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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하느님의 종, 이벽성조 이장과 족보 기록 사진- Photos of the genealogy & of the tomb exhuming of the Server of God, JhonBaptist Yi Byeok, the Korean Catholic Church's Founder.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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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Photos of the genealogy and of the tomb exhuming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s Founder, JhonBaptist Yi Byeok.
하느님의 종, 이벽성조 묘 이장과 족보 기록 사진
Photos of the genealogy & of the tomb exhuming of the Server of God,
JhonBaptist Yi Byeok, the Korean Catholic Church's Founder.
 
 

     Historical Photo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s Founder, JohnBaptist Yi Byeok's(1754~1785) genealogy and of his tomb exhuming, who was keeping his whole life of virginity,even if He married a woman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at time by the will of his family father.

    John baptist Yi Byeok, the Server of God, was leading a hermitage life for 15 years to study in Chon Jin Am hermitage and to initiate the Church of Catholic 1st  community from 1770 till 1784.and, at last, He could not but be martyried  in starvation punishment by his father under pressure of their clan, for 10 days, and, then, he was forced by poison drinking so to die quickly soon, and, for the last, His whole body, yet not died, was all the parts of it be enveloped in many folds of thick blankets to be suffocated all  entirely by the persecutioners of his family, of his clan, and of that society.He is the first martyr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who was killed by the time of non christian society in odio Fidei !  
       
   The Saint Antoine Daveluy, the fifth Diocesan Ordinary Bishhop of Korea wrote on his death in Spring of 1785

(,,,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 Mgr. A. Daveluy,   

이벽 성조께서는 어려서부터 15년간이나 修道에 전념하시며, 學問에 열중하시고, 32세 짧은 일생을 傳道와 교회창립에 집중하시다가,10 여일간의 아사벌(餓死罰)로 탈진한 상태에서, 음독벌(飮毒罰)을 강행당한 후, 몸을 여러겹 두꺼운 이불로 말아서 호흡을 막는 질식벌(窒息罰)로, 최후를 맞아, "다 이루셨다"! 특히, 이벽 성조께서는 출가승이나 독신자들처럼, 친 자녀가 전혀 없었던 布衣道人이셨음이 들어나고 있다 !
 
만 31세의 짧은 일생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순교하신 이벽 성조께서는, 외형적으로는 혼인상의 부인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년시절부터 술과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는 출가승들처럼, 貞潔한 布衣道人으로 생활을 하였음이 들어나며, 側近名士들의 詩文證言으로도 확증되고 있다. 
 
이벽 성조의 최후는, 집안에 연금되어, 불철주야로,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바꾸지 않고, 신도들과의 면회도 엄금된 채, 기도하며, 10여일간의  餓死罰 로 탈진한 상태에서, 죽음을 강요하는 飮毒罰 과, 급살(急煞)을 강행하는, 여러겹 이불말이하는 窒息罰로 순교하셨다.
 
(,,,après huit ou neuf jours quand la sueur commençait à sortir ceux qui le soignaient l'enveloppèrent de plusieurs couvertures, malgré tous les soins et efforts qui lui furent prodigués, il ne fit qu'étouffer sous ces lourds vêtements et la sueur ne pouvant percer et sortir, il en mourut à l'âge de 33 ans)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최초의 제물이 되셨다!.< Daveluy 신부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 1850년 경  기록에서>
 
우선, 경주이씨세보와 가문의 口傳과, 특히 망각 속에서 失墓 위기상황에 처해 있던 그 분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移葬이 불가피하여, 만부득의 묘 발굴에서 들어난 실상과, 또 문중의 자료와 구전을 접하면서, 전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적지 않은 사실들이 교회의 관심과 학계의 연구와 함께, 진솔한 존경을 재촉하며, 하나하나 밝혀지고, 확인되어 가고 있다.
 
