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
세자 요한 李檗, 베드로 李承薰, 암브로시오 權哲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權日身, 아우구스띠노 丁若鍾,
5位 諡福諡聖 請願文 초안 준비
Confessione e Martirio di Giovanni Battista Yi Byok, il fondatore principale, e dei suoi 4 amici co-fondatori, Pietro Yi Seoung Houn, Ambrogio Kwon Cheol Shin, Francesco Xaverio Kwon Yil Shin, Augustino Jeong Yak Jong della Chiesa Cattolica in Corea.
2009. 2. 25.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所 所長 Monsignor 卞 基 榮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세자 요한 이벽과 그 동료 베드로 이승훈, 암브로시오 권철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아우구스띠노 정약종, 5명의 신앙 증거와 순교
1. 한민족의 宗敎史 개관.
극동 아시아의 한반도와 북만주 지역에 분포되어, 오랜 세월 수렵생활과 농경문화를 이루며 살아온 韓民族은, 약 반만년 전부터 동족들 간의 여러 부족국가들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한민족은 선사시대부터 지상의 큰 바위나 고목, 호랑이나 곰 같은 동물, 산과 강하와 바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달과 해, 족장이나 장군의 혼령, 등을 위하며, 민속적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저 높은 하늘 위에는 가장 높으신 上帝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념으로, 최고의 唯一神 思想이 있었으니,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國慶日, [開天節], 즉, “하늘이 열린 날”, “ 하늘을 열은 날”과, 愛國歌 후렴에 부르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가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한민족의 윤리의식도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나 변화는 있으나, 그래도 부모와 어른을 존경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弘益人間과 敬天愛人 및 理化世界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 전래의 고유한 신앙적인 사상이 전통종교들과 민속에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여기에는 儒敎와 佛敎, 道敎, 등의 영향 이전부터, 원시 부족국가 사회의 기초가 되었던 정신적 전승이 기반을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접해 있는 관계로, 유사이래로 이웃나라 중국의 여러 부족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하여, 중국문화, 특히 산악에서의 神仙 思想과 함께, 도교는 중국과 거의 같은 시대에 생활 관습으로 유입되어 알려졌다. 일부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老子 이전에 이미 우리겨레의 신선 사상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런데 유교는 漢字 문화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 신라 초기 4세기말에는 儒學 경전을 강의하는, 오늘의 대학원 수준의 연구기관이 경주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산궁곡에 은둔 수도하며, 극소수의 神仙化를 목표로 전파된 도교보다도, 당시 외국어였던 漢文 文字와 함께 지식과 교육방법으로 들어온 유교의 전래는 점진적으로 자연스러이 한민족의 지식인들 사이에 크게 보급되어, 생활윤리와 사회기강의 주축이 되어왔다.
그러나, 애초부터 완성된 기성 종교로 전해진 불교는, 기존의 민족 고유 신앙과 도교적 사상, 및 유교적 지식에 의하여, 처음에는 거부되기도 하였으므로, 신라의 최초 불교 신도였던 異次頓이 순교하게까지 되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구려에는 372년 소수림왕 때, 백제에는 384년 침류왕 때, 신라에는 528년 법흥왕 때, 전래 시초부터 정식 종교로 들어와, 다소간의 거부와 저항도 겪었지만, 서서히 왕궁에까지 전파되어, 국왕이 권장하거나 명하는 國敎 수준으로까지 자리잡게 되므로써, 불교는 도교나 유교보다 더 힘있고 폭넓게 전파, 보급되었다. 마침내 고려 때에는 護國佛敎로 크게 발전하여, 명실공히 國敎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권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유교가 국민생활의 규범이 되고, 아동교육의 교과과정이 되면서, 유교는 국민 생활윤리 전반의 중심이 되고, 정부의 治國指針이 되었다.
