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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구 신부 <반론>에 답한다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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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구 신부에 답함

2015. 9. 26.

1. 필자는 지난번 <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며 이의를 제기하였었다.; 일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에 앞서, 교회내외에 물의를 일으킨 발표가 있었다. ‘윤민구,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연구, 2014 국학자료원’ 이란 글이 발표된 것이다. 교회사는 역사학과 신학의 종합이므로, 사목적인 면에서 교회의 인가(Imprimatur)를 받아야만 책 출간이 가능한 데, 이를 무시하고, 추정에 의한 자신의 주관적 견해만이 진실이고, 타인의 견해는 오류라며 자신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추정에 의한 주관적 논리는 논자의 생각일 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고, 기초가 부실한 沙上樓閣사상누각으로서, 올바른 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밝혀보았다.

교회의 인가를 받아야 교회사에 관한 책을 출판할 수 있다고, 위와 같이 필자는 <소견>에서 주장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성과 언급이 윤민구 신부의 <반론>에 없으므로, 아래와 같이 다시 한 번 그 근거를 제시하며, 대답을 요구한다.

*수원교구 업무정보>규정집에는, 저작물의 출판 승인 규정(1998 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 승인, p. 80-85)이 게시되어있다.

*III. 사목분야(교회사 = 역사학 + 신학)에 속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앙과 도덕에 관한 저작물의 출판 승인 규정

- 주교회의 1998년 추계 정기총회승인-

제1조 목적. 이규정은 그리스도신자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저작물의 출판승인과 관련된 사항을 정한다.

제2조 사목자의 의무와 권리. 교회의 목자들은 신앙과 도덕의 진리가 온전히 보존되도록, 저작물이나 홍보매체들의 사용이 그리스도신자들의 신앙이나 도덕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감독하고, 또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저작물을 판단하여, 올바른 신앙이나 선량한 도덕을 해치는 저작물의 전시․판매․배포를 금지해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교회법 제24조 1항 참조).

제9조 학교교과서 채용. 성서, 신학, 교회법, 교회사, 그리고 종교나 윤리규율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 책들은 교회 관할권자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야 학교 교과서로 채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교회법 제27조 2항).

*그리고 p. 83에는 출판을 위한 양식으로, <출.판. 승.인. 신.청.서.>가 있다.

가. 윤민구 신부는 <쟁점연구>란 책 겉표지의 내면에, 윤민구 신부 저자를 소개하는 글에서, 자신이 ‘1983년에 로마 라테란 대학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황청에서 103위 한국순교자 시성청원인으로 일하였다’고 썼다.

지금은 청원인이라고 번역하지만, 당시에는 주교회의 공문에서도, ‘在로마 연락관’, 혹은 ‘시복시성 수속담당관’이라고 하였었다. 103위시성 확정의 결정적 단계인 기적심사관면이 1983년 6월 7일에 확정되는데, 윤신부의 전임자 초대 연락관은 서울교구 소속 박준영 신부(1977. 10. 13~1982. 6. 18, 약 5년간 재직)였고, 그 후임은 전주교구 소속의 김진석 신부(1982. 6. 18.~ 1983. 3., 약 1년 정도)였으며, 그 후임으로 윤민구 신부가 마지막에 와서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박준영 신부, 김진석 신부, 현재의 김종수 신부, 등은 모두 자신들이 교황청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데, 유독히 윤민구 신부만이 교황청에서 일하였다고 표지 내면에 쓴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민구 신부 자신의 생각에, 교구보다 상위의 기관인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교구의 규정과 교회법을 지키지 않고도 책을 출판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윤민구 신부는 근본으로 돌아가, 교회의 규정에 대하여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지, 그 답을 제일 먼저 하여야 한다.

나. 윤민구 신부는 이 같이 교도권의 지시를 무시하고, 교회의 인가 없이 책을 출판해 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09년에 출간된 < 103위 성인 탄생이야기>에서도 교도권의 인가를 무시한 채 책을 출판하였다.

1985년판 한국가톨릭대사전, p. 711에 보면, ‘시성운동일지에, 1971.12.13. 주교회의, 한국복자 시성추진안을 정식안건으로 채택하였다. 1975년에는 전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시성시복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76.4.21. 주교회의에서는 시성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 및 시성추진위원장에 김남수 주교를 선임하였다. 1977.10.13.에 시성추진위원회에서는 박준영 신부를 로마주재 한국순교복자수속 담당관으로 임명하여, 1978.4.13. 교황청에, 103위 시성청원서를 정식 접수시켰다. 1980.7.17.에 시성시복추진사업을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입안하고, 11월 17일에 변기영 신부를 시성시복추진부장으로 임명하였다. 1982. 5.28.에 주교단은 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보고관면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고, 6월 18일자로 김진석 신부를 박준영 신부 후임으로 로마주재 한국복자시성수속 담당관으로 교체하였다. 1983. 3. 7.에 김진석 신부 후임으로 윤민구 신부가 로마주재 시성수속 담당관으로 피임되었고, 6월 7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적심사 관면허락을 하였다.’ (한국가톨릭대사전 8권, 5332쪽 참조).

1980.5.16.부터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기념 준비위원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일하기 시작한 변기영 신부(신장본당주임)는 이어서,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 사업위원회 부위원장과 동시에 시복시성추진부장, 마카오 기념사업부장, 바티칸박물관내 한국전시관개선부장을 맡아서 동분서주하였다. 1982.5.28.에 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관면청원서를 전국주교단 연서명으로 받아 교황청에 제출하였고, 1983년 재의 수요일부터 전국적으로 순교자유해순회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시복시성추진부장 변기영 신부가 1983년 2월 12일부터 3월 6일까지 성청을 방문, 실무교섭을 벌이는 가운데, ‘시성심사 결정에 최종 고위자문 기구인, 로마나 로따의 Concistori들이 하는, 교황성하 앞에서의 연례 선서식에도 참석(1983년 2월 26일 사진 참조)하는 등, 교황님께 직접 시성청원을 하였다’.( 가톨릭신문 1983.3.27.; 순교정신의 불길 제 2호(1983.5.31.); 천진암 자료집 36권 참조). 변기영 시복시성추진부장 신부의 2월 성청 방문 기간 동안에, 로마주재 시성수속 담당관 김진석 신부와 윤민구 신부를 한자리에 불러 교체를 통보하였고, 3월에 김남수 주교의 성청방문 때 교체사실을 공식화 하였던 것이다.

