse dans les préfectures de recevoir toute espèce d'appels, qui sont par le fait rejetés à plus tard, nous en avons été témoins plus d'une fois.
Dans l'étiquette la plus sévère il y a deux salutations en usage; la première se fait le dernier jour de l'année au soir, et porte le nom de 'salut de l'année écoulée'; la 2de se fait le matin du jour de l'an, c'est le 'salut du nouvel an' ou nos souhaits de bonne année, ce dernier salut est le seul vraiment de rigueur et qui soit pratiqué par tous. Il doit se faire à tous les parents, supérieurs et connaissances, et y manquer serait provoquer le refroidissement des relations et souvent s'exposer à des reproches graves. Mais la cérémonie la plus grave et la plus importante, c'est le sacrifice aux ancêtres, il se fait partout ce jour-là, avec la pompe que la position d'un chacun lui permet, c'est, croyons-nous même, le plus indispensable de toute l'année. Si les tombeaux des parents se trouvent près de la maison. on s'y rend aussi de suite, sinon on va les visiter dans le courant de la 1ère lune et on y fait les salutations d'usage. Les étrennes se retrouvent aussi dans ce pays, mais en petit; dans la famille il se bornera à quelque partie d'habillement donné aux enfants et aux inférieurs, puis des envois de patisseries chez les supérieurs, amis et connaissances. Du reste il est reçu au moins dans la province que quiconque fait son salut du nouvel an a droit à un verre de vin ou à d'autres nourritures. L'article des joujoux, dont la Corée est du reste fort mal assortie, joue toutefois quelque petit rôle au jour de l'an, mais seulement à la Capitale ou peut-être encore dans quelques autres villes. Les premiers jours de l'année se passent donc ainsi en échange de civilités, puis en réunions pour se récréer. Aucun travail ou transaction ne se reprend avant le 5 de la lune, ce qui fait 8 jours de repos, mais on peut dire que 19 ou 20 jours se passent presqu'à rien faire et les jeux prennent une partie du temps, surtout des soirées. D'après ces quelques détails on ne sera pas étonné que la grande affaire de la ruine des chrétiens ait été suspendue pour quelques jours à l'occasion du nouvel an.
Nous sommes donc arrivés à l'année Sin-iou, qui répond à 1801; année Sin-iou à jamais mémorable par ses horreurs et ses cruautés! année gravée à jamais en caractères de sang dans le coeur de tous nos chrétiens et qui devrait être aussi dans le coeur de tout honnête homme, sur le pied de certaines années de Néron ou Dioclétien; mais aussi année glorieuse pour l'Eglise militante, comme féconde pour l'Eglise triomphante et où la Corée revêtue des toges sanglantes de ses généreux enfants semble avoir acquis le droit de se présenter avec confiance devant le Dieu crucifié pour faire valoir ses nobles titres à l'adoption d'enfant du calvaire. Non, nous en avons la douce assurance, la foi plantée et arrosée d'une manière si admirable dans cette contrée ne saurait y perdre ses racines.
On ne perdit pas de temps. Dès le 9 de la 1ère lune, le traître Kim Ie-sam i conduisit les satellites chez le catéchiste en chef T'soi Jean, surnommé Koan-t'sieni. Jean qui s'attendait à l'orage s'était depuis quelques temps retiré et caché chez d'autres chrétiens; mais le 5 de cette même lune ayant été indisposé, il avait été obligé de revenir chez lui pour se soigner. Les satellites se présentèrent au milieu de la nuit, s'en saisirent et il fut écroué à la prison des voleurs. Peu après ayant été battu de 13 coups de la planche à voleurs, il paraissait sans connaissance et étendu par terre il ressemblait à un homme mort, mais quand le juge commença à l'interroger il se redressa et développa avec dignité les 10 commandements. Le juge lui dit: "Puisque tu prétends honorer tes père et mère, pourquoi ne leur offres-tu pas les sacrifices?" Jean répondit: "Veuillez bien un peu réfléchir sérieusement. Pendant le sommeil aurait-on devant soi des nourritures délicieuses on ne pourrait les goûter, à plus forte raison comment un homme mort pourrait-il user des aliments?" Le juge ne put rien répondre et on le fit reconduire à la prison. Après cette prise les satellites en firent beaucoup d'autres et le jour et la nuit.; c'était seulement parmi les simples et les ignorants récemment convertis et des femmes. Les personnes plus influentes et plus haut placées furent alors prises en petit nombre.
Le 11, parut un ordre de la Régente qui nous a été conservé; elle s'exprimait ainsi: "Le feu roi disait souvent: en s'appliquant à faire briller la droite doctrine, la doctrine déréglée (perverse) s'éteindra d'elle-même. Maintenant j'entends dire que la doctrine déréglée se maintient et que depuis la Capitale jusqu'à la Province et surtout dans le Ho-tsiong, elle se répand de jour en jour davantage, comment pourrais-je ne pas en trembler? L'homme ne devient vraiment homme que par l'observation des relations naturelles, et un royaume ne trouve sa vie que dans l'instruction et la vraie doctrine. Or la doctrine déréglée dont il est question ne reconnaît ni parents ni roi, et rejetant tout principe elle ravale l'homme au rang des sauvages et des animaux. Le peuple ignorant s'en laisse empreindre de plus en plus et s'égare dans une fausse voie, c'est un enfant qui court à la rivière et s'y perd; comment pourrais-je ne pas le prendre en pitié et en avoir le coeur blessé? Les gouverneurs et mandarins des villes doivent lui ouvrir les yeux, faire en sorte que ses adeptes s'amendent clairement, et que ceux qui ne la suivent pas soient fortement éclairés et avertis, par là nous ne foulerons pas aux pieds les instructions que le feu roi s'est si généreusement efforcé de donner et les lumières qu'il a fait briller. Après cette stricte prohibition s'il y a encore des êtres qui ne reviennent pas à résipiscence, il faut les poursuivre de rébellion. En conséquence, les mandarins de chaque district établiront chaun dans toute l'étendue de sa juridiction le système des cinq maisons solidaires l'une de l'autre; si parmi les cinq maisons il y en a qui suivent la mauvaise doctrine, le chef qui leur est préposé avertira le mandarin pour les faire corriger. Après quoi s'il ne veulent pas encore changer, la loi est là, qu'on les extermine de façon à n'en laisser aucun germe. Telle est notre volonté, qu'elle soit connue et exécutée tant dans la ville capitale que dans les provinces."
Dès cette époque et pendant tout le cours de la 1ère et de la 2de lune commença à surgir une foule d'adresses au roi, pétitions aux ministres, circulaires des nobles, etc. dont le nombre est vraiment effrayant. Nous en avons sous les yeux une collection, loin toutefois d'être complète, qui atteste combien les esprits étaient montés et prouverait à elle seule que les choses étaient sans remède. (Il est dit aussi das ces mémoires que les mots de 'trois ennemis' employés dans les livres chrétiens pour désigner le démon, le monde et la chair ont donné lieu à l'accusation de rébellion, en faisant comprendre le gouvernement du roi sous le nom obscur de 'monde'. Cette remarque a été faite aussi par quelques autres. A tout prix, on voulait condamner les chrétiens comme rebelles afin de mettre par là ces familles tout à fait au ban de la loi et d'empêcher qu'elles ne pussent se relever. Quelle profonde malice! et malheureusement on ne réussit que trop bien.) Sur ces entrefaites une caisse renfermant des livres et objets de Religion, avec différents papiers compromettants et des lettres du P. Tsiou, avait été envoyée par précaution et mise en dépôt dans une maison que l'on croyait à l'abri des perquisitions. Mais bientôt après le dépositaire lui-même se trouvant en danger voulut la faire reporter à son propriétaire et craignant qu'elle ne fût saisie en route par les satellites, il la fit cacher dans des branches de sapin, espérant la faire passer pour une simple charge de bois de fagot. Le chrétien Im Thomas fut donc chargé de ce fardeau, mais la tournure en étant suspecte, un des valets de la mairie qui l'aperçut, soupçonna que ce pouvait être de la viande de boeuf tué en fraude, arrêta le porteur et le conduisit jusqu'au poste de la mairie, où la caisse ayant été ouverte devant le mandarin, on trouva tous ces objets et livres de Religion avec des lettres du prêtre. Le mandarin saisi l'envoya immédiatement sous escorte au tribunal des voleurs où tout fut déposé et le porteur soigneusement enfermé. Ce fut de l'huile jetée sur le feu et l'agitation devint extrême. Ceci se passait le 19 de la 1ère lune. Cette caisse, au dire de Hoang Alexandre et de toute la tradition, appartenait à Tieng Augustin, dit Iak-tsong, (Tieng Jean, dit Iak-Iong, dans ses mémoires se récrie fortement contre la calomnie qui fit passer son frère Augustin pour propriétaire de la caisse. Il ne voit là qu'une ruse de ses ennemis pour parvenir à condamner de rébellion toute sa famille. Cependant outre les autorités que nous avons citées, il paraît que son frère ne nia pas que la caisse lui appartint et nous le regardons comme d'autant plus certain qu'un parent de cette famille nous assura que l'auteur des mémoires avait des raisons politiques pour tromper sur ce fait même après que tout était consommé.) et le mandarin de la mairie l'avait ainsi rapporté au grand juge criminel, qui était alors Ni Iou-kiengi, mais celui-ci conservait des doutes et voyant toute la gravité de l'affaire n'alla pas plus loin et la laissa tomber. Depuis cette saisie tous les chrétiens, consternés et tremblants, ne pensaient plus pouvoir vivre même un seul jour, une dizaine de jours se passa toutefois sans aucun événement. Dans les premiers jours de la 2de lune, le grand juge criminel fut remplacé par Sin Tai-hien i, qui, on ne sait dans quelle pensée, relâcha immédiatement tous les chrétiens apostats dont la prison regorgeait et n'en gardait que quatre, à savoir: T'soi Thomas, T'soi Pierre, T'soi Jean et Im Thomas. Les uns disaient qu'il voulait les faire périr sous les coups, d'autres qu'on parlait de les envoyer en exil et on cessa même un instant de faire de nouvelles arrestations, d'où les chrétiens conçurent une joie inespérée et osaient même se flatter que les choses en resteraient là. Mais leur joie ne fut pas de longue durée, car sans perdre de temps Pak Tsong-oa et quelques autres se concertèrent et dans une adresse à la régente, après avoir fortement décrié la Religion, ils demandèrent qu'on traitât les coupables en rebelles et dénonçaient en même temps le grand juge Sin Tai-hien i pour avoir traité les chrétiens beaucoup trop légèrement. La régente tout en colère, fit en effet punir le grand juge et donna ordre de transférer les 4 prisonniers à la prison du tribunal appelé Keum-pou. (En fait de jusice les nobles qui n'ont pas une dignité sont mis sur le pied du simple peuple.) D'après la loi les dignitaires et les rebelles seuls sont justiciables du Keum-pou; le tribunal des voleurs ne s'occupe que des voleurs et si le peuple se rend coupable de quelqu'autre délit il est justiciable du tribunal des Crimes. Les chrétiens saisis jusqu'alors, quoique tous du simple peuple avaient déjà été assimilés aux voleurs en les faisant juger par leur tribunal, maintenant les transférer au Keum-pou, c'était les mettre sur le pied des rebelles pour les traiter en conséquence. D'où l'on vit que les plans des ennemis de la Religion étaient dès le commencement déterminés et qu'ils étaient résolus de pousser les choses au parti extrême pour obtenir la réalisation complète de leurs projets.