2. 천주교의 한국 접촉사 개관.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가장 오래된 痕迹으로는 통일신라 시대의 8세기 경에 축조된 古墳 일부가 1920년대에 발굴되면서, 약간의 금석문 자료들이 출토된 것을 볼 수 있다. 1928년대 경주에서 8세기 말의 통일신라 고분을 발굴하면서, 瓦製 景敎 십자가,, 동방박사 아기 예수 敬拜圖 陶器, 및 石製 십자가, 등이 출토되었는데, 7세기 중엽에 중국 당 나라에 전파되었던 景敎(Nestorianismus)가, 중국과 무역이 빈번하던 통일신라 때, 신라에까지 한 때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까지 기록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스페인 선교사 Cespedes 신부가 일본인 수사 1명과 함께 1593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 군종신부로서 조선의 남부 지방, 진해 부근에 상륙하여, 곰내(熊川, 현재의 경남, 진해, 왜성동) 진지에서 6개월 정도 머물면서 미사를 드리고 조선인 포로들에게 천주교를 가르치며,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천주교 신부와 세례받은 조선인 포로들도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서, 국내에는 그 후 200여년간 천주교가 전혀 계속되지 않았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왕궁에서 선조 임금을 모시고 있다가 피난 길에서도 선조 임금을 안전하게 호위하던 重臣 중에, 이벽성조의 8대조가 되는 지퇴당 이정형(1549~1607)의 절친한 친구, 지봉 이수광 선생(1563~1628)이, 救國功臣, 이정형의 천거로, 명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간 사신단과 함께 중국에 갔던 기회에, 서양 서적들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天主實義]를 비롯한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귀국하므로써, 문서상으로는 이 때 천주교가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그 후로도 허균(1569~1618), 정두원(1581~?), 이경상(1603~1647), 소현세자(1612~1645), 이이명(1658~1722), 홍대용(1735~1783), 등이 중국에 사신단으로 다녀 오면서, 천주교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보고, 서양의 과학 서적들과 함께 천주교회 새로운 서적들도 가지고 귀국하여, 마침내 국내 학계에 보다 폭넓게 천주교는 계속 알려졌다.
이렇게, 당시 天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학계에 천주교는 조선 선비들 사이에 더욱 많이 인식되어, 일부 선비들은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도 하였다. 그 중에 이이명(1658~1722), 이익(1681~1763), 신후담(1702~1761), 안정복(1712~1791), 등은 천주교에 대한 연구와 소개를 하였고, 또 신후담이나 안정복 같은 일부 하자들은 비판의 글을 쓰기도 하였고, 반대로, 홍유한(1726~1785) 같은 선비는 천주교 교리의 진실됨을 깨닫고 믿었으며, 당시 사회에서는 너무나 생소한 천주교를 조용히 자유롭게 실봉하기 위하여, 경북,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 소백산 자락의 산골 마을로 들어가, 비록 세례를 받지는 않았으나, 혼자서 십계명을 지키며 살기도 하였으니, 홍유한은 한국천주교회 선각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3. 한국천주교회 출발 당시의 문화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던 시기(1750~1850)의 우리나라는 유교의 三綱五倫이 국민들의 기본 윤리였으며, 그 중에도 부모에 대한 효성과 임금에 대한 충성은 최상의 덕목으로서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가문의 체면과 위신을 소중히 여겼다. 특히, 孔孟의 사상과 교훈의 영향을 많이 받아, 부모에 대한 효도는 절대적인 제1의 덕목이었다. 특히, 孔孟의 영향하에서, 삼강오륜을 어기는 죄목에 대한 벌이 3천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不孝에 관한 형벌보다 더 큰 것이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第以莫大於不孝)고 생각하였으며, 불효 중에는 아들을 낳아 後嗣를 잇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불효는 없다고 생각하였다(無後爲大).
그리하여 부모의 명을 거역하면, 아버지는 자식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마 자식을 칼로 피를 흘려 죽이거나, 짐승처럼 목을 매달아 죽이는 일은 피하고, 餓死罰로 굶겨 죽이거나, 음독시켜 살해하였다. 이벽 성조 당시의 임금 정조 임금의 아버지 思悼世子도, 父命을 어겼다하여, 그 아버지 영조 임금이 내린 아사벌로 대궐 안 마당에서 뒤지(나무 궤) 속에 10일간이나 감금하고 禁食시켜 강제로 굶겨 죽였다(1762).
