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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2)St. Giovanni-Paolo II's speech,내 일생 가장 감격적이었던,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명강론 - 1984년 10월 14일 주일, 바로 32년 전 오늘, 로마에서,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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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Giovanni-Paolo II's speech,
내 일생 가장 감격적이었던,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명강론 !
1984년 10월 14일  주일, 바로 32년
 
 
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2) 내 일생 가장 감격적이었던,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명강론 - 1984년 10월 14일  주일, 바로, 32년 전 오늘 ! <명 강론 전문 원어>
 
10월 14일 주일 미사는 실로 장엄하고도 경건하며 황홀한 세계 천주교회의 거룩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첫 축일 교황집전 대미사였다.
그러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성하의 전혀 뜻밖의 명강론이었다.-<계속>-
 

1984년 10월 14일 성 베드로 대성당 103위 성인 첫 축일 대미사. 한국 모든 교구 대표 사제들이 사도 성 베드로 무덤을 향하여, 바로 앞줄 양쪽 둥글게 자리하고 붉은 제의를 입고 교황 성하와 고동 미사를 올렸읍니다. 사진을 바라보며, 우편에는 색동 저고리에 다홍치마, 등 한복을 입은 대한민국 전국 교구에서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신도들 약 3천여명이 특별석에 참석하였읍니다.(주교회의 이름으로 6백명과 국내 각 여행사들이 인도한 1천여명과 로마와 파리를 비롯한 전 유롭에서 유학중인 한국인들과 사업상 체류 중인 한국인 동포들이 총 동원되어(1천여명, 미국과 카나다, 일본, 호주, 남미, 지역 해외 동포들이 5백여명 이상) 참석하였읍니다. 교황님의 강론는 교황님께서 미리 로마에 유학 중인 장익 신부님에게 이태리어 원고를 주셔서, 한국어로 번역하여, 이를 우리 시성추진부에서는 복사하여 나누어 주었읍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공식 강론 중 첫 부분에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에 대한 교의적이며, 최초로 파격적인 내용을 우렁찬 목소리로 천명하여 주셨읍니다. <이하 발췌 번역과 원어 전문>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L'Osservatore Romano 1984. 15, Ottore).
 
In Corea -caso unico nella storia -la fede fu introdotta spontaneamente dai Coreani stessi. Infatti il cammino dei Coreani verso la fede ebbe inizio grazie alle iniziative autoctone di qualche laico. Questo cammino ci fa capire quanto siano importanti, in vista della salvezza eterna, le aspirazioni naturali alla verità che caratterizzano la ragione umana. Tutti sappiamo, infatti, che èla ricerca sincera della verità che ha spinto questi laici, –un gruppo di intellettuali e di ‘ filosofi ‘-a prendere contatto con Pechino, dove secondo quello che avevano sentito dire, si trovavano alcuni cattolici che li hanno illuminati sulla nuova fede che conoscevano grazie ai nuovi libri. Questi laici, uomini e donne, considerati a giusto titolo" 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 hanno, durante oltre 56 anni, dal 1779 al 1835, senza l’assistenza di preti, -a parte la breve presenza di due preti cinesi -diffuso il Vangelo nella loro patria, e questo fino all’arrivo dei missionari francesi nel 1836; questi laici hanno offerto e sacrificato la loro vita per la loro fede in Cristo."(이하 생략).”
 
 
대부분 많은 신자들도 세례받은 신자들이 있어야 교회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야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자라야 세례를 받을 수 있기에, 천주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무당이나 비신자들은 세례를 받지도 않지만, 신자로 위장하여 세례를 받아도, 무효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세례를 줄 때, 끝에 가서, 천주교 신자인지를 질문하며 확인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아직 세례를 받지 않고, 세례 성사 받을 예비자도 죽으면, 일반 영세신자들과 똑같이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이 묻히는 교회 묘지에 매장하였습니다.
 