Jusqu'ici les saisis n'avaient porté que sur des hommes du peuple; toutes les mesures étant bien organisées il était temps de frapper le coup décisif. Le 9 de la 2de lune, un mandat d'arrêt fut lancé avec les formalités requises sur les principaux dignitaires du parti menacé; (Les satellites ne peuvent pas saisir les dignitaires, s'il sont accusés on envoie un des mandarins subalternes du tribunal dont ils dépendent et on doit le suivre.) Ni Ka-hoan i, ministre du 2d ordre, Tieng Jean, dit Iak-iong, dignitaire du 4ème degré approchant du ministre, Ni Pierre dit Seng-houn i peu auparavant mandarin, et Hong Luc dit Nak-min aussi d'une dignité élevée furent arrêtés et déposés à la prison dite Keum-pou. Le 11 de la même lune Kouen Ambroise dit T'siel-sin i, et Tieng Augustin dit Iak-tsong le furent aussi et en même temps ordre fut donné au tribunal des voleurs de reprendre tous les chrétiens récemment relâchés. Le 14 Hong François Xavier dit Kio-man i fut pris avec son fils Léon, mais ce dernier fut envoyé à la prison de sa propre ville de P'o-t'sien. De plus on fit venir au Keum-pou les chrétiens détenus aux villes de Nie-tsiou et de Iang-keun, en un mot les principaux des chrétiens soit de la Capitale soit de la province furent arrêtés. Les allées et venues des satellites dans tous les quartiers ne discontinuaient ni le jour ni la nuit; le Keum-pou, les deux divisions du tribunal des voleurs, la prison du tribunal des Crimes, tout était plein et regorgeait même, assure-t-on. Des arrestations si nombreuses et de personnages si importants fit un éclat effroyable dans toute la ville, chacun était dans la consternation et surtout les chrétiens glacés d'effroi et cette terreur fut portée à son comble, quand n'épargnant plus même les femmes nobles, on vit le 24 les satellites se porter sur la maison de Kang Colombe et la saisir avec ses esclaves, et ce premier pas fait, beaucoup d'autres femmes nobles furent aussi arrêtées. La plupart de ces personnages importants sont déjà connus par ce que nous avons rapporté dans cette histoire, nous ajouterons seulement quelques mots pour faire connaître les autres.
Kouen Ambroise, appelé T'siel-sin i était l'aîné de la famille des Kouen que Ni Pieki choisit pour en faire le fondement de la Religion dans ce pays et frère de Kouen François Xavier que nous avons vu périr en 1791. Nous avons déjà dit quelle réputation de science et de vertus il s'était acquis. Quand il entendit parler de la Religion, il eut d'abord peine à y croire et étant sur ses gardes il en approfondit assez longtemps les diverses parties avant de l'embrasser, mais une fois son parti pris, il ne se démentit pas. Près de ses parents il s'exerçait aux devoirs de la piété filiale; dans ses rapports avec la société, libéral et dévoué, il savait gagner la confiance de tous et généralement était regardé avec un grand respect. L'autorité de son nom attira beaucoup de payens à la Religion, puisque cet homme-là regarde la Religion comme vraie, se disait-on, comment pourrions-nous ne pas le croire? (Cependant) il ne se mêla jamais aux affaires de la chrétienté et resta toujours chez lui occupé à ses études et autres devoirs; malgré cela, son nom seul, trop grand aux yeux de ses rivaux, lui attira beaucoup d'envieux et sa conduite toute opposée aux maximes du siècle augmentait de jour en jour le nombre de ses ennemis. Dans des écrits et ciculaires publiques plusieurs fois accablé d'injures, il ne s'en inquiétait pas et continuait tranquillement son genre de vie. Entendant parler des défections que les tortures arrachaient aux chrétiens il disait en soupirant: "Pauvres gens! quel dommage, ils rendent par là inutiles les travaux de la moitié de leur vie et reçoivent les supplices sans aucun salaire." Pris lui-même et conduit devant ses juges, il y donna en détail toute la suite de la Religion et ses pratiques, dans les supplices son visage ne changeait pas et il répondait avec calme et tranquillité, au point qu'un de ses ennemis les plus acharnés ayant par fonction assisté à la question disait en sortant à ceux qui étaient là: "A voir les autres coupables dans les interrogatoires, il semble qu'ils soient tous hors d'eux-mêmes, mais pour Kouen T'siel-sin i, il répond au milieu des tortures comme un homme tranquillement assis à un festin."
Un autre prisonnier non moins distingué était Tieng Augustin appelé Iak-tsong, descendant de l'illustre famille des Tieng de Ma-tsai dont nous avons souvent parlé et un des frères aînés de Tieng Jean appelé Iak-iong. D'un caractère très droit, il avait encore l'esprit juste, précis et profond. De bonne heure il s'appliqua fortement aux études, eut des succès dans les lettres, se plaisait auprès des personnes graves et instruites, se lia avec le fameux lettré Ni Ka-hoani et voulut prendre les leçons des plus célèbres lettrés alors existants. Regardant la littérature comme trop légère il renonça à cette partie, résolut dès lors à ne pas entrer dans les dignités dont la voie lui était d'ailleurs si facile, puis se tourna entièrement aux travaux de philosophie et de morale. Quelque temps il s'appliqua à la doctrine de Laotse pour essayer d'obtenir l'immortalité qu'elle promet, mais bientôt reconnaissant le peu de fondement et la vanité de cette secte, il l'abandonna entièrement. Ses travaux embrassèrent encore la médecine et il s'y acquit un nom distingué. Vers l'âge de vingt ans il devint veuf par la mort prématurée de son épouse; toute sa famille l'en plaignait beaucoup, lui seul se tourmentait peu de cet isolement où il se trouvait, ses pensées étaient plus haut. Toujours enfoncé dans l'étude il en perdait même la pensée de dormir et de manger, et on le vit quelquefois retiré dans un appartement, tout appliqué jour et nuit à ses recherches sans se troubler ou même percevoir du tapage, quoiqu'il fût, dont la maison retentissait. Quand la Religion se répandit en Corée, Augustin en fut de suite instruit, mais il ne se rendit pas et disait souvent que Ni Pieki sortait de la vraie voie, ce ne fut que 4 ou 5 ans plus tard qu'il céda aux sollicitations de la grâce et trouvant dans ses hésitations quelque chose semblable à la conduite de St. Augustin, il voulut prendre ce saint pour patron au baptême. Une fois qu'il eut commencé, il ne regarda plus en arrière et poursuivit sa route avec une ferveur et une persévérance au dessus de tout éloge. En 1791 alors que ses frères et tant d'autres de ses amis tombaient dans une misérable défection, il ne se démentit pas. Son père non seulement n'avait pas voulu pratiquer, mais encore décriait la Religion et la prohibait sévèrement à ses enfants. Augustin tout en continuant vis à vis de lui la pratique de tous les devoirs d'un fils pieux et dévoué, n'en continua pas moins tous ses exercices et supporta avec une patience inaltérable tous les mauvais traitements qu'il lui faisait subir. On rapporte qu'un jour ayant violemment gourmandé trois de ses fils à ce sujet, il finit par les lier ensemble, puis leur demanda comment ils se trouvaient. Augustin répondit qu'il se trouvait mieux que jamais pour bien pratiquer. Il avait eu de sa 1ère femme un fils nommé Charles qu'il instruisait avec soin de tous les devoirs de chrétien, puis cédant aux instances de sa famille il se remaria, mais voulait vivre dans la continence avec sa femme; les chrétiens l'en dissuadèrent et suivant leurs conseils il en eut plusieurs enfants dont nous aurons par la suite à nous entretenir.
