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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丁若鏞 선생의 母校, 天眞菴의 天學書堂이 조선 近代化에 끼친 영향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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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 天眞菴 聖地의 意義와 位相

차 례

들어가는 말

I 천진암은 전 세계에 자랑스러운 한국천주교 발상지.
II 천진암은 조선사회 개혁의 얼과 힘이 육성된 성지.
III 천진암은 정약용 문학의 꽃이 만발한 성지.

맺는 말

들어가는 말.

“남들이 기록으로 남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받은 사람은 신(神)으로부터 복(福)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헌을 기록할 수 있는 재능과 기회를 받은 사람도 신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록을 읽고 실행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받은 사람은 신으로부터 복을 더 받은 사람이다

200여 년 전 광주 천진암을 본거지로 하여, 광암 이벽(曠菴 李檗, 1754-1785)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젊은 선비들의 학문 연구 정신과 강학 활동, 등이 단순히 종교적인 면에서만 주로 거론되었으나, 당시 사회개혁과 민족 개화의 차원에서 조국 근대화에 끼친 영향과, 특히 사암 정약용(俟菴 丁若鏞, 1762-1836)의 청소년 시절에 그의 문학적인 자질을 드러내는 문헌들에 관해서는 좀 소홀히 한 편이다.

더욱이 이렇게 다각적인 면에서 광주 천진암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가치와 위상(位相)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을 보다 폭넓고 심도 있게 하려면 일이 너무 많아지므로, 여기서는 되도록 간결하게나마 그 윤곽을 설명하고, 각주의 출처나 원문, 번역문도 중복 제시하여, 관심 있는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I 천진암은 전 세계에 자랑스러운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은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의 움을 틔우고 싹이 돋게 한, 한국 천주교 발상지다. 특히, 유?불?천(儒?佛?天)의 환경 여건(環境 與件)을 합류시켜, 상호보완적인 노력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한 거룩한 곳이다. 즉, 유교의 젊은 선비들이 불교의 암자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를 세운, 실로 전 세계 천주교회 역사상 유일한 성지다.

지난 2천 여 년 간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전파된 천주교는 모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로마 대제국은 이스라엘임 베드로와 바오로가, 영국과 아일랜드는 이태리인 파드리시오가, 일본은 스페인인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중국은 이태리인 마테오 릿치가 선교하였다. 이처럼 모든 나라의 천주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세웠다. 그러나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의 젊은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여 시작하였으니, 학문적 대상의 수준에 있던 천주교 교리를 실행에까지 옮김으로써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켰다. 그 현장이 바로 천진암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가 천진암에서 출발하는 전후좌우 사정을 살펴보면, 순수 학문적인 수준에서 연구의 대상이었던 천주교 교리를, 지식 학습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의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결실을 맺었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무역 같은 기회를 맞아, 권력이나 재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순수 학문적인 연구를 계기로 실천에까지 나아가는 강학(講學)과 신앙수련의 도장(道場)이 바로 천진암이었다.

지난 1984년 한국천주교회의 103위 순교자들을 시성(諡聖)하면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한국천주교회가 선교사 없이 성직자 없이 한국인 평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졌음을 격찬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전 세계에서 한국뿐이다. 즉, 우리겨레는 선교사나 성직자나 누가 찾아와서 시키거나 가르쳐 주기 전에,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고 전파하며 수호하고 증거 하는 진리의 민족임을 전 세계 인류 역사 안에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조선천주교회는, 사실 1593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해양 세력 일본 침략군의 군종 신부로 남해안 진해에 상륙하여 머물던 서반아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 일행에 의해서나, 1637년 병자호란을 계기로 중국에 볼모로 8년간이나 머물다 온 소현세자와 묵암 이경상 일행과 함께 입국한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에 의한 활동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즉 전쟁을 계기로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되지 않았다. 그 시도는 있었으나 시도로 그칠 따름이었다.

또 숙종, 영조 때, 황해도 해안 해주 지역과,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회령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상인들에 의한 무역과 접촉은 있었으나 종교적 결실은 없었다. 해주나 회령 지역의 일부 백성들이 천주교를 신봉하며 부모제사를 소홀히 한다는, 수령방백들의 보고에 대하여, 당시 조선 중앙 정부의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가면서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오직 광주 천진암에서, 양반가문 출신의 순수하고 진솔한 천재적인 선비들에 의해서, 특히 광암 이벽 중심의 천학(天學) 운동이 실제 생활 개혁을 전제로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조선천주교회 탄생과 창립을 성사시켰다.

조선시대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단 일행에 의해 서구문화에 관한 서적들과 함께 천주교 책들도 들어왔는데, 이벽에 앞선 여러 학자들이 이미 천학(天學)이라고 부르던 천주교에 관하여 알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연구도 하고 비판도 하였다. 특히, 이수광(1563-1628), 이경상(1603-1647), 허균(1569-1618), 정두원(1581`-?), 이이명(1658-1722), 홍대용(1735-1783), 이익(1681-1763), 신후담(1702-1761), 안정복(1712-1791), 홍유한(1726-1785), 등은 천주교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처음 200여 년간은 이들 서적들이 선비들의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다만 이벽 광암 시대에 오면서부터는 보다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나아가 이벽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젊은 학자들에 의해서 실행에까지 옮겨지면서, 종교 단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출발의 현장이 바로 광주 천진암이다.

특히, 이벽 선생은 그 가문이 고려와 이조 시대에 국난을 당하여 왕을 보필하며 국권을 수호한 애국충절의 저명한 신하들을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원(元나)라가 고려를 점령하여 60여년가까이 고려의 왕과 왕세자, 신하들까지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忠宣王(1275-1314)을 모시고, 원나라 서울에 萬卷堂이라는 도서관 겸 연구원을 세워, 고려의 인재들을 선발하여 유학시키며,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益齊 李齊賢(1287-1367)의 후예가 바로 이벽 선생이다.