세례를 아직 받지 않고, 천주교회에 입교할 원의를 가지고 있는 세례예비자들이 교회의 신자임을 교회는 敎義(dogma)로 선언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의헌장 (Lumen Gentium) 14항,
선교 헌장 (Ad Gentes Divinitus 14항),
교회법 (Canon 206조),
천주교회 교리서 (Catechismus, 1249항)
특히, 코린토 전서 1장 10절 이하에는
우리가 참고할 사항이 큽니다.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오기 전, 이벽 성조를 위시하여 우리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의 활동을 한국교회의 창립으로 언급하시는 강론은 당일 6개국어로 발행되었습니다. 교황님의 강론을 들으며, 김남수 주교님과 우리는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지 않은 성직자들역시, 세례성사를 받아야 신자가 되고, 또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들이 있어야 교회가 성립된다고 믿고 있을 때였는데, 교황님의 강론은 우리 한국교회의 부족한 敎義 지식을 깨우쳐주셨기 때문입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또 이듬 해, 2015년 3월, 한국 주교님들이 로마 사도좌를 순례하면서 교황님을 예방하셨을 때, 이 점에 대하여 더욱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추후 계속> Msgr. Byon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 진사가 예수회의 프랑스 선교사, Joseph de Grammont 신부한테 세례를 받으므로서 시작되었다고 흔히들 알고 있을 때였읍니다. 그런데 1779년 천진암 강학이 절정에 달하던, 젊은 선비들의 천주교 공동체의 출발을 교회의 출발로 언급하신 것은 당시 아주 감격스러운 내용으로서, 필자는 온종일 아무것도 안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지 않은 성직자들역시, 세례성사를 받아야 신자가 되고, 또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들이 있어야 교회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야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자라야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무당이나 비신자들은 세례를 받지도 않지만, 신자로 위장하여  세례를 받아도, 그러한 세례는 무효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세례를 줄 때, 천주교 신자인지를 질문하며 확인하는 순서가 있읍니다. <계속>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Questi laici, uomini e donne, giustamente

 

 considerati i “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 per

 

 ben 56 anni, dal 1779 al 1835,

 
  •  
    [,,,Questi laici, uomini e donne, 
     
     
    giustamente considerati i “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 per ben 56 anni, dal 1779 al 1835, ,,,,]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fondatori)」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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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sservatore Romano 1984. 15, Ottore). <교황님의  명 강론 원어 전문>
     
    CONCELEBRAZIONE PER I MARTIRI DELLA COREA
    OMELIA DI GIOVANNI PAOLO II
    Basilica Vaticana - Domenica, 14 ottobre 1984
     
    1. “Il regno dei cieli è simile a un re che fece un banchetto di nozze per suo figlio” (Mt 22, 2).
    A queste nozze speciali il Padre eterno invita tutti i popoli e tutte le nazioni della terra.
    Due secoli fa è stato invitato il popolo coreano. Nello scorso mese di maggio ho avuto la gioia di celebrare in Corea il bicentenario di quella cristianità.
     
    Il popolo coreano ha risposto all’invito al mistico banchetto del Padre celeste mostrando nel proprio cuore una straordinaria disponibilità e un edificante impegno, che oggi sono premiati con una splendida fioritura della comunità ecclesiale.
     
    In Corea la fede fu recata - caso unico nella storia - spontaneamente dai coreani stessi. Il cammino dei coreani verso la fede infatti è cominciato grazie all’iniziativa autoctona di alcuni laici. Tale cammino ci fa comprendere di quanta importanza, ai fini della salvezza eterna, sia rivestita l’aspirazione naturale della ragione umana alla verità. Fu infatti, come sappiamo, una leale ricerca della verità a spingere quei laici - era un gruppo di letterati e “filosofi” - a prendere contatti, non senza gravi rischi, con Pechino, laddove avevano sentito parlare della presenza di uomini, alcuni dei quali cattolici, che avrebbero potuto illuminarli sulla nuova fede da essi conosciuta mediante i nuovi libri.
     
    Questi laici, uomini e donne, giustamente considerati i “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 per ben 56 anni, dal 1779 al 1835, senza l’aiuto di sacerdoti - tranne la presenza assai breve di due sacerdoti cinesi - hanno diffuso il Vangelo nella loro patria fino all’arrivo dei missionari francesi nel 1836, e hanno offerto e sacrificato la vita per la loro fede in Cristo.
     