Les affaires de 1795 et années suivantes n'ébranlèrent pas la constance d'Augustin, comme il resta aussi insensible aux clameurs continuelles de ses ennemis, il semblait ne pas en avoir connaissance. Voici ce que Hoang Alexandre dit de lui après l'avoir si bien connu "Ne s'occupant nullement des affaires du monde, il se plaisait surtout à l'étude de la philosophie morale; fut-il malade ou souffrant de la faim il semblait ne pas s'apercevoir de la douleur; un point de doctrine lui était-il obscur, perdant le goût des nourritures et la pensée du sommeil il ne cessait ses recherches qu'après l'avoir éclairci; à cheval ou en bateau il ne discontinuait pas ses profondes méditations; voyait-il des ignorants, il mettait tous ses soins à les instruire et malgré qu'il eût la langue desséchée ou le gosier souffrant, on ne voyait chez lui ni paresse ni ennui à le faire et parmi les plus grossiers il en est peu qu'il ne parvînt à instruire. Il composa en faveur de ces ignorants deux volumes en coréen, intitulés: 'Principaux articles de la Religion', y réunissant ce qu'il avait vu dans les livres religieux, y ajoutant quelque peu du sien et s'efforçant surtout d'être clair; aussi les simples et les enfants en ouvrant ce livre y voient tout clairement; aucun doute, aucune obscurité ne les arrête; c'est un livre précieux pour les nouveaux chrétiens de ces pays et le prêtre l'autorisa. Appliqué aux études pendant de longues années, c'était devenu chez lui une seconde nature. Aussi quand il rencontrait des chrétiens après les premiers compliments d'usage il parlait de suite de doctrine et pendant tout le jour on ne pouvait placer une parole inutile. Si on lui donnait la solution de quelque point qu'il n'avait pu pénétrer il en avait le coeur tout rempli de joie et en remerciait sans cesse. Si des gens tièdes ou stupides ne s'occupaient pas volontiers entendre les vérités du salut, il ne pouvait contenir sa peine et sa tristesse. On l'interrogeait sur toute espèce de points, et aussitôt semblant tirer quelque chose qu'il aurait eu en poche, il répondait sans trouble, discutant successivement sur tout et n'étant jamais à court. Ses discours étaient pleins d'ordre et sans confusions; son esprit étant admirablement précis il confortait la foi et échauffait la charité dans le coeur de tous. Sa vertu et sa réputation étaient moindres que celles du grand catéchiste T'soi Jean, mais ses talents et ses connaissances lui étaient supérieurs...."
De concert avec Kim Yosaphat, appelé Ken-sioun i, Augustin s'occupait de former une suite complète des vérités de la Religion, en classant par ordre, dans un seul ouvrage, ce qui est répandu dans beaucoup de livres et il en était à peine à moitié quand la persécuion les surprit. Il est bien à regretter que cet ouvrage n'ait pas été conservé, rédigé par des hommes du pays, il eût dû être plus à la portée des peuples de ce royaume, aucun vestige n'en reste. S'étant établi à la Capitale il reçut nombre de fois le prêtre dans sa maison et avait été nommé président de la confrérie dite Mieng-to. Au courant de toutes les menées des ennemis de la Religion, il voyait bien qu'il ne pouvait échapper à leurs coups, mais il le voyait avec calme et n'en continuait pas moins de se livrer aux bonnes oeuvres, son esprit et son coeur étant bien élevés au dessus de ce monde de boue. On rapporte que peu de temps avant sa prise, un de ses amis chrétien de la classe des interprètes étant venu le trouver, vit sur ses habits mille petits croix resplendissants de clarté et lui demanda ce que c'était. Augustin sans répondre directement détourna, dit-on, la conversation d'une manière adroite, mais les chrétiens y virent un présage des souffrances auxquelles il allait être en but. Le 11 de la 1ère lune de l'année Sin-iou, il revenait à cheval de Ma-tsai à la Capitale et rencontra sur la route un mandarin de la prison Keum-pou, qui déjà l'avait passé, quand Augustin se doutant qu'il allait pour le prendre, lui envoya son esclave pour savoir qui on voulait saisir, ajoutant que si c'était lui-même, il était inutile d'aller plus loin. En effet on allait pour le chercher, il fut donc pris dans ce même lieu et conduit à la prison de la Capitale. Dans les interrogatoires il fit noblement sa profession de foi, développa les vérités de la Religion devant ses juges et déclara nettement que se conserver furtivement la vie par le reniement de son Dieu, c'est ce qu'il ne pourrait jamais faire. De là on essaya cent fois de le faire changer, mais il ne répondit plus un mot et un mandarin dit à un de ses frères: "Votre frère est dur comme bois et pierre." Interrogé sur la fameuse caisse prise le 19 de la 1ère lune, il dit qu'elle lui appartenait, mais interrogé ensuite sur les lettres qu'elle contenait il n'ouvrit pas la bouche et resta muet. Le juge envoya donc à la maison d'Augustin et fit dire à sa famille: "Si votre père voulait seulement indiquer les noms et la demeure du prêtre, il n'y aurait pas de raison pour qu'il mourût, mais il préfère de violents supplices et ne veut ouvrir la bouche. Vous, sa famille, ses enfants, songez-y bien et pour sauver la vie de votre chef, avouez tout franchement." La famille répondit ignorer le tout. Augustin en faisant l'apologie de la Religion avait dit qu'on ne devait pas la prohiber, ses juges en prirent occasion pour dire qu'il se récriait contre l'ordre du roi et présentèrent l'accusation dans le sense de crime de lèse-Majesté. (Dans ce pays ceux qui osent dire que le roi se trompe ou qu'il a tort d'agir de telle ou telle manière, s'exposent à être poursuivis de rébellion, qu'on ne l'oublie pas, car c'est là tout le crime de rébellion qui fut imputé à Augustin.)
Les livres de Religion pris dans la caisse présentant le monde comme un ennemi qu'il faut vaincre, on prétendit encore que ce mot indiquait le gouvernement sous un nom couvert; et enfin par suite de quelques notes prétendues sur les actes du gouvernement contre la Religion ou plutôt par suite de la détermination ferme où on était de passer par-dessus toute jusice et de le traiter en rebelle, on le déclara tel et l'arrêt de mort fut prononcé avec les formalités voulues en pareil cas.
(Nous avons en main les écrits d'un noble qui voulut s'amuser à réfuter la Religion, il l'attaque par la doctrine chrétienne sur les ennemis le monde et la chair. "Regarder son corps, dit-il, comme un ennemi, c'est traiter d'ennemis les parents qui l'ont engendré. Regarder le monde comme un ennemi, c'est regarder le roi en ennemi." puis prenant occasion de paroles par lesquelles la virginité est louée et désignée comme un conseil de perfection, il ajoute, avec l'exagération qu'inspire toujours la mauvaise foi: "Enfin cette doctrine défend les rapports naturels de l'homme et de la femme, elle est donc en tout contraire à la nature." Telle est la sotte impudence avec laquelle on ose bien mentir, tout en prétendant faire une discussion raisonnée.)
Enfin était encore détenu Hong François Xavier, appelé Kio-man i (Hong de Nam-iang) descendant lui aussi d'une noble famille de Nam-in, depuis longtemps distinguée par les charges importantes qu'elle remplit de race en race dans le royaume. D'un caractère grave et réfléchi, joint aux connaissances qu'il avait acquises, il était considéré et respecté de tous et avait obtenu le grade de Bachelier dit tsin-sa. Quittant la Capitale il avait été s'établir au district de P'o-tsien à 8 ou 10 lieues de là, et bientôt après la Religion pénétrant en Corée il en fut aussitôt instruit, vraisemblablement par la famille des Kouen de Iang-keun dont il était allié. Il ne l'embrassa pas de suite, mais plus tard éclairé et pressé par son fils Léon, il en reconnut la vérité, se mit à la pratiquer avec ferveur, se fit baptiser par le P. Tsiou et ne se démentit pas un instant. Quoique dans une belle position, il n'eut plus dès lors de pensée pour les grandeurs humaines et cessa ses relations avec ses nombreux amis payens, sans s'inquiéter du blâme et des reproches que sa conduite lui attira. Tout appliqué à ses devoirs et à l'instruction de sa famille, il s'efforçait de réchauffer les tièdes et de propager la Religion et passait fréquemment ses soirées à exhorter les chrétiens du pays réunis chez lui à cet effet. On ne voit pas qu'il se soit jamais mêlé aux affaires de la Religion, toutefois ses ennemis voyaient d'une part en son nom une espèce de péché originel et de l'autre sa Religion leur était odieuse; aussi en 1801 prévoyant bien être recherché, il s'était caché quelques jours, puis sachant qu'il ne pourrait longtemps éviter il prit son parti et retournait chez lui en compagnie de son fils pour y attendre l'ordre de Dieu quand rencontré sur la route par les satellites il fut saisi et conduit à la Capitale; il ne perdit pas son calme et sa tranquillité et subit sans faiblesse les supplices qui lui furent infligés, et la sentance de mort ne se fit pas attendre.
Le procès de ces hommes importants ne devait pas durer longtemps, leur sort était décidé à l'avance et la rage de leurs ennemis ne pouvait souffrir de retard. Il reste peu de détails sur les circonstances de leurs interrogatoires et supplices, mais les pièces détachées des actes civils que nous avons entre les mains les portent comme accusés d'être sectateurs d'une religion étrangère et dépravée, puis pour Tieng Augustin seulement, d'être en outre rebelle aux ordres du roi qui l'avaient prohibée. Dès avant la fin des débats, le 21 de la 2de lune, Kouen Ambroise terminait sa carrière à l'âge de 66 ans tué sous les coups au rapport des uns, et seulement des suites de ses blessures selon d'autres. Quelques-uns prétendent même qu'il rendit le dernier soupir en dehors de la prison, circonstance qui leur fait jeter quelque doute sur sa constance, et est en elle-même de nature à le faire, mais simple soupçon qui n'est appuyé d'ailleurs sur aucun document, ne nous permet pas d'entacher la mémoire de ce chrétien dont les sentiments et la conduite ont été si fermes pendant tant d'années et jusque dans les supplices. Les principaux chefs furent aussitôt condamnés à mort et le 28 de la 2de lune (8 avril 1801) montèrent sur l'échafaud en dehors de la petite porte de l'ouest: Ni Pierre dit Seng-houn i, T'soi Thomas dit P'il-kong, T'soi Jean dit T'siang-hien, Tieng Augustin dit Iak-tsong, Hong Luc dit Nak-min, et Hong François Xavier dit Kio-man i.