또한 당시 일반 가정에서는 早婚 풍습이 있어서, 남자는 12세 전후에, 여자는 15세 전후에 혼인하였고, 15세가 되면 남자는 號牌를 차게 하였다. 국민들은 士農工商의 순서로 상하 계급이 철저하였고, 나라에 벼슬하는 것이 유일한 최고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일반 서당에서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10여세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가정을 떠나 바로 심산궁곡의 사찰이나 道場으로 修學의 길을 떠났고, 적어도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수 년 간씩 가정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양반대가에서는 어린 아들들을 3세나 4세 때, 말을 배우면서부터 집안에서 부모가 千字文 글을 가르치므로, 좀 자라서 10여세가 넘으면 일반 서당에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었으며, 15여세 전후에는, 이미 높은 수준의 학식으로 詩文을 지을 정도였다.
그런데 단순히 경서를 읽고 외우며, 지식만을 탐구하는 소년들뿐 아니라, 武術을 연마하거나, 종교적인 修道僧의 수업을 하는 청소년들도 있었으니, 이는 오래된 민족 전래의 풍습이었다. 예컨대, 신라 때에 유명한 화랑도들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는데, 이미 15세에 鷄犬聲 들리지 않는 심산에 들어가 火食을 피하고 生食하며, 3년 내외를 보낸 후에 18세 전후에 자타가 공인하는 花郞이 되어 下山하였다. 화랑으로서의 입산 수련은, 학문과 무예와 수도의 종합적인 인격도야 수업이었으니, 합당한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대에 高僧이나 도사를 찾아서, 혹은 독자적인 道場이나 讀書處를 마련하여, 지식 탐구와 무술연마, 혹은 神仙道의 수련, 등을 위하여 수도승들의 수도방법을 본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년들은 가정을 떠나, 10여년씩 공부를 하면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고요한 산속 道場에서 젊음을 불태우며 주야로 인격도야에 열중하였다.
4.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의 가문과 친인척 관계.
우리나라에 아직 성당도, 성직자도, 신자도 전혀 없던 시절에, 오로지 중국에서 들어온 교회 서적을 읽고 천주교를 배워 알고, 믿고, 실행하며, 교회를 세운 선비들의 가문과 인격과 상호 인간관계를 간결하게 먼저 일별하는 것은,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립사와 창립선조들의 활약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200여년 전의 문화가 지금 우리 시대와는 너무나 다르고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당시 사정에 무식하면 당시를 오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5. 세자 요한 이벽(1754~1785)의 가문.
어려서부터 청소년기에 부르던 이름은 德祖 이고, 족보의 이름은 檗이며, ?는 曠菴이고, 세례명은 세자 요한이다. 그런데, 德祖라는 이벽의 호를, 정약용은 德操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벽이 천진암에 입산하여 학업과 天學修道에만 출가승처럼 열중하고, 고집스럽게도 부인과 가정을 돌보지 않는데서 고쳐부르던 호(令德勉早修)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벽 성조는 경주이씨 양반의 가문 출신으로, 고려 때 저명한 대학자 문관으로서 충신이었던 익제 이제현(1287~1367)의 직계 후손이다. 익제 이제현은 15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까지 하던 학자 정치가요, 무장으로서, 충선왕(1275~1314)을 모시고 원나라 서울 북경과 토번, 심양에서 충선왕과 볼모생활을 함께하며, 원 나라 서울에 수년간 머물렀고, 모국 고려의 충선왕이 세운 萬卷堂(오늘의 도서관 겸 연구원에 해당)에서, 고려의 선비들에게 강의도 하고, 연구 지도를 맡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귀국 후에도, 중국에는 의리있는 문인대가들과 대대로 교분이 있어서, 익제 이제현의 가문은 그 후손들도 고려시대에는 물론, 왕조가 바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맡아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와서 이벽 성조의 직계 8대조가 되는 지퇴당 이정형(1549~1607)은 승정원 좌부승지, 홍문관 부수찬, 경기관찰사, 의정부 승지, 등의 정부 요직을 맡은 重臣으로서, 선조 임금을 보필하였고, 賀至使 書狀官, 告急使, 聖節使, 등, 선조 임금이 중국 명 나라에 파견하는 사신단 대표로 3차례나 중국 황실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동안에는 선조 임금을 모시고 피난 길을 함께하였으며, 국가 위기 중에, 호위 관군이 패하는 경우, 왕의 피난 길을 함께하던 주변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주변의 왜군을 물리쳐서 왕을 호위하였으므로 큰 공신이 되었으며, 박학다식하여,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지봉 이수광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후에, 北人 政派가 득세하게 되자, 낙향하여, 저술에 집중하였다.