다. 윤민구,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2002년 국학자료원 발행의 책도 교도권의 인가 없이 출간되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글은 교도권의 통제와 지시 밖에 있다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렇게 교회의 규정과 원칙에서 벗어난 <쟁점연구>글에 대하여, 처음부터 자세히 읽어볼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몇 가지 내용을 보고 나서, 모든 내용이 원칙을 도외시하고, 근거 없는 자신의 주관적 추정으로 글을 썼다고 판단하게 되었기에, 일일이 다 검토를 하지 않았었다.

2. 필자는 <소견>에서, 경향신문의 별지 부록으로 발간된 보감 (1906년 발행) 은 처음부터 현대적인 풀어쓰기를 하고 있어, p. 6 에서만 아오스딩(5회)과 그레고리오(4회)를 9회나 현대적 표기법으로 풀어서 쓰고 있다고 소견을 제기하였다.(사진 보감 (1906년 발행), 대한성교사기, p.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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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윤민구 신부는 <반론>하기를; 물론 김학렬 신부님의 지적대로 1906년에 나온 《보감》에 “아오스딩”과 “그레고리오”란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작년 필자의 책이 나온 직후에 열린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움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이다. 그런 표현을 쓴 것은 파리외방선교회 삐숑(송세흥) 신부님이다.(*아래 필자주에서, 이는 잘못 알고 있는 사실임을 밝힌다.) -- 단지 1906년에 나온 《보감》에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이 나온다면, 천주교 신자가 필사한 것처럼 위장하여 한글본 〈성교요지〉 등과 같은 거짓 글들을 지어낸 시기가 조금 더 앞당겨져서, 1906년 이후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필자주; 삐숑(Leon Pichon, 宋世興, 1893~1945; 조광,〈《조선성교사료》(Pro Corea-Documenta) >, 《교회와 역사》 84호, 1982. 참조) 신부는 1922년에야 한국에 입국하여, 1927년 9월부터 용산 대신학교 교수로 오기선 신부(1932년 수품) 등을 가르쳤고, 신설되는 덕정리 본당(德亭里本堂)의 초대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1933 년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에 기고하였다. 그러므로 보감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은 파리외방선교회 삐숑(송세흥) 신부님이 아니었다.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기관지인 보감의 최초 편집인은 드망쥬 신부였고, 나중에 갓등이와 수원(북수동)성당 주임신부도 역임한 김원영 아오스딩 신부가 그 실무자였다. 그러므로 김원영 신부 자신의 본명을 1906년에 벌써 아오스딩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보감해제 참조).

가. 필자는 앞선 <소견>에서, 아오스딩과 같은 원리에서 현대적 표기법으로 풀어서 쓴 기록이 있음을, ‘1895을미년에 간행된 치명일기에서, 223. 손 니고나오(니고놔 대신)와 444. 홍 다니스나오(다니스놔 대신), 622. 김 비오(대신)의 경우에도 그대로 풀어서 쓰고 있으므로, 1800년대에도 벌써 현대적인 철자법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하였다. 와스딩과 같이 니고놔, 다니스놔, 뵈 라고 표기하지 않고, 현대적 철자법을 따랐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1700년대 말에 번역되어, 신유박해시에 압수되었던 한글본 성년광익에서도, 현대적인 표현이 혼용되고 있다는 것을, [성년광익 I] 춘계 제 이편의 목록에서 ‘십구일셩어서비오(어서뵈 대신) 쥬교, 일이일 셩나사로(나자로 대신)현슈’라 하였고(p. 258), 본문에서도 그대로 어서비오와 나사로로 표현하고 있다.(p. 321, 332).’고 하였다. 어서비오와 같이 현대적 표기법이 1700년대에도 혼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漢字의 경우에는, 표기법이 계속 변화되는 과정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글본 [천주실의]에서는, 한글로 필사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을 梧斯悌諾(오오사제낙 - 천주실의 상권, 1편)으로 쓰고 있어, 한글로 표기하지 않고 한문 그대로 옮겨 쓰면서도, 梧斯諾 이라고 표기함으로써 를 잘못하여 탈자 하고 있다. 그 다음 [영언여작]에서는 亞吾斯丁으로 변화하였고, 황사영 백서에서(43행)는 디아즈의 성경직해(1636 -진복팔단 풀이)와 같이 奧斯定이라고 쓰고 있다. 1654년에 발행된 초성학요에서는 聖 奧定이라고 중간의 글자 를 생략하였다. 브르기애르 소주교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노력하던 유진길의 경우에는 奧斯定亞悟斯丁이라고 번갈아 가며 적고 있다. (달레 중, 285 각주 2, 302 각주 23, 304 각주 27, 310 각주 39). 현재 중국에서는 聖 思定(奧思定) 이라고 쓰고 있다. 한글의 경우에도, 필사본 [신명초행] 예수부활, 기도와 셩톄 부분에서는, ‘셩 와스디노’라고 표기하고 있다. (천진암성지자료집 113권, p. 170, 203.) 성경직해광익, 예수성명성경에서는 와스징와승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천진암성지자료집 111권, p. 133, 137.)

<소견>에서 또 이미 언급하였다.; 중국어의 성경과 기도문에서 인명과 지명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중국 북부의 예수회의 번역에서는 예수와 아멘이라고 하였으나, 중국 남부의 파리외방선교회의 구역에서는 이를 여수와 아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이태리 나폴리의 성가정 신학교 출신인 유 빠치피코 신부의 성모경은 아래와 같다. (중국 남부 홍콩에서 1847년 6월 19일에 작성한 것이다. 문서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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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una lettera cinese del P. Pacifico Ju, L‘Ave Maria in Coreana.
<야우 마리아, 만피 에라지아쟈, 쥬여이어 녀즁이위찬미, 이여수, 병위찬미,
(亞物 瑪利亞, 滿被 額辣濟亞者, 主與爾偕焉 女中爾爲讚美, 爾胎子耶蘇, 並爲讚美,
텬쥬셩모마리아, 위아등죄인, 금긔텬주, (지?)아등사후 아믄.>
天主聖母瑪利亞, 爲我等罪人, 今祈天主, 及我等死候 阿們.)