En même temps Tieng Iak-iong et Tieng Iak-tsien, frères d'Augustin qui s'étaient rachetés par de lâches et nombreuses apostasies (Tieng Iak-iong dit encore avoir apostasié lors de sa prise, ainsi que Ni Pierre et Ni Ka-hoan i) furent envoyés en exil; et nous voyons le ministre Ni Ka-hoan i, frappé de la même sentence de mort comme chef des chrétiens, enfermé dans une chambre sans nourriture et y mourir apès sept jours d'une lente agonie. Ainsi périt cet homme remarquable, immolé à la fureur de ses envieux sous prétexte de Religion, mais toutes nos recherches n'ont abouti qu'à nous convaincre de plus en plus que jamais il ne pratiqua et jusqu'à la fin nous ne trouvons aucune trace de conversion qui puisse nous faire espérer qu'il ait trouvé grâce devant Dieu, dont l'existence lui fut toutefois connue, ainsi que la vérité de la Religion. (On apprendra avec satisfaction qu'un certain nombre de descendants de ce ministre pratiquent aujourd'hui.) Dilexirunt magis gloriam hominum quam gloriam Dei. Nos pensées se reportent d'une manière bien plus triste encore sur Ni Pierre que nous avons vu introduire la Religion dans ce pays-ci et l'y propager avec zèle, ses nombreuses défections et les écrits dont il les accompagna pour se laver aux yeux du public nous ont déjà souvent percé le coeur, aujourd'hui nous le voyons bien porter sa tête sur l'échafaud, mais qui ne pâlira en apprenant qu'après apostasie, aucune trace de rétraction, aucun vestige de retour vers son Dieu n'a pu être rencontré. O profondeur des jugements de Dieu! Non multi potentes, non multi nobiles!! Il avait 45 ans. Après 3 jours, son corps fut reporté chez lui, personne n'osa aller y faire de visite de condoléance, son ami et allié Sim Iou fut le seul, il y alla en deuil et pleura sur le corps, ce qui excita des murmures. (Dans la nombreuse parenté de Ni Pierre on compte très peu de pratiquants, bien plus la plupart de ses parents sont jusqu'à ce jour fort hostiles à la Religion. De 3 fils qu'il laissa, deux branches seulement pratiquent aujourd'hui et nous aurons à en faire mention dans la suite de cette histoire.)
Mais détournons nos regards de ces lamentables tableaux et joignant nos concerts à ceux de la cour céleste qui vient de recevoir en triomphe nos cinq glorieux martyrs, édifions-nous des quelques détails qui nous ont été conservés sur ces morts précieuses. C'est d'abord T'soi Thomas dont le caractère si droit et si franc avait, comme nous avons vu, excité les sympathies du feu roi et les nôtres aussi d'une manière si admirable. Ses dernières tortures furent supportées sans aucune marque de faiblesse. Le bourreau peu expérimenté ne lui ayant pas tranché la tête du premier coup, Thomas porta sa main sur sa blessure, la retire toute ensanglantée, la fixe attentivement et dit avec joie: Précieux sang! (oui, précieux sang en effet qui était le prix d'une éternelle félicité) et au même instant un second coup ouvre au généreux martyr les portes de la céleste patrie.
C'est ensuite le zélé catéchiste T'soi Jean. Dans les derniers interrogatoires il eut au tribunal des voleurs un moment de faiblesse, mais la grâce a pris le dessus, et de suite au tribunal des Crimes il se rétracte franchement et a l'audace, disent les actes civils, de composer alors par écrit et de présenter une apologie de la Religion et c'est sur cette noble confession qu'il va gaiement présenter sa tête au bourreau, voilà l'Apôtre. Il était âgé de 43 ans.
C'est encore Hong François Xavier sur lequel aucun détail ne nous est parvenu, mais dont un bel éloge fut tracé par ses juges eux-mêmes en disant: Qu'il s'était invariablement montré décidé à mourir de bon coeur pour sa Religion. Il avait 64 ans.
Suivons aussi Hong Luc, cet homme élevé en dignités qui plusieurs fois pour se mettre à l'abri des attaques, avait renié de bouche sa Religion sans toutefois perdre ses convictions ni abandonner la pratique. Ses apostasies précédentes lui firent faire grâce de la vie, et condamné à l'exil il reçut sur les jambes la bastonnade en usage en pareilles circonstances. C'est alors que la grâce reprenant le dessus et la foi toute sa vivacité, réveillèrent cette âme aux sentiments généreux. Il relève aussitôt la tête et dit à ses juges: "Tout ce que j'ai dit par le passé n'était que pour conserver furtivement mon existence; maintenant que je suis encore battu et déshonoré j'aime mieux vous dire tout ce que j'ai sur le coeur et mourir franchement. Le Dieu que je sers, c'est le Souverain Maître (Seigneur du Ciel) de la terre, des esprits, des hommes et de toutes choses. Ni Matthieu (nom du P. Matthieu Ricci) et les autres missionnaires sont des hommes admirables de doctrine et de sainteté, toutes leurs paroles sont vraies, rien de faux chez eux. Je désire donc maintenant mourir pour Dieu et par là confesser sa vérité." Les premiers ministres qui présidaient à la séance furent aussi étonnés que piqués des paroles du confesseur de la foi et ce fut une grande rumeur dans toute l'assemblée. Un exprès fut immédiatement envoyé à la régente pour l'informer de ce fait et la reine irritée donna ordre de le traiter d'une manière extrême, ce qui fut fait et on peut se faire une idée de l'état où son corps dut alors être réduit. Hong Luc renvoyé ensuite à la prison disait en lavant le sang découlant de ses blessures: Voilà qui fait bien et met le coeur à l'aise. Ces paroles ont été conservées par un témoin. S'il faut en croire sa sentence Luc aurait dit aussi souffrir avec joie ses supplices pour expier ses anciennes apostasies dont ils étaient la juste punition. Quand il monta sur le charriot pour aller au supplice il avait un air de bonheur, tenait les yeux élevés en haut et exhortait le peuple, il mourut ainsi à l'âge de 51 ans. L'auteur contemporain de sa notice ajoute une réflexion bien digne d'attention. "Après avoir été fermes au commencement, dit-il, beaucoup fléchissaient à la fin; se relever après la chute et devenir martyr n'est pas chose commune ni facile. On dit que Hong Luc récitait tous les jours son rosaire et que même au milieu de ses fonctions publiques ou du concours d'hôtes et amis, il ne l'omit jamais un seul jour, serait-ce qui lui a mérité cette grâce extraordinaire?" On est aussi heureux que surpris de rencontrer cette réflexion dans la bouche d'un néophyte et elle nous montre que les sentiments des chrétiens sont les mêmes par toute la terre, gloire donc et honneur à la bonne Marie qui jamais n'abandonne pas ses serviteurs.
Admirons enfin les derniers moments de Tieng Augustin. La noblesse de son extraction, ses talents remarquables et ses vertus éclatantes lui avaient acquis un grand nom qui réhausse encore sa glorieuse confession. Quand il monta sur le charriot pour aller au supplice l'air de son visage était calme et rayonnant de lumière. Pendant le trajet il appelle le conducteur et lui dit avoir soif. Les assistants le réprimandèrent fortement, mais il répondit: "C'est pour imiter un grand modèle que je demande à boire."
Infatigable prédicateur jusque dans la prison et à la barre de ses juges, le théâtre de son martyr devait encore être pour lui une chaire bien éloquente. Arrivé là il s'asseoit en face des instruments de supplice qu'il contemple avec bonheur, puis élevant la voix de manière à être entendu de tout le peuple environnant, il s'écrie: "Le Seigneur suprême du Ciel et de la terre et de toutes choses, existant par lui-même et infiniment adorable, vous a créés et vous conserve. Tous, vous devez vous convertir à votre premier principe, n'en faites pas follement un sujet de mépris et de raillerie. Ce que vous regardez comme une honte et un opprobre pour moi va être bientôt un sujet de ma gloire." On l'interrompt en l'avertissant de mettre sa tête sous l'instrument du supplice, il se place de manière à voir le Ciel. "Il vaut mieux, dit-il, mourir en regardant le Ciel qu'en regardant la terre." Le bourreau tremblait et n'osait frapper, mais enfin la crainte du chatiment l'emportant sur l'admiration, il donne le coup. La tête n'était coupée qu'à moitié, Augustin se redresse, fait extensiblement un grand signe de croix et se replace paisiblement, la tête tomba sous un nouveau coup et l'âme du héros chrétien entre triomphante à la cour du roi des martyrs, il avait 42 ans. Ainsi finit un des hommes les plus remarquables et des plus beaux martyrs que la Religion ait compté dans ce pays. Admiré de tous, son souvenir est encore présent à beaucoup jusqu'à nos jours. Par une distinction que l'on a peine à s'expliquer, Augustin fut traité sur un pied plus sévère que ses autres compagnons; il est le seul dont les biens furent alors confisqués par ordre spécial de la cour sous prétexte de rébellion aux ordres du roi, sans toutefois l'avoir jamais accusé d'aucun complot. "C'est, dit-on, une précaution prise par ses ennemis pour rendre plus difficile la réintégration de sa famille et lui ôter (rendre impossible) toute idée de vengeance possible; la prise de la caisse et sans doute la noblesse et la fermeté constante de ses paroles en fournirent l'occasion; quoiqu'il en soit, c'est à nos yeux une distinction honorable pour notre martyr et de quel nouvel éclat ne brillera-t-il pas quand nous verrons plus tard presque toute sa famille partager sa palme. Le corps fut recueilli et enterré au pays natal d'Augustin et ses parents peu ou point chrétiens nous ont assuré que plusieurs guérisons miraculeuses s'étaient opérées sur son tombeau.
(1) Le pied dont il est parlé ici n'est pas si grand que l'ancien pied français. C'est du reste un terme usité ici pour désigner un taille extraordinaire.
(1) par l'amour des sciences et se rendant de suite à l'évidence de ses principes. Ici comme ailleurs la Religion est toujours la fidèle compagne de la science qu'elle dirige et perfectionne, comme elle est elle-même soutenue humainement partout.)
* Détails à la vie de Tan oueni.
