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주일)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 중 한분이신 암브로시오 녹암(鹿菴) 권철신( 權哲身, 1736~1801) 성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진암 성지 광암성당에서는, 후손들과 함께 낮 12시에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다과가 있읍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의 정신과 업적과 덕행을 되새기고, 감사드리면서, 이 어른들의 시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을 바칩시다. 장차 시복,시성되실 우리 신앙선조들에 관한 기념하는 날이 전혀 없이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러다가 한국 교회가 국제적인 불쌍민들의 집단이 될까 걱정입니다.
늦었지만, 이제 31회째(1981~2012), 심산궁곡의 산골에서나마, 우리 신앙선조들을 기념하는 정신으로 제사를 올립니다.너무나 촌스럽고 서툴다고 남들이 흉을 보든, 후대들이 탓을 하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조껀 하에서, 우리나름의 산골 제사랍니다. 혹시라도 뜻을 같이하는 교우들은 와서 함께합시다.
***************************************************************
이 기회에,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들의 고향과 강학 장소와 순교 사실에 관하여 다시 한번 더 몇가지 확실한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기념하는 위대한 순교자 권철신 성현에 관한 몇가지 점을 재확인하여 강조하고자 합니다.
①. 권철신 성현 5형제 분의 고향은 현재 양평읍 사무소와 양평 도서관과 양평 중고.등학교가 있는 양평군 양근면 갈산리입니다.
② 또한 산북면 下品里 앵자산 계곡의 지극히 협소한 30여평 내외의 주어사 터는, 권철신 성현이 잠시 머물렀던 곳(寓居)일 뿐, 여러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던 곳도 아니고, 지형상 물리적으로도 강학을 할 수 있는 곳도 아니며, 강학을 하였다는 기록도 전혀 없는 곳입니다. 더욱이, 정약용 선생이나 이벽 성조께서 주어사에 관한 흔적이나, 언급이나, 기록이 전혀 없는, 큰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③ 그리고 권철신 성현께서는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박해자들에 의하여 타살(打殺)되신 거룩한 순교자이십니다.
**************************************************************
① 권철신 성현 5형제의 고향 갈산리와 감호정
정약용 선생은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公은 諱가 哲身이고, 字가 旣明인데, 스스로 지은 號는 曰 鹿菴이며, 유명한 그곳에(名其所) 살았으니(居), 가로되(曰) 감호(鑑湖)라는 곳이다.(公諱哲身 字旣明 自號 曰鹿菴 名其所居 曰鑑湖..)”. 즉, 좀더 알기 쉽게 풀어 말하면, “공은 족보상 이름이 [철신]이고, 어려서 부르던 이름은 [기명]이며, 스스로 지은 호는 [녹암]인데, 저 유명한 명소에 살았으니, 가로되 [감호]라는 곳이다.”
또한, 1791년 신해년 박해 때, 동생 권일신 순교한 후에는, “녹암 권철신을 따르는 문도(門徒)들이 모두 발길을 끊어서, 권철신은, “대문을 닫아 걸고, 슬픔을 머금은 채, 10여 년간 산문(山門) 밖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門徒皆絶 公杜門銜哀 足跡不出乎 山門者十年.)고 정약용은 녹암 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지리적인 의미의 산문(山門)이란 계곡 안의 산을 등지고, 뒤쪽은 막히고, 앞쪽은 좌우의 양쪽 산자락이 마치 담처럼 둘러 있어, 한 곳이 대문(大門)처럼 좁혀져 있는 산어귀를 말한다. 즉 대부분 절이 있는 골짜기 입구처럼, 예컨대, 천진암 성지 입구나, 용문사 입구처럼. 그러나, 대석리(大石里)의 대감(大甘) 마을 입구는 넓은 벌판인데다가, 뒤쪽이 산을 등지고 막혀 있지 않고, 용담리, 백자리, 하품리, 상품리, 송현리 등 길고 드넓은 탁 터진 벌판지역이므로 산문(山門)이라는 표현이 해당될 수가 없다.
그러나 양근리(楊根里)에 연결된 바로 갈산리(葛山里)는 탕기(湯器)나 똬리처럼 둥글게 생긴 낮은 산자락으로 북쪽, 동쪽, 서쪽이 산으로 빙둘러 있고, 서남쪽으로만 약간 열려 있는 곳이다. 현재는 왜정 때 신규 도로를 낮은 산자락 능선으로 내었다가 계속 높낮이를 평탄케 하며, 확장한 신장로 때문에 좀 넓혀져 보이지만, 지금도 자세히 보면 산문(山門)의 표현이 적중된 지형(地形)이다. 정약용 선생의 지형에 관한 기록은 현재 양평 읍사무소와 도서관이 있는 갈산리(葛山里) 안 마을이 녹암 권철신이 살던 곳임에 적중되는 표현이다.