지퇴당 이정형의 손자인 묵암 이경상(1603~1647)역시 이벽성조의 직계 6대조이며, 병자호란(1637)때 소현세자를 모시고 8년간이나 중국에서 볼모살이를 함께하며, 북경 남당의 Adam Schall 신부와 소현세자 간의 교분을 만들고, 중국인 천주교 신자 환관 5명을 대동하고 귀국하기도 하였으나, 정적들에 의해 소현세자가 독살되면서, 중국인 신자들은 귀국 조치되고, 이경상은 낙향하였다.
서당이나 얼마 않되는 서원 외에는 대학이나 대학원, 연구소 같은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그 옛날, 양반대가 출신의 대학자 관직의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서적들과 식자들이 있었다. 천재적인 학문적 지식을 지니고, 임진왜란의 난국에 선조를 모시고, 또 사신단을 이끌고 3차례라나 중국에 다녀왔던 지퇴당 이정형의 두뇌와 국가와 왕실의 위기위기관리의 사리판단력, 또한 병자호란 중에 임금 인조를 모시다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8년간이나 중국을 다녀온 묵암 이경상, 등은, 이벽 성조의 집안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충성심과 애국심, 군병 통솔역량의 기백과 함께 박식한 전통이 대대로 집안에 가풍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조부 이달(李達,1703~1773)도, 무과에 급제하고, 호남병마절도사부총관의 높은 벼슬을 하였고, 부친 李溥萬(1727~1817)은 사후,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형 이격(1748~1812)은 무과에 급제한 후, 별군직관, 황해병마절도사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고, 동생 이석(1759~1829)역시 무과에 급제한 후, 좌포장, 제남병사, 등의 벼슬을 하였으니, 이벽성조의 집안 남자들은 자자손손이 문무를 겸한 천재적인 머리와 학식, 굳센 무관의 기백과 호걸의 체질을 지니고 태어났다.
특히, 고려 때는 심양과 북경, 토번 등지로 끌려다니며 볼모 새활을 하던 충선왕을 수행하며 보필하던 익제 이제현과, 조선시대에 오면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 임금을 피난 살이 길에서 수행하고, 명나라에 사신단을 이끌고 3차례나 파견되던 지퇴당 이정형과, 병자호란 때는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수행하며 8년간이나 심양과 북경에서 보필하던 묵암 이경상, 등이 직계 조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이벽성조의 성장과 교육환경은 당대에 아주 예외적인 고차원의 수준이었으니,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시대에서 매우 예외적인 특권층의 교육 기회가 주어진 경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나 神童이라 불리던 이벽성조께서는 7세 이전에 철이 들어, 이미 어른다운 지식과 明悟를 갖추었으며, 15세를 전후하여, 병조판서를 지낸 권엄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당시 양반대가 아들들의 학업관습대로, 入山 修學에 전념하느라, 道場의 여늬 출가승들과도 같이, 결혼생활이나 입신양명을 위한 가정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않아, 처갓집 장인 어른의 질책과 원성을 피할 수가 없었으며, 부인 柳閑堂 權氏는 아기를 낳지 못하고(无育),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유한당 권씨가 不姙 여성이었는지, 아니면, 광암 이벽 성조께서 결혼 후, 당시 양반대가의 과거시험 준비하는 선비들의 흔한 관습대로, 즉시 入山 修學을 위해 별거하였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산 바로 같은 시대에 정약용 선생도 1777년 정유년 15세 때 결혼하였으나, 즉시 학업에 몰두하느라, 첫 딸을 1784년 갑진년 23세 때에 가서야 낳았으나, 생 후 몇 달 안가서 바로 죽었다. 하여간 병판대감이었던 권엄과 그 집안에서는 훗날, 을사년박해(1785)와 신해년 박해(1791), 을묘년 박해(1795), 그리고 신유년 박해(1801) 때 천주교 반대에 앞장섰던 이유 중에는, 사위 이벽이 천주교라는 서양 종교에 빠져서, 자기 딸을 돌보지 않아 일찍 죽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으며,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이 경주이씨는 당시 의금부도사, 울산군수, 등의 높은 벼슬을 하던 정재원의 장남 정약현과 결혼하여서, 이벽성조께서는 마재에 있는 누님댁 정약현의 집에 자주 들리게 되었고, 특히, 10여세 전후 손아래의 영특한 사돈들이 되는 정약전(1756~1816), 정약종(1760~1801), 정약용(1762~1836), 등에게 서양의 신학문과 천주교를 가르쳐 주므로써, 이 젊은 소년들의 경탄과 존경과 추종을 받았다.