한 국 천 주 교 회 창 립 사 연 구 원
(朝鮮에 있어서 천주교의 起源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을 우리가 얻어낸 자료들은 鄭若鏞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丁若鏞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는데,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관계하였으며 거의 모든 천주교 지도자들과 인척이거나 친구 사이였다. 학문과 관직에 있어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천주교를 저버리는 나약함을 보였음에도 1801년 유배를 면치 못했다. 수년 후에 赦免을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심행위와 모범적인 苦行의 실천에 오랫 동안 온 힘을 기울였으며, 지극히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보이며 죽었다. 한 편으로 그는 天主敎에 관한 몇 가지 글을 남겼는데, 우리가 한 일은 대단히 잘 쓰여진,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나 짧은 그의 기록들을 단지 옮겨 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朝鮮王國에 天主敎의 胎動을 일으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는 字를 德祖라 하고 號를 曠菴이라 하는 李檗이었다. (李)檗은 慶州 李씨로, 高麗朝 때부터 이미 지위가 높았던 그의 조상들 가운데에는 학문이나 벼슬로 뛰어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의 家門은 증조부 이후로 武官職에 종사하였고, 이 새로운 부문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오고 있었다. 檗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資質을 갖추고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은 武官 벼슬을 얻는 데 필요한 활쏘기, 말타기 등의 훈련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檗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끈질기게 거부하였다. 이 일로 그는 부친의 애정을 잃었고, 부친은 지나치게 고집이 센 그의 성격을 가리키는 ‘벽’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자라면서 檗은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해졌다.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활달하고 잘 생긴 그의 風采는 당당하였고 당연히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의 재주도 이처럼 뛰어난 外樣에 지지 않을 정도여서, 유창한 言辯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견줄 만하였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智力을 타고난 그는 오직 事物의 理致와 學說의 참된 토대만을 추구하였다. 언제나 事物의 根本을 파고드는 데 몰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經典을 공부함에 있어 그 깊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처럼 좋은 소질은 개인적으로는 빛나는 미래를 그에게 보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고, 자신의 일에 성공을 기하기 위하여 학문에 있어 자신을 도와주고 이끌어주고자 하는 모든 지식인들과 交分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관습이나 예의에 거의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고귀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직업적인 학자들을 구별시켜주는 벼슬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이상이 당시 자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李檗의 모습이다.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鄭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자 어떤 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도처의 길은 눈에 덮여있었고, 거리는 백 리도 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들이 학문과 지혜를 그토록 갈망하는 열렬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길을 떠났고, 험난한 길들을 나아가면서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지는 해도 그가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으며,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에 다달았다. 그러나 자신이 절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모든 승려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山中의 외딴 건물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인간본성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 위에 偉人들의 倫理經典들을 연구하였고, 유럽사람이 漢文으로 쓴 철학서적과 수학서적 몇 권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마침내 연구와 토론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몇 권의 초보적인 서적에까지(이 책들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미치게 되었다. 이 서적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당시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攝理,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七罪宗을 그에 상대되는 일곱가지 德으로 물리치는 修行法 등을 다룬 몇 권의 槪論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中國經典들의 막연하고 모호한 학설에 익숙해있었어도 眞理를 渴望하던 그 곧은 사람들은 우리 聖敎의 기초원리를 검토하자마자 그 敎理에 담긴 위대하고 아름답고 확실한 모든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책이 없었으므로 이 교리를 더이상 깊이 연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즉시 감동되었고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렇듯 眞理는 언제나 그 標識를 同伴하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진리의 빛은 이를 찾는 모든 이들의 눈에 빛나고,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리가 행복의 싹처럼 심어주는 느낌에 무감각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 나라에서 학문에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된 것을 보자니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가!) 이리하여 지혜를 추구하던 우리 주인공들은 聖敎에 젖어들게 되었고, 그 명확한 원리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黙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영혼 수련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를 지켰다. 그들이 이러한 수련을 얼마동안이나 지속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비리에 이를 행하였다. 그런데 뒤이은 사실들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그들중 대부분은 이를 오래 지키지는 못한 듯하다.
檗의 열렬한 마음에 풍요로운 씨앗이 심어졌다. 이러한 시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는 느끼고 있었고, 그의 모든 생각과 시선은 시작된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中國을 향해 있었다. 이러한 조바심 가운데 몇 년이 흘렀고, 그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바친 노력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 1783년 초여름, 4월 보름날, 누이의 忌日을 맞아 마재 丁씨네에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檗은 丁氏 두 형제 若銓, 若鏞과 함께 배에 올랐다. 한양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철학적 대화와 연구였다. 조선의 책 몇 권을 검토한 다음, 그들의 정신은 서양인들의 學說에 이르렀다. 그들은 天地와 인간의 창조,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그리고 來世에 천당과 지옥에서 받는 賞罰 등의 道理에 대해 차례로 자세히 토론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 道理의 참됨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기분좋은 진리를 처음 듣는 여행객들도 모두 놀라고 기뻐하였다. 그 무렵에 이런 토론모임이 되풀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檗의 끓는 열정이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西學 서적들에 대해서, 그리고 또한 천주교에 관한 몇 권의 서적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보았거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문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北京에 연례적으로 가던 사절단을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천주교 敎理의 초보적 개념들이 널리 유포되어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의 서적들은 聖敎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天主를 찾는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天主께서는 그해를 곧은 영혼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는 해로 삼으셨다. 그해 1783년 겨울 李東郁이 北京 朝廷에 가는 書狀官으로 임명되었고, 아들 李承薰도 따라가게 되었다. 장차 여러 해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될 이 대단한 인물에 대해 소개할 시점이 지금이다. 李承薰은 字가 子述이고, 平昌 李氏 양반 가문 출신으로, 조상들은 文官의 要職을 자주 맡았었으며, 그의 家門은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1756년(丙子年)에 태어난 李承薰은 열 살때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열아홉, 스무 살에는 벌써 온 나라에 뛰어난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옛 聖賢들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李承薰은 학문과 品行이 더 나은 사람들과 교제하였으며, 學識을 높이는 일 뿐 아니라 品性을 가다듬는 데에도 애를 썼다. 李檗과도 아는 사이였지만 취향이나 성품이나 공부의 차이로 인해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지는 못하였다. 25세 되던 1780년(庚子年)에 進士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李檗은 承薰이 北京使節團에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承薰을 찾아갔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李承薰에게 이런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네가 北京에 다녀오게 된 것은 참된 道理를 알도록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호의 기회일세. 萬物의 創造主이신 上帝를 恭敬하는 데 대한, 그리고 여러 聖人들에 대한 道理는 西歐人들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네. 이 道理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心性을 바로잡을 수도 없고, 事物의 원리를 깊이 알 수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과 백성의 여러 가지 의무를 어찌 알겠는가? 그것 없이 생활의 원칙도 없고, 天地의 창조, 天體의 물리적 질서와 규칙적 運行, 兩極의 질서 등을 우리가 알지 못하네. 天使와 惡靈의 구별, 세상의 始初와 終末, 靈肉의 결합, 善惡의 理致, 죄를 赦하기 위한 天主聖子의 降生, 善人에 대한 천당 報償과 惡人에 대한 地獄罰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네.” 천주교 서적을 아직 보지 못했던 李承薰은 이러한 말에 크게 놀라고 감탄하면서 그런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는 천주의 존재와 標徵에 대한 초보서적들과 <七克>을 훑어보고 난 뒤, 행복감에 사로잡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檗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물었다. 檗은 承薰에게 이렇게 말을 계속하였다.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표시일세.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生死에 관한,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承薰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마치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으며, 공동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약속하였다. 檗이 한 말을 살펴보면, 檗은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똑같이 목말라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지 않은 말 속에서도, 그의 智力은 이미 천주교를 세계와 사회의 토대로 이해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이번 일이 그에게는 오직 唯一無二하게 긴요한 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가 곧 시작하게 될 大業, 즉 처음 천주교의 씨를 전파하는 大業을 天主의 恩寵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벌써 준비시키신 것이다.
承薰이 드디어 北京으로 떠났다. 北京에 도착하자 南堂을 찾아가 통(湯) 알렉산델 主敎를 만나 가르침을 청했다. (바로 알렉산델 구베아 主敎로서, 프란치스코회 제 3회원이었으며, 中國 儀禮에 관한 敎皇令을 北京 敎區가 따르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 분이다. 북경에서 감금생활을 할 때 알게된 유명한 Caradre de St. Martin 주교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중국이름이 湯인 구베아 주교는 중국이 자랑할 가장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요, 가장 위대한 주교 가운데 한 분이었으며, 포르투갈 國籍이었다.) 그는 또 索德超라는 서양사람을 만났는데, 나이가 90이 넘었는데도 아직 건강하였으며 태도가 상냥하였다. 그외에 梁이라는 이름의 젊은 사람도 만났다. 네 곳의 성당에 오륙십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열심히 천주교를 공부하여 세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고, (아마도) 梁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때, 조선인 가운데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동포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조선천주교회의 주춧돌이라는 의미에서 洗禮名을 베드로라 하였다. 아마 그 때가 1784년 초였을 것이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이 많은 책과 십자가와 像本 등과 몇 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주었는데, 이 물건들은 나중에 王宮으로 보내졌다. 1784년(甲辰年) 봄, 承薰은 이 모든 물건들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가장 급한 일은 檗에게 책, 십자가, 像本 등을 보내는 것이었다. 檗은 초조함에 발을 구르며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책들을 받자마자 집을 한 채 빌려 꼼짝도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목타는 사람이 샘물을 만난 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영혼이 말그대로 배고프고 목말라하던 진리를 찾아 깊이 탐구하는 데 얼마동안 푹 빠져있었다.