또한 조선조 임진왜란 7년간 선조 임금을 안전하게 모시었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선조의 명으로 명나라에 가서 지원군을 오게 한 知退堂 李廷馨(1549-1607)이 바로 익제 이제현의 후손이며, 이벽선생의 조상인데, 특히, 이정형은 자신보다 12세 연하의 芝峯 李睡光(1563-1628)을 선발하여 수행원으로 삼아, 명나라에 동행하여, 귀국 길에 天主實義를 비롯한 新刊 西洋書籍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국내에 최초로 가지고 들어와 읽고 전하면서, 芝峯類說을 집필하였다.

더욱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된 후, 인조의 명을 받아,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8년간 모시고 청나라에서의 볼모살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케 하는 ?菴 李慶相(1603~1647)은 이정형의 친 손자이며, 이벽 선생의 직계 현고조(玄高祖)로서, 이벽선생의 집안에는 당시 국내에서는 가장 풍부한 외국 서적들이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서당이나 서원보다도 많이 전해내려왔고, 특히 국가의 위기에 신명을 바쳐서 충성을 다하는 애국심이 家風으로 되어 있는 집안이었다.

1770년대 초부터, 광주산맥의 천진암 계곡에서는, 韓民族의 젊은 선비들이, 儒敎의 교육을 받은 지식으로, 佛敎의 암자에서, 天主敎를 연구하고 받아들여 실천하고, 목숨까지 바치며, 이를 증거하고 전파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이 진리탐구와 진리 실천, 진리 수호의 위대한 자질을 지닌, ‘진리의 민족’임을 온 세계에 널리, 길이 알린 업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 전 세계 천주교 학계가 이미 다 잘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서,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자신이 친필로 서명한 문서로 이러한 사실을 공인함으로써, 천주교회 안에서는 기적적이며 자랑스러운 사실(史實)로 격찬되고 있다.

따라서, 천주교회에서는 이벽을, ‘韓國天主敎會 創立 聖祖’로 존경하여 부르며, 天眞菴을, ‘韓國天主敎會 發祥地’로 부른다. 이렇게 천진암은 우리겨레와 우리나라를 위해서, 나아가 전 세계 12억의 천주교신자들을 위해서, “진리의 땅”, “거룩한 계곡”으로서 세계에 유일한 자랑이 되었다.

어느 나라나 순교성지는 많으나, 그 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천주교회가 시작된 자기네 나라 천주교 발상지는 없다. 이를 가지고 있는 나라나 민족은 우리뿐이다. 위대한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와 찬미를 올려야 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 강복을 베푸느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평화통일을 이루어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1993년 9월 21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II 천진암은 조선사회 개혁의 얼과 힘이 육성된 성지.

천진암은 200여 년 전,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총억 등,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또 순수하고 진솔한 자세로 학문 연구와, 특히 진리탐구를 위한 자발적인 강학의 모범을 보여주고, 음력 주일을 제정하여 실천하며, 양반과 상민의 사회 계급타파 운동을 실천하고, 일부일처제 등을 실천할 정도로, 당시 조선의 사회개혁을 시도한 젊은이들의 본거지였다.

구한말 문호개방과 더불어 일부 선교사들이 설립, 운영하던 학원들보다도 1세기가 앞서는 교육 내용으로, 조국근대화의 불꽃이, 광주 천진암을 본거지로 삼던 젊은 선비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실천되고 있었음은, 이하에서 보듯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게 기여한 정약용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광암 이벽의 역할과 그 위치에 대하여는 이미 거론한 학자들이 적지 않다.

정약용과 그 형 정약전, 등 선비들은 소년시절부터, 즉, 아주 어려서부터 천진암에 와서, 당시 독서하며 수덕에 전념하고 있던, 여덟 살 위의 사돈간이 되는 광암 이벽한테서 여러 가지 새로운 학문을 듣고 배웠다. 이 때 배운 신학문(新學問) 지식으로, 훗날 정약용은 조정에 들어가 정조 임금을 보필하며,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며,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서도, 현산어보(玆山魚譜), 문씨표해록(文氏漂海錄), 등을 저술할 수 있었다. 당시 이승훈(1756-1801), 정약전(1758-1816), 정약용(1762-1836), 권상학(1760-1819), 김원성, 이총억(1764-1822), 등은 천진암에서 이벽으로부터 태양력 계산법과 기하원본, 천문, 지리, 양명학(陽明學), 천학(天學), 수학, 요일(曜日), 등을 배웠는데, 이러한 지식은 당시 일반 서당에서는 물론, 왕실의 동궁관(東宮館)에도 없던 학과목들이었고, 특히 새로운 敎에 대해서도 듣고 배우며, 몹시 기뻐하였다.

정학술이 기록한 [니벽전(李檗傳)]의 내용을 보면, 천진암에 모이던 젊은 선비들이 천주교 교리는 물론 당시로는 새롭고 신기한 여러 가지 학문을 듣고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무술(戊戌, 1778)년 이벽선생은 25세 되던 해에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선비들, 정씨(丁氏), 이씨(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썼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무관(武官) 홍군사(洪軍士)한테서 천학 서적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읽은 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고는,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 노닐며 주유천하하였다. 그러다가 광주(廣州)에 이르러 원앙산사(鴛鴦山寺, 일명 앵자산, 천진암)에 은거(隱居)하매, 도(道)를 닦는 벗들(道友)이 무리를 지어 모여 중도(衆徒)를 이루게 되었고, 이벽 선생은 이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쓰게(下筆) 하였다.”