    E quel Figlio di Dio che, venendo sulla terra tanti secoli prima, aveva detto: “Chiunque è dalla verità, ascolta la mia voce” (Gv 18, 37), non poté deluderli nella loro ricerca, anzi, con la sua parola divina, li illuminò molto al di là di quanto essi all’inizio si attendevano. Li illuminò e li fortificò. Dette loro quello Spirito di fortezza che già li aveva guidati, senza che essi stessi se ne fossero resi conto nel cammino verso il Verbo di verità e verso il Padre.
     
    È per questo Spirito di fortezza, che essi rimasero ben saldi in Cristo, pronti a perdere ogni bene, anche quello della vita, pur di non perdere lui, Gesù salvatore.
     
    2. La Chiesa in terra coreana ha reso, specie nel corso dei primi cent’anni, una straordinaria testimonianza alla fede in Cristo, come ne sono prova le numerose schiere dei martiri.
    Come è noto, durante l’Eucaristia giubilare del 6 maggio scorso a Seoul, mi è stato dato di canonizzare 103 martiri della Corea.
     
    Questi martiri della Corea costituiscono un numero piccolo, ma particolarmente significativo, tra le migliaia e migliaia che vengono ricordati dalla storia.
     
    Ciò che ci riempie di profonda ammirazione, almeno nelle testimonianze più eroiche che ci sono riferite, è l’eccezionale serenità e la misteriosa gioia delle quali, per uno speciale dono di Dio, essi furono capaci pur davanti alla prospettiva di crudeli tormenti e della morte. La fortezza dei martiri della Corea richiama alla memoria quella di cui si parla circa i primi secoli cristiani. In essi lo splendore particolare della testimonianza sembra risentire in qualche modo della disciplina orientale concernente l’autodominio e il distacco ascetico dai beni di questo mondo, compresa la stessa vita fisica, completando nella loro carne “quello che manca ai patimenti di Cristo, a favore del suo corpo che è la Chiesa” (Col 1, 24).
     
    3. Il Vangelo di oggi ci parla dei servitori che il re manda a chiamare gli invitati alle nozze di suo Figlio: “Andate ora ai crocicchi delle strade e tutti quelli che troverete, chiamateli alle nozze” (Mt 22, 9).
     
    Molti figli e figlie di Francia hanno compiuto un grande servizio missionario nei confronti della giovane Chiesa di Corea.
     
    Infatti, papa Gregorio XVI, avendo ricevuto una lettera della comunità di laici che chiedevano l’invio di sacerdoti, si rivolse nel 1827 alla Società delle missioni estere di Parigi, che conosceva un momento di forte espansione missionaria, proponendole di rispondere alla richiesta. Tra i volontari che si presentarono, vi era il primo vescovo designato dalla Santa Sede come vicario apostolico per la terra di Corea, monsignor Barthélemy Bruguière. Egli morì però prima di raggiungere il suo luogo di destinazione.
     
    Ma il martirio attendeva i francesi coraggiosi che dall’anno seguente, il 1836, cominciarono la loro attività in Corea: Pierre Maubant e Jacques Chastan. Furono poi martirizzati il secondo vicario apostolico, monsignor Laurent Imbert, arrivato nel 1837, poi monsignor Siméon Berneux, monsignor Antoine Daveluy, ed altri eroi francesi dei quali abbiamo iscritto i nomi, come voi sapete, “nel libro della vita” (Fil 4, 3; Ap 3, 5; 13, 8; 21, 27).
     
    Questi martiri missionari hanno fraternizzato con i coreani in un’unica testimonianza di fede che mostra fino a che punto la carità ha un valore che non conosce le barriere o i limiti della nazionalità o della cultura. Colui che ama veramente la sua patria non può considerare “straniero” il cristiano di un altro Paese. E ogni vero cristiano considera suoi compatrioti, in un certo modo, gli uomini di altri Paesi. Come i missionari francesi seppero riconoscere dei fratelli nei coreani, così i coreani seppero riconoscere dei fratelli nei francesi. Il miglior modo di amare la propria patria e di rispettare quella degli altri è giustamente parte di questo spirito di “cattolicità”, cioè di autentica universalità, di questo amore per l’uomo insegnato dal Vangelo e che è un dono di Dio all’umanità intera.
     
