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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 2013년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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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성지 2013년
 
안녕하십니까? 천진암 성지에 2012년 8월에 부임해온, 김학렬 요한 사도 신부입니다. 이제까지 천진암 성지에 관심과 사랑을 주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면서, 천진암 성지의 역사적 배경을 알려드립니다.
 
1. 우리 신부님들의 대 선배이신 주재용 신부님께서는, 이미 천진암 성지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밝혀 놓으셨습니다.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 1970》와 《선유의 천주사상과 제사문제, 1958》를 통하여, 천진암 ․ 주어사를 발견한 내력을 밝히셨습니다. 1779 기해년 겨울에 《이벽은 누구보다도 진리에 목말라하여 그 탐구에 열중하던 터라, 눈속을 헤매면서 먼저 주어사를 찾아갔다가, 거기에 없고 천진암에 모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천진암으로 돌아가서 모두 반가이 만나 장촉담경(張燭談經)을 하였다. -옹위 p.40》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천진암강학이 천주교의 기도모임이었다는 것을 다블뤼 주교도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1783년 겨울에는 청국 황제에게 세배 겸 달력 배수차 동지사(元旦使)를 따라가는 이승훈을 파견하여(옹위 p.43; 왕조실록 1801. 10. 27의 이만수의 토사주문; 황사영 백서 43행 ; 1838년 모방 신부의 서한 등 참조), 1784년 양력 2월에 영세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이벽은 즉시 두문불출하고 잠심열독으로 독서와 묵상으로 교리 연구에 전심전력하였고, 1784년 겨울에는 이가환, 이기양과 3일간이나 토론을 벌여 둘 다 굴복하여 개종하게 되었습니다(옹위 p.46 ; 백서 47행; 벽위편 4권 33). 그리고 1785년 명례방에서 설법교회(說法敎誨) 후, 문중박해에 의하여 《결코 배교자로 취급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옹위 p.51).
 
이승훈의 배교 부분에 관하여서도, 소위 《벽이문》이라는 것은 도리어 천주교를 은근히 두호하고 찬양하는 글로서, 당시 반대파들의(이기경, 홍낙안 등) 공통된 견해는 벽이문․시는 결코 배교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고, 이승훈의 이러한 수법은, 권일신이 1791 신해년에 《대저기학이(어)공맹지학요탄부정 - 대저 그 학은 크게 다르고 공맹지학은 요탄부정하다》고 풀 수도 있다며, 그 수법을 본떴던 것이라고 합니다(옹위 p.82). 그밖에도 3차의 배교논란과 참수 순교 부분에 관하여, 이승훈의 영예로운 순교를 《이 못난 불초가 변호하였사오니, 오늘 천국에서 우리 79위 복자들과 함께 지금 기뻐하소서. 1968. 9. 26. 복자축일에 춘천에서 주재용》이라 적고 있습니다. 대구교구장과 전주교구장, 그리고 유스티노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이렇게 연구하셨던 주재용 신부님의 글을, 제위 신부님들이 숙독하시어 천진암 성지에 관한 이해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2. 이벽성조 이장미사 중 김수환 추기경님 말씀(1979. 6.24 =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참조).
《지금 우리는 이 시간, 한국의 세자 요한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한국에 있어서 역시 주님의 길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서 갔던, 선구자였던 이벽선생의 유해를 모시고 그 추모미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1785년 한국 최초의 박해인 을사박해 사건도 실은 이벽선생의 교회예절과 강론이 도화선이었던 것입니다. 첫 박해가 일어났던 김범우 도마의 집은, 한국 땅에 있어서의 복음선교의 터전이었고, 그 집은 바로 오늘, 이 명동성당이 서 있는 종현언덕입니다. ---하느님을 더 잘 섬길수록, 부모를 더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철두철미한 유교적 사회관은, 모든 것을 부모에 대한 孝로써 판단하였고, 특히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였기에, 하느님을 믿으면 부모를 거스리는 것이 되고, 부모의 뜻을 따르며는, 하느님을 배반한 것 같은 갈등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갈등 때문에 이벽선생님도 한때 외적으로 믿음을 나타내는 일에 주저했으나, 자신의 마지막 시기에는, 기도와 보속과 묵상으로 보내시면서, 1785년 만 31세의 짧은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가족으로부터 오는 압박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 마음속에서 生을 다하신 분이십니다. ---이벽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느님을 흠숭하며 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광명과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모든 겨레가 삶으로써 이 겨레가 광명 속에 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 하셨습니다. --- 관심을 가진 성직자와 신자들이 끈질기게 노력하여, 지난 4월 10일 경기도 포천군 화현리에서 선생의 묘를 발견했고, 또 불가불 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급한 상황에서, 천진암으로 옮겨 모시는 도중, 이벽선생님이 전교의 터전으로 삼으셨던 바로 이 종현 언덕, 이 명동성당에 오늘 다녀가시게 된 사실도 대단히 뜻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분을 본받아서, 우리도 참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사랑합시다.》
 
3. 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에서는 2002년부터 열린 4차의 심포지움 노력 끝에, 2011년에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I, II》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논문들 가운데서도 특히 심상태 몬시뇰의 종합적인 견해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1권 p.301에 게재된 저의 논문도 참고하시어, 천진암 강학이 한국천주교회의 뿌리요 시작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내용은 1975년부터 변기영 몬시뇰이 줄기차게 주장한 내용들이니, 천진암 성지의 홈페이지, 자료실 - 시복시성추진 항목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4. 교황 요한 바울로 2세는 1993. 9. 21.에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 강복문을 보내오셨는데,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새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하셨습니다. 또한 2012년 10월 20일에 심상태 몬시뇰의 안내로 천진암 성지를 방문하신, 발터 카스퍼 추기경님께서는 성지 내의 창립자 묘역에 참배하는 신자들에게 강복하시고, 박물관과 유물들을 확인하신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I Martiri di Corea e i Fondatori della Chiesa cattolica in Corea preghino per noi ! :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들과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5. 천진암 성지 구역 내에는 묘역이 세 곳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창립선조들의 묘역과 조선교구설립자 성인들의 묘역, 그리고 창립자 가족들의 묘입니다. 조선교구를 설립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영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다가 1839 기해년 박해에 순교하신 분들은 성인이 되어 계시고, 60년 전의 똑같은 기해년 1779에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하신 분들은 아직도 시복이 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경우로 보자면, 증조할아버지 뻘의 창립성현들이 아직도 시복이 안 된 사실에 대하여,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하루 빨리 이 성업이 성취될 수 있기를 바라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 주임  김학렬 신부
입력 : 2012.12.05 오전 10: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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