이곳 감호(鑑湖)와 갈산(葛山)을 거론할 때, Daveluy 주교는 그의 문헌에서 감호는 그대로 감호라고 하였는데, 갈산을 감산이라고 하고 있다. 즉, 권철신 형제들은 양근 감산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감호의 갈산’을, 합쳐서 줄여 말하던 우리말의 습관이니, 鑑湖의 鑑과 葛山의 山만을 따서 그렇게 단축하여 불렀다. 마치, 여수와 순천을 합쳐 여천시라고 함과 같이, 우리 국어에서, 충주와 청주를 합하여 줄여서 ‘충청도’라는 이름이, 또, 전주와 라주를 줄이고 합쳐서, ‘전라도’라는 지명 칭호가 된 것과 같다. 선교사들의 다른 문헌에서는 양근의 갈산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권철신의 직계 5대손 권오규 변호사(1900~1995), 동생 권오진 회장 및, 故 오기선 신부님,등의 증언과, 4대손들이 생존해 있던 1906년 경향잡지 1권 보감의, "대한성교사기"에서도 순교자 권철신은 양근 葛山里에 살았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鑑湖岩이 새겨진 옛날의 큰 바위가 발견되었으나, 양평은 원주민 노인들은 어려서부터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② 권철신이 잠시 走魚寺에 우거(寓居)하였을 때, 천진암에서 선비들의 강학이있었습니다. 주어사 터는 천주교회 창립과 별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1. 走魚寺라는 단어는 丁若鏞의 權哲身 墓誌銘과 丁若銓 墓誌銘에서 꼭 한번씩 나오는 것이 전부로서, 현재까지 문헌상 기록은 정약용의 글에서 2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어떤 관변 기록에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서종태박사).
2. 그런데, 더구나 走魚寺에서 講學이 있었다는 기록은 위의 거기에도 없고, 또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녹암이 [寓居走魚寺할 때] 강학이 있었다는 문장을 확대해석하는 史學人들이 종종 있을 뿐입니다. 나아가, 권철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簡札이나 墓誌銘 등에 나타나는 1768년 겨울, 1770년 여름, 1773년 겨울, 1777년 겨울, 1779년 겨울의 강학을 모두 走魚寺에서 한 것처럼, 붙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권철신의 생장향이며, 대부분이 書堂이 있던 楊根 葛山里에서, 또는 천진암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주어사에서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2. 寓居라는 말은, 隱居나, 蟄居나, 同居나, 獨居나, 別居, 등에서 보듯이, [잠시 거한다]는 뜻으로, 居하는 기간과 시기를 표현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짧게는 몇 시간이나(여름 소나기 올 때 원두막에 寓居한 후), 길어야 하루 이틀 정도입니다. 결국 녹암 공이 주어사에 寓居하던 시기를 말 할 뿐으로, 그 시기에 講學이 있었다고하여, 당시 천진암에서 있었던 강학도, 녹암 공이 우거하던 주어사에서도 하였다는 해석은 확대 오류의 큰 잘못입니다. 녹암 공이 주어사에 잠시 우거하던 시절에 강학은 앵자산의 天眞菴이나 鳳泰庵이나 樊魚寺나 日出庵이나, 楊根 鑑湖나 葛山, 등에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모든 기록은 현장 대조와 일치해야 하는데, 走魚寺 터의 地形은 30평여평 남짓한 아주 협소하여, 선비들의 빈번한 장기적인 모임은 地形上 物理的으로 不可能한 곳임을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곳입니다. 특히, 氷泉은 北向溪谷에만 있는 것으로, 주어사 터처럼 東南向 계곡에는 없는 것입니다(최석우 신부님과의 논쟁사 참고). 즉, 주어사에서는 적지 않은 선비들이 老少가 한데 모여서 講學할만한 場所도, 居處도, 食水도, 生活用水도, 모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곳입니다. 현재는 숯가마 터 하나가 오래동안 자리잡고 있고, 바위산 급경사 주변에 숯가마 인부들이 잠자던 한 두 평씩의 움막터 흔적이 한두곳 보일 뿐입니다.
4. 茶山은 천진암에서의 讀書處나 豪士昔講讀, 등에서 보듯이, 아주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들의 母校처럼, 수차례, 심지어 늙어서까지도 찾아가 머물며, 추억의 詩文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走魚寺에 대하여는 녹암이 우거하던 시기가 고작입니다. 주어사 터에 의미 부여는 매우 허탈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벽 성조와 정약용 선생의 주어사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특히 당시의 實學과 天學에 관 기록에 있어, 가장 비중 높은 정약용 선생의 기록에는 주어사 강학이란 기록이 全無합니다.
5. 楊根 葛山이나 鑑湖가 주어사보다는 비할 수 없이 더 의미있는 곳으로, 특히 당시 권철신과 권일신 같은 대학자들을 스승으로 섬기는 선비들이 영남(홍유한 子弟 洪樂質, 등)과 호남, 등 전국에서 많이 모여들어, 면학하던 학문의 전당이 있던 葛山은, 實學運動과 天學(=天主敎) 전파에 매우 의미있는 곳이며, 더욱이, 乙巳年 박해(1785년)와, 신해년 박해(1791년),또 을묘년 박해(1795년)와, 신유년 박해(1801년)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 현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權日身 형제들의 가옥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극심하여, 녹암공은 1791년부터 1801년까지 10년간 杜門不出하며 집밖에를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丁若鏞).
6. 丁若鏞 선생이 15세로 결혼한 후, 정유년(1777년)에 천진암에 와서 스승이신 이벽 광암 공에게 결혼 인사차 지어 드린 詩文(다산전집 제1권 첫머리)부터,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정해년(1827년)에 와서 며칠씩 머물며 지은 저 많은 詩文들(제2권)을 읽어보면 강학 장소 규명은 충분합니다.