다른 모든 생각은 멀리 내던져지고, 완전히 새로운 靈的 生命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천주교와 迷信排斥에 대한 새로운 증거와, 七聖事에 대한 解說, 基本敎理書, 福音書들에 대한 註釋, 매일매일 기념하는 聖人들의 行蹟, 그리고 꽤 완벽한 祈禱書 등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야 그는 천주교의 전체 모습과 상세한 내용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오직 온 나라를 更生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얼마간 연구한 다음 承薰과 丁若銓, 若鏞 두 형제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道理이고, 참된 길이 여기에 있네. 위대한 천주께서는 우리나라 萬百姓을 불쌍히 여기셔서, 세상 救贖의 善業에 널리 同參케 하고 싶어하시네. 이는 천주의 명령이니, 우리는 應하지 않을 수 없네. 천주교를 널리 傳播하고, 온 세상에 福音을 전해야 하네. 온 세상을 십자가 깃발 아래 불러모으려 十字軍 遠征을 외치던 隱者 베드로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 길로 그는 몇몇 친구들 집에 찾아갔는데, 이들은 中人계급이었지만 모두가 學識과 德行으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그 친구들 대부분은 설교를 듣자마자 즉시 檗의 활기있고 예리한 말에 굴복하였다. 이들은 崔昌顯, 崔仁吉, 金宗敎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를 통해 四方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檗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로운 종교에 관한 소문은 금방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모든 大事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반대자들이 나타났다. 많은 양반들과 선비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儒敎에 매여있고 젖어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교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뺏어가리라는 것을 잘 알았으며, 자신들이 지켜오던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또 바른 眼目을 가진 몇몇 사람은, 새 종교에 있어 얼핏 보기에 나쁜 길로 이끄는 황당무계한 迷信이라고 생각되어질 만한 부분이 소개되지 않도록 힘을 쏟았다. 한 편 모든 善의 적들은 眞理 때문에 자기 쪽이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자신의 정복자에 대한 崇拜가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편안한 눈길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께서 통치하는 데 반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李家煥은 조선에서 가장 지체높은 가문 가운데 하나요, 당시에도 여러명의 유명한 학자들로 빛나던 집안 출신으로,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학식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벌써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모든 계층에 천주교가 신속히 전파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이거 아주 큰 일이로다. 이 외국교리가 비록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으나, 우리 선비들의 道는 아니다. 李檗이 이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니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하리라.” 討論 日時를 정하고, 李家煥이 李檗의 집으로 나아가니, 그 굉장한 論戰을 구경하려고 양쪽의 친구들과 호기심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우선 李家煥이 자신이 誤謬라고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檗을 되돌리고자 시도하였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李檗은 그의 말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는 상대방의 주장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논리 전체를 무너뜨려 분쇄하였고, 外敎人 학자는 버티어보려고 애썼으나 헛일이었다. 檗의 명쾌하고 명석한 발언은 사방에 빛을 내뿜었다. 항상 前後가 일치하고 이치에 부합하는 한 편, 더욱 강력한 증거를 내세워 점점 더 드러나게 하기를 계속하였다. 상대방의 논리를 모두 뒤집어 엎는 李檗의 明哲함은 태양처럼 빛났다. 그의 공격은 하나하나 적중하였으며, 바람처럼 몰아치고 날카로운 칼로 가르는 듯 하였다.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드문 壯觀을 맛보았다. 그것은 難澁한 중국 학설들로 이루어진 구태의연한 學派의 우두머리가 공번된 眞理(福音의 光明)의 겸손한 守護者와 벌이는 싸움이었다. 사람들은 뛰어난 두 학자가 치열한 싸움을 갖가지 방법으로 번갈아가며 전개하는 것을, 그리고 온갖 기교와 재능을 동원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眞理의 支柱인 한 쪽은 조금도 휘어짐이 없이 꼿꼿한데, 다른 한 쪽은 그 柔軟性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막을 갑옷이 없어 끊임없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듯하다가 곧 또다시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천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은근히 몸을 떨었고, 반면에 천주께 충실한 마음들은 기뻐 두근거리고 행복한 기분으로 설레였다. 이렇게 유례없는 무대에서 승리를 거둔 신앙은 새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진실되고 곧은 영혼들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檗이 상대한 무서운 적을 완전히 항복시키기 위해서 하루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조목조목 거듭된 토론은 사흘간 계속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새로운 교리의 아름다움과 넓음과 단단함이 더욱더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지치고 무너지고 굴복한 李家煥은 더이상 내놓을 거리가 없어지자 이렇게 기억할 만한 말을 하였다. “이 道理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터인 즉, 어찌할꼬?” 그는 물러나 돌아가서 이후로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이상 입을 여는 법이 없이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유명한 論戰의 모든 이익과 영예는 檗에게 돌아갔다. 眞理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나가 도처에서 새 추종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의 확장과 소문난 토론회의 결과를 접하고 또다른 적수가 나타나, 직접 이 종교의 원리를 들어보고 자기도 그 守護者들과 論爭을 벌여보고자 하였다. 그 사람은 李基讓으로, 당대에 두드러진 博識과 지체높은 가문으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 거둔 성공들보다도 진리에 의해 더 힘을 얻은 檗은 對面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기꺼이 討論을 받아들였다. 그는 論敵 앞에서 天地의 이치, 세계와 그 모든 부분들의 아름다운 秩序, 四元素의 調和, 그리고 天主 攝理의 여러 가지 원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또 인간 영혼과 그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한 교리, 각 사람의 이승에서의 행실과 來世에서 받게되는 賞罰 사이의 놀라운 일치를 설명하고, 그리스도교의 명백한 진리가 굳건하고 손상시킬 수 없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한 마디로 직접 만져보도록 해주었다. 李基讓은 토론을 더 지속할 수 없었고, 감히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믿는 듯 하였으나 이를 솔직히 고백하고 실천에 옮길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그가 물러간 뒤 檗은 두 학자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두 李씨는 대답할 말이 전혀 없으니 토론을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저들을 신용할 수 없다. 기대할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檗은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福音이 신속히 전파되는 것을 조만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이 거룩한 사업을 확장시키고 지속시키기 위하여 檗은, 그 학문과 명성으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여론을 휘어잡을 만한 인물 몇 사람을 토대로 삼으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거론된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기대하지 않고, 揚根의 한 집안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 집안은 신앙의 빛을 맨처음 받았으면서도 그 이후로 이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權씨 집안이었다. 이 이야기의 처음부분에서 소개된 바 있는 權씨 집안은 高麗 때부터 높은 벼슬을 지냈고, 왕조가 바뀔 때 새 임금 쪽에 가담한 가장 충성스러운 가문들 가운데 포함되었으며, 이후 文章이나 벼슬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을 계속 배출하였다. 그런데 그때 號를 鹿菴이라 하는 權哲身이 있었는데, 다섯 형제의 맏이로서 모두가 그 학문과 德行으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세째인 稷菴 權日身도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있었다. 이 집안은, 친척 중에도 뛰어난 사람이 많았을 뿐 아니라, 이들 곁에서 학문과 德望의 滋養分을 얻고자 전국 각처에서 몰려온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檗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끌어들이도록 노력하여 이 나라 천주교의 뿌리와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같은 해 甲辰年(1784) (음력) 9월에 檗은 말을 타고 揚根 고을 감산에 있는 그 집으로 갔다. 도착하자 마자 천주교 전반을 깊이 검토하고 폭넓게 토론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眞理가 환한 빛을 발하면서 드러났다. 나중에 本名을 암브로시오라 한 맏이 哲身은 나이가 쉬흔 가량으로, 중국 經書의 哲學과 倫理를 깊이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의 빛에 저항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엄청난 연구작업의 성과를 한 순간에 저버릴 결심을 할 수 없었고, 檗은 당장 그에게서 열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얼마 후에야 신앙을 실천할 결심을 하였는데, 일단 시작하고 나서는 변함없는 신앙심과 뛰어난 행동으로 빛을 발하여, 나중에 보게되는 바와 같이 영예의 冠을 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日身은 檗이 이 집에 올 때 기대했던 바대로, 대단한 열심으로 즉각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두 눈은 빛나는 열의로 가득찼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자 마자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어서 자기 집안 모든 남녀 식구들을 가르쳤고, 또한 친구와 친지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하였는데, 그의 학문과 덕행과 이름에서 비롯된 권위로 인해 전적인 성공이 보장되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열의와 열성을 바쳤던지, 揚根 고을은 가히 조선 천주교의 搖籃으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가 앞서 본 바대로 北京에서 영세했던 李承薰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李檗과 權日身에게 세례를 준 것도 분명히 이 무렵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건 완벽하고자 하였으므로, 本名도 숙고하여 재치있게 선택하였다. 檗은, 한 편으로 그 높은 생각과 고귀한 행동을 볼 때,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천주교 연구를 도처에서 시작하게 하고 그리하여 이 나라에 救世主가 오시는 길을 마련함에 있어 그의 열정이 그로 하여금 맡도록 한 역할을 볼 때, 두 사람의 使命에 어느 정도 타당한 유사성을 찾아본 듯, 本名을 洗者 요한이라 정하였다. 日身은 현명한 정신과 더불어 열렬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동포들에게 복음을 널리 전하는 데 몸바치고자 하였으므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聖人을 主保로 모셔, 동양 전체에 그 음성이 울려퍼졌던 이 성인을 表樣으로 삼아 따르려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 이름으로 그를 부를 것이다.
이 세 뛰어난 인물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고귀한 길로 꾸준히 나아갔으며, 신앙을 받아들일 만한 듯한 사람들의 눈에 신앙의 빛이 빛나게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朝廷으로부터 금지 조치가 없었고, 모든 것이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반대자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이 나라의 정신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진리가 싸움을 거치지 않고는 확산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뻔히 보이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온갖 종류의 폭력이 염려될 만하였다. 어찌 되었건 각자는 자신의 계획을 밀고나갔고, 신앙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때까지 진정한 敎人들은 주로 한양과 그에 인접한 지방에 몰려있었다. 그러나 攝理의 때가, 즉 숨겨져만 있을 수 없는 그 빛이 더욱 먼 지방에까지 전해져야만 할 때가, 그리고 수많은 장님들의 눈을 뜨게 하여 온순한 상태로 救世主 救贖者의 발아래 데려갈 때가 와있었다.)
특히 權 사베리오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자신이 직접 한 일이건, 제자들이 한 일이건,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나중에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本名으로 불리게 될 이단원 또는 李存昌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다.
