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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최재용신부님 모친 故 민마리아님 고별미사 메아리 !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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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당님이 돌아가셨다고? 금년 93세시라니, 최신부님이 효자시군 ! 이제 그런 천주교 신자 또 보기 어렵겠네 !” 3일 전 부고를 듣고 답한 후, 오늘 고별미사에는 추운 날씨에도 용인 시골의 퉁적골(泉里) 본당에는 많은 교우들과 200여명 사제들이 2분 주교님들과 함께, 성당 마당에까지 모여서서 거룩히 고별미사를 드렸다.

내가 민 마리아님을 처음 만나보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봄부터다. 미리내 본당 사제관에서 배유선 신부님(Justin Bellouse O.F.M.)의 한국말 공부를 도와드리다가, 윤마두 신부님(尹亨重)이 부임하자, 퉁적골 공소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다. 당시 소신학생(高 2年?)이었던 최발도로메오의 어머니 민마리아님은 무척이나 부지런한 시골 부인이었다. 먹뱅이(墨坊里) 입구에서 꽤 떨어진 퉁적골 공소에 무슨 예절이든 빠지시는 법이 없었다. 故 元수산나 자매님과 함께 기도와 성당일을 도맡아하시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이런 천주교신자들을 앞으로는 어디 가서 다시 볼 수 있으랴 ! 몇 년 전에 元 수산나 자매님의 장례 미사 때도, 수원, 서울, 인천, 청주, 대전 지역에서 모인 사제들이 20 여명 남짓하여 모두가 서로 놀랐다. 시골 동네 교우 장례미사인데 ! 대도시 아주 큰 본당에서 某 교구청 현역 원로사제 부친 장례미사 갔을 때보다 많은 사제들이!,,,퉁적골의 천주신앙인들이 이제 거의 다 승천하고 있다. !

두꺼운 [우리 말본(崔鉉培 著)]을 책상에 놓고 배신부님과 마주 앉아서 1년 내내 날마다 하루종일 떠들면서, 우리말 문법과 영어는, 사실은 필자가 그 때 제대로 배웠는데, 6.25. 3년간의 전란 후, 당시 중.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19세의 시골 소년으로 아직 신학생도 아닌 나와 배신부님에게, 공소 민회장님과 교우들은 아주 소박하고 친절하였으며, 모두가 가난한 농민들이었는데도, 열무, 참외, 감자, 햇콩, 쌈 상추, 등, 농사지은 것으로 우리 둘의 식복사 이 마리아자매님을 많이 도와주었다. 천주교신자가 한명도 없던 열교촌(裂敎村) 출신으로, 영세한지 2년밖에 안된, 나는 그 때, 원수산나, 민마리아 등, 퉁적골 교우들한테서, 첨례와 연도, 등 천주교 수계범절을 많이 익혔으니, 미리내 본당에서 1957년 9월에 신요셉신부님한테 혼자서 영세한 후, 1958년 12월에 퉁적골 공소 경당에서 노기남 주교님한테 견진성사를 받았을 뿐, 실로 신문교우(新門敎友)로서, 1959년은 1년간 퉁적골 공소에서 살면서, 천주교 신심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 후, 4.19와 5.16의 격랑기에, 마신부님(Don Martelli, S.D.B.)의 관대한 배려로, 한국에서 초창기 살레시회에 들어가, 백신부님(Don Miller, S.D.B.)의 지도로, 수도정신과 이태리어, 등을 배우면서도, 민회장님과 원수산나, 민마리아 등, 퉁적골 교우들 한테서 익힌 신심업으로 다른 입회 지원자들 틈에 낄 수가 있었다. 훗날, 내가 용인 고향이 속한 수원교구 신학생이 되어, 1968년도부터 여름과 겨울 방학 때면, 김효신 용인본당 신부님의 관대하신 허락으로, 늘 퉁적골 공소 경당에서 책 번역을 하며 지내었는데, 민회장님과 원 수산나 민마리아, 등, 퉁적골 교우들은 예루살렘 부인들처럼 나를 아주 많이 보살펴 주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思想(Teilhard de Chardin, S.J.)"도 1968년 방학 때 거기서 번역, 출판하였고, 칼 라너 신부의 “오늘의 인간과 종교”, “본성과 은총”(Karl Rahner, S.J.)도 방학 때, 거기서 번역하여 바오로 출판사에서 둘 다 1969년에 발행하였다.

훗날 사제가 되어, 1972년부터 용인본당신부가 되어 사목할 때도, 당시 32개 공소들 중에, 가을 추수 후, 그 어렵던 시절, 가장 먼저 교무금 쌀을 바쳐주는 퉁적골 교우들을 잊을 수가 없다. 뜨거운 신앙심의 폴랜드 교우들이, 유롭인들의 상상을 뒤엎고, 보이티야 신부를 교황 요한바오로 2세로 만들었듯이, 퉁적골 신자들의 신심은, 비신자였던 그 마을 유지 김규환 선생이 경당 터 3천평을 기부하게 하였고, 김진용 회장의 활약으로 교우들의 정성은 6.25. 전란 후 어렵던 그 시기에도, 경당을 건립하였으며, 최재용 신부를 비롯하여, 성심전교회 관구장 김데레사 수녀, A.F.I.의 김정옥 교수, 김마리아 평신도 자선사업 전문 봉사자(김영인 회장 동생), 민신부(민영천 회장 아드님), 이신부(이종만 회장 아드님), 등,,, 그 적은 산골에서 그 어느 다른 큰 읍내나 도시보다도, 성직자와 수도자, 사도직 활동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기복신앙(祈福信仰)과 사회주의 윤리철학이나 정치사상의 계절풍이, 우리 주님과 사도들의 초자연적 구원의 복음과 성사은총을 무색하게 만들어 나가면서, 나아가 우리 교회 신앙선조들의 순교 신앙마저 무력케 하고자, 박물관 유물처럼 만들려고 발악하는 이 광란의 시대에, 가난하고 고달프게 일하면서도, 내 일보다 교회 일에 우선하여 열성을 다하던, 퉁적골의 聖人들이 승천하는 소리는 이 땅에 소리없는 메아리 되어, 끊임없이 전승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상에서 살 때보다, 천상에서 더욱 더 열성으로 일하실 분들이시니까!!! Msgr. Byon
입력 : 2012.03.02 오후 5: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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