7. 결론: 走魚寺는 한국천주교회 創立史 면에서나, 實學運動史 면에서나 그리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丁若鏞 선생도, 유배생활 前이나 後나, 주어사를 찾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남긴 기록도 全無합니다. 정약용 선생은 천진암 강학에 녹암 공의 참석을 밝히면서, 비록 신유년 박해 후이지만, 양근 갈산에 잔유하던 일부 후손들과 친지들에게 또다시 화근꺼리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양근 갈산의 권철신’선생도 참석하였다고 쓰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진, 심산궁곡의 협소하고, 이름만 남아 있다시피한 주어사에, 그나마 잠간 거하던 그 시기에 강학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이라 여깁니다.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其後七年 而謗生此 所謂盛筵難再也> 일찍이 기해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을 때, 주어사는 설중이었다. 이벽이 밤중에 이르러, 촛불들을 켜놓고 경서를 담론하였는데, 그 후 7년 후에, 천진암에서 있었던 이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겨서, 그러한 강학을 다시는 해보기 어려웠다.-정약용-
③ 권철신, 권일신, 형제는 모두 신해년 박해와 신유년 박해 때, 천주교 신앙 때문에 打殺되었습니다.
“권철신과 권일신은 모두 천주교를 하기 때문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以邪學杖斃-1807년 안동권씨 족보)”고 명시되어 있듯이, 두분이 모두 杖下殉敎하셨습니다.
<지형 설명 추가>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를 중심으로 강북 강변의 상하류 강가와 바닥은 거의가 주로 바위 암반으로 이루어저 있고, 강물 수심이 바로 아주 깊어서, 불순물이 가라앉기 때문에, 강북 강변가의 물은 맑고 깊고, 또 당연히 몹시 차가와서,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하였다. 양평읍 앞강 가의 오빈리(五賓里)에 있던 오로정(五老亭)은 언제부터인지 감호정(鑑湖亭)으로 되었고, 이 감호정에서는 선비들과 귀빈들이 자주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으며, 후에는 덕망이 높은 분의 거처가 있다고 하여, 덕고실(德高室)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아예 덕구실이라고도 한다. 마치 갈산을 칼산으로도 부르는 것과 같다. 아마 정조 임금까지도 존경하던 권일신 직암공이 윗 마을 갈산리에서 거처를 감호정 마을로 옮긴 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양근면의 앞강 남쪽, 즉 강상면, 강하면의 운심리, 성덕리, 세월리, 쪽은 비교적 넒은 평야의 논과 펀펀한 찰 질흙으로 강남쪽 강변이 형성되어 있고, 또 수심이 얕아서, 물이 맑지도 않고, 수초(水草)도 많아서, 거울처럼 물맑은 감호(鑑湖)라고 부를 수도 없고, 실제로 강남쪽을 감호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큰 우물은 필수적이다. 갈산리 양평읍 사무소 안 마당에는 복개한 큰 우물은 아직도 있어서, 가물 때는 앞마을 양근리(楊根里) 사람들까지 모두 퍼다 먹었다는, 아주 큰 우물인데, 강상면 대석리(大石里)의 대감(大甘) 마을은 그렇지 못하다. 양근면 갈산리(葛山里)는 앞 강이 바로 옆의 갈산에 붙어 있고, 비교적 얕은 산자락으로 둘러 쌓인 평지(平地)마을이라, 앞강 상류의 물이 스며들어 우물물이 많지만, 대석리의 대감마을은 뒷산 계곡도 아주 짧고, 산비탈은 경사가 심한 지역이라서, 비좁은 계곡 자체가 평소에도 또랑 물조차 흐르지 않는 건조한 좁은 또랑이다. 큰 물이 없고, 가뭄이 있을 때는 물을 구하기가 어려운 산비탈이므로, 양반 대가의 권철신네 여러 형제들의 많은 문족(門族)들을 비롯한 식객(食客)들의 빈번한 출입과 서당 운영 등을 감안할 때, 권철신 5형제분들의 생장향이 이른바, 대석리 대감마을로 보는 것은 늘 신빙성이 매우 어렵게 보여지는 점이었다. 양반대가들이 이런 곳에 생활 터전을 잡지 않는다.
그런데 양근면 오빈리의 감호정(鑑湖亭)과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과의 거리는 사십여리(18km)나 되는데, 더군다나 잦은 詩會를 참석하거나 주관하기 위하여는 걷는 거리에다가 늘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하는 통행수단 등을 감안할 때도, 권일신 형제분들이 강상면 대감마을에 살면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며, 더군다나 자기 집 마을에서 40여리 떨어진 강건너 정자 이름을 따서 자기 호를 짖는다는 것은 당시 상식에 좀 어긋난다. 선비들이 대개가 자기 집에 붙은 앞강이나 앞 냇갈 이름, 혹은 집에 붙은 뒷 동산 이름을 따서 자연스레 서로 부르며 호를 짖기 때문이다. 결국 후손들의 전승과 다산의 기록은 매우 부합된다.