李 루도비코는 정직한 농부 집안 출신으로, 內浦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넓은 평야 옆에 자리한 충청도 천안 여사울 마을에 살고 있었다. (內浦는 바닷물이 밀려드는 수많은 운하가 지나가는 드넓은 평야인데, 한양의 곳간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비옥한 穀倉으로 유명하다. 潮水에 대한 서술 참조)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자연의 비밀을 넓고 깊게 공부해보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어떤 위대한 스승 곁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자기 고장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權씨 家門의 名聲에 마음이 끌려, 權씨 형제를 찾아가 그들의 제자가 되었다. 權 사베리오는 이 제자의 훌륭한 정신과 뛰어난 자질이 마음에 들어 보살펴주고 있던 중 서양 교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제자에게 천주교를 전해주었고, 이 제자를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뿐 아니라 특히 그 모든 계율을 실제 실천하도록 단단히 교육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이 일에서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된 李 루도비코는 자기 가족과 친지들을 가르치고 온 힘을 다해 천주교를 전파할 사명을 스승으로부터 부여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스승의 이러한 지시에 충실히 따랐던 李 루도비코는 곧바로 자기 가족과 주변사람들과 수많은 親知들을 입교시켰는데, 이들은 그의 학식과 덕행에 끌려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이었으며, 루도비코는 이들의 정신과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權 사베리오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던 유명한 內浦지방 천주교회는 조선 교회 안에서 항상 커다란 빛을 발하여 왔는데, 이렇게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어, 뒤에 우리가 보게되는 바대로 빛나는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전라도 지방에 천주교를 전하고, 이 지방 천주교회를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운 영예도 權 사베리오에게 돌아갔다. 아우구스티노라 불리는 柳恒儉은 그 집안이 지체가 썩 높지는 않은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 지방에서는 상당한 평판을 누리고 있었고, 많은 재산으로 해서 꽤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이 지방 중심지인 全州에서 15리 정도되는 초남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글공부를 하여 능력있는 지식인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 새 종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또 이 종교를 믿는다고 알려진 유명한 인물들의 명성에 이끌려, 자기가 직접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름만으로도 그에게는 진리를 보장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천주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權씨 집안을 찾아갔다.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듣자 마자 그의 곧은 영혼은 승복하였고, 즉시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 곧바로 많은 수의 가족을 가르쳤고, 또한 친구와 친지와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열성 덕분에 그의 집안은 이 지방 천주교의 뿌리라고 할 만한데, 남쪽에 위치한 이 지방에서는 그 이후로 열심한 교인들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또 전라도 珍山 고을에 살던 尹持忠 바오로도 같은 시기에 金範禹를 통해 신앙을 전해받았는데, 金範禹에 대해서는 이제 곧 이야기할 것이다. 천주교 신앙의 용맹한 대표선수 尹持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미루었다가 나중에 그의 순교행적을 그릴 때 함께 하도록 하겠다. 한 편, 그는 적어도 生前에 자기 고장 傳敎에 큰 몫을 하지는 못했다.
좀 가까운 지역에서는 丁씨 집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若銓과 若鏞 두 형제가 檗과 함께 초기 講學會에 참여했음은 앞에서 보았다. 이 丁씨 집안은 本이 羅州이며, 경기도 廣州의 마재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장과 벼슬로 계속 명성을 드높여온 이 집안은, 당시에도 이름에 권위가 있으면서 천주교 활동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또한 양반인 봉산(豊山?) 洪씨 洪樂敏 루가 집안도 있는데, 당시 두 형제가 官職에 있었다. 이들은 그 즈음이나 또는 얼마 뒤에 李承薰에게 교리를 배웠다. 中人계급은 처음부터 가장 크게 참여했는데, 本名이 마티아인 崔仁吉은 譯官 집안 출신으로 李檗에게서 배웠고, 宮中樂士 집안 출신 池창홍 사바는 제발로 찾아가 교리를 배웠다. 성품이 순박하고 공손하며 부지런하여, 천주교를 잘 검토해본 다음에는 즉시 天主를 공경하는데 熱心 專念하였고, 항상 天主를 위해 죽기를 소망하였다. 또한 위험과 궁핍과 고통에 쉽게 몸을 내놓았고 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참아내었다. 다음은 冠泉이라는 號로 더 잘 알려진 崔昌顯 요한인데, 譯官 집안 출신으로, 역시 李檗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활동적이고 지칠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천주교에 대하여 듣자 마자 신앙을 받아들이고, 천주교 서적들을 전부 자기 손으로 직접 筆寫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종교서적들을 아주 많이 筆寫하였으므로, 이 방면에 어찌나 명성이 높았던지, 敎人들 중에 책을 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책방에 가듯이 그에게 찾아갈 정도였다. 모든 主日과 祝日을 위한 福音 解釋도 그가 조선말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그는 막 태어나는 교회를 위해 막대한 봉사를 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방금 소개한 이 사람들은 한양에 살았고 더 자주 등장하는 만큼, 먼저 언급해두어야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활동적이고 능력있는 인물들은 틀림없이 천주교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을 터이지만, 더 정확한 이해를 제공하고자 이곳의 사회관계 관습을, 특히 노동일은 하지 않고 글공부만 하는 (또는 하는 듯이 보이는) 계층 사람들 사이의 사회관계 관습을 조금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믿는다.
누구나 아는 바대로, 이 나라 여자들은 최하층에 속하지 않는 한 집안에 갇혀 지낸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눈을 피하고, 모든 일에 뒤로 물러나 있으며, 訪問이나 다른 사회관계는 남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런 만큼 남자들의 교제는 더욱 자유롭고 빈번하다.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들, 특히 양반들은 능력에 따라 집 앞쪽에 한 두 채의 집을 짓는데, 이것은 바로 응접실이다. 이곳의 출입은 남자들에게만 허용되며, 문이 길쪽으로 나있기 때문에, 집안으로 전혀 통하지 않고도 드나들 수 있다. 집주인은 통상 이곳에 기거하면서 친구와 친지들을 접대하는 일을 즐긴다. 게다가, 손님을 厚待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로 간주되고, 중요한 예절에 속하는 까닭에,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든 손님을 능력껏 접대하는 일을 명예로 생각하였다. 이런 사랑방 아무데나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日常 중에는 휴식을, 밤에는 잠자리를 請하면서 대접받을 수 있다. 네모난 나무토막이 베개로 쓰이고, 바닥에 깔린 이불이 침대로써, 모든 사람이 나란히 누워 함께 사용한다. 옛 풍습의 소박함과 다정함을 상기시키는 아주 아름다운 관습으로, 聖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후한 접대를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관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이 民族에게 있어 뛰어난 同胞愛를 조성하고 유지시켜왔는데, 온갖 찬사를 넘어서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관습에도 동전처럼 뒷면이 있을 터이지만, 여기서 자세히 논한다는 것은 우리 이야기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쨌건 知人과 친구들의 동아리가 얼마나 쉽게 확대되었을 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類類相從>이라는 속담은 이곳에서도 역시 들어맞기 때문에, 모든 계급의 사람이나 모든 過客들이 아무렇게나 어울리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조선 사람은 천성적으로 遊覽과 談笑를 좋아해서 항상 산넘고 개울건너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자기 집에서 할 일이 없는 경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사랑방에서 저 사랑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나라안 소식을 전해듣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 볼 일이 있거나, 여러 날 가야하는 곳에 있는 어떤 친척이나 친구, 친지를 방문해야 할 때면, 여행짐으로 담뱃대와 지팡이만 가지고, 또는 기껏해야 어깨에 거는 작은 봇짐을 등에 지고, 여비로는 엽전 몇 닢, 어떤 때는 빈털털이로 걸어서 떠난다. 저녁이 되어서도 길을 다 가지 못했으면, 여인숙에 가는 대신에, 길에서 멀지 않은 사랑방을 찾아 간다. 그리고 번잡한 절차없이 친구처럼 환대를 받으면서, “차린 것 없는” 상을 함께 나눈다. 피곤하거나 날씨가 궂을 때는 그 집에서 하루 이상 머물기도 한다. 주로 文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짤막한 作文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랑방에서는, 특히 여름철에, 친구들간에 모여서 몇 날 몇 주씩 각자 공부한 것을 서로 나누고, 作文을 통해 상호경쟁심을 불러일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이야기가 펼쳐지던 시대에는 특히 權씨 집안의 사랑방들이 수많은 親知들과 學文愛好家들로 북적대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드는 마치 여관과도 같은 곳이 되어있었다. 밤이 되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돌아가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거기서 하루밤이건 여러날이건 머무르곤 하였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 근처의 길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온갖 처지의 사람들로 항상 가득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오는 거대한 응접실이 되어버린 듯하였다.