    Ecco perché il Vangelo è aperto ad ogni forma di cultura: esso feconda dall’interno le qualità spirituali e i doni propri delle diverse culture (cf. Gaudium et Spes, 53).
     
    4. Dove dovrebbe condurci, oggi, questa riflessione sull’eroica testimonianza dei martiri, perché non rimanga un ricordo di essi meramente astratto?
     
    Anche oggi, nonostante l’universale affermazione del principio della libertà religiosa, proclamata dalle organizzazioni internazionali, tanti nostri fratelli e sorelle, in non poche regioni del mondo, sono soggetti a incomprensioni, all’emarginazione, alla persecuzione e alla violenza fisica e morale a causa della loro fede in Cristo. In non poche nazioni, i cristiani così come i seguaci di altre religioni, sono imprigionati e privati delle loro libertà fondamentali.
     
    In questa solenne e importante celebrazione in onore dei 103 martiri coreani mi appello alle autorità interessate e chiedo loro di fare in modo che la libertà religiosa dei loro concittadini sia rispettata ad ogni livello. Il loro popolo non può e non deve essere discriminato a causa della sua fede! I cristiani sono, e intendono rimanere, cittadini leali ed esemplari, ma “fermi nella fede” (cf. 1 Pt 5, 9), pronti e desiderosi di promuovere e di contribuire al progresso morale e civile dei loro Paesi con tutte le loro capacità!
     
    Questa celebrazione vuole anche essere un’esaltazione doverosa e grata, da parte dell’intera Chiesa, del lavoro instancabile e generoso compiuto, nel passato come nel presente, dai missionari - sacerdoti, religiosi, religiose, laici, uomini e donne - che hanno lasciato la loro patria, la loro famiglia, i loro affetti e ideali umani per dare una pronta risposta alla chiamata di Cristo e diffondere il suo Vangelo in tutto il mondo! Questo dinamismo missionario, che è parte della realtà stessa della Chiesa, può adottare, nel corso del tempo, differenti metodi e strumenti per permettere che il messaggio del Vangelo abbia maggiore incidenza e efficacia secondo le varie circostanze. Ma questo dinamismo sarà sempre fondato e animato da un’intensa fede e da un’immensa carità e sostenuto e illuminato dagli insegnamenti della Chiesa.
     
    In questo senso la testimonianza dei martiri della Corea è essenzialmente, ancor oggi, un esempio pienamente valido e splendido per tutti i missionari, ai quali rinnovo la mia gratitudine e quella dell’intero popolo di Dio!
     
    5. Il testo della seconda lettura di questa messa, presa da san Paolo, illustra molto bene la spiritualità dell’apostolo-missionario-martire.
     
    Ci sono sorprendenti similarità tra ciò che vediamo in molti martiri della Corea e la personalità del grande apostolo dei gentili: totale dedizione alla causa di Cristo; coraggio inflessibile e spirito di sacrificio per la difesa di quella causa fino alle estreme conseguenze; un desiderio irrefrenabile e incrollabile di condividere la gioia interiore della propria esperienza cristiana con il maggior numero possibile di anime, senza mai soccombere all’incomprensione o allo scoraggiamento.
     
    “Ho imparato ad essere povero e ho imparato ad essere ricco . . .” (Fil 4, 12). Paolo era pronto a tutto e, nello stesso tempo, era distaccato da tutto. Era preoccupato di una sola cosa: essere e rimanere con Cristo. Ogni altra cosa era vista come secondaria e finalizzata a quel traguardo assoluto, in relazione a quel valore supremo e irrinunciabile. Da Gesù stesso riceveva la forza per il suo completo distacco. Mediante la grazia, Gesù lo teneva vicino a sé. Ciò avvenne anche con i martiri della Corea.
     
    6. Oggi i figli e le figlie della Corea e quelli della Chiesa in Francia gridano insieme: “Possa il Padre del Signore nostro Gesù Cristo illuminare gli occhi della nostra mente per farci comprendere a quale speranza ci ha chiamati” (cf. Ef 1, 17-18).
     