후손들이 전하는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양근면(楊根面: 一名, 邑內面) 갈산리(葛山里)에 권철신(權哲身)네 5형제가 살았고, 권일신(權一身)은 훗날 감호정(鑑湖亭)이 있는 덕곡(德谷)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학문을 좋아하던 권일신(權日身)은 감호정(鑑湖亭)에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선비들이 자주 모여 시회(詩會)를 열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감호정(鑑湖亭)은 처음에 덕곡(德谷) 마을 앞강의 오로정(五老亭)이라고 불렀는데, 덕곡리(德谷里)를 훗날 덕고실(德高室)로 부르다가 지금은 덕구실로 부르기도 한다. 권철신 권일신 학자들을 말할 때, 감호(鑑湖)라는 말을 쓴는 것은 당시 자연스러운 습관이었다. 오로정(五老亭)에서 유래한 말인지는 모르나, 지금 이 지역을 五賓里, 즉 다섯 귀빈들에 연관된 이름이 붙어 있다.
마치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강진으로 귀양 간 후, 뒷동산에 다(茶)나무를 심고, 그 작은 산자락을 다산(茶山)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호(號)도 다산(茶山)이라고 한 것과 같다.
원래 선인(先人)들이 자기 호(號)를 정할 때, 지역 이름(예, 호남(湖南), 양근(陽根), 수원(水原)..)을 따서 짓는 법은 없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이나 아니면 자신이 거(居)하고 있는 장소 이름, 즉 이승훈(李承薰) 성현(聖賢)의 경우, “만천(蔓川)”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승훈 선생이 태어난 서울 중림동 반석방(盤石坊) 앞을 흐르는 냇갈 이름이었다. 서울역 뒤로 해서 원효로로 흐르는 이 냇물에는 덩굴풀이 우거져 있다 해서 사람들이 “덩굴내” 또는 덩굴풀 만(蔓)”이라는 글자를 쓴 “만초천(蔓草川)”을 “만천(蔓川)”이라고 불렀었다.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강진으로 귀양 가기 전 젊은 날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고도 하였으나, 자기 집 앞의 강물은 남한강(南漢江)과 북한강(北漢江)의 두갈래 강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므로, 두 강물 뜻이 있는, [二 水] 변에 쓰는, 열수(冽水)라고 하였듯이, 권일신이나 권철신이 자신들의 호처럼 사용하던 감호(鑑湖)는 감호정(鑑湖亭)있는 마을 앞 강물을 의미하는 것이지, 삼사십리 거리나 되는 강 건너 산골 비탈에 있는 대석리(大石里)의 大甘마을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감호(鑑湖)는 감호정(鑑湖亭)이 있고, 연결되어 있는 덕곡(德谷), 양근(楊根), 갈산(葛山)마을의 양평읍내 앞강을 의미한다.
1800년 6월경에 권상문이 체포된다. 이 때는 양근군 감옥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1801년 2월 초(11일경)에는 양아버지 권철신 옹이 체포되어, 서울감옥에서 무서운 매를 맞고, 2주일 후(2월25일경) 숨을 거둔다. 아직 사형선고가 확정되기 전이라서, 박해자들이 먼저 때려 죽이고 나서, 사형판결문을 작성하여 얻어내느라 법석을 떨었다.
1802년 1월 초(1월)에 권상문은 자기 본 고향에서 참수처형하도록 ,서울에서 양근으로 끌고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양근이 그 당시 권철신 형제들의 영향으로 가장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강건너 강상면 대석리의 대감마을에 끌고 가서 처형하게 할 이유가 없으며, 천주교신자들이 당시 가장 많기로 알려졌던, 양근면 양근리와 갈산리와 도주울(도곡리)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군청소재지 양근 앞강 강변에서 참수한다. 즉, 권상문의 고향 땅에서, 고향 마을에서 처형한 것이다. 권상문을, 신유박해 6개월 전에 체포 구속하던 세력과, 고향 땅으로 끌고 내려와서 처형케 하도록 강요하던 세력은, 증오심에 불타던 같은 세력이었다.즉, 천주교를 하므로 몽둥이로 때려서 죽였다(以邪學杖斃) - 1807년의 안동 권씨 족보.
65세에 건달들한테 몽둥이로 수없이 매맞아 죽은 老學者는 2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생일도, 기일도,아무런 기념일도 없이,어디서도 아무데서도 기억해주는 사람들 없이,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세우신, 거룩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비록 늦었지만 오늘에 와서야 무딘 후손 우리들이 기억하기 시작하게 되었읍니다.
1월 15일(주일)은 권철신(1736~1801) 성현을 기억하는 제31회(1981~2012) 기념일이니, 신부님들께서는 미사 강론 때 한 말씀씩 교우들에게 상기시켜주시고, 성묘라도 권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1월 15일(주일)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 중 한분이신 암브로시오 녹암(鹿菴) 권철신( 權哲身, 1736~1801) 성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진암 성지 광암성당에서는, 후손들과 함께 낮 12시에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다과가 있읍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의 정신과 업적과 덕행을 되새기고, 감사드리면서,
이 어른들의 시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을 바칩시다. 장차 시복,시성되실 우리 신앙선조들에 관한 기념하는 날이 전혀 없이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러다가 한국 교회가 선조들에게 예의가 없는 국제적으로 불쌍민들의 집단이 될까 걱정입니다. 늦었지만, 이제 31회째(1981~2012), 심산궁곡의 산골에서나마,신앙선조들을 잊지 않고자 기념하는 정신으로 제사를 올립니다. 너무나 촌스럽고 서툴다고 남들이 흉을 보든, 후대들이 탓을 하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조껀 하에서, 우리나름의 산골 제사랍니다. 혹시라도 뜻을 같이하는 교우들은 와서 함께합시다.