“기해(1779)년 이벽선생이 26세 되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이 선생을 웃어른으로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산사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 선생은 기묘한 학문에 아주 박식하여 천문학(天文學)과 지리학(地理學), 의학(醫學)과 복술(卜術), 철학과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달통(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 대답하는 것이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 그 문하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총림(叢林)과같이 학문적이며 신앙적 단체를 이루어, 그 명성이 세간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정학술(丁學術)의 “니벽전(李檗傳)”에서 언급한 대목은, 다불뤼 주교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며, 일부는 정약용의 녹암묘지명(鹿菴墓誌銘)과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 및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밝히는 것과도 대동소이하다.

또한 정약용 자신의 자찬 묘지명(墓誌銘)이나, 정약전의 현산어보(玆山魚譜), 등을 읽어보면, 그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기술방법이 매우 과학적이며, 육합원칙(六合原則)에 맞는 논리를 따르고 있으니, 당시 일반 선비들의 글과는 매우 차별되는 현대적 서술방법과 순서를 볼 수 있다. 이는 광암 이벽이 당시 대학자 이가환(李家煥1742~1801), 이기양(李基讓, 1744-1802), 등과의 공개토론회에서 대승을 거둘 만큼, 논리적이었음을 보면, 이러한 이벽과 그 동료들이 소년시절부터 서양의 신학문을 듣고 배우던 수재(秀才)들에게서 나타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양력과 요일이 없던 사회였다. 기금부터 100여 년 전 구한 말, 즉, 1800년대 말에 와서야 양력과 요일이 사회 일각에서 거론되고 쓰여졌는데, 천진암에 자주 모이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선비들은, 이미 200여 년 전, 즉 1770년대 말에 벌써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일요일로 삼아, 이날을 상제(上帝) 천주의 날로 정하고, 온 종일 노동과 음식을 금하며, 집안에 들어 앉아, 기도에만 열중함으로써, 국내에서는 최초로 매주 종교적인 주일을 정하여 지키며,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정기적인 휴식 운동을 시작하였고, 양반과 상인들의 계급 차별을 타파하며, 일부일처제를 실천하였으니, 당시 권철신, 권일신, 이벽, 이승훈, 정약종, 등의 생활은 중인계급의 김범우, 최창현, 윤유일, 등 일반 서민들이나 상민들과 함께 같은 종교의 신도들이 되어 함께하였고, 모두가 양반들로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이었음에도 불고하고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던 소실이 없었다.

당시 이렇게 생소한 생활 개혁운동 실천은 엄격한 부모 형제들의 통제를 받던 일반 양반집 가정 안에서나, 더욱이 훈장 어른과 학동들이 함께 면학하는 서당에서나, 또는 신도들이 적지 않게 왕래하는, 정상적인 기존의 타종교 기관이나 시설에서는 매우 어려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심산궁곡의 오래되어 퇴락해 가는 허름한 암자나, 한적한 산골 오두막처럼, 남들의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아주 적막한 곳에서 자기들끼리만 종종 모이는 젊은이들만에 의해 초보적으로나마 시도될 수 있었던 생활혁신 모습이었다.

이벽과 젊은 선비들의 천진암 강학 내용에 대하여, 또 그 진행 과정에 관하여 가장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준 사람은 프랑스 선교사 중에 천사적인 두뇌를 가진 다불뤼 안주교(Antoine Daveluy, 1818-1866)였다.

그는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한문(漢文)에 능통한 선교사였으며, 조선에 입국하여, 22년간 활동하면서 한글로 많은 책을 썼다. 특히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한글 문법] 책과, 한글 사전, 즉 [한한불자전] 대작을 최초로 저술하였고, 그가 기록한 [한국 순교자 비망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서로서뿐 아니라, 당시의 우리나라 문화 기록으로 아주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집필하였다 하여, 이를 해외자료니, 국외자료니, 하고 분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국내에 20여년간 머물면서 연구한 바를 가지고, 국내에서 쓰여 진 것이기 때문이다. 꼭 한문이나 한글로 쓰여져야만 국내 자료는 아니다. 다불뤼 주교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 인사들의 증언을 청취하여, 천진암 강학의 내용도 충분히 가장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다불뤼 주교의 이 기록은, 정약용이 유배생활 후, 아직도 천주교 박해시대라서, 제약이 심하던 시기에, 조심스럽게 써야 했던 정약용이 간결하게 조금씩 언급한 내용이나, 혹은 정학술이 쓴 [니벽전]의 내용과 서체면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이들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다불뤼 주교의 역사서가 훨씬 더 자세하게 풀어가면서 보완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의 기록은, 다른 기록들과 원천이 다른 역사 자료로서 매우 소중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또한 영국의 롱포드(Joseph H. Longford,) 교수의 문헌도, 1800년대 중반에 수집한 자료로 정리 집필한 다불뤼 주교의 역사서가 기록된 후, 약 25년간이나 극동 문화사를 연구하고, 보완하여, 1911년에 발행한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지만, 국내에 와서 20여년을 살면서 기록한 다불뤼의 문헌이 훨씬 더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 설명을 합리적이며 사실적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특히 롱포드 교수는 1720년, 이이명이 북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천주교 서적들을 조선의 양반 가문 젊은이들이 50여 년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는데, 이벽은 13년간 전념하여 연구한 후에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었으며, 천주교를 실천하는데 자신을 바쳤다고 하므로서, 1770년부터 1783년 가을 이승훈 북경 파견 때까지, 13년간이라는 숫자를 명시하면서 이벽의 천주교 집중연구를 밝히고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동남아 선교사 양성의 대신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1770년부터 이벽은 심산궁곡에서 교리를 연구하고, 천주의 계명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는 조사 보고서 기록을 교과서에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 가서 영세하고 귀국한 후, 천진암에서 서울로 아주 들어가는 때가 1784년 4월경이니, 이벽과 젊은 선비들이 종종 모이던 천진암 천학 도장의 기간은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