우리말로 아멘과 아믄을 중국어로 표기함에 있어, 처음 라명견 역본에서는 亞明이라 하였고, 이마두 역본에서는 亞孟이라 하였다. 영국 Cambridge 대학에 있는 Jean Basset 신부의 필사본에서는 아직도 亞孟이라고 하였으나, 로마Casanatese 도서관에 있는 Jean Basset의 필사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필레몬서 25절 등에 이르는 말미에서 阿孟이라고 표기하였고, 이후 개신교의 모리슨 역(1823)에서는 口亞口門이라 하였고, 유 빠치피코 신부는 阿們이라 함으로써 아멘의 중국어 표기가 꾸준히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후에 더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예수회 출신의 쁘아로 (Louis de Poirot, 1735-1814, 賀淸泰) 신부는 만주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로도 성경의 대부분을 번역하였는데, 불행히도 그의 번역은 아무것도 출판되지 못하고 원고만 보존되어 있다. 그의 중국어역 [古新聖經]의 원고는 현재 북경의 北堂圖書館에서 북경도서관으로 이전되었고, 上海 徐家淮藏書樓에 그 抄本이 보관되어 있다가 상해 도서관으로 이전되었다. 우리 신앙의 창립자들도 이를 구하여 복사해 읽었을 古新聖經 聖徒 瑪竇紀的 萬日略(<= Vangelo가 후에 복음서가 된다, 어느 교수의 견해)에서, 쁘아로 신부가 法里塞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사사성경에서는 바리서이(마태3,7)로, 쟝 바쎄 신부는 法吏叟(輩)로, 모리슨은 法利西口法口利口西輩로 표현하여 꾸준히 변화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 교회사에 관련된 모든 문서의 진실을 밝혀내려면,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를 밝히는 연구가 중요하다. 특히 시기(언제)를 밝히는 것은 歷史 연구에서 본질적이요 핵심적인 부분이다. 시기를 잘 못 산정하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윤민구 신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고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만 집착하여 본질을 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보았듯이 엉뚱한 것들을 증거라고 제시하면서 마치 1700년대와 1800년대에 이미 천주교에서 “아오스딩”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착각하게 하였다.

또한 <소견>에서 지적하였듯이, 윤민구 신부는 책 서문에서, ‘모든 자료가 1930년을 전후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 자료라고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그 근거로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이 시기를 푸는 열쇠라며, 1920-30년대는 와스딩과 아오스딩이 혼용되면서 차츰 아오스딩으로 변환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빨라도 혼용되던 시기인 1920-30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p. 292-297).

추정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나의 진실을 증명해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윤민구 신부는 먼저,‘1920-30년대는 와스딩과 아오스딩이 혼용되면서 차츰 아오스딩으로 변환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빨라도 혼용되던 시기인 1920-30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고 한, 1920-30년대의 글이라는 추정을 변경하여야 한다. 한편 아오스딩과 같은 표현 방법인, 현대적 풀어쓰기 표기법이, 1700년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성년광익 I] 춘계 제 이편에서‘십구일 셩어서비오(어서뵈 대신) 쥬교’와 같이 표기되고 있고, 교회의 첫 공식 기관지인 보감에서는, 1906년에 아오스딩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므로, 아오스딩만 1920년부터 표기되었다는 추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3. 윤민구 신부는 인명과 지명에서 개신교 성경의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짜이며 사기라고 표현하였다. (p. 62- ).

필자는 이에 대한 <소견>에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에서, 세례명을 그냥 이름으로 부르다가, 아예 호적에 기록되는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서울 교구의 83번째 양기섭(1905-1982)베드로 신부는 [가톨릭청년]이 1933년 6월에 창간되었을 때, 梁 彼得이란(성교요지4절 見彼得後書 참조) 필명으로 <비오 11세와 출판물>을 썼으나, 다음 호부터는 梁基涉이란 실명으로 글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88번째 김 彼得(1907-1954) 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풍천 출신으로, 11세에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후 1930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30년대에 金 彼得이란 필명으로 [가톨릭 청년]에 많은 글을 쓰며 활동하였다(1934년 5월호에 [천국의 존재]를 시작으로, 1935년 3월,4월,5월,9월,10월호 등).

82번째 이복영(1905 -1958) 요셉 신부는 이문근 신부의 삼촌으로서, 수원 (북수동) 본당신부로 사목하다가 선종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은 어디로]란 제목의 가톨릭청년 1935년 8월호 글에서, ‘예호아(天主)의 간선하신 백성 유태민족(猶太民族)은 구세주 예수를 학살한 죄벌로 말미암아.. 유태인’으로 표현하고 있어, 1900년대를 전후하여서, (즉 만천유고 등에 관한 문헌들이 필사되던 시기에도,) 천주교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개신교의 용어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예:성년광익, p. 469 나자릣 => 나사렛, 가톨릭청년 1933. 10월호 p. 15, 17.=빠리 외방선교회 송세흥 신부의 글).