***************************************************************
이 기회에, 한국천주교회 창립성현들의 고향과 강학 장소와 순교 사실에 관하여 다시 한번 더 몇가지 확실한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기념하는 위대한 순교자 권철신 성현에 관한 몇가지 점을 재확인하여 강조하고자 합니다.
①. 권철신 성현 5형제 분의 고향은 . 현재 양평읍 사무소와 양평 도서관과 양평 중고.등학교가 있는 양평군 양근면 갈산리입니다
② 또한 산북면 下品里 앵자산 계곡의 지극히 협소한 30여평 내외의 주어사 터는, 권철신 성현이 잠시 머물렀던 곳(寓居)일 뿐, 여러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던 곳도 아니고, 지형상 물리적으로도 강학을 할 수 있는 곳도 아니며, 강학을 하였다는 기록도 전혀 없는 곳입니다. 더욱이, 정약용 선생이나 이벽 성조께서 주어사에 관한 흔적이나, 언급이나, 기록이 전혀 없는, 큰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③ 그리고 권철신 성현께서는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박해자들에 의하여 타살(打殺)되신 거룩한 순교
자이십니다.
**************************************************************
① 권철신 성현 5형제의 고향, 갈산리와 감호정
정약용 선생은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公은 諱가 哲身이고, 字가 旣明인데, 스스로 지은 號는 曰 鹿菴이며, 유명한 그곳에(名其所) 살았으니(居), 가로되(曰) 감호(鑑湖)라는 곳이다.(公諱哲身 字旣明 自號曰鹿菴 名其所居 曰鑑湖..)”. 즉, 좀더 알기 쉽게 풀어 말하면, “공은 족보상 이름이 [철신]이고, 어려서 부르던 이름은 [기명]이며, 스스로 지은 호는 [녹암]인데, 저 유명한 명소에 살았으니, 가로되 [감호]라는 곳이다.”
또한, 1791년 신해년 박해 때, 동생 권일신 순교한 후에는, “녹암 권철신을 따르는 문도(門徒)들이 모두 발길을 끊어서, 권철신은, “대문을 닫아 걸고, 슬픔을 머금은 채, 10여 년간 산문(山門) 밖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門徒皆絶 公杜門銜哀 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고 정약용은 녹암 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지리적인 의미의 산문(山門)이란 계곡 안의 산을 등지고, 뒤쪽은 막히고, 앞쪽은 좌우의 양쪽 산자락이 마치 담처럼 둘러 있어, 한 곳이 대문(大門)처럼 좁혀져 있는 산어귀를 말한다. 즉 대부분 절이 있는 골짜기 입구처럼, 예컨대, 천진암 성지 입구나, 용문사 입구처럼. 그러나, 대석리(大石里)의 대감(大甘) 마을 입구는 넓은 벌판인데다가, 뒤쪽이 산을 등지고 막혀 있지 않고, 용담리, 백자리, 하품리, 상품리, 송현리 등 길고 드넓은 탁 터진 벌판지역이므로 산문(山門)이라는 표현이 해당될 수가 없다.
그러나 양근리(楊根里)에 연결된 바로 갈산리(葛山里)는 탕기(湯器)나 똬리처럼 둥글게 생긴 낮은 산자락으로 북쪽, 동쪽, 서쪽이 산으로 빙둘러 있고, 서남쪽으로만 약간 열려 있는 곳이다. 현재는 왜정 때 신규 도로를 낮은 산자락 능선으로 내었다가 계속 높낮이를 평탄케 하며, 확장한 신장로 때문에 좀 넓혀져 보이지만, 지금도 자세히 보면 산문(山門)의 표현이 적중된 지형(地形)이다. 정약용 선생의 지형에 관한 기록은 현재 양평 읍사무소와 도서관이 있는 갈산리(葛山里) 안 마을이 녹암 권철신이 살던 곳임에 적중되는 표현이다.
이곳 감호(鑑湖)와 갈산(葛山)을 거론할 때, Daveluy 주교는 그의 문헌에서 감호는 그대로 감호라고 하였는데, 갈산을 감산이라고 하고 있다. 즉, 권철신 형제들은 양근 감산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감호의 갈산’을, 합쳐서 줄여 말하던 우리말의 습관이니, 鑑湖의 鑑과 葛山의 山만을 따서 그렇게 단축하여 불렀다. 마치, 여수와 순천을 합쳐 여천시라고 함과 같이, 우리 국어에서, 충주와 청주를 합하여 줄여서 ‘충청도’라는 이름이, 또, 전주와 라주를 줄이고 합쳐서, ‘전라도’라는 지명 칭호가 된 것과 같다. 선교사들의 다른 문헌에서는 양근의 갈산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권철신의 직계 5대손 권오규 변호사(1900~1995), 동생 권오진 회장 및, 故 오기선 신부님,등의 증언과, 4대손들이 생존해 있던 1906년 경향잡지 1권 보감의, "대한성교사기"에서도 순교자 권철신은 양근 葛山里에 살았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더욱이, 최근 鑑湖岩이 새겨진 옛날의 큰 바위가 있는 그대로 발견되었으나, 양평의 원주민 노인들은 어려서부터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다른 이론은 불가능합니다.