이렇게 광주 천진암에서 있었던 역사를 충실하게 전승해주었다는 점에서, 다불뤼 주교의 공헌은 반드시 인정받고 존경받을 만하다. 또한 우리 모두가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이다. 다불뤼 주교의 역사서가 없었더라면, 천진암 강학과 젊은 선비들의 활동은, 정약용의 문헌에서처럼 모임의 제목이나 연도나 참석자들 이름 정도 이부만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까지 보다 자세하게 조사하고 보고서 겸 비망록을 쓴 다불뤼 주교의 공로로 우리는 보다 상세한 빛나는 역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였던 정약용의 기록이나 특 시문은 당사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록 간결한 시문이지만,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III 천진암은 정약용 문학의 꽃이 만발한 성지.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 정약용이 기여한 역할의 밑바탕에는 홍이섭교수의 논고에 이미 언급되었듯이, 광암 이벽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고, 이는 천진암의 이벽 독서처와 강학당이 그 본거지였음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우리가 간추려보는 정약용의 시문은 단순히 문학적일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을 겸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천진암(天眞菴)이 한국천주교 발상지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개화와 사회개혁의 정신적 실천운동 출발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의 지덕(知德) 형성에 끼친 영향과, 특히 ‘정약용 문학’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사암 문학(俟菴文學)]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한편, 젊은 날의 정약용 작품에 대하여, 더욱이 소년시절의 작품에 대하여, [다산 문학]이라는 표현보다는, [사암 문학]이라고 표현함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 때부터만 많이 사용했고, 또 널리 알려진 호(號)이기는 하나, 남인계(南人係) 인사들 중 한 분의 호로서, 또 젊은 날 주로 많이 사용되던 호로서,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쓰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천진암의 이벽에 관한 정약용의 시문(詩文) 몇가지를 추려서 읽어보자.

① 1777년 정유년, 15세 때 少年 정약용의 시문,

② 1784년 갑진년 22세 때 靑年 정약용의 시문,

③ 1785년 을사년, 23세 때 靑年 정약용의 시문,

④ 1797년 무술년 35세 때 관직에 있던 長年 정약용의 시문,

⑤ 1827년 정해년, 65세 때 老年 정약용의 시문.

위의 시문 속에서 정약용은 천진암과 이벽에 관한 그의 사상과 애정을 당시 주위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정약용이 자기 일생에 수차례 자주 왔었고, 또 와서 가장 많은 시를 읊은 곳은 천진암인데, 소년시절부터 청년시절과 관직에 있을 때도, 더욱이 18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후, 병으로 4개월씩이나 앓다가 겨우 일어난 노년에도, 마치 자신의 모교(母校)를 찾듯, 천진암에 와서 며칠씩 묵어가며 시를 읊었다. 천진암의 주변 산천과 야생 동식물과 자연현상에 대한 시도 읊었다. 천진암에서 꽃피기 시작한 정약용의 문학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관계 인물들과 주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터가 없는 집이 없듯이, 문학 작품역시 그 터전과 환경과 뿌리는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특히 한시(漢詩)의 경우, 너무 글자 자체만을 보고 자의적(字意的) 음미에만 집중한다거나, 혹은 한 단어나 문장 하나만을 가지고 풀이해서는 부족하며, 작품을 쓰던 작가의 당시 지식과 나이와 심정과 주제, 내용과 대상은 물론, 주변 사정을 염두에 두고, 참작, 감안하며 이해해야만 한다. 특히 정약용이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문(詩文)에 관해서는 더욱 그 작품이 쓰여 지는 대상과 동기를 참작해야 하는데, 최근 일부 식자(識者)들 중에는 이 점을 너무 소홀히 하는 감이 없지 않다

사실 천진암 성지의 의미와 가치와 위상과 역할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광암 이벽을 어느 정도 인지하여야 한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빼놓고서는 서구문화를 이해할 수 없듯이, 광암 이벽이 빠지고 없는 천진암은 그다지 큰 의미부여가 어렵다. 그러므로 천진암 이해의 첫 걸음과 사암 문학 인식의 첫 단계는, 정약용이 알고 있던 이벽이란 인물에 대한 인식이라 할 것이다.

사실 정약용은 자신이 광암 이벽을 얼마나 존경하며 어떻게 사모하였었는지를 시문에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문들은, 이벽에 대한 그의 존경의 성격과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예비지식은 정약용의 시문을 이해함에 있어, 어떤 오해(誤解)나 오역(誤譯)을 피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 일러둘 것은, 이벽(李檗)은 족보상의 이름이고, 광암(曠菴)은 스스로 지어서 자타가 부르던 호(號)이며, 덕조(德祖)는 어려서 부르던 자(字)인데, 다만 정약용이 덕조(德操)라고 쓰는 것은, 이벽의 천진암 독서 이후, 강학 전후부터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벽과 직접 관련된 시문들 중에, 1777년, 1784년, 1785년, 1797년, 1814년에 쓰여진 시는 모두가 정약용이 각기 다른 나이 때, 각기 다른 상황에서 쓰여 진 것들이지만, 서로 일맥상통하는 표현과 연결성이 있으므로, 먼저 함께 종합적으로 간결히 공통된 표현들을 훑어보고 나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777년 정유년, 정약용이 결혼하던 15세 때 쓴 시에서는 23세의 이벽을,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갖추신 분(賢豪氣相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784년 갑진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진사가 귀국한 후, 당시 30세의 광암 이벽이 천진암에서 서울 수표동 자택으로 본거지를 옮길 때, 22세의 정약용은 이벽을, 중국의 문호 소식(蘇軾)의 학문과, 도사 이응(李膺)의 덕망을 연상시키며, 시를 읊었다(蘇軾才高談水月, 李膺名重若神仙).