 이벽 성조 묘 이장 사진들 <1부>
 
-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의 발굴 현장.
참석자: 이장위원회 위원장 김남수 주교, 춘천교구장 박토마 주교(교회법 박사), 총대리 이응현 신부(춘천교구 총대리), 부위원장 박희봉 신부, 7대손 이상국, 총무 변기영 신부(실무 총 주관).후손들 7대손 이상만, 8대손 이완형, 하한주 신부, 오기선 신부, 정덕진 신부(수원교구 총대리), 윤석원 신부, 송병수 신부, 길홍균 신부, 류홍렬 박사(서울대 역사교수), 권흥식 박사(가톨릭의대 해부학 교수, 법의학 겸),등.
 
이벽 성조의 묘 지석. 1979. 4.11. 발굴 확인, 1979. 6. 21.에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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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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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형 8대손(좌) 변기영 신부, 김남수 주교.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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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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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성조 7대 직계손 차남 이상국, 이격 6대손 이응우(좌편 흰머리). 박희봉 신부, 마이크를 잡은 오기선 신부, 혜화동 보좌 김구의 신부. 박토마 주교, 김남수 주교, 등, 발굴 작업 후, 오기선 신부님 말씀.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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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부터 홍길후 회장, 윤석원 신부, 나자로마을 이경재 신부(유해 운구 담당), 변기영 신부, 길홍균 신부, 이벽성조 직계7대손 차남, 이응우(이격 장군 6대손),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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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발굴 완료 후 감격의 예절,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혜화동 본당 성가대 부인들의, 천주공경가  평음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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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정씨 광중 발굴.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
 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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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이장위원회 총무 변기영 신부가 위원장 김남수 주교에게  발굴 도중, 유해 상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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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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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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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이벽 성조의 유해 발굴 . 좌로부터 이원호 교수, 청바지 이응우씨, 이상국씨, 이각규 회장, 이상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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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유해 측정:  해부학 주임교수였던 권흥식 박사는 이벽 성조 유해의  치아 끝이 모두 까맣고 붉게 타있고, 가슴과 배 부위가 유난히 짙게 검푸른 것을 보고, 독약으로 사망한 시신으로 확인하였다.
 
 권흥식 교수의 유해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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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관 상판과 양 옆면 출토, 이응우, 이상만 후손들의 관 판 이동, 이장전문가 박동준씨(붉은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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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유해 측정:  해부학 주임교수였던 권흥식 박사는 이벽 성조 유해의  치아 끝이 모두 까맣고 붉게 타있고, 가슴과 배 부위가 유난히 짙게 검푸른 것을 보고, 독약으로 사망한 시신으로 확인하였다.
 
  유해 재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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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유해 측정:  해부학 주임교수였던 권흥식 박사는 이벽 성조 유해의  치아 끝이 모두 까맣고 붉게 타있고, 가슴과 배 부위가 유난히 짙게 검푸른 것을 보고, 독약으로 사망한 시신으로 확인하였다.
 
 유해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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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서울대학 역사학 교수 류홍렬 박사.
 
 유홍렬 박사의 기록, 이응우씨, 오기선 신부, 이원호 교수, 이각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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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1979. 4. 11. 지석 확인 팀. 우로부터, 오기선 신부, 후손 이상만, 유홍렬 교수, 김남수 주교, 묘 발
견자 변기영 신부, 이원호 교수(신장본당 총회장), 이기형(이벽성조 8대손. 당시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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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봉분을 제치고 나서 지석 확인, 박동준, 정덕진 신부, 송병수 신부, 이응현 신부, 7대 종손 이상국, 하한주 신부, 김남수 주교, 박토마 주교, 7대손 이상만, 변기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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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발굴 작업 완료 후, 변기영 신부의 감사의 인사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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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첫째부인 안동권씨 유해. 이벽 성조보다 훨씬  여러 해 먼저 사망하여, 장례하였다가 발굴하여,  이벽 성조 묘에 합장하여, 시신형태나 유골이 희검은 색과 검붉은 색으로 진토되어 있는 상태로, 젊어서, 적어도 20세 미만에 사망하여, 연한 뼈가 쉽게 빨리 진토된 모습<이장전문가 판단과 참관인들 소견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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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둘째 부인 해주정씨로 기록된 여성의 사모관대와 수의가 유골에 붙어 삭아 있고, 키가 1m 80cm 가량 크고, 뼈대가 굵게 그대로 있는, 노인 여성으로 65세 이상의 할머니 유골로 장수한 시신.<이장전문가 판단과 참관인들 소견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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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둘째 부인 해주정씨, 여성의 사모관대와 수의가 유골에 붙어 삭아 있고, 키가 1m 80cm 가량의 뼈대가 굵게 그대로 나온 노인 여성으로 65세 이상의 할머니 유골로 장수한 시신.<이장전문가 판단과 참관인들 소견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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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발굴 작업 후의 감격에 넘친 감사와 찬미의 말씀의 전례 <혜화동 보좌 김구의신부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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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신창읍민회 공동묘지에 있던 이벽성조 묘지에서
 