② 권철신이 잠시 走魚寺에 우거(寓居)하였을 때, 천진암에서 선비들의 강학이있었습니다.
주어사 터는 천주교회 창립과 별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1. 走魚寺라는 단어는 丁若鏞의 權哲身 墓誌銘과 丁若銓 墓誌銘에서 꼭 한번씩 나오는 것이 전부로서, 현재까지 문헌상 기록은 정약용의 글에서 2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어떤 관변 기록에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서종태박사). 2. 그런데, 더구나 走魚寺에서 講學이 있었다는 기록은 위의 거기에도 없고, 또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녹암이 [寓居走魚寺할 때] 강학이 있었다는 문장을 확대해석하는 史學人들이 종종 있을 뿐입니다. 나아가, 권철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簡札이나 墓誌銘 등에 나타나는 1768년 겨울, 1770년 여름, 1773년 겨울, 1777년 겨울, 1779년 겨울의 강학을 모두 走魚寺에서 한 것처럼, 붙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권철신의 생장향이며, 대부분이 書堂이 있던 楊根 葛山里에서, 또는 천진암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주어사에서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2. 寓居라는 말은, 隱居나, 蟄居나, 同居나, 獨居나, 別居, 등에서 보듯이, [잠시 거한다]는 뜻으로, 居하는 기간과 시기를 표현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짧게는 몇 시간이나(여름 소나기 올 때 원두막에 寓居한 후), 길어야 하루 이틀 정도입니다. 결국 녹암 공이 주어사에 寓居하던 시기를 말 할 뿐으로, 그 시기에 講學이 있었다고하여, 당시 천진암에서 있었던 강학도, 녹암 공이 우거하던 주어사에서도 하였다는 해석은 확대 오류의 큰 잘못입니다. 녹암 공이 주어사에 잠시 우거하던 시절에 강학은 앵자산의 天眞菴이나 鳳泰庵이나 樊魚寺나 日出庵이나, 楊根 鑑湖나 葛山, 등에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모든 기록은 현장 대조와 일치해야 하는데, 走魚寺 터의 地形은 30평여평 남짓한 아주 협소하여, 선비들의 빈번한 장기적인 모임은 地形上 物理的으로 不可能한 곳임을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곳입니다. 특히, 氷泉은 北向溪谷에만 있는 것으로, 주어사 터처럼 東南向 계곡에는 없는 것입니다(최석우 신부님과의 논쟁사 참고). 즉, 주어사에서는 적지 않은 선비들이 老少가 한데 모여서 講學할만한 場所도, 居處도, 食水도, 生活用水도, 모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곳입니다. 현재는 숯가마 터 하나가 오래동안 자리잡고 있고, 바위산 급경사 주변에 숯가마 인부들이 잠자던 한 두 평씩의 움막터 흔적이 한두곳 보일 뿐입니다.
4. 茶山은 천진암에서의 讀書處나 豪士昔講讀, 등에서 보듯이, 아주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들의 母校처럼, 수차례, 심지어 늙어서까지도 찾아가 머물며, 추억의 詩文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走魚寺에 대하여는 녹암이 우거하던 시기가 고작입니다. 주어사 터에 의미 부여는 매우 허탈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벽 성조와 정약용 선생의 주어사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특히 당시의 實學과 天學에 관 기록에 있어, 가장 비중 높은 정약용 선생의 기록에는 주어사 강학이란 기록이 全無합니다.
5. 楊根 葛山이나 鑑湖가 주어사보다는 비할 수 없이 더 의미있는 곳으로, 특히 당시 권철신과 권일신 같은 대학자들을 스승으로 섬기는 선비들이 영남(홍유한 子弟 洪樂質, 등)과 호남, 등 전국에서 많이 모여들어, 면학하던 학문의 전당이 있던 葛山은, 實學運動과 天學(=天主敎) 전파에 매우 의미있는 곳이며, 더욱이, 乙巳年 박해(1785년)와, 신해년 박해(1791년),또 을묘년 박해(1795년)와, 신유년 박해(1801년)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 현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權日身 형제들의 가옥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극심하여, 녹암공은 1791년부터 1801년까지 10년간 杜門不出하며 집밖에를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丁若鏞).
6. 丁若鏞 선생이 15세로 결혼한 후, 정유년(1777년)에 천진암에 와서 스승이신 이벽 광암 공에게 결혼 인사차 지어 드린 詩文(다산전집 제1권 첫머리)부터,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정해년(1827년)에 와서 며칠씩 머물며 지은 저 많은 詩文들(제2권)을 읽어보면 강학 장소 규명은 충분합니다.