이에 대한 윤민구 신부의 <비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실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1906년에 《보감》에서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을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위 2항에서 그 잘못을 지적하였다. 보감의 실무자는 송세흥 신부가 아니라, 갓등이와 수원(북수동)성당 주임신부도 역임하였던 김원영 아오스딩 신부였다.) 그때까지 천주교에서는 “아오스딩”이라고 하지 않고 스딩”이라고 썼다. 그런데도 송세흥(삐숑) 신부님은 “아오스딩”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한동안 천주교에서는 “아오스딩‘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두고 1906년부터 스딩”과 “아오스딩”이 혼용되어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설령 그것을 변화된 사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설명했듯이 문제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1933년에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가톨릭청년〉에 쓴 글에서 이 개신교 용어인 “나사렛”이란 말을 썼던 것이다. 그것도 용어를 착각하여 잘못 번역하면서 그런 개신교 용어를 썼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하였듯이 천주교회에서는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나자렛”이라고 한다. 그것이 천주교의 변함없는 전통이다. 그런데 왜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1933년에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개신교 용어인 “나사렛”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며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근거로 1900년대 천주교에서 자유롭게 개신교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학렬 신부님은 그런 억지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1900년대 전후를 살았던 정규하 신부님이 개신교 용어들이 등장하는 한글본 〈성교요지〉 등을 필사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소견> 글에서, 나자렛과 나자리스트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지식으로, 송세흥 신부의 글을 인용한 것은 아니었다. [성년광익 I] 춘계 제 이편의 목록에서 ‘십구일셩어서비오(어서뵈 대신) 쥬교, 일이일 셩나사로(나자로 대신)현슈’라 하였다는 것과(p. 258) 본문에서도 그대로 어서비오와 나사로로 표현하고 있다.(p. 321, 332).’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윤민구 신부는, 송세흥 신부가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가 나자리스트였는데도 나사렛이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그것도 용어를 착각하여 잘못 번역하면서 그런 개신교 용어를 썼던 것이다.’고 하고, ‘왜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1933년에 빠리외방전교회 송세흥(삐숑) 신부님이 개신교 용어인 “나사렛”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며,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그냥 송세흥 신부의 잘못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윤민구 신부는 <반론>에서 다음과 같이 또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한참 되던 시기인 1930년대에 두 분 신부님이 “필명”을 베드로의 개신교식 표현인 “彼得(피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1900년대를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고 일반화해서 주장할 수는 없다.

게다가 김피득 신부님은 이름 자체가 “피득”인데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양기섭 신부님은 필명으로 딱 한 번 “피득”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더욱이 이복영 신부님이 쓴 글은 시오니즘에 대한 논문식 글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상황과 글의 내용으로 보아 일본 논문을 많이 차용하여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 논문 속에 나오는 개신교식 용어들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더욱이 이복영 신부님이 쓴 “예호아”란 용어도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초기 개신교 성서에서는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耶和華(야화화)”를 우리식으로 그대로 읽어 “야화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다 나중에 “여호와”라고 고쳐서 사용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그것을 우리말로 “예호아”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이복영 신부님은 이런 정체불명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 개신교에서는 중국 개신교 성서에 나오는 한자 “耶和華(야화화)를 일본어로는 “エホバ (에호바)”라고 읽는다.

어떻든 이렇게 이복영 신부님이 “여호아”든 “예호아”든 이런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사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복영 신부님이 하느님의 이름을, 그것도 개신교풍의 표현인 “예호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 역시 이복영 신부님이 일본 논문에 나온 내용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본 논문에 나오는 개신교풍의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이복영 신부님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또한 천주교 신자들이 “예호아”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옆에 괄호에다 그것이 “천주”를 가리킨다는 것을 부연 설명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근거로 “1900년대를 전후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고 일반화해서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학렬 신부님은 이런 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근거로 개신교 용어들이 나오는 한글본 〈성교요지〉 등을 1900년대를 전후해서 살았던 정규하 신부님이 필사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심지어 김학렬 신부님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펼치며 ‘천주교 성서에서 이미 먼저 개신교식 용어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천주교 신부들이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였던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영향을 받아 개신교에서도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게 된 것’처럼 주장하였던 것이다.

윤민구 신부의 <반론>에 답하자면; 88번째 김 彼得(1907-1954) 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풍천 출신으로, 11세에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후 1930년에 서품을 받았다. 김피득 신부가 11세에 신학교에 들어온 구교우 자녀였으므로, 분명 어려서 1907년에 베드로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름도 피득으로 지었을 터인데, 이름을 彼得이라고 한 것에 관하여서는 제대로 <반론>에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피득 신부가 그대로 개신교 사기꾼이라는 것인지 답해야 한다. 또한 당시 천주교에서 사용하지 않던 유태인과 나사렛과, 피득도, 천주교에서 정규하 신부와 비슷한 시대에 사목한 신부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신부들이 잘못한 용어선택이었다면, 그 구체적 근거(청구학회나 일본 개신교의 글 등에서)를 제시하여야 한다.

제대로 된 검토와 근거도 없이, <반론>자 윤민구 신부는 자신의 어린 시절 본당(수원 북수동) 신부였던 이복영 요셉 신부를 일본 개신교의 글이나 번역해 내는 문제의 사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쟁점연구> p. ?책을내면서 와 같이 본당 수녀는 정통 교리를 가르쳤는데, 본당 신부는 개신교 글이나 번역해 냈다고 추정만 하지 말고, 그 근거를 밝혀야 한다. 필자의 옛 전임 본당신부였으므로 기억하는 신자들과 함께 기일미사를 봉헌했던, 이복영 신부는 이문근 신부의 삼촌으로서, 윤형중과 양기섭 신부와 함께 1930년 서품 이후, 교구장 비서와 소신학교 교사, 경향신문 창간 위원(해방 후 복간 때에는 총무, 사장서리 역임) 등을 거쳐 수원(북수동) 본당 신부(1948.8 - 1958.8)를 지내다 선종하였다. 윤민구 신부는 사기를 치는 근거가 되는 청구학회의 글들과 함께, 어린 시절의 본당신부인 <이복영 신부님이 일본 논문에 나온 내용을 차용> 하는 구체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4. <반론>자 윤민구 신부는, ‘2014년 6월 말 필자는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인 얼마 전, 김학렬 신부님이 반론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책이나 논문 형식이 아니었고, 분량도 A4 용지 4쪽짜리였으며, 천진암성지 게시판과 수원교구 사제들의 게시판에 올렸다.’고 하였다.

<쟁점연구> P. 374에서는; ‘<이벽전>에서는 이벽이 1778년에 [홍군사]에게서 <천학전함>을 받아 읽은 후 천주교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이벽이 홍대용(1731-1783)에게서 한문서학서들을 받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홍대용은 노론쪽 인물이고 이벽과 그의 집안은 남인에 속하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차기진 박사의 말을 <가능성이 희박한 추정>이 아니라, <진실이 확실한 추정>처럼 인용하고 있다.

