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혜화동 대신하교 출신의 이계항 신부님과 [손들어 !] 사건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지난 6.25. 전란 중에 서품을 받으신 李 신부님과 그 아래 윗 반의 선배들님들에게는, 오늘의 교우들과 젊은 신부님들도 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장례 미사에 서울에서 유일하게 오신 안경렬 몬시뇰께서는 미사 후, 미리내 葬地로 가는 차 중에서, 필자에게, 선배들에 관한 歷史와 여러 가지 逸話를 후대 교우들과 후배 사제들에게도 많이 알려주도록 그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이른 바, 혜화동 대신학교에 있었던, “손들어!” 사건입니다. 해방 후부터 서울에도 각종 테러와 放火 사건이 빈번하였는데, 당시 연약한 정부도 치안역량이 부족하여, 서울 신학교에서도 할 수 없이 한동안 신학교 자치 방어를 위하여, 밤이면 대신학생들이 조를 짜서 차례로 밤에 야간 순찰을 돌았는데, 캄캄한 밤중에 혜화동 신학교 뒷동산 落山 기슭에서 마주치자, 먼저 상대방을 본 순찰조가 묻는 암호의 대답을 잊어버린 조가, 답을 못하고 딴 소리를 하는 바람에, 침입자들로 오인되어, [손들어 ! 이 새끼들아!], 외쳐도, 겁도 없이, [야, 우리야, 우리 ! 우리 몰라?] 하며, 상대방들이 우물쭈물 하자, 그만 손에 꼭 쥐고 다니던 木銃과 몽둥이로 후려갈기는 것을 피하여, 일부는 뒤로 도망(?)가기도 하고, 나머지는 두 손을 번쩍들고, 애걸하는 바람에, 겨우 심한 매는 맞지 않아, 그래도 모두들 정신이 번쩍나는 反共 訓練 敎育이 있었답니다.
사실 그까짖 암호가 무어야 하며, 설마 어떠랴 하던, 좀 얼간이(?) 신학생들이 하마터면, 잔뜩 겁먹고 긴장하여 독(?)이 오른 신학생 용사들(?)한테, 마치 성난 며느리한테 마른 북어처럼 두들겨 맞을 뻔한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나중에는 교수 신부님들에게까지도 알려져서 꽤 여러 해를 두고, 이른 바, [혜화동 신학생들의 손들어! 사건]으로서, 바로 이계항 신부님들 반도 주역(?)은 아니었으나, 참여하는 용맹한 용사들의 영예(?)를,,,..
양수리에서 양평 들어가지 직전, 냇갈이 한강과 합류하는 강변에서 이계항 신부님의 부모님들과 몇몇 회장님들이 (12명(?) 내외) 공산주의자들한테 두들겨 맞아 참살당하였는데, 황해도 같은 고향의 곡산 본당의 강주희 신부님(전 왕림본당 주임)도 부모님들과 바오로회 회원이었던 누님수녀님과 다른 수녀님들이 회장님들과 함께 공사주의자들한테 도끼와 낫과 몽둥이로 집단 참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강주희 신부님은 훗날, 수원교구에 오셔서도, 어쩌다가 한 잔 하시게 되면, 그 참극이 떠오르시는지, 자신의 인간적인 고독한 신세를 절감하시는지, “문패도 번지 수도 없는 주막에, 이슬비 내리는 이 밤이 애닲구료,,,”를 자주 부르셨읍니다.
이 계항 신부님역시, 참살당하신 순교자 부모님들과 은률 고향을 그리워하며,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를 자주 부르시던 내력을 오늘의 우리가 한번쯤 되새겨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수원교구의 연혁에 남는 이계항 신부님과 강주희 신부님은, 某 사제의 표현대로, [골수 반공주의자(骨髓 反共主義者)]이셨으며, 이 시대에 천주교 신앙 때문에 미움을 받아 (in odio fidei), 비참하였지만 그러나 거룩하게 순교한 가정의 사제들이였습니다. 오늘 이계항 신부님의 장례미사를 마치고,,,.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