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땅에 빛을 밝힌 신앙선조-<이벽 성조의 생애와 최후> *바탕화면에서 들어가면 됩니다.
뜻밖에도, "이 땅에 빛을 밝힌 신앙의 선조"라는 제목으로, 평화방송에서 지난 해 11월에, 제작,방영한 이벽 성조에 대한 동영상은, 전편과 후편으로, 각각 46분씩 걸리는 것으로 모두 92분 걸려야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계속하여 시청자들이 늘어서, 4만여명을 넘고 있읍니다. 의외의 결과입니다. 딱딱한 논문식으로 되지 않고, 이야기식,評傳 서술 형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편집자들은 촬영한 내용들 중에 시간 관계상(?) 많이 줄이느라고 애를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꾼이 너무 많은 분량을 말하였기 때문이지만, 못다한 말이 훨씬 더 많고, 그 당시 역사의 현장은 더더욱 말할 내용이 많을테니, 문헌에 나오는 한두줄 문장이나, 한두 글자의 바늘구멍으로 보고 떠드는 소리들이 얼마나 옛 사실과 거리가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필자 이야기꾼이 두어번 훑어보니, 그런대로 좀 재미있게 보시는 분들도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이야기식이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근거문헌들을 가지고, 그동안 잘못 알려져온 것들도 많이 바로잡고자 하였으며,또 짧지 않고,단순하지 않은 역사를 이야기하다보니, 이야기하는 자신도, 산골에서 항아리에 쌀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는데도, 굶어죽지 않도록, 하늘이 주시는 '나이'만이라도 공짜로 알고,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특히, 많은 내용을 되도록 다 이야기하고자 과용을 부리며 빨리 늘어 놓느라고, 속인들의 우스개 말처럼, "종종 말이 빠져서, 이가 헛나온 경우도 없지 않았읍니다.
조선교구 설정(1831) 당시의 북경 교구장은 Alexander de Guvea 주교가 아니라, 당시 남경 교구장으로서 북경교구장도 겸직하던, Pires Perreira 주교였고, 김대건 부제와 함께 서해를 항해하여 중국에 갔던 사람은 이총억의 동생 이방억이 아니라, 이방억의 아들, 이의창입니다. 순교자 이의창의 묘는 병오년(1846) 박해 때 순교한 후, 횡성군 공근면 산골에 있다는 족보 기록을 따라, 필자 자신도 찾아보았고, 필자의 동창 이대식 신부에게도 부탁하여 찾아보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읍니다. 전국이 개발화 일변도의 시국이라서, 지각변동과 변화가 심하여, 앞으로는 더욱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기야, 100년 밖에 안된 토마스 안중근 의사의 묘도 잃어버려, 찾지 못하는 민족이니,,,참 ! 그래도 200여년이 지난 이벽 성조의 묘를 실묘 직전에 찾게 된 것은 하늘의 섭리였음이 분명합니다.
또, 을사년(1785) 박해 때,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저 5,6명의 최초 천주교 신도들을, 각 가문에서는 서양 오랑캐의 도를 따르는 무리라 하여, 족보에서 제명하라는 문귀 ,"휘지문담지외야"는 을사추조적발 사건의 통문에 나오는 것으로, 방송 자막에 나오지 않아, 좀 아쉬웠읍니다.(彼西學五六人 擯以夷狄之類 揮之門墻之外也-벽위편). 앞으로 문헌 위주로뿐 아니라, 당시의 우리 문화 관습에 대한 상식과 이해가 전제된 수준에서, 보다 풍부하게 정리되어 옛 역사가 책으로 발행될 날이 오도록 힘쓰고 있읍니다.Msgr. Byon
- By Mgr. Peter Byon.
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