 이상국씨와 변기영 신부의 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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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혜화동 본당으로 모신 유해를 명동성당 지하 묘소로 운구. 1979. 6. 23. < 박희봉 신부와 김구의 신부.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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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낮 11시, 명동대성당에서 이벽성조의 본명축일, 세자요한 축일 대미사를, 이벽성조 유해를 제단 앞에 모시고, 이장미사(김수환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공동미사, 이상영 신부, 오기선 신부, 길홍균 신부 공동, 변기영 신부 촬영)로 바치는 한국인 첫 주교이며 첫 대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첫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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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낮 11시, 명동대성당에서 이벽성조의 본명축일, 세자요한 축일 대미사를, 이벽성조 유해를 제단 앞에 모시고, 이장미사(김수환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공동미사, 이상영 신부, 오기선 신부, 길홍균 신부 공동, 변기영 신부 촬영)로 바치는 한국인 첫 주교이며 첫 대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첫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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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낮 11시, 명동대성당에서 이벽성조의 본명축일, 세자요한 축일 대미사를, 이벽성조 유해를 제단 앞에 모시고, 이장미사(김수환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공동미사, 이상영 신부, 오기선 신부, 길홍균 신부 공동, 변기영 신부 촬영)로 바치는 한국인 첫 주교이며 첫 대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첫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 주례와 명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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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낮 11시, 명동대성당에서 이벽성조의 본명축일, 세자요한 축일 대미사를, 이벽성조 유해를 제단 앞에 모시고, 이장미사(김수환추기경 노기남 대주교 공동미사, 이상영 신부, 오기선 신부, 길홍균 신부 공동, 변기영 신부 촬영)로 바치는 한국인 첫 주교이며 첫 대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첫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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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 오후 3시 하관을 위해 천진암 성지로 운구되는 이벽성조 유해.
 
 천진암에 도착하여 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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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에 모셔진 이벽 성조의 묘 앞에서,1980. 6. 24. 천진암성지에서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일을 선포하는, 기념행사 집전 겸 순례오시는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주한교황대사 Luciano Angeloni 대주교와 신도들과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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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 오후 3시 하관을 위해 천진암 성지로 운구되는 이벽성조 유해.
 
 천진암에 도착하여 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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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 오후 3시 하관을 위해 천진암 성지로 운구되에 이벽성조 유해 안장 후 작업.
 
 천진암 터에 구축된 새 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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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 오후 3시 하관을 위해 천진암 성지로 운구된 이벽성조 유해 앞에서 김남수 주교 집전의 이장, 하관 예절.
 
 천진암 터에 구축된 새 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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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 오후 3시 하관을 위해 천진암 성지로 운구된 이벽성조 유해 앞에서 김남수 주교 집전의 이장, 하관 예절.
 
 천진암 터에 구축된 새 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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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6. 24. 주일, 세자요한 대축일 오후 3시 하관을 위해 천진암 성지로 운구된 이벽성조 유해 앞에서 김남수 주교 집전의 이장, 하관 예절.
 
 천진암 터에 구축된 새 묘지에 안장, 김정원 신부와 8대손 이완형씨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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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 6. 21.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갓등산 낮은 봉의 신창읍민회 공동 묘지에서이벽 성조 묘 발굴을 마치 후 예절.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춘천교구장 박토마 주교 공동 집전.
 