이상의 간단한 槪觀으로 聖敎理가 어떻게 그리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귀에 전해지고 모든 사랑방에서 반복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入敎했다거나 入敎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결론지어서는 않된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그대로 되돌아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儒敎를 고수하면서 새로운 교리를 깨트리려는 목적으로, 또는 새로운 교리에 끌려들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하였다. 몇몇 사람은 黨派心으로 인해 聖敎理에 귀를 기울일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 틈에 끼기를 원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미 예견할 수 있었던 불행에 대한 염려가 이들을 붙들었다. 당시 상황은 바오로 성인이 최고법원 앞에서 설교했을 때 벌어졌던 일의 再現이었고, 또는 우리 주님이 제시하신 씨앗의 비유의 완벽한 실현이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 스스로 알고 또 존중하는 善을 실천하지 못하게 막는 온갖 情念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朝鮮 兩班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여러 黨派들이 福音의 전파에 있어 엄청난 障碍였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초기에 신앙을 전파한 모든 사람들은 南人이라는 黨派 소속이었으므로, 다른 모든 黨派와 최근에 南人 자체 내에서 분열된 사람들은 당연히 신앙의 반대자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점은 뒤이은 사실들이 확인해주고 밝혀주게 될 터인데, 天主敎가, 당시 權力을 쥐고 있던 南人들을 공격하여 다시는 再起하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하는 口實이 되는 것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救贖과 그리스도교 설립의 위대한 사업을 완수하려는 순간에 우리 聖敎의 崇高한 창립자 예수께서는 어디서나 영원히 眞理인 다음 말씀을 하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이 天主敎 基本敎理는 일반사람들 눈에 언제나 誇大妄想으로 보여왔는데, 이제 物質에 푹 젖어있는, 그러나 信仰의 光明이 비추고 있는 이 民族 앞에 실제로 이루어져 드러나게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이미 우리 聖敎는 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뛰어난 훌륭한 인물들을 信徒로 가지고 있었고, 양떼 가운데에는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聖敎는 피의 시험을, 아니 차라리 피의 受胎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天主를 뒤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어디까지인지 가르쳐주어야 했으며, 또한 그때까지 책에서만 보아온 敎理가 어떤 암흑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起源 때와 마찬가지로 天主께서는 피가 내를 이루어 흐르는 것을 즉시 허락하지는 않으셨으니, 이곳에서도 단지 한 방울의 피가 뿌려졌는데, 이는 天主의 사업에 참 印章을 찍기에는 충분하였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위로해줄 그 어떤 牧者도 가질 수 없었던 이 새 信者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거나 信仰을 消滅시키키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天主敎에 대한 반대자와 적들이 일어난 지는 오래전부터였고, 天主敎가 도처에서 거두고 있던 成果는 이런 반대자들의 수효와 불평소리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까지는 왕이 무슨 뜻을 표시한 것 같지는 않으므로, 우리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사건은 政府內 협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私的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1785년(乙巳年) 봄, 天主敎가 정식으로 傳播되기 시작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刑曹判書 金華鎭이 (어느 黨派 소속인지?) 사람들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조치로 天主敎의 成長을 멈추게 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이름난 天主敎 指導者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本名이 토마스인 金範禹를 붙잡아 끌어 오도록 하였다. 金 토마스는 朝鮮에서 譯官 직책을 수행하는 中人階級 집안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初期에 李檗에게서 天主敎를 배웠고, 은총의 부르심에 응하여 지체없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또 그는 즉시 자기 가족에게 傳敎하여 入敎시켰으며, 그의 열성은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가서, 자기 친구들 가운데 여러 사람을 改宗시키고 譯官 계층에 신앙을 퍼뜨렸다. (北京 主敎의 書翰에는 이 사실이 1788년으로 되어있으나, 일련의 사실들로 미루어,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丁 요한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이를 이 시점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天主敎 傳播者 金範禹는 갑자기 天主敎 신앙의 告白者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 고귀하면서도 어려운 使命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1785년 乙巳年 봄에 체포되었다.) 형조판서 앞에 끌려갔을 때, 형조판서는 그를 背敎시키고자 하였으나, 토마스는 天主의 은총에 의지하면서 비열한 背反을 용감하게 거부하였다. 갖가지 고문이 가해졌지만 虛事였다. 그는 잘 참아내면서 한 순간도 굽히지 않았다. 權日身 사베리오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충직한 同敎人을 저버림은 자기 위치에 비추어 걸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기성, 李龍億, 홍익 등과 (이들은 누구인가?) 함께 형조판서 앞에 나아가, 용감하게 목소리를 높여 억압받는 眞理를 옹호하였다. (1785년 3월 太學生 (鄭)淑이 天主敎人들의 친척과 친구들은 이들과 絶緣하라는 通文을 돌린다. 이 通文은 큰 소란을 불러왔는데, 거기에 金範禹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鄭淑이란 사람은 南人이면서도 天主敎에 매우 敵對的이었다. 이 집안은 1786년에도 李承薰의 복귀에 반대하는 通文을 돌리며 들고 일어났다. 1785년의 通文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회에서 축출하기 위해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식 문서이다.) 그는 형조판서에게 말하였다. “우리 모두 金範禹와 같은 종교를 信奉하오. 그의 生死는 그 혼자만에 관계되는 일일 수 없으니, 우리는 대감이 그에게 내리는 처분을 그대로 함께 나누고 싶소.” 判書는 그토록 유력한 인물들을 공격할 힘이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義人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았고,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는 여러 가지 酷刑을 가한 다음, 여전히 이 천주교인의 신앙과 끈기를 꺾을 수 없자, 충청도 동쪽 끝에 있는 丹陽 고을로 귀양보냈다. 金 토마스는 丹陽으로 끌려가서, (그는 거기 도착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바쳤고,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약 2년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을 飜覆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상처의 후유증으로 衰盡해져 天主께 영혼을 바쳤다. 範禹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金 토마스는 이렇게 영예의 冠을 받았다.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해주신 救世主의 죽음을 救世主께 돌려드리는 영광을 이 나라에서 첫번째로 얻었던 것이다. 우리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天主께 대한 충성심과 진정한 孝心에서 비롯하는 의무는, 天主께 봉사하는 명예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데 주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이곳의 여러 고장에 피의 목소리로 외치는 영광을 그가 첫번째로 안았다. 拷問에 肉身은 무너질 수 있어도 靈魂은 소멸되지 않으며, 不滅性으로 가득찬 소망 속에서 天主께 봉사함을 이 동양 맨 끝 나라의 暴君들에게 알려주는 영광도 그가 첫번째로 안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때 金 토마스가 朝鮮의 수많은 殉敎者들이 이루는 영광된 합창단의 맨 선두에 놓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 殉敎者들은 그가 보인 模範이 引導하고 부추기는 대로, 刑吏들의 광기어린 칼날 아래에서도 소리높여 예수 그리스도를 告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다른 餘波는 없었지만, 天主敎人들로 하여금 그들의 敵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엿보게 하기에 충분하였고, 참 天主를 섬기기 위해서는 온갖 것에 대비하고 있어야 함을 깨우쳐 주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공포심이 특히 한양과 그 부근에 퍼져나갔고, 갓 태어나고 있는 교회의 기둥이라고 할만한 사람 가운데 몇몇을 흔들어놓았다. (많은 집안에서 자기네 가족 중 敎人인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들에게서 背敎를 얻어내기 위해 애원과 위협을 비롯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고, 여기저기서 영광스러운 信仰告白도 있었지만 또한 개탄스러운 變節도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天主敎의 主動者이자 우두머리로 특히 李承薰 베드로와 李檗과 丁若銓, 鄭若鏞 형제를 지목하고 있었고, 도처에서 위협적인 言辭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 세 집안에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부분의 가족들은 겁을 났다. 그리고 이 敎人들의 熱誠을 멈추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信仰實踐을 그치게 하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였고, 불행하게도 훌륭한, 또는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李承薰의 동생 致薰은 天主敎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형으로 하여금 天主敎에 싫증을 느끼게 하고 결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결국 李承薰은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모든 종교서적을 불태우고, 萬人 앞에 자신을 변명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李檗의 아버지는 天性이 激情的인 사람으로, 天主敎에 連累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었는데, 天主敎에 깊이 빠진 듯이 보이는 자기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종교적 心性을 뿌리뽑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달기에 이르렀다. 檗은 그러한 광경에 無感할 수 없었다. 더이상 버틸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굴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天主敎人이라고 부르기도 不當한 어떤 敎人 하나가 그에게 찾아와, 그가 느끼고 있는 듯 보이던 動搖를 完結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檗을 背敎시키는 데 성공하기 위해 가능한 온갖 수단을 다 썼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術數를 다 동원하였다. 檗은 지치고, 그토록 시달림을 받아 정신이 昏迷해졌어도 공개적으로 背敎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며, 자기 앞에 놓여있는 모든 불행을 물리치기 위하여 婉曲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오호라!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잃지 않고 간직한 신앙심은 그의 가슴속에서 자연적인 人情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한 편에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셨고 다른 한 편에는 친아버지가 계셨다. 어찌 天主를 否認하겠는가? 어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겠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싸움은 그를 筆舌로 묘사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서글프고 우울해졌으며 말이 없어졌다. 밤낮으로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시간마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衣冠도 더이상 벗지 않았고, 잠은 눈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직은 가끔 음식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입맛을 완전히 잃었으므로, 아무 맛도 없고, 몸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치열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불행하게도 本性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츰 悔恨과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았고, 은총의 마지막 노력이 간신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건강상태로 되돌아왔으며, 벼슬에 대한 욕심이 되살아났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에게는 아무 것도 시도해볼 시간이 없었다. 1786년(丙午年) 봄 당시 유행하던 黑死病(중국인들 말로 疫病)에 걸렸고, 8, 9일 후, 그가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간호하던 사람들이 여러 겹의 이불로 덮었는데, 이 무거운 이불 밑에서 숨이 막힌데다가 땀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온갖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敎友들이 찾아가 悔改를 권하고 天主 앞에 나아갈 준비를 시킬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 열의와 열성과 재능으로 이 나라에서 天主敎에 문을 열었던 이 사람은 이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스러졌다. 그는 뛰어난 資質과 부정할 수 없는 德性을 지녔지만,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는 救世主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런 죄악의 돌에 걸려 넘어져서, 그가 일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 볼 때 매우 슬픈, 그리고 그에 대해 자주 존경심을 가졌던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최후를 보여주었는데 (그러나 우리 聖敎가 200여년 전부터 서적을 통해서만 소개되고, 聖敎를 부각시키고 더 자세히 알려줄 사람이 아직 없던 상황에서, 우리 聖敎에 대한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광을 얻은 것으로 그의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다.), 이는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작은 양떼의 신앙은 잠시 흔들리기는 했어도 아주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天主敎會가 한 편으로는 몇몇 구성원의 變節로 인해 초상집같은 분위기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 壓制者들의 迫害보다 때로 더 견디기 힘든 집안 迫害 가운데에서도 대부분 敎人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 또 날마다 여기저기서 새로 入敎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으로 위안을 받았다. 天主敎에 대한 이 첫번째 시위가 전반적인 열의를 많이 가라앉힌 듯 보이지는 않으며, 前進은 계속되었다. (이하 생략)-김형래 교수 초역-
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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