주어사 터는 필자가 지난 30연간 100여회 이상 현장과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며, 관계문헌을 살펴본 바, 海雲堂大師義澄이 급경사 암반의 삼각주 같은 아주 비좁은 계곡 또랑가에 작은 거처(방 2개와 부엌 정도?)를 마련하고, 뒤에 한 두평짜리 金堂에 불상을 모시고, 상좌 한두명과 칩거하던 곳으로서, 숭정기원 후 무인년(1638년) 5월 해운당이라 부르던 의징 스님이 입멸하자, 그 상좌(제자)가 후에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참고走魚寺 터 해운당 대사 의징지비: 海雲堂大師 義澄之碑 <崇禎紀元後戊寅五月日卒 上佐 守堅天心> 숭정기원 후 무인년은 1638년 인조16년),
결론적으로, 走魚寺는 한국천주교회 創立史 면에서나, 實學運動史 면에서나 그리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丁若鏞 선생도, 유배생활 前이나 後나, 주어사를 찾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남긴 기록도 全無합니다. 정약용 선생은 천진암 강학에 녹암 공의 참석을 밝히면서, 비록 신유년 박해 후이지만, 양근 갈산에 잔유하던 일부 후손들과 친지들에게 또다시 화근꺼리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양근 갈산의 권철신’선생도 참석하였다고 쓰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진, 심산궁곡의 협소하고, 이름만 남아 있다시피한 주어사에, 그나마 잠간 거하던 그 시기에 강학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이라 여깁니다.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 其後七年 而謗生此 所謂盛筵難再也> 일찍이 기해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을 때, 주어사는 설중이었다. 이벽이 밤중에 이르러, 촛불들을 켜놓고 경서를 담론하였는데, 그 후 7년 후에, 천진암에서 있었던 이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겨서, 그러한 강학을 다시는 해보기 어려웠다.-정약용-
③ 권철신, 권일신, 형제는 모두 신해년 박해와 신유년 박해 때, 천주교 신앙 때문에 打殺되었습니다. 개국공신 권근의 후손이라, 당시 관리들이 직접 타살하지 않고 깡패 건달들을 사주하여 집에서 체포할 때부터 압송할 때도, 또 감금한 후에도, 형리들이 자리를 비우는 척하고 부랑자 건달패들로 하여금 때려 죽이게 하였다.
“권철신과 권일신은 모두 천주교를 하기 때문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以邪學杖斃-1807년 안동권씨 족보)”고 명시되어 있듯, 두분이 모두 杖下殉敎하셨습니다.신해년 박해와 신유년 박해 때 권일신과 권철신을 타살한 자들은 천주교를 이워하는 세력의 비호를 받는 관리들의 사주와 보호로, 당시 건달패 깡패들이니, 개국공신 권근의 후손이며 저명한 학자들이고, 대학자 순암 안정복의 사위가 되는 권일신과 그 집안 권철신 같은 이들을 관리들이 직접 타살까지 하지할 만큰 미련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리 해설 추가>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를 중심으로 강북 강변의 상하류 강가와 바닥은 거의가 주로 바위 암반으로 이루어저 있고, 강물 수심이 바로 아주 깊어서, 불순물이 가라앉기 때문에, 강북 강변가의 물은 맑고 깊고, 또 당연히 몹시 차가와서,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하였다. 양평읍 앞강 가의 오빈리(五賓里)에 있던 오로정(五老亭)은 언제부터인지 감호정(鑑湖亭)으로 되었고, 이 감호정에서는 선비들과 귀빈들이 자주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으며, 후에는 덕망이 높은 분의 거처가 있다고 하여, 덕고실(德高室)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아예 덕구실이라고도 한다. 마치 갈산을 칼산으로도 부르는 것과 같다. 아마 정조 임금까지도 존경하던 권일신 직암공이 윗 마을 갈산리에서 거처를 감호정 마을로 옮긴 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양근면의 앞강 남쪽, 즉 강상면, 강하면의 운심리, 성덕리, 세월리, 쪽은 비교적 넒은 평야의 논과 펀펀한 찰 질흙으로 강남쪽 강변이 형성되어 있고, 또 수심이 얕아서, 물이 맑지도 않고, 수초(水草)도 많아서, 거울처럼 물맑은 감호(鑑湖)라고 부를 수도 없고, 실제로 강남쪽을 감호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큰 우물은 필수적이다. 갈산리 양평읍 사무소 안 마당에는 복개한 큰 우물은 아직도 있어서, 가물 때는 앞마을 양근리(楊根里) 사람들까지 모두 퍼다 먹었다는, 아주 큰 우물인데, 강상면 대석리(大石里)의 대감(大甘) 마을은 그렇지 못하다. 양근면 갈산리(葛山里)는 앞 강이 바로 옆의 갈산에 붙어 있고, 비교적 얕은 산자락으로 둘러 쌓인 평지(平地)마을이라, 앞강 상류의 물이 스며들어 우물물이 많지만, 대석리의 대감마을은 뒷산 계곡도 아주 짧고, 산비탈은 경사가 심한 지역이라서, 비좁은 계곡 자체가 평소에도 또랑 물조차 흐르지 않는 건조한 좁은 또랑이다. 큰 물이 없고, 가뭄이 있을 때는 물을 구하기가 어려운 산비탈이므로, 양반 대가의 권철신네 여러 형제들의 많은 문족(門族)들을 비롯한 식객(食客)들의 빈번한 출입과 서당 운영 등을 감안할 때, 권철신 5형제분들의 생장향이 이른바, 대석리 대감마을로 보는 것은 늘 신빙성이 매우 어렵게 보여지는 점이었다. 양반대가들이 이런 곳에 생활 터전을 잡지 않는다.
