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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9월 9일, 오늘은 조선교구설정 기념일,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교서로,,,.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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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교서, "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를 발표하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갈망하던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조선교구(DIAECESIS COREAE)가 설정되었습니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교서>
 
 
Gregorius XVI세 교황은 지금의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전신, 포교성(Propaganda Fidei) 차관 대주교 시절부터, 조선 교우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고,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가지 않은 아시아 동쪽 끝 먼 나라에서 신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보내달라고 하므로,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며, 몇년 후, 교황이 되자마자, 적지 않은 반대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교구를 설정합니다.
 
[하느님의 至上命令에 대하여 교회가 사목적 직무수행을 소홀히 한 빚을 지고 있는 부채 덩이를 實感하는 마음으로(Ex debito pastoralis officii superna Dei,,,)],,,)]라는 표현으로 시작한 교황교서는, 교회가 그 동안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 없이,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피를 뿌리며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바치며 살아남아서 간청하는 조선 신도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구조요청(perpendere necessitas)하는 바를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교회 신자들의 애절한 청원(Nos perpensis Coreanorum  christianorum necessitatibus,,)을 깊이 숙고한 나머지,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교구를 설정한다는 교서의 내용은,  우리나라 평신도들의 간청에 의해서 교구를 설정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교구 설정은 기존 교구장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므로, 조선교구는 평신도들 간청의 꾸준한 노력으로 설정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현 교황님의 Memory Guard 말씀을 상기합시다.).                   
 
본래 교구명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 예방을 겸하여, 국가명을 쓰지 않고, 대부분 편의상 중심 도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일본 교구미국 교구라는 교구명 설정은 없으며, 동경 교구, 뉴욕 교구라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이나 [한양]이라는 지명이 유럽에 알려져 있지 않았고, 북경이나 마카오를 경유하여 어쩌다가 있는 로마와의 서신 연락에도, [高麗] 때부터 국제적으로 종종 유럽에 알려진 왕국명을 따라서, COREA 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조선 전국을 포함한, 특히, 오늘의 [서울 교구] 설정 명칭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서울 교구의 생일이며, 동시에 전국 교회의 큰 축일입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조선교구 설정 교서 발표와 동시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Bartholomaeo Brugueire) 蘇 주교에게 보내신 친서>
 
 
천주교회의 교구(Diocesis ← dioecesis)라는 말은 본래 로마 대제국 때  3세기 경, Diocletianus 황제가 시작하여  Constantinus 황제, 등이 제국을 4관할 구역으로 나누어 부르던 행정구역 단위 호칭이었으며, 천주교회는 사도시대부터, 신자들의 모임이나 공동체를 교회(Ecclesia) 라고 불렀고, 차차 발전하여, 13세기 경에 와서는 오늘과 같은 교구 제도가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생활 근거지 중심으로 부르던, 교구와 같은 의미의 본당(Parraechia → parroechia →  parrochia)이 이 때부터 아주 차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9월 9일은 우리나라 전국 교구가 다같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축해야 할 축일입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매년 9월 9일, 조선교구 설정기념일에, 조선교구 설립의 주역 성 정하상 유진길 성현들의 묘를 참배하며, 12시에 감사미사를 드리고, 간소한 다과를 나누기도 합니다. 전에는 서울 교구에서도 매년 9월 9일에는 신도들이 마포 산등성이에 있는 서울교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모셔진 초대 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 소주교님의 묘를 참배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발도로메오 부르기에르 蘇 주교님은 프랑스 남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Carcasson에서 태어나셨는데, 필자가 1984년 8월 말 방문하였을 때는, 무궁화꽃이 마을 주변과 특별히 카르카쏭의 古城, 성벽 둘레와 마을 골목 여기저기 울타리마다 매우 아름답게 만발하여 있어서, 마치 한국 땅을 찾아온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Carcasson 城은 프랑스 혁명기의 대혼란과 파괴 시기에도 전혀 파괴되지 않고, 원형대로 가장 잘 보전된 중세기의 성곽으로 유명합니다. 
 
   무궁화는, 동양 최초의 책이라는 중국의 山海經에 나오는 대로,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이 옷을 못 입고 살던 시절, 君子의 나라에 사는 東夷族 들(韓民族)은 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칼을 차고, 관을 썼으며, 아침 일찍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早開暮死) 무궁화(中國 古語로는 薰華草)를 가꾼다고 기록함으로써, 이미 문헌상으로도 약 4천년 전부터 배달겨레가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의미로 자기네 마을의 표지나 거처의 표지로 심어서 가꾸던 韓民族의 民族花입니다.
 
    <인류 역사상, 民族花國花 제정의 梟示的인 관습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 말기에, 唐나라 유학에서 귀국한 최치원이 신라국왕의 명으로 작성하여 唐에 보낸 國書에서는, 신라를 槿花鄕 이라고 新羅 自國 소개를 하고있는데, 당시, 후백제, 후고구려, 발해, 등의 우후죽순처럼 출현하려는 세력들 중에 오직 신라만이  본래의 東夷族, 즉, 韓民族 국가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읍니다. 이러한 문화는 무궁화가 고려의 국화로 자리잡게 하였고,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開國하면서, 오얏나무 꽃, 즉  李花 를 궁궐화로 바꾸어 정하면서, 대궐에서 쫓겨난 꽃 無宮花로 선비들이 부르던 것을, 조선시대 말기에 열강들의 침략을 염두에 두고, 근대 우리 선각자들은 을 다함이 없다는 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선사시대를 전후하여서부터, 이렇게 우리겨레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주막집들의 표지였던 무궁화가, 고대 몽골족의 일부인 프랑군족이 水陸 양면으로 서쪽으로도 이동할 당시, 지중해 연안까지 화초로 무궁화가 묻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蘇 주교님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된 후, 극동선교를 자원하여 동남아(샴)에서 선교하시다가, 당시 아프리카보다도 덜 알려지고 더 멀리 있어서, 아무도 자원하지 않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신 분으로,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자, 즉시 조선 임지로 출발하였으나, 천신만고 끝에 북경의 북동쪽에 있는 펠리구 마을까지 와서, 路毒과 과로로 인한 병을 얻어, 조선 땅을 밟아보지조차  못하고, 1835년 10월 19일, 43세에 선종하셨습니다.
 
중국의 시골 공동묘지 잡초가 우거진 가운데 묻혀져 있던 소주교님의 묘는 그동안 중국 내의 박해와 전란이 계속되어, 찾아가는 이들도 없고, 또 찾기가 극난하여, 사실상 잃어버리다시피하고 있었습니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뮈뗄 민대주교님의 정성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초대교구장 소주교님이 임종하신 중국 시골 동네를 수소문하여 찾아 가서, 계속하여 수소문하여 묘를 찾고, 마침내 장례식 때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세웠던 돌비석과 함께 유골을 발굴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모셨습니다. 토마스 안중근 의사 묘를 관리 못하고 잃어버린 데 비하면, 얼마나 큰 다행입니까?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소주교님의 묘를 찾아 조선에 모셔다가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하여 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에게 감사를 드립시다.  -Msgr. Byon-  
입력 : 2015.09.09 오후 10: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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