윤민구 신부에 답한다 ; 책으로 내려면, 우선 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길 바라며, ‘책이나 논문 형식이 아니었고, 분량도 A4 용지 4쪽짜리’가 아니라서, 길게 써야 권위가 있는 글이기를 바라면, 다음의 내용도 검토하여 답을 주기를 요구한다.

마태오 리치 신부가 처음으로 지은 책, [교우론]은 북학파인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의 마음을 열어, 조선 사회에 파격적인 벗 사귐을 만들어 나갔다. 이들의 사귐은 [교우론]에 있는 ‘벗은 제 2의 나’라는 기이한 말을 통해 신분과 문화, 국경을 초월한 수평적 인간관을 낳고 있었다. 북학파는 야소교 교리의 핵심인 이웃사랑을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담헌 홍대용을 취사(取捨)하며 학문적으로 교류하던 초정 박제가(1750- 1805)는 담헌이 연행에서 귀국하자(1766년 17세 때) 즉시 찾아가 홍대용을 만났고, 박제가 역시 북경을 4차례나 다녀왔으며, 정파가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이덕조(벽)에 대한 추도시를 지어 남겼다. 그가 이벽을 이토록 그리워하였던 것은 어려서부터 봉선사에서 함께 공부한 친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정약용도 우인이덕조만사를 남겼다.) 

박제가, 정유각집, 四悼詩, 李德操 蘖

진(晉) 나라 사람들은 유명한 道理를 늘 앞세우고 나가면서, 晉人尙名理, 진인상명리

淸明한 道理를 알려 春秋戰國 亂世를 밝히고자 하였듯이, 淸譚亂厥世 청담난궐세

德操는 上下 左右 先後 모든이와 差別없이 對話하였었는데, 德操議六合, 덕조의육합

어찌하여 이리도 일찍 實存의 現世를 버리고 떠나간단 말인가? 何嘗離實際 하상이실제

匹夫로서 만나게 되는 運數에 매여 있으면서도, 匹夫關時運 필부관시운

집안 일 뒤로 하고, 濟民 經世에만 뜻을 두었었지! 破屋志經濟 파옥지경제

크나큰 온 宇宙, 天上天下를 가슴 속에 모두 품고 함께 보며, 胸中大璣衡 흉중대기형

東西南北 온 누리에 홀로 외로이 드높은 境地에까지 올랐었도다. 四海一孤詣 사해일고예

萬物의 本性과 實體를 直觀하고 알리며, 物物喩性體 물물유성체

萬有의 類別까지도 서로 견주며 밝혔었도다. 形形明比例 형형명비례

거친 벌 드넓어 아직 모두 未開拓인데, 鴻荒諒未開 홍황양미개

뉘 있어 그 어떤 유명한 말로라도 서로를 모두 매어 묶으리오? 名言孰相契 명언숙상계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 앵무새들에게 닥치면, 天風吹鸚鵡 천풍취앵무

새들은 거꾸로 몸을 뒤집어 새 장을 빠져나갈 꾀를 내듯이. 飜成出籠計 번성출농계

못 다 꾼, 남은 꿈마져 깨버리고, 머물던 움막도 미련없이 떠나서, 遽廬罷殘夢 거려파잔몽,

그 神靈한 智慧를 靑山에 파묻고 떠나가는구료! 靑山葬靈慧。청산장영혜

봄가을 오고 가는 세월은 잠시도 쉬지도 머물지도 않고, 春秋不暫停 춘추부잠정,

만물의 造化에는 죽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네. 万化無非逝 만화무비서,

드높이 나르며 울며 가는 기러기, 그 휘파람 소리에 보내노라! 高嘯送飛鴻 고소송비홍,

하늘과 땅도 한 쌍이 되어, 소리없이 哭하며 어두운 눈물 흘리도다! 乾坤暗雙涕 건곤암쌍체

홍대용의 부탁으로 박지원은 [회성원집발문]을 썼는데, 이는 [교우론]의 1장과 56장의 영락없는 판박이였다.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제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羽) 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 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홍대용도 [회성원집발문]에 얼굴을 모르는 곽집환에게 이미 마음이 통했으니 서로 벗으로 삼고, 벗으로 삼으면 서로 사랑하고 중히 여기자고 썼다. “담헌에 대해서는 사귐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마음은 통했던 것이니, 이미 마음이 통했으면 장차 친구로 삼아야 할 것이고, 이미 친구로 삼는다면 장차 사랑하고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미 사랑하고 중히 여긴다면 장차 그 도(道)에 나아감을 더욱 원하지 않겠는가?”

이같이 홍대용과 박지원이 [교우론]에 대해 언급한 것은, 삼강오륜의 수직적 봉건사회를 수평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삼강오륜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봉건사회의 윤리관 속에서, 수평적 관계인 붕우는 오륜의 제일 마지막 항목이었고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이덕무와 벗으로 통했으며, 열두세 살 아래인 제자 박제가(1750-1805), 유득공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박제가는 이때의 허물없는 사귐을 기리면서 서로 주고받았던 시와 편지를 모아 [백탑청연집]을 남겼다. 양반 가문 출신의 홍대용과 박지원은 참된 [교우론]을 알았기에, 서러움을 받는 서얼 출신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함께 제 2의 나로 친구처럼 지냈다. 그 때의 편지 및 시문을 간추려 벗의 우의에 대해 야박한 자들에게 경계로 삼기 위해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파가 다른 남인파의 이벽과도 친구처럼 지냈기에, 이벽이 홍대용에게서 [천학초함]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이벽전), 이벽의 순교 후에는 박제가가 [사도시]를 남길 수 있었다.