    Ecco la luce della vostra vita: la speranza della salvezza e del regno di Dio. Questa è la verità che deve guidare i nostri passi, facendoci superare tutti gli ostacoli che si oppongono a tale prospettiva: prepararsi ad attendere il regno del Signore, guardare sempre al di là della morte, e rendersi degni, con una vita santa, della terra nuova dei viventi. Il Signore Gesù sia la nostra guida. Diciamo anche noi con i martiri coreani e francesi: il Signore è mio Pastore! Egli mi rinfranca, mi sorregge e mi guida. Con lui non manco di nulla. Amen!
     

    Oggi siamo qui riuniti, intorno all’altare di san Pietro, simbolo della “confessione” della vera fede, per celebrare insieme la santa Eucaristia in onore dei martiri della Corea, canonizzati in Seoul durante il periodo di Pasqua.
     
    Con questo atto solenne vogliamo dare testimonianza non solo all’unità e all’universalità della Chiesa, ma anche al loro messaggio, alla loro “confessione” nel martirio, tanto rilevante e attuale oggi per il mondo e per la Chiesa universale.
     
    Vorrei rivolgere uno speciale saluto ai carissimi fedeli coreani nella loro lingua:
    Sia lodato Gesù Cristo! Sono davvero lieto e grato che siate venuti da così lontano per celebrare insieme con me la santa Eucaristia in onore dei santi martiri della Corea.
     
    Auspico che la vostra vita di veri cristiani faccia risplendere nel mondo di oggi il loro eroico esempio!
     (L'Osservatore Romano 1984. 15, Ottore).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 광경.당시 언론과 보도기관에서는 100만여명으로 보도하였으나, 필자는 55만명~60여만명으로, 내한한 성청 인사들에게 보고 하였었다(Sua Santità Giovanni Paolo II aveva concelebrato la messa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con molti Cardinali, Arcivescovi, Vescovi, sacerdoti e fedeli cattolici - circa 500.000 - a Seoul il 6 maggio 1984. Per quella canonizazione, il Rev. Byon, rettore di Chon Jin Am, il luogo natale della Chiesa, aveva servito per 5 anni (1980~1984) come segretario esecutivo generale della commissione episcopale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본문이미지
    (Photos by Baeck - Nam-Shick).
    <참고문헌>:
     
    103위 시성 위해
     
     
    한국 주교단 전원이 서명 요청한
     
     
    기적심사관면 신청서.
     
     
                          (본 내용은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자료실" 에서 퍼온 글입니다.)


    103위 시성기적심사관면청원서 사본,1983년 3월 5일 자, 한국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서명으로
    교황성하께 올린 문서. 사실은 1982년도에도 2차례나 있었으나, 주교회의 시복시성담당위원장 김남수 주교의 서명만으로 제출되었었다. 그러나 103위가 소속된 연고지 관할교구장들이
    고유권한(competenza)을 위임받은 주교회의 담당 위원장의 서명만으로는 문제발생여지가 있어서,시성성성의 지시대로 보완한 최종 공문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서울교구장 자격으로 제일 먼저 서명하였다.103위시성 후보의 연고지가 전혀 없는 교구장들(제주,청주, 춘천, 등)은 처음에 제외되었었으나, 연고지 변경 불가피의 변동사유 발생시를 대비하여, 모두 하기로 하였다. 시성성성에서는 이 공문이 [절대적 구비 근거요건]이 되는 것이다. 전 세계 특히 주변 관련국들의 대주교나 추기경(김수환추기경을 포함한, 일본, 대만, 필립핀,프랑스, 미국, 등)들이나 대통령이나 왕들이나 학회 대표들의 시성 지지 탄원서나 추천서나 진정서 같은 것은 다만,[반대하지 않는다]거나, [찬성한다]거나,나아가 [간청한다]고 하여도, 시성성성에서는 참고자료 정도로 다룰 뿐이지, 절대적인 필요 근거 문서는 아니다. 그 이유는 교구장 주교들이 시복시성 청원의 직권자들이기 때문이다.


    103위 시성기적심사관면청원서 사본,1983년 3월 5일 자, 한국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서명으로
    교황성하께 올린 문서


    103위 시성기적심사관면청원서 사본,1983년 3월 5일 자, 한국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서명으로
    교황성하께 올린 문서


     
     
    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또는   www.msgr-byon.org  
    입력 : 2016.10.14 오후 11:42:34
    Copyright ⓒ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Servant Hall of Msgr. Byo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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