1785년 을사년 봄, 문중의 박해로 인하여, 31세에 비운(悲運)으로 순절(殉節)하는 이벽의 장례식에 와서 지은 만사(輓詞)에서, 23세의 정약용은, 당시 사회의 선비들을 병아리 떼와 오리 떼로 표현하면서, 이벽을, “신선나라에서 인간세계에 잠간 내려온 학(鶴)으로서 신(神)의 풍채를 보인 선인도사(仙人道師)”로 표현하였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羽?皎如雪 /鷄鶩生嫌嗔).

1797년 정사년 봄, 조정에서 상감을 모시는 현직에 있으면서도, 천진암을 찾은 35세의 정약용은, 사후 12년이나 지난 광암 이벽이 면학(勉學)하던 ‘이벽 독서처(讀書處)를 보면서, 이벽 생존시의 풍류와 문채가 신령(神靈)한 경지였음을 읊었다(李檗讀書猶有處 …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1814년 갑술년, 강진 유배지에서, 52세의 노학자(老學者) 정약용은, 30여 년 전 자신이 성균관 태학생으로 있을 때, 정조 임금이 내린 숙제를, 광암 이벽의 도움으로 작성 제출하여, 도승지 김상집의 칭찬을 들었는데, 그 때 썼던 답안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를 다시 손질하면서, 이벽 광암을 그리워한 나머지, “광암이 세상을 떠난지 30여년이 흘렀으니, 누구한테 가서 물어보랴? 물어보러 갈만한 사람이 없구나! 만일 이벽 광암이 아직 생존해 있다면, 그의 높은 덕(德)과 박학(博學)함이 어찌 내게 비할까보냐? 이제 광암을 그리워하며, 고쳐주던 책 원고 뭉치를 움켜쥐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도다.”하였다(質問無處 使曠菴而尙存 其進德博學 其余比哉 不禁撫卷而流涕也).

그런데 이벽에 대한 정약용의 이러한 표현은, 외국인 선교사들,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의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다불뤼(Daveluy) 주교는 그의 역사서에서, “1783년 가을, 북경으로 파견되던 당시 27세의 젊은 학자 이승훈(李承薰)은 이벽 당부하는 말을, “대도사(大道師)의 말씀”, 즉, 프랑스어로, “Maitre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일반적인 ’스승(maitre)'이라는 말과 달리,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예수, 마호메트 등, 인류의 대 스승들에게 대해서나 쓰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된 내용을 염두에 두면, 어려서부터 이벽을 따르며 존경하던 정약용 소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이벽이 어떠한 인격을 갖추었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정약용의 시문 몇 귀절을 음미해보자.

1. 1777년 정유년, 정약용이 15세 소년으로 결혼하던 해에, 당시 천진암에서 독서에 열중하며 덕을 닦고 있던, 8 살 위의 23세 이벽에게 지어 드린 시는, 여유당전집 제1권 첫머리에 나오는 시문(詩文)으로서, 그 연대와 내용면에서, 소년 정약용의 지식과 심정과 인간관계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15세 소년 정약용이 지은 이 시문(詩文)에 들어 있는 그의 해박한 지식도 놀랄만하지만, 그가 밝히는 이벽의 인물은 더욱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표현하는 문학적 자질 또한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시의 내용을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그 대의를 풀어본다.

이벽 선생님에게 드립니다.

“음양(陰陽) 두 가지 법칙은 비록 고치거나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일월화수목금토, 일곱 요일은 차례로 자리 바꾸며 서로 합쳐 발전하니 ,

봄이 되면 나무도 새 움을 틔워 아름답게 만발하고,

꽃도 피고 지며, 또다시 다르게 변하여 성장하고 있도다.

암 공은 새로운 가르침으로, 공격과 비난을 받아 난처해져도,

연민의 정으로 차마 상대방 면박이나 반격은 피하며,

인간차별 아니하고, 만사에 편파적이지 않도다.

그렇다고 인기나 존경, 부귀와 공명은 전혀 부러워하지 아니하니,

광암 공이야말로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고루 다 갖추고 있도다.

광암 공의 그 인품은 실로 친절하고도 진지하며 정감이 충만하도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가정을 떠나 학문과 수덕에만 몰두하니,

위엄과 온화를 겸한 모습 항상 그 얼굴에 풍기며 흘러 넘치도다”

2. 1784년 갑진년 봄, 22세의 정약용이, 30세의 광암 이벽과 함께 서울로 가는 배 위에서 지은 시는 매우 감격적이다. 당시 외교관 이동욱 서장관의 아들이며, 정조 임금이 설립한 성균관 연구원에서 24세로 진사가 된 이승훈은 27세가 되던 해, 천진암 도우(道友)들의 좌상(座上)이었던 이벽 광암 공의 대리자로, 1783년 늦가을에 북경에 파견되어, 영세하고 다음해 봄 2월 경에 귀국하였다. 얼마 후, 1784년 4월 경, 늦봄, 당시 모든 면에서 인격적으로 성숙한 30세의 이벽은 , 약 15년간(1770~1784) 머물며 독서와 강학의 터전 천진암의 천학도장 즉 독서처(天學道場 讀書處), 본거지를, 제자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자신의 수표동 자택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날 아침 두미협 나루터에서 배를 타며 정약용이 읊은 시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두미에는 광암 이벽의 시골집(鄕邸)이 있었는데, 혹자는 이 향저를 별장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두미 마을 앞 강, 두미협 나루터에서 22세의 청년 정약용 일행이 30세의 이벽과 함께 서울로 가는 배를 같이 타고 가며 지은 이날의 시문 역시, 간결한 문장 속에 함축된 지식과 의미가 심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광암공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서, 당시 언어 관습대로, ‘상경(上京)’이라 하지 않고, ‘입경(入京)’이라 하고 있는 점도 의미가 없지 않은 표현이다.