신해박해(1791) 중에 올린 이기경의 상소에서는, 이기경 본인과 채제공 역시 [천주실의]를 읽은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초정 박제가는 1778년 1차 연행에서 채제공의 종사관으로 수행을 하였었다. 박제가 역시 이때를 전후하여 [천학초함] 전권을 읽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이벽 성조의 순교 후인, <1786년 1월 22일 朝參時에 박제가가 품었던 생각> 속에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신이 듣기에, 중국의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법에 정통하다 합니다. 국가에서 관상감 한 부서를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머물게 하고, 나라의 인재들로 하여금 천문과 천체의 운행, 악기나 천문관측기구의 제도, 농잠, 의약, 기후의 이치 및 벽돌을 만들어 궁궐과 성곽과 다리를 짓는 방법, 구리나 옥을 채굴하고 유리를 구워내는 방법, 화포를 설치하는 법, 관개하는 법, 무거운 것을 멀리 옮기는 기술을 배우게 하십시오.(천학초함, 기편) 그러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라를 다스리는데 알맞게 쓸 인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 신의 생각에 그들 무리 수십 명을 한 곳에 거처하게 하면, 난을 일으키지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고 모든 욕망을 끊은 채, 먼 나라를 여행하며 포교하는 것만을 신념으로 삼고 있습니다.(천학초함, 리편) 그들의 종교가 천당과 지옥을 독실하게 믿어 불교와 차이가 없지만, 후생의 도구는 불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를 가져오고 그중의 하나를 금한다면, 옳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다만 저들에 대한 대우가 적절치 않아, 불러도 오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초정 박제가는 이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과학과 기술을 배우자고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이렇게 건의하고 있으며, 정약용과 더불어 종두법을 함께 연구하는 등, 이들은 붕당을 초월하여 실용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교류로 미루어 보아, 이벽 역시 박제가의 스승 격인 홍대용을 만나서 연행사실을 듣고 배웠으며, [천학초함]도 전수하여 보았다는 ‘이벽전’의 내용이 -(부연사 홍군사로써 천학전함을 증수하여 몰독주야하시더니)-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명(1658 - 1722)은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내다가 숙종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고부사로 북경에 가면서 이기지(1690 - 1722)를 자제군관으로 대동하였던 노론의 거목이었다. 1795년에 노론이 야소교를 믿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을 때, 정조는 ‘야소교가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이명의 편지를 인용하여 남인을 보호하였다. (불국사 120) 정조가 평택 안핵어사로 파견한 김희채(1744-1802)는 본관이 청풍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노론이었으나, 이동욱의 從婿로서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있으면서 3년 동안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지 않은 사실을 엄폐하기 위함이었음이 드러나고 있고, 당시 보고 선상에 있던 승지도 이동욱의 從兄 이동현이었다.

이밖에 소론에서도 정파를 초월하여 姜世晃의 아들 姜彛天이 천주교를 수용하였고, 안동 김문의 봉사손이었던 노론의 金健淳과 그의 族兄 金伯淳이 천주교를 신봉한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김건순은 애초 주문모 신부에게 북벌을 설득하고 이용후생을 배우고자 접근하였다. 담헌 홍대용 등과 큰 테두리를 공유하는 장면이다. 노론 명문 집안 출신인 김건순은 이미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리치 신부의 [기인십편]을 통해 일찍부터 천주교를 알고 있었다. 그는 권철신을 밤으로 찾아가 교리를 배웠고,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받고 서울로 찾아가 요사팟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김건순은 이후 친척과 친구들에게 신앙을 전파하여, 이중배, 원경도, 이현, 이희영, 정치상, 김치석 등을 입교시켰다.

* 담헌 홍대용의 교우관계

가. 담헌 홍대용은(1731 - 1783) 남양주시의 옛 미금나루(구산성지 맞은편) 근처에 있는 석실서원에서 미호선생(渼湖先生) 김원행(金元行)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석실서원의 위치는 이벽 성조가 천진암과 두미에 머물면서 서울과 포천을 왕래하던 길목에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1770년대에 홍대용을 찾아 만나 뵈올 수 있었다고 여겨지며, 또한 책도 빌려서 필사하여 간직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담헌과 관련해서 당시 사상계의 동향을 볼 때, 먼저 주목할 그룹은 낙론 가운데 김원행의 문하이다. 석실서원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붕당을 뛰어넘는 지식인 사이의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지형도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담헌은 애초 김원행이 중히 여기던 제자였고, 영조 말년 書筵에 낙론을 대표하는 신진 학자로서 세손(정조) 교육(1774/5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벽전]에서는, 이벽 성조가 홍군사로부터 [천학전함]을 전수하여 천학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담헌 홍대용을 언급한 것으로 나타나는 이 내용은, 이제까지의 연행일기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홍대용의 부연사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00년 정도만 지속되었던 元왕조(1279-1368)처럼, 100년 통치 후에는 망할 것으로 기대하던 청나라가 망하지 않고 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홍대용이 직접 목격하며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청 관계에 있어 시각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홍대용의 연행일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제까지 청나라는 원나라와 같이 오랑케가 세운 나라로서, 100년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며, 청에 도입된 발전된 서양의 문화에 대하여서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대용은 달랐다. 남당과 동당의 성당을 찾아, 4차례에 걸쳐 그곳의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볼 수가 있었고, 이들의 과학과 종교에 대하여 상당한 충격을 받았기에, 후에 고금도서집성 5,020권에 달하는 책을 정조 즉위 직후인 1777년에 은자 2,150냥을 주고 수입하여 열람하면서 공부를 하였고, 이들 가운데서 [천학초함]을 이벽이 빌리거나 복사하여 공부하였으리라고 본다. 후에 정약용은 이렇게 도입된 책들 가운데서 [기기도설]을 보고 응용하였다. 이규경이 언급한 이 [기기도설]에는 기계의 조작과 설계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고, 이와 더불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도 소상히 다루어져 있다. 이를 보면 정조와 정약용은 이 책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알았을 것이다.

또한 [이벽전]에, “혹 友人이 내왕 담소하면 주를 금하여 후천지지설에 묵계하여 유하시더니, 상천도를 작하야 봉점사 춘파대 사당 증하시더라.”고 하였다. 여기서 봉점사는 봉선사의 오기일 것이며, 이 절에는 마태오 리치의 세계지도 <건상곤여도>가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되어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담헌의 제자격인 박제가는 ‘ 봉선사를 들르다. 내가 어릴 적 글을 읽던 곳이다 ’며, 봉선사를 찾아 5개의 시를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연결 지어 볼 때, 이벽과 박제가는 어린 시절부터 봉선사에서 글을 읽는 학동으로 만나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벽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시를 지었다.