그런데 양근면 오빈리의 감호정(鑑湖亭)과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과의 거리는 사십여리(18km)나 되는데, 더군다나 잦은 詩會를 참석하거나 주관하기 위하여는 걷는 거리에다가 늘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하는 통행수단 등을 감안할 때도, 권일신 형제분들이 강상면 대감마을에 살면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며, 더군다나 자기 집 마을에서 40여리 떨어진 강건너 정자 이름을 따서 자기 호를 짖는다는 것은 당시 상식에 좀 어긋난다. 선비들이 대개가 자기 집에 붙은 앞강이나 앞 냇갈 이름, 혹은 집에 붙은 뒷 동산 이름을 따서 자연스레 서로 부르며 호를 짖기 때문이다. 결국 후손들의 전승과 다산의 기록은 매우 부합된다.
후손들이 전하는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양근면(楊根面: 一名, 邑內面) 갈산리(葛山里)에 권철신(權哲身)네 5형제가 살았고, 권일신(權一身)은 훗날 감호정(鑑湖亭)이 있는 덕곡(德谷)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학문을 좋아하던 권일신(權日身)은 감호정(鑑湖亭)에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선비들이 자주 모여 시회(詩會)를 열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감호정(鑑湖亭)은 처음에 덕곡(德谷) 마을 앞강의 오로정(五老亭)이라고 불렀는데, 덕곡리(德谷里)를 훗날 덕고실(德高室)로 부르다가 지금은 덕구실로 부르기도 한다. 권철신 권일신 학자들을 말할 때, 감호(鑑湖)라는 말을 쓴는 것은 당시 자연스러운 습관이었다. 오로정(五老亭)에서 유래한 말인지는 모르나, 지금 이 지역을 五賓里, 즉 다섯 귀빈들에 연관된 이름이 붙어 있다.
마치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강진으로 귀양 간 후, 뒷동산에 다(茶)나무를 심고, 그 작은 산자락을 다산(茶山)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호(號)도 다산(茶山)이라고 한 것과 같다. 원래 선인(先人)들이 자기 호(號)를 정할 때, 지역 이름(예, 호남(湖南), 양근(陽根), 수원(水原)..)을 따서 짓는 법은 없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이나 아니면 자신이 거(居)하고 있는 장소 이름, 즉 이승훈(李承薰) 성현(聖賢)의 경우, “만천(蔓川)”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승훈 선생이 태어난 서울 중림동 반석방(盤石坊) 앞을 흐르는 냇갈 이름이었다. 서울역 뒤로 해서 원효로로 흐르는 이 냇물에는 덩굴풀이 우거져 있다 해서 사람들이 “덩굴내” 또는 덩굴풀 만(蔓)”이라는 글자를 쓴 “만초천(蔓草川)”을 “만천(蔓川)”이라고 불렀었다.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강진으로 귀양 가기 전 젊은 날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고도 하였으나, 자기 집 앞의 강물은 남한강(南漢江)과 북한강(北漢江)의 두갈래 강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므로, 두 강물 뜻이 있는, [二 水] 변에 쓰는, 열수(冽水)라고 하였듯이, 권일신이나 권철신이 자신들의 호처럼 사용하던 감호(鑑湖)는 감호정(鑑湖亭)있는 마을 앞 강물을 의미하는 것이지, 삼사십리 거리나 되는 강 건너 산골 비탈에 있는 대석리(大石里)의 大甘마을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감호(鑑湖)는 감호정(鑑湖亭)이 있고, 연결되어 있는 덕곡(德谷), 양근(楊根), 갈산(葛山)마을의 양평읍내 앞강을 의미한다.
1800년 6월경에 권상문이 체포된다. 이 때는 양근군 감옥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1801년 2월 초(11일경)에는 양아버지 권철신 옹이 체포되어, 서울감옥에서 관리들의 방치와 사주와 비호 하에 몰려들던 건달패들한테 무서운 매를 맞고, 2주일 후(2월25일경) 숨을 거둔다. 아직 사형선고가 확정되기 전이라서, 박해자들이 먼저 때려 죽이고 나서, 사형판결문을 작성하여 얻어내느라 법석을 떨었다.
1802년 1월 초(1월)에 권상문은 자기 본 고향에서 참수처형하도록 ,서울에서 양근으로 끌고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양근이 그 당시 권철신 형제들의 영향으로 가장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강건너 강상면 대석리의 대감마을에 끌고 가서 처형하게 할 이유가 없으며, 천주교신자들이 당시 가장 많기로 알려졌던, 양근면 양근리와 갈산리와 도주울(도곡리)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군청소재지 양근 앞강 강변에서 참수한다. 즉, 권상문의 고향 땅에서, 고향 마을에서 처형한 것이다. 권상문을, 신유박해 6개월 전에 체포 구속하던 세력과, 고향 땅으로 끌고 내려와서 처형케 하도록 강요하던 세력은, 증오심에 불타던 같은 세력이었다.즉, 천주교를 하므로 몽둥이로 때려서 죽였다
(以邪學杖斃) - 1807년의 안동 권씨 족보 ) .Msgr. Byon <2006-03-27> (08:47)
Msgr. Byon <2006-03-27> (0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