특히, 작시(作詩) 당일의 주위 풍경, 즉, 마치 환송례의 합창가처럼 들리는 새 소리와, 환송 축례의 상서로운 연기처럼 보이는 마을 아침 연기와, 환송 길에 화동(花童)들이 꽃이라도 뿌리는 듯, 바람에 흩날리며 하늘이 내리는 복사꽃 붉은 꽃잎을 보며, 정약용은 그 아름다운 선경(仙境) 속에서 광암 공의 서울 입경(入京)을 감격해 하며, 광암을 존경하며 노래하였다

벗 이덕조(李德操) 벽(檗)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면서.

숲속에서 부르는 꾀꼬리들의 노래소리 뒤로하고,

우리 나그네들 태운 배는 이른 아침 서울로 떠나는데,

강가의 마을에는 아침 연기 퍼져서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네.

봄은 깊어 강기슭 양쪽의 복사꽃 잎이 붉은 비처럼 흩날리며 내리는데,

오늘 아침 따라 강바람이 고요히 자니,

흐르는 강물도 잔잔하여 거울같아, 하늘이 강물 속에 들어있네그려.

일찍이 천상(天上)의 일과 지상(地上)의 일을 익히 알고 있던,

그 옛날 중원(中原)의 박학다식한 천재 시인 소식(蘇軾)은,

하늘의 달(月)과 땅 위의 물(水)을 노래하였고,

또 중원의 그 옛날 신선도사(神仙 道士) 이응(李膺)의 입산(入山) 길에는,

환송하는 백성들의 수레가 백리 길에 줄지어 늘어섰다 하였었지.

광암공역시 학덕(學德)을 겸비한 대도사이나, 나는 재능도 인망도 너무도 모자라니,

성현 군자들 따라가며 흉내조차 도저히 낼 수도 없어,

차라리 성현 군자 도사들이 남긴 글이나 부지런히 읽고 배우는 것이,

나로서 할 수 있는 보답의 길이 아니랴 !

3. 1797년 정사년 초여름, 35세의 정약용은 궁중에서 정조 임금을 모시는 우부승지, 좌부승지, 부호군 등의 직책을 차례로 수행하던 시기였는데, 이벽 광암 공 사후 12년이 지난 후였으나, 정약전, 정약종 두 형들과 함께,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면서, 뜻 깊은 시를 20여수 읊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정약용을 비난하는 상소문이 정조 임금에게 빗발치 듯 하던 때였다. 다른 이유나 핑계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정약용이 1784년에 영세(領洗)한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가장 큰 미움과 비판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느냐, 아니었느냐를 놓고, 그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이 기회에 광주 천진암을 중심으로 훌륭한 문학 작품도 적지 않게 많이 남긴 정약용에 관한 이 중대한 논란에 관하여, 아직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을, 발표되지 아니한 자료로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을 원문과 함께 여기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정약용이 이승훈 진사한테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음을 명확히 증명하는 기록문이 [추안급국안]에 明記되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래 원문과 필자의 初譯을 소개 한다. 최근 에도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느냐, 아니었느냐를 가지고 학자들 간에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을 보면, 천주교 세례를 받았음이 명기되어 있고, 본명이 요한이었음도 뒤에 나온다. 이는 다불뤼 주교의 기록에서도 그의 본명이 요한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이 임석한 가운데 이승훈과도 대질심문한 내용이니, 가장 정확하다 할 것이다.