6. 베드로 이승훈(1756~1801) 聖賢의 家門과 姻戚 關係.
어려서부터 청소년기에 부르던 이름은 子述이고, 族譜의 이름은 承薰이며, ?는 蔓川이고, 세례명은 베드로다. 蔓川이란 호는, 李承薰 성현의 탄생지이며, 할아버지 집과 先塋이 있던 仁川의 萬壽洞과 별도로, 관직에 있던 아버지의 서울 집이 있던, 中林洞 앞을 흐르는 냇가에, 덩굴풀이 많이 우거졌다 하여, 일반 서민들은, “덩굴 내”라고 불렀고, 좀 유식한 지식층에서는, “蔓草川”이라고 불렀는데, 덩굴풀 만(蔓)이라는 漢字에는 이미 풀 초(?)라는 글자가 있어, [蔓川]이라고 불렀다. 즉 태어난 마을 앞 냇갈 이름을 따서 ?를 사용하는 경우는, 자연스레 출신지나 거주지를, 자신의 이름대신 사용하던 당시 습관에서 온 것이니, 丁若鏞 선생은 자신의 生長鄕이 마재(馬峴)인데 그 앞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곳이라서, 2개의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는 강물가에서 태어나 살고 있음을 뜻하는, “열수(?列 水)” 라는 호로 불리었고, 강진에 유배생활할 때는 차(茶)를 동산에 심어서 달여 마시며, 자신을 “茶山”이라 하였고, 丁若銓은 黑山島에 유배생활하면서, 흑산도의 바위들이 모두 검은 색이라서, 자신의 호를 “현산(玄玄 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曠菴, 鹿菴, 稷菴, 俟菴, 같은 호는 대부분 자신들이거나 아니면, 스승이나 집안 어른들에 의해 지어진 의미있는 호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 李東旭 역시 文科에 及第한 후 벼슬이 높아, 正祖의 신임을 받았으며, 3차례나 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하였고, 신의주 府尹, 등 고위직에 있었으며, 中國語와 中國 文化에 달통한 外交官이었다. 더욱이 이승훈은 당시 24세의 젊은 나이로, 王立 최고 연구원 成均館에서 進士 학위를 받은 秀才였으며, 外交官 아버지 李東旭의 영향하에서 中國語와 中國文物에 남들보다 더 많이 듣고 배우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李承薰은 자기 집안과 같은 南人系의 丁載遠의 딸, 羅州丁氏와 결혼하게 되어, 李檗, 李承薰, 丁若銓 3형제들과 자주 만나서 함께 학문을 談論하는, 親姻戚 간의 젊은 학자들 중에 당시 中國通이라 할 수 있는, 젊은 학자였다.
7. 암브로시오 권철신(1736~1801)과
프란치스꼬사베리오 권일신(1742~1792) 2 兄弟 學者.
