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長興)면 부곡리 선영의 황사영(黃嗣永) 진사(進士) 묘(석제(石製) 십자가 및 항아리 발견돼) 주문모 신부로부터 Alexius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황사영 진사는 주신부님과 거처를 같이 하며 전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제천 산골 배론 토굴에 몸을 숨기고는 북경 주교 앞으로 보내는 백서(帛書)를 썼다.
그러나 도중에 밀사였던 황심(黃沁)이 잡히면서 황사영도 체포되어,서울로 압송된 후, 달포 남짓하게 온갖 고문을 당한 후, 12월 초에 서소문 네거리에서, 양 팔과 양 다리와 목에 밧줄을 감고 사방에서 말 4필이 동시에 달리게 하여, 온 몸을 여섯으로 찢어죽이는 능지처참형의 육시를 당하여 순교하였다(26세). 한국의 순교자들 중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형벌로 순교하였다. 천주교 때문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천주님 때문에, 한국 교회사에 가장 무서운 박해와 고통을 받고 처참하게 죽은 순교자 황진사와 그 가정은 1801년 신유박해를 마감하는 수난의 순교가정이었다.
순교자 황진사보다 3살 위의 부인 丁命淵 마리아는 文度公 요한 丁若鏞 承旨의 친 조카딸이며, 광암 이벽 성조의 친 외조카딸인데, 1801년 제주도 모슬포 대정읍으로 유배되어, 39년간 官奴로 종살이하다가 68세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黃慶憲은 1801년 3살 때, 제주도로 유배가는 어머니와 함께 가다가, 추자도에 강제로 떨어뜨려, 마음착한 어부 吳씨가 거두어 길러서, 추자도에서 죽을 때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생활하는 어머니를 한번도 뵙지 못하고, 추자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교자 황진사의 어머니 전주 이씨는 1801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문전걸식하는 걸인으로 지내다가 굶어서 핍진하여 세상을 떠났다.
순교자 황진사가 능지처참형으로 처형되어 온 몸이 찢어져 사방에 흩어진 살덩이와 의복 조각들을 그 벗들이 모아, 창원황씨 종종산 선영인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홍복산 밑)에 묻혔는데, 1980년 여름, 종친회의 17대손 황용호(黃龍浩, 동국대, 경상대)교수와 당시 대구대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사의 고상국 기자가 자료를 추적하며 변기영 신부(당시 주교회의 200주년 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 겸 순교자 시복시성추진부장)에 알려주어, 7월 초에 1차 답사하고, 9월 1일에 묘를 발굴하면서, 무덤 속에서 십자가형으로 놓은 돌들과와 비단대(帶)가 들어 있는 작은 이조백자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변기영신부1980년 7월 1일) |
순교자 황사영 묘 발굴시 발견된 항아리를 변기영(신장 본당)신부가 들어내고 있다. 곁에 있는 황두희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 종친회 회장으로 황사영 계의 후손이다.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의 외아들 경헌이 추자도로 유배되자, 황씨 문중에서는 족보상으로 황사영의 사촌인 병직(秉直)을 양자로 들여 손(孫)을 잇게 했었다.(1980년 9월 1일) |
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 묘를 발굴후 재 손질한 모습(변기영 신부, 1980.09.20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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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골 홍복산 아래 있는 황사영 진사의 묘를 발굴하기 전 답사 확인(변기영신부1980년 7월 1일)
그 당시는 순교자 황진사 묘 앞의 토지가 평당 2만5천원 내외라서, 마을 이장에게 부탁하여 우선 3천평 매입을 즉시 매입계약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교회 내의 무슨 일에나 반대부터 하고 보는 이들의 반대하는 목소리가 하도 커서,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평당 3,4백만까지 부르며 올랐다니, 더구나 각종 러브 호텔과 음식점 등으로 삐잉 둘러막혀 있어서, 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