나. 홍대용은 서장관이 된 계부 홍억을 따라서 자제군관으로 1765년 11월 2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7일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1766년 정월 초하루의 조참례에 참여하여, 만주어로 행하는 의례의 소리를 들으며 연행을 시작하였다. 음악과 관련하여 담헌이 북경에서 목격한 경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월 9일에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연주까지 해보면서 서양문물을 상세히 접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담헌 홍대용은 서양 과학을 새롭게 발견하고, 비로소 그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우주와 자연에 관한 담헌의 지대한 관심은 그의 10대 종조인 홍언필과 그의 아들 홍섬이 각각 영의정이 되어 觀象監事관상감사를 겸하는 등, 천문학이나 역산학 전통이 그 집안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家學보다 좀 더 영향을 받았던 것은 그가 수학했던 김원행의 石室書院석실서원 주변의 象數學상수학 전통이었다. 김원행의 문인이었던 황윤석이 석실서원의 상수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고 있는데, 말년인 1776. 8. 4.에 홍대용을 만나 의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황윤석은 며칠 후 다시 홍대용의 집을 방문하여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담헌이 소장하고 있던 과학. 기술 관련 서학서들을 열람하였다. 여기에는 수리정온, 역사고성, 팔선대수표, 대수천미표, 페르비스트의 태서곤여전도, 유력연원, 율려정의 등 時憲曆시헌력의 토대가 되는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천학초함]도 소장하고 있었다. 홍대용은 북경에 다녀온 후(1766/7), 북경에서 사귄 반정균에게 화면재집과 함께 天文類函(天學初函)과 소자전서를 구해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뒤의 두 책은 평생 보고 싶어 하던 책이라고 하였다. 천문 우주론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을 자극한 요인으로는, 바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된 유럽의 과학 기술이었다. 담헌의 천문, 역산학과 우주론에서 西法의 영향이 컸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에서 서학이 출현한 후, 수용파(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등)와 거부파, 그리고 절충파인 西學中源設서학중원설이 등장하였다. 조선에서도 서학중원설은 붕당이나 학맥의 경계를 넘어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학자들만으로도 이헌경, 홍양호, 황윤석, 이가환 등이 서학중원설을 수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동시대를 산 담헌 홍대용의 경우에는, “하늘에 七曜가(정약용의 贈李檗 시에도 七曜가 등장한다.) 있어, 그 드리운 모양이 매우 분명한데, 다만 땅에서 아주 멀고, 사람의 시력에 한계가 있어서, 요순(堯舜)의 신명으로도 璿璣玉衡(선기옥형)과 勾股術(구고술)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 대개 西法이 출현한 후부터 기계기술의 오묘함이 堯舜이 남긴 비결을 깊이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현재 중국의 천문, 역산학보다는 서양의 그것이 더 우수하므로 서양의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담헌은 공맹으로부터 주희를 거쳐 온 전통위에서 서양 과학을 맞이하여, 자기 전통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며, ‘ 음양에 구속되고 理의 본의에 빠져서 천도를 살피지 못한 것이 선유들의 잘못이다’ 고 하였다. 담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의산문답은 1939년 연활자본 <담헌서>가 발간되기 전까지 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었다.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그 당시에도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제약을 받아, 저작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

다. 담헌 주위의 지식인 가운데 잘 알려진 그룹은 이른바 연암 박지원 일파이다. 연암 그룹은 담헌과 연암을 중심으로, 선배로는 김용겸, 원중거가 있었고, 후배로는 초정 박제가, 형암, 영재, 이서구 등이 있었다. 원중거가 1763/4년에 일본을 사행하고 기록한 [승사록] 과 [화국지]는 담헌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원중거는 일본 문화를 상세히 전하며, 그들의 시문 융성, 서적유통 등을 높이 평가하여 ‘해중문명’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담헌이 원중거를 취사했던 것처럼,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1750-1805)는 담헌을 취사하였다.

특히 초정 박제가는 급진적으로 문명의 위계를 세우고 중국의 선진성을 수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물교류 지향을 서양으로까지 확대시켜, 서양 선교사들을 영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초정은 다산 정약용과 절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창기 천주교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벽을 경제의 선비이자 사물의 본성을 깨우친 이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를 쓰고 있다. 초정의 이러한 경향은 다른 부류의 지식인 속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담헌 사후 이와 같이 급진적 인물들이 출현하는 현상은 선배에 대한 취사의 과정이 가속화하는 장면으로 보이는데, 이 흐름은 신유박해로 단절을 겪은 듯하다.