“…같은 날 죄인 이승훈 최창현을 대면 질의 한 바 이제 밝히 알려졌다. 이승훈이 최창현을 보고 가로되, “네가 나를 아느냐 ” 하니, 최창현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승훈을 모른단 말이오?” 하였다. 승훈이 가로되,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다는 말이냐?” 하니, 창현이 가로되, “갑진년(1784) 이벽의 집에서 우리가 서로 만나보았고, 또 당신이 내게 어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오?, 더구나 나를 신부를 하게하고, 그렇게 부르게 하지 않았단 말이오?” 하자, 이승훈이 가로되, “이는 내 지금 너한테 들어 비로서 알게 되는 바이니, 과연 그렇단 말이냐?” 하였다. 정약용의 문초 중에 나온 말에 대하여 이승훈에게 물어보니, 이승훈이 가로되, “내가 정약용 집안을 모두 천주교에 빠지게 하고, 천주교에 호의를 베풀게 권하였다고 하며, 정약용은 지금 나를 아주 원수로 여기고 있으니, 내가 어찌 이를 일일이 다 밝혀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문초 중에 정약용의 답변이 이러한즉, 나 역시 한마디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찍이 갑년년(1784) 동안에 정약용과 더불어 이벽의 집에서 회동하였는데, 그 때 정약용은 천주교에 흠뻑 빠져서, 자기도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나에게 간청하므로, 나는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정약용이 지금 나를 원수로 삼고 있은 즉, 그렇다면 나 역시 그를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외에는 더 이상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약용과 이승훈은 처남과 매부의 사이다. 위 원문은 1801년 2월 13일, 많은 조정 대신들의 참석과 입회하에 실시된 문초 기록에 명확히 들어 있다. 여기서 보면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후회하며, 이승훈 진사를 원망하고, 이승훈 진사에게 책임을 돌리며,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승훈 진사는 정약용이 정영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도 이제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천주교 신앙과 자신과의 관계를 발설하는 정약용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아, 이승훈 진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정약용과 다른 신도들에 관하여, 요새 표현으로 묵비권을 행사하며, 일체 발설하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1801년 음력 2월 13일에 이승훈 진사와 최창현, 정약용 등을 대면시켜 문초한 기록 앞에는 이 심문 현장에 입회 참석한 자들의 직책과 명단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영중추부사 이병모 /의정부 영의정 심환지 /의정부 좌의정 이시수 /의정부 우의정 서용보 /겸 판의금부사 서수정 /겸 지의금부사 이서구 /겸 동지의금부사 윤동만 /겸 동지의금부사 한용탁 /승정원 의부승지 서의수 /사간원 대사간 신봉조//사헌부 장령 이경삼 /별문사 낭청/ 홍문관 부수찬 오한원 /통례원 좌통례 정래백 /사복사정 이안묵 /성균관 사 성 유하원 /홍문관 부교리 이기원 /부 사 과 임후상 /별형방 /도 사 윤수정 진 /도 사 이흥운 진 /문서색 /도 사 이희연 진 /도 사 이지겸 진.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해설이 필요할 듯하다. 최창현 회장에게 세례를 주고, 임시 준 성직자 역할까지 맡겼던 이승훈 진사가 최창현을 대면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다른 신자들을 더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최창현을 위해서와 다른 신도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 또한 처남인 정약용이 배교하며 변명하는 과정에서, 자기네 정씨 형제들이 천주교를 신앙하게 된 것은 모두 매형이 되는 이승훈 진사 때문이라고까지 탓하며 미루면서 말하자, 비로서 이승훈 진사는, 만일 처남인 정약용이 후회막심해하며, 자신을 매형으로보다 원수로 여긴다고 한다면, 이승훈 진사 자신도 정약용 같은 저런 사람을 처남으로 두었고, 신자가 되도록 세례까지 주게 된 것을 후회하는 동시에, 처남이 배교하는 한, 처남을 원수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진사의 고매한 성품과 열렬한 신덕이 밝게 들어나는 대목이다. 이 문초 후, 이승훈 진사(*당시 進士는 오늘의 博士 학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몇 차례 더 고문과 혹심한 매를 맞고, 10여일 후, 정약종 등과 함께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1801년 연초에 신유년의 대박해가 일어나기 2, 3년 전부터 당시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천주교와 정약용에 대한 비판이 혹심하였다. 정조 상감이 감싸도 소용이 없었다. 1797년 정사년에 들어오면서, 조정 대신들은 상감이 찾으실 때, 즉시 대령할 수 있도록, 도승지의 허락 없이는 도성 밖을 나가지 말고 항상 대기하라고 하였으나, 정약용은 동대문을 통과하여 고향 마재에 와서, 형들과 물고기를 잡아 천렵국을 끓여 먹고 나서, 모두 천진(天眞)에나 가자고 뜻이 모아지자, 1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벽 광암 공과 함께 공부하던 천진암을 찾는다. 조선 천주교의 시조(始祖)로 알려진 광암공이 머물던 천진암은 정약용에게 모교(母校)와 같이 느껴졌기에, 골치 아픈 조정을 떠나, 천진암에 와서 이틀을 쉬며 20여수의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단오날 두 분 형님들과 함께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천진암 가는 길은 울창한 산림 속으로 오솔길 하나뿐인데 싱싱한 녹음은 한껏 젊은 양, 서산에 지는 해를 놀리는듯 하네 뽕잎이 두툼해지면 산 비둘기들은 알을 낳고 보리이삭이 패면은 꿩들이 번갈아 울어대네 옛 산골길이 봄불에 타버려서 스님들이 다니던 길마저 불분명하나,계곡 폭포 물은 비오듯하여, 이 맑은 날에도 나그네 옷을 적시네. 개울 건너서 이름 부르는 고함 소리 들리더니, 여아가 돌아오고 있구나. 양자봉 상상봉 쪽 초목은 무성한데, 흰구름이 바람에 모두 날아가듯 사라지자, 겹겹 속속들이 청산이로세. 청살모가 날으듯 나무를 타니, 꾀꼬리들이 짖으며 먼저 피하고 ,담비와 시라소니 숲 속에서 어슬렁거리자 까치떼들 짖고 있구나

비탈길 오르노라니, 나물 캐는 아낙네들 만나보게 되고 바위돌 대문 기둥은 꽃구경 춘객들을 돌려 보내네. 흐르는 또랑물에 발 담그고 씻는 뜻은 중원과 조선 땅 밟으며 묻은 먼지 너무 많기 때문일세. 절 터 언덕은 첩첩이 바위산으로 둘러 있어서 불경과 공양 향로가 아주 깊은 이 산속 절에까지 와서 있구나. 실 또랑물가의 풀들은 청 황 녹색이 뒤섞여져 있는데 멧새 떼들 열 백 천 가지 목소리로 번갈아 울고 있네 그러나 이벽의 독서처는 아직도 저기 그대로 있지만, 원공(苑公)이 깃들이던 자취는 아득하여 다시 찾기 어렵도다. 풍류와 문채는 모름지기 신령(神靈))한 경지에서라야 할 수 있으니, 그 옛날 그리워 한나절내 술 마시며, 또 한나절내 시를 읊어보노라.

4. 1827년 정해년 늦 봄, 당시 65세의 정약용은 약 4개월을 누어서 앓다가 자기 아들과, 두 명의 옛 벗들, 그리고 그 아들들과 모두 10여명이 오래간만에 함께, 또 사실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렀는데, 이 때 이들 일행은 소싯적을 회고하며, 40여 편의 시를 읊었다.

그런데 이 정해년에는 남부지방, 주로 영남과 호남에서, “일본에서 도망하여 건너온 천주교 신도들을 색출한다.”는 핑계로, 조정에서 다시 천주교 신도들을 잡아 죽이는 박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노약(老弱)한 정약용은 옛 벗들과 함께 아들들까지 천진산(天眞山) 절놀이(寺之游)를 겸하여 와서 3일을 머물며 시를 지었다. 이 때 읊은 시문이 형식상으로는 각자 한마디씩 지어서 부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중복되는 귀절도 몇 군데 있고, 또 아들들의 나이와 경력으로 봐서는, 그런 내용의 시를 지어 부르는 것이 어울리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정약용 자신의 나이와 과거 경력이 전제 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시의 귀절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대부분이 정약용 자신의 작품으로 봐야 하며, 혹은 정약용의 입장에서 같이 간 아들이나 친구들이 지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의 많은 시문 중에서 몇 가지를 추려서 음미해보자.