어려서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부르던 權哲身의 이름은 旣明이고, 族譜의 이름은 哲身이며, ?는 鹿菴이고, 세례명은 암브로시오다. 旣明이라는 이름은, “벌써 明悟가 열려 어른답다”는 뜻이니, 어려서부터 일반적인 다른 아이들보다 출중하게 明晳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권철신은 儒學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선비들 사이에 유명하였으며, 生長鄕 양근의 葛山里, 楊根里, 五賓里, 앞 강물이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鑑湖라고 불렀는데, 이곳 鑑湖亭에 많은 선비들이 자주 모여 詩會를 열었었다.
권 철신의 동생 權日身은 어려서부터 청소년기에 부르던 이름이 省悟이고, 族譜의 이름은 日身이며, ?는 稷菴이고, 세례명은 프란치스꼬사베리오다. 權日身 역시 어려서부터 일찍 철이 들고, 明悟가 열려서, “省悟”라고 불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5형제 증에, 權哲身과 權日身 두 형제가 가장 博學多識하고 저명한 학자들이었으니, 모두 두뇌가 명석하고 학식과 덕망이 높은 대학자들이었다.
權哲身 형제들은 朝鮮 政權의 開國功臣 權近의 후예이므로, 역대 왕들이 자연히 존경하며, 보살펴주는 집안이었고, 더구나 學識과 名望이 널리 알려져서, 전국 각처에서 제자들이 모여드는, 당대 전국 선비들에게는 羨望의 큰 스승들이었다.
8. 李檗聖祖의 天學 연구와 信仰硏修.
이벽 성조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神童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學業이 다른 어린이들을 출중하게 앞서갔고, 집안에 祖上 代代로 전해 오는 國內外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할 수 있었다. 15세를 전후하여, 1770년 경, 당시의 관습을 따라, 兵曹判書 大監 權巖의 딸, 安東權氏와 결혼하였는데, 당시 양반 가문의 관습을 따라, 혼인식 후, 가내 인사를 다니고나서, 즉시 入山, 勉學하기 시작하였으며, 누님 집 마재에서 30여리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깊은 산골 鶯子山의 天眞菴으로 들어왔다. 또한 누님 댁이 있는 마재에서 강건너 남쪽 두미에 집을 한 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벽성조의 이 집을 ‘별장’으로 칭하는 이도 있고(홍이섭 교수), 갑진년(1784년) 봄에 임시로 전세를 내어, 개인적으로 묵상하던 ‘거처’ 곳으로 말하는 이도 있으며,(Daveluy주교), 정약용이 이벽성조를, ‘廣州人’이라고 하는 이유가, 두미에 있던 집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윗 斗米나 아랫 斗米 마을에 이벽성조의 집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누님 댁의 사돈들,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들은 10여세 전 어린 시절부터 이벽성조의 修學 道場, 天眞菴에 자주 놀러 왔다. 큰 兄嫂(이벽 성조의 누이, 慶州李氏)의 심부름을 겸하여, 자주 놀러 와서, 李檗聖祖로부터 外國, 특히 西洋의 新學問과 함께 天學이라고 부르던 天主敎를 배워 알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거의 모든 書堂에서는 전혀 배울 수 없었던, 天文學, 地理學, 數學, 幾何原本, 周易, 曆學, 등을 이벽 성조로부터 배웠으며,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曜日에 관하여 듣고, 陽曆이 전해지지 않던 그 시절, 陰曆으로 매월 초 7일, 14일, 21일, 28일을 主日로 삼아, 지키기도 하였다. 차차 수년이 지나면서, 이벽성조를 중심으로 하여, 10대 후반의 젊은 청소년들은 천진암에 자주 모여서, 그 당시까지 지난 약 200여년간 조선의 선비들이 學問的 知識의 대상으로만 삼던 天學을, 信仰生活로 實行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선교사나 성직자없이 자발적으로 시작된 모임이오, 신앙실천이었다.
9. 李檗聖祖의 天學 實踐의 團體(共同體) 結成 .
