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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丁若鏞선생 기념일 미사, 8월 5일 낮12시 천진암에서.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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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5일 금요일 낮 12시에,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는,
정약용 선생 기념일을 맞아 경축미사를 봉헌합니다. 요한 정약용 선생(1762~1836) 탄생 24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762년 8월 5일(그 해는 음력 6월 16일)에, 정약용 선생은 남한강과 북한강과 경안천이 합류하는 경기도 마재에서 탄생하여, 10세 이전부터, 자신보다 8세 年上의 사돈 간이 되는, 세자요한 曠菴 李檗 聖祖(1754~1785)를 아주 깊히 존경하며, 어려서부터 형들과 함께 따라다니면서, 당시로서는 매우 신기한고 새로운 지식을 배웠습니다.

당시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부터 天眞菴에 入山하여, 天學 연구와 실천에 몰두하였는데, 이 시기에 소년 정약용 선생은 兄들과 함께 천진암 성지의 天學道場, [李檗 讀書處]에 자주 찾아와서,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습니다.(天眞菴 石徑細如線, 昔我童時遊, 嘗從李檗, 究幾何原本, 天文學, 地理學, 數學,醫學, 曆學, 新敎之說(天主敎), 등. -墓誌銘, 天眞消搖集-).

1776년 14세 때 결혼한 정약용 선생은 1777년 결혼 인사 겸, 천진암의 이벽독서처에서 學問과 修道에 열중하는 이벽 성조께, 獻詩를 지어 증정하였으며, 약 15년간 종종 개최되었던 선비들의 [천진암 강학회]에 가장 年少한 나이로 참석하여, 조선 천주교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따라서, 조선천주교회 創立史에 관한 가장 많은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천진암에서의 天主敎 講學이 절정기에 이르기 시작한 1777년에는 正祖 임금(1752~ 1800)이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784년 甲辰년에 정약용 선생은 22세로, 10세 연상의 正祖 임금님을 처음으로 대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계기는 바로, 正祖 임금이 成均館 太學生들에게 내린, [中庸 講義 70條目]에 관한 숙제를, 曠菴 李檗 聖祖의 도움을 받아 작성, 제출하므로써, 도승지와 正祖 임금을 감탄시켜, 이 때부터 正祖의 부르심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1783년 가을, 이승훈 진사(1756~1801)가 이벽성조의 대리자로, 또 조선 천주교 신도들의 대표로서 북경에 파견되어, 이듬 해, 1784년 2월에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정약용 선생은 이승훈 진사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천주교 신부로 임명되어, 포교활동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선조들이 천주교회 제도를 잘 모르고 시작한 자발적인 사제서품은 정식 주교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서, 천주교회 법규상 무효이므로, 얼마 후, 조선 평신도들의 臨時準聖職團은 북경 주교의 지시로 중단조치되었습니다.

그 후 조정에서 正祖 임금에게 발탁되어, 많은 일을 하였고, 바쁜 중에도, 母校인 天眞菴을 종종 찾아와서 2,3일씩 묵으며, 詩를 써서 남겼습니다.

1801년 辛酉년 박해로 강진에 유배되어, 1818년에 석방될 때까지 많은 저서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조카 丁夏祥 바오로의 朝鮮敎區 설립을 위하여, 배후 조종과 후원을 하였고, 특히, 1827년 정해년에는 65세의 老軀를 이끌고 천진암을 마지막으로 찾아와서, 3일간 머물며, [天眞消搖集]을 남겼습니다.

183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년에는 蔓川遺稿, 李檗傳, 등, 조선천주교회 창립사(朝鮮天學日誌 ?)에 관한 역사서를 저술하여, 조카 정하상 회장을 통해, 프랑스 선교사로서는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Pierre Maubant 신부에게 전하였습니다. 이 저서가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玄錫文 가를로와 李在宜 토마스 등에 의하여 보전되고 전해진 후, 1845년에 입국한 Antoine Daveluy 신부에게 전해지므로써, 오늘날 우리는, 세계교회사 빛나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 정약용 선생은 유배생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6년, 중국인 余恒德 신부한테서 병자성사를 받고, 약 한달 후, 조카 정하상 바오로 회장의 안내로 조선에 처음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 Pierre Maubant 신부를 만나본 후, 그 해 즉 1836년 4월 7일(그 해는 음력 2월 22일)에 마재 고향 집에서 거룩히 선종하였다.

문중이나 후손들의 정약용 선생 忌祭祀니, 學會 같은 사회단체에서 선생을 기억하는 기념제, 등을 제외하고,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무관심한 편이지만, 천진암 성지에서는 매년 8월 5일, 탄생일에, 이 위대한 聖賢을 기념하며, 감사드리고 있다.

낮 12시 미사, 후 간소한 茶菓 순서가 있습니다. Msgr. Byon
입력 : 2012.03.02 오후 5: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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