포천 화현리 묘지에서 발굴을 마치고, 2분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이 함께 감격의 감사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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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성조께서는 15년간이나 修道에 전념하시,學文에 열중하시면서, 일생을 傳道에 집중하여,출가승이나 독신자들처럼, 친 자녀가 전혀 없었던 布衣道人이셨다 !
 
만 31세의 짧은 일생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순교하신 이벽 성조께서는, 외형적으로는 혼인상의 부인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년시절부터 술과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는 출가승들처럼 貞潔한 布衣道人으로 생활을 하였음이 들어나며, 側近名士들의 증언시문으로 확증되고 있다.
 
 
우선, 경주이씨세보와 가문의 口傳과, 특히 망각 속에서 失墓 위기상황에 처해 있던 그 분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移葬이 불가피하여, 만부득의 발굴에서 들어난 실상과, 또 문중의 자료와 구전을 접하면서, 전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적지 않은 사실들이 교회의 관심과 학계의 연구와 함께, 진솔한 존경을 재촉하며, 하나하나 밝혀지고, 확인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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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세보 고본 일부 소개
 
위대한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한, 한민족의 자랑 경주이씨 세보는 韓民族史의 중심에서, 60년 주기로, 문중의 족보를 편찬하였다. 또 60년 기간에도 종종 分派譜를 편찬하여 大同譜를 수정,보완하여 왔다. 감사를 드리자. 우리 民族史의 일부이며, 민족문화를 지키고 가꾸어온 큰 업적이다. 특히,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북간도 지역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조선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집결한 경주이씨 애국지사들 후원 세력 파악과 관리 차단을 위하여,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전국에서 경주이씨 족보를 수집 보전, 사용하였다.
 
 <상세한 설명은 추후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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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의 경주이씨 무신년 족보. 이벽 성조 난에는 안동권씨 병조판서 권엄의 딸과 결혼한 것과 묘소가 화현리 있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73년 계유보에서는 안동권씨가 무육(無育=无育)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아기를 낳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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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의 가장 상세한 족보에는 첫째부인 안동권씨도, 둘째부인으로 기록된  해주정씨도 모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무육(无育=無育)으로 나온다. 즉, 이벽 성조 소생의 친 자손이 없고, 당대로 끝났음을 알리고 있고, 이는 천주교 박해자들이 기록한 南譜에도 이벽은 아들이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추후 사진과 족보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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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성조께서는 15년간이나 修道에 전념하시며, 학문에 열중하시고, 일생을 傳道에 집중하여,출가승이나 독신자들처럼, 친 자녀가 전혀 없었음을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만 31세의 짧은 일생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순교하신 이벽 성조께서는, 외형적으로는 혼인상의 부인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년시절부터 술과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는 출가승들처럼, 貞潔한 布衣道人 으로 생활하였음이 들어나며, 側近名士들의 證言詩文으로도 확증되고 있다.
 
 
우선, 경주이씨세보와 가문의 口傳과, 특히 망각 속에서 失墓 위기상황에 처해 있던 그 분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移葬이 불가피하여, 만부득의 발굴에서 들어난 실상과, 또 문중의 자료와 구전을 접하면서, 전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적지 않은 사실들이 교회의 관심과 학계의 연구와 함께, 진솔한 존경을 재촉하며, 하나하나 밝혀지고, 확인되어 가고 있다.
 
 
                                      慶州李氏世譜 편찬년도
 
 
初刊譜 甲子譜 1684
二刊譜 戊辰譜 1748, 갑자보 후 64년만에.
 
 
----- 1754년 갑술년 이벽 성조 탄생, 1785년 을사년 늦봄에 순교 -----------
 
 
三刊譜
甲戌譜 1814 ---- 이벽성조 순교 후 29년 후, 1748 戊辰譜 후 66년만에.
戊申譜 1848 ---- 이벽성조 순교 후 63년 후, 1814년 갑술보 후 34년만에,
 
四刊譜
癸酉譜 1873 19권 --- 이벽성조 순교 후 88년 후, 1814 갑술보 후 59년만에.
甲戌譜 1934 54권 --- 그 중 국당공파 계보는 17권이며, 최종 수정보완하는 작업에는,
 
문중에서 막대한 경비를 투자하고,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추가 자료수집, 정리, 보완하여, 가장 자세히 편집하여 편찬한 것으로 확신하며,여기에는 안동권씨도, 해주정씨도 모두 아기를 낳지 못한(無育) 여성으로 기록하였다.
 