라. 김원행 문하의 홍대용과 동문이었던 정철조는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이가환의 매부였다. 이가환의 부친 이용휴의 집에는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기하원본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이가환은 매부 정철조로부터 수리정온을 빌려보기도 하였다. 황윤석은 정철조로부터 역상고성을 빌려 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철조를 매개로 담헌 등 연암일파와 성호학파의 학문적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생전의 담헌은 성호사설을 소장하여 읽은 듯하다. 연암일파와 이가환 등과의 교류는 담헌의 사후에 더욱 긴밀해졌다. 그중 초정 박제가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유하였다. 초정은 자신과 절친했던 친구 60인을 기린 시(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에서, 정철조와 이용휴, 그리고 이가환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노래하였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조선 후기 서양화법의 효시라고 하는 이희영(1756 - 1801)의 犬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희영은 예수 초상화를 3점이나 그렸으며, 신유박해로 순교자가 되었다. 이희영의 견도는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서 장식용으로 가져온 서양화와 북학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희영의 스승인 정철조(1730 - 1781)는 1772년 이후로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학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문학과 예술, 실용적인 학문 등을 연마했다. 그는 기중기, 도르래, 수차 등의 기계를 손수 만들고 그것을 시험했다. 그는 서양 과학 서적을 연구하여 천문관측이나 역산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다. 또한 정밀한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5. 윤민구 신부는 <반론>의 나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누구나 글을 쓰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글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은 필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 또한 어떤 글을 인용할 때도 좀 더 정확하게 옮겨서 글을 썼으면 좋겠다. 김학렬 신부님은 “[이벽전]에, 부친의 호가 사연이며 휘는 부만이고...”라고 말하였는데 《이벽전》에는 부친의 호가 아니라 “자(字)”가 사연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휘”는 부만이 아니라 “박만”이라고 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필자가 윤민구 신부의 [이벽전 연구]논문을 보고 적었는데, ‘부는 자(字)가 사연이요. 휘를 부만(溥萬)이라 하옵고’ 하였다. 필자가 호가 사연이라고 한 것은 분명 기억의 착오였다. 그러나 이런 ‘호와 자’ 글자의 오기야말로 지엽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휘가 부만(溥萬)이라 한 것은 윤민구 신부가 논문에서부터 잘못한 것이다. 오히려 부만(溥萬)박만(博萬)으로 읽고 필사할 정도라면, [이벽전]의 내용을 필사한 사람은 정자로 쓰여진 족보를 보지 못한 채, 흘려 쓴 한문을 잘 못 혼동하여 읽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실수로 치자면, [이벽전 연구]에서 윤민구 신부는 현장을 답사하며 확인하지 않았기에, [이벽전 연구] 말미에 나오는 ‘영월 자규루 상량문 정조(正祖) 신하(臣下) 채제공 찬하여 이동욱 서라.’고 하였으나, 천진암성지측에서 답사한 결과를 보면, 신하가 아니라 신해(辛亥)년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과 현장이 일치해야 사실로 확인이 되는 것이므로, 천진암성지에서는 수많은 답사를 통하여, 포천의 이송복 묘지명, 삼전도비, 영월 자규루 상량문, 봉선사, 등을 모두 확인하였다. 특히 이송복 묘지명을 찾아 포천으로 답사해본 결과, [이벽전]이 1920-30년대에 사기를 치기 위하여 찾아가 읽고 쓸 수는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영월 자규루 상량문 답사 사진; 2014년 10월 20일 사제게시판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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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윤민구 신부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上宰上書]라고 책표지까지 바꾸어 출판해 낸 것을, <여진천 역주, 황사영 백서 해제, 1999 기쁜소식, p. 73. 각주 98>에서까지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니, 宰相, 左相, 右相, 領相도 구별할 줄 모르는 무지를 서둘러 고쳐야 할 것이다. 그대신 [이벽전]에 나오는 이벽의 순교사실을, 신라 시대 최치원의 시를 빌어서 “巫峽重峰之歲 死(絲)入中天(華) 銀河列宿之年 錦還天(故)國” 으로 찾아서 변용하여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벌써 한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야 하며, 최치원이 숭복사의 비문을 썼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잘 앎과 동시에, 이벽 성조의 순교사실도 확실히 알아야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이벽 성조가 봉선사 춘파대에 기증한 상천도는, 초정 박제가가 봉선사를 찾아 지은 시와 이벽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지은 추도시와 관련지어 볼 때, 어린 시절부터 이벽과 초정이 정파를 넘어서 교유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초정 박제가의 스승격인 담헌 홍대용에 의하여 비로소 서양문물을 가감없이 수용하려는 형세가 조성되었고, 이 기회에 북경에 자제군관 자격으로 홍억 삼촌을 따라간 홍군사로부터, 연행 사실을 이벽 성조도 전해들을 수 있었고, [천학초함]을 증수하여 몰독주야 하였음도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순암 안정복을 따라 공부하였다는 [이벽전]의 ‘순암안선생에 종학하시더라.’ 등의 내용도, 권일신의 장인이 안정복이라는 사실과, 권철신과 안정복 사이에 오고간 편지 내용을 알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문장들임을 알 수 있다. 

송파의 삼전도비와, 포천의 이송복 묘지명, 그리고 자규루의 상량문에 대하여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채제공찬, 이동욱서) 이렇게 상세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답사하여 알고 적은 사람이 과연 누구였는가? 만천잡고 중에서, 천진암성지 인근의(庚子1780春 聽鶯有懷), 무수동, 원적산중8경의 원적산과 천덕봉, 그리고 복하천과 이현, 夜與李德操翫月次唐絶韻, 수종사, 斗尾呼舟에 대한 시를, 누가 일일이 답사하면서까지 사기성 작품을 남겼겠는가? 그러므로 이리화는, ‘만천유고 중 詩稿에 70여 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夜與李德操玩月次唐絶韻>에서는 이벽과 친구임을 나타내고 있고, 여러 시들을 보면 양수리와 마현에 왕래가 잦았던 사람임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6. 그러므로 정약용과 이승훈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던들, 이렇게 상세한 초기교회의 정보를 알려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글들이 후대의 사기성 작품이라면, 그 글의 저작자는 한국 가톨릭 교회사의 연구와 개척에 아주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학계에서 밝혀내기 이전에, 애타게 찾고 있던 많은 내용들이 이미 사실대로 상세히 적혀 있는 것을, <사기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인사동에서 [만천유고]를 복사할 당시에, 계산 정원태 선생의 증언은, ‘이런 학덕의 소유자는 위작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한학과 교회사의 선구자인 주재용 신부도, ‘만천유고 자체의 사실이 위작이 아님을 선생님과 함께 승복합니다’ 하였다. 이리화 교수도, ‘너무나 역사적인 배경이나 당시의 정황이 들어맞는 점으로 보아, 이 유고가 어떤 동기에서건, 뒷사람의 조작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여러 주변 정황이 사실과 부합한 것으로 보아, [만천유고]가 위작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윤민구 신부가 추정에 의한 주관적 논리로, 수 만 가지 추정을 바탕으로 두꺼운 책을 쓴다 할지라도, 이는 논자의 주관적 생각이고 추정일 뿐, 객관적인 진실로 입증될 수는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고, 기초가 부실한 沙上樓閣사상누각으로서, 올바른 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혀보았다. 끝.

입력 : 2015.09.26 오후 3: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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