“천진암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돌 바닥 이 오솔길은,(石徑細如線)

우리가 어려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놀던 바로 그 길인데,(昔我童時遊) 우리가 심산에 들어온 것은 절의 부처님을 기쁘시게 하려함이 아니고,

다만 경치 좋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즐겁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무꾼들의 도끼날에 이미 큰 나무들은 없어졌고

참선수도하던 등불은 사라져서 젊은 선비들 모임도 없어졌구나…

새벽이면 옛날처럼 지금도 덕목(德目)을 외워보기가 차마 부끄럽네만,

그래도 해가 넘어가고 저녁이 되면 책만은 꺼내서 읽어본다오…

여기는 바로 호걸들과 선비들이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지… (豪士昔講讀)

‘붉은 단풍잎’을 제목으로 시를 던 곳이고,

이제 다시 여기를 밟게 되니 이 나그네의 마음은 서글퍼지네그려…

그 옛날 여기서 하던 그 때 그 생활 다시 해 볼 수 없으니 처량하구나…

그 옛날 참선하던 방에 있던 친구들을 어디 가도 다시는 구해올 수가 없지…

우리가 공부하던 누각 앞의 기숙사는 모두 무너져서 주저 앉았고…

무너진 절의 개왓장은 여기저기 수북수북 모아놓고,

농민들이 절터를 경작하고 있네그려…

나는 여기 천진암에 아주 와서 살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간절하지만

천진암에 다시 와서 머물 방도와 편의를 제공해 줄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네…

비 내리는 소리처럼 흐르는 물소리! 퀄퀄퀄 소리내며 흐르면서

안개구름 피우는 광경 흐믓하기도 하네! 맑고 고요한 산 풍경 사랑하며,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보노라!

울창한 나무그늘 밑에는 흐르는 폭포수 소리만 울리는데,

흐르는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씻는 내 뜻을 그대가 어찌 알리오마는,

이 계곡 실폭포수 맑은 물방울에 옷자락만 비 맞은 듯 젖는구려!…

삼십여년만에 천진암에 다시 와보니, 그 때나 이 때나,…

나는 늘 괴로운 바다에 뜬 외로운 배 한척의 신세로다…

여기서 정약용이 자기 심정을, ‘유연고해일고주(猶然苦海一孤舟)”라고 한 표현이, 만천유고(蔓川遺稿)의 발문(跋文)에도 같이 또 더 자세히 나오고 있다. 특히, 天眞消搖集에도 몇차례, “삼십여년 흘러간 세월과 어진 선배들과 친하던 옛 벗들이 不意에 모두 세상을 떠났음”을 회고하는 대목이 같이 나오는데, 蔓川遺稿의 발문을 쓴 무극관인도 정약용이며, 이 역시 천진암 시절의 정약용과 이승훈 진사 등이, 당시 선비들 사이에 유행하던 중국의 려문(儷文) 문학활동을 함께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천진암에서 쓰여 진 여러 선비들의 시문을 볼 때, 이태리의 시성(詩聖) 단떼의 신곡(神曲)에 비길 수 있는, 이벽의 신구약성경 요약의 大敍事詩인 성교요지(聖敎要旨)와, 천주공경가, 그리고 만천유고에 들어 있는, 앵자현(鶯子峴)의 두견새 울음 소리, 등, 이승훈의 여러 시문들과, 특히 정약용의 저 많은 시문들을 접할 때, 천진암은 젊은 선비들의 숭고한 문학의 요람지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천진암만큼 아름답고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진 곳은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IV. 결론

광주 천진암은 세계적인 종교인, 천주교회가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움이 트고 싹이 돋은 발상지로서, 우리 겨레의 정신적 자질을 전 세계 종교계에 들어낸, 한민족의 얼굴이오, 자랑이며, 거룩한 얼이 깃들어 서려 있는, 실로 민족의 성지(聖地)다. 더욱이 천진암은 한민족개화와 당시 조선의 사회개혁 및 조국근대화의 정신과 지식이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선비들에 의하여 실천되기 시작한 도장이며, 조선의 근대화를 이미 200여 년 전에 착수한 젊은 혼들의 모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천진암은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의 숭고한 순수문학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여 만발한 생장향이니,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당시 역사와 사상과 신앙과 대자연을 사랑하고 음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명문장이 집필된 현장이다.

특히, 천진암은 정약용이 1777년 15세 때부터 1827년 65세 때까지, 50년간이나 종종 찾아와서,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들어낸 문학의 현장이다. 또한 천진암에서의 이벽과 이승훈과 정약용 등의 위상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와 그 중요한 역할로 보아, 젊은 날 이들의 도장이 있던 천진암의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며, 온 겨레가 자자손손이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야 할 명소가 아닐 수 없다. 지리적 현장 보존이나 장식이나 기념물 건립 뿐 아니라, 그 사상과 정신과 덕행을 본받아, 천주를 공경하고 백성들을 위하며, 대자연의 이 산천과 초목과 야생 동물들을 사랑하며 보호해야 하겠다.

현재 천진암박물관이 완공되어 내부 시설과 장치에 들어가고 있으나, 앞으로 천진암에는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이 우람하게 세워진 둘레에, 천진암에서 쓰여 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이 현지에서 쓴 시문 전제의 기념비]가 세워져, 과거의 역사를 지키며, 미래에 전하는 한민족 정신문화의 꽃이 만발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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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3.15 오전 1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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