入山 修道한지 7년 정도 지난 후부터, 천진암에는 이승훈,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과 丁若銓네 3형제들이 자주 모였으며, 젊은이들은 이벽성조를 [웃어른], 즉 座上 겸 스승으로 모시고, 자연스레 총림을 이루었다. 따라서 天學에 관한 강학회도 종종 개최하였으니, 때로는 당시에 이미 저명한 대학자로 이름난 40여세의 권철신도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천진암의 이 젊은 선비들의 단체는, 신 학문 강의와 연구와 토론 및 새로눈 종교를 신앙하는 순수하고 진솔하고 열열한 공동체로 결속되고 발전하여, 마치 신흥종교의 창립과정을 밟고 있었으며, 소문이 퍼져 나감에 따라,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23세의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교 교리를 종합 요약하여,[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고, 젊은 제자들이 받아 적게 하였는데, 현존하는 聖敎要旨는 이승훈 진사가 받아 쓴 것임을 훗날 정약용이 蔓川遺稿에서 밝히고 있다. [天主恭敬歌]도 지어 부르며,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마치, 신흥종교의 형태로, 한 종교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즉, 당시의 불교적인 표현으로, [叢林]을 이루게 되었다고, 훗날 정약용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성직자도, 성당도, 신자도 전혀 없던 당시에, 이 天學叢林의 천주교 신앙생활은 천주공경 예식 거행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연히 한계에 부딫쳤고, 서양 선비들이 와서 天學을 전하며, 천주공경예식을거행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던 北京 天主堂과의 연락을 수년간 (plusieures annees) 시도하였었다.
10. 天眞菴의 天學 叢林 活動.
이벽성조께서는 학문적으로 도리를 깨닫고, 찾아와 모이는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7일마다 주일을 정하여 지키는 것이었고, 천주교회의 一夫一妻 제도를 깨달아, 당시 양반집 대가의 선비들이었으나, 한평생 모두 소실을 두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므로서, 사실 모두들 죽을 때까지 소실을 두지 않았다. 당시 조선 관습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권철신은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였는데도, 남들처럼, 아들을 두기 위하여 소실을 얻을 명분이 있었으나, 죽을 때까지 소실을 두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동생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을 양자로 삼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의 제사 책임수행을 비롯하여, 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른 나라 문화에서는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천진암에서 시작된 젊은 선비들의 천주교 단체는 교리 공부와 천주 십계, 등, 주요 계명을 지킬 뿐, 천주교의 7성사 거행을 비롯하여, 교회예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알 수가 없었다. 한번도 성사 거행에 참석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절 거행을 위한 지침서나 예식서가 전혀 없어서, 우선 기도서와 예식서, 등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천주교 예식서는 물론, 예식 거행방법, 등을 가르쳐줄 사람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공경 예절을 마음으로 열망하면서, 실로 애타는 심정으로, 마음이 늘 북경 천주교회로 향하여 있었으니, 북경에는 천주공경예식을 거행하는 天主堂이 있고, 천주공경예식을 주관하는 서양 선교사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과 중국은 사신단의 왕래가 1년에 한 두 번 있을 뿐이었고, 조선 인삼이나 중국 비단, 한약재 거래를 위한 상인들의 왕래가 비밀리에 종종 있을 뿐이었다. 이벽성조께서는 꽤 여러 해 동안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으나, 번번히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좋은 기회가 왔다.
11. 李檗聖祖께서 天眞菴의 天學 共同體 代表者로 李承薰을 北京 天主堂에 派遣.
이벽성조께서는 몇 차례에 걸쳐 북경에 사람을 보내며 여러 가지 試圖를 하여보았으나, 번번히 결실이 없던 차에, 마침내 1783년 늦가을, 李承薰 進士를 파견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당시 이승훈 진사는 中國語와 中國文學에 博識하였고, 아버지 李東旭 公이 外交 官으로서 北京 皇室에 冬至使로 파견되므로, 李承薰 進士는 정식 수행원으로 갈 수 있는 好機였다.
이에 대한 Maubant 신부의 문헌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성 Maubant 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이며,김대건(1821~1846), 최양업, 최과출, 15세 조선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파리에 보낸 편지와 문헌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역사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