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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Daveluy 주교,丁若鏞의 領洗本名은 요한 !.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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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eluy 主敎와 Pierre Maubant 神父의 原文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 - 聖 Daveluy 主敎 문헌


* (Les documents dans lesquels nous avons puise la plupart des faits relatifs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ee ont ete reunis par Tieng Jak iong dont il est parle souvent. Il fut nomme Jean au bapteme. Il eut part a presque toutes les affaires de la religion ab initio et etait parent ou ami de presque tous les principaux chefs. Homme distingue dans les lettres et les charges publiques, il eut la faiblesse d'abandonner la Religion, ce qui ne lui evita pas l'exil en 1801. Gracie plusieurs annees apres, il pratiqua avec ferveur, se livra longtemps a tous les exercices de la piete et d'une grande mortification exemplaire et mourut fort chretiennement. Il a laisse en outre quelques ecrits religieux. Nous n'avons fait que copier et relier ces notes malheureusement trop brieves, mais fort bien ecrites.),,, A.M.E. vol 4 (pp. 5-29) P. 1.


<飜譯文>

(朝鮮에 있어서 천주교의 起源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을 우리가 얻어낸 자료들은

丁若鏞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丁若鏞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는데,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관계하였으며 거의

모든 천주교 지도자들과 인척이거나 친구 사이였다. 학문과 관직에 있어 뛰어난 인물이

었으나 천주교를 저버리는 나약함을 보였음에도 1801년 유배를 면치 못했다. 수년 후에

赦免을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심행위와 모범적인 苦行의 실천에 오랫 동안

온 힘을 기울였으며, 지극히 천주교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며 죽었다. 한 편으로 그는

天主敎에 관한 몇 가지 글을 남겼는데, 우리가 한 일은 대단히 잘 쓰여진, 그러나 애석

하게도 너무나 짧은 그의 기록들을 단지 옮겨 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 정약용 선생은 1784년 4월 하순 경(?) 서울 수표동에 있던 이벽 성조의 자택에서

이승훈 진사한테 세례성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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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eng Jean, dit iak-iong, dit que la religion etait connue en Coree pres de 200 ans avant les conferences de Ni Pieki.,,.M.E. vol 4 (pp.5 -29) -P. 2.


(若鏞이라고 부르는 丁요한은, 말하기를, 李檗의 講學보다 200년 앞서 조선에는 이미

이 종교(천주교)가 벌써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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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문헌 중 한국천주교회 창립에 관한 부분


St. Pierre Maubant

聖 Maubant 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이며,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3명의 15세 조선 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즉, 1838년 10월 3일에

龍仁 양지 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Mr. Langlois신부에게 보낸 문헌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어, 일부 발췌하여 옮겨봅니다.

"
[…]Nous avons pu cette annee nous procurer secre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e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ee. Elles diffe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ees d'apre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e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een nomme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c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ee. Un nomme Koang, qui rec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e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elytes il envoya en 1783 a Peking un autre delegue egalemant nomme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c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e, sous le nom de Pierre[…]"



여기서 대표자란 이승훈을 말한다.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ee a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eres

Yangtchi 3 Xbre 1838.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etablissement)에 관하여, 말로만 듣던,

손으로 기록한 비망록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즉, 1720년,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강희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사신 이공(李公, 역자 주. 이이명:李?命)이 서양선교사들

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역자 주. 광암(曠菴) 이벽(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전심으로 받아들였고

(embrassa la religion chretien), […]광(광암)이라는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e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elegue)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요한 정약용 선생]이라고 불러야 한다.

<관련 고문서 원본 사진 보기는 Photos 난의 최하단 [敎會史 原本資料 난의 Daveluy]로
들어가면 됩니다> Msgr.Byon
입력 : 2012.03.02 오후 5: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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