천주교 박해 세력에 의해서 요시찰적인 남인들을 점검해 나가기 위하여 1`800년대 후반에 발췌 기록한, 南譜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남보에서는, 이벽(李檗) 성조의 형(李格)과 동생(李晳)은 아들, 손자들까지 모두 올라와 있으나, 이벽 성조는 아들도, 손자도, 전혀  자손이 없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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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상 癸卯생 1603년 정해년 1647년 졸 44세 묘 신혈리, 소현 세자 서장관, 묘 신혈리.
 
李鐽 1703 癸未생-1773 癸巳졸 71세 戊申년 1728 무과 호남병마절도사부총관
李溥萬 1727 丁未생-1817 丁丑졸 91세 추증 이조판서 묘 화현리
李浩萬 1730-庚戌생-1753 癸酉졸 84세
 
李顯稷 1795 乙卯생 1876년 丙子졸 82세, 한성판윤,병조판서, 어영대장, 등. 
 
 
李格 天老 1748 戊辰생-1812 壬申졸 65세 己丑 1769 무과 황해병마절도사부총관 묘화현리
李檗 德祖 1754 甲戌생-1785 乙巳졸 32세 - 화현리
李晳 大叟 1759 己卯생-1829 己丑졸 71세 庚子년 1780 무과 제남병사 화현리
 
 
李懋 德叟 1758 戊寅생 1793 癸丑졸 36세 癸卯 방어사, 추증 병조참판 화현리
 
德叟 李懋(덕수 이무)  防御使(방어사)의 아들 3형제.
顯英 景實 1777 丁酉생 1849 己酉졸 72세, 금별부총관,병사 화현리(現 봉수리 경계)
顯謨 景文 1784 甲辰생 1847 丁未졸 64세, 通德郞<1848년 戊申譜에(檗승적顯謨)>묘 샘밭
顯夔 景一 1790 庚戌생 1838 戊戌졸 49세 장단부사/ 이석의 (계자) 화현리 
秉榮 秉周 1814 甲戌생 1838 戊戌졸 24세 현능참봉, 묘 춘천 샘밭 
 
국당공파 경주이씨세보 1848년 戊申譜 5권에만 繼配로 기록된 부인들이 49명이나 나오지만, 해주정씨는 수록되지 않았다. 특히, 이벽성조의 손자 秉周의 파평윤씨와의 결혼은 수록하였으나, 이벽 성조는 안동권씨 혼인만 나온다.

 <상세한 설명은 추후에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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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벽성조의 형 이격 장군의 계자가 된 이현직 장군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주요 부대장 명 사령깃발 원본으로 만든 장군기병풍. 이 병풍은 이격 장군의 후손 이응우씨가 변기영 신부에게 기증한(1988.02.24)한 것을, 몇년 후, 기증자의 동의를 받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현재는 삼각지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 후기, 무과에 급제한 후 군 사령관, 병조판서, 어영대장, 한성판윤, 등에 이르는 무관 연구에 유일한(?) 연구자료로, 천진암박물관보다 국가의 군사 박물관에서 관리함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 기증 이관함(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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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성조의 형 이격장군의 장군기병풍(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 기증, 1988.02.24) 이벽성조의 형 이격 장군의 계자가 된 이현직 장군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주요 부대장 명 사령깃발원본으로 만든 장군기병풍. 이 병풍은 이격 장군의 후손 이응우씨가 변기영 신부에게 기증한(1988.02.24)한 것을, 몇년 후, 기증자의 동의를 받아, 육군사과관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현재는 삼각지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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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성조의 형 이격장군의 장군기병풍(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 기증, 1988.02.24) 이벽성조의 형 이격 장군의 계자가 된 이현직 장군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주요 부대장 명 사령깃발원본으로 만든 장군기병풍. 이 병풍은 이격 장군의 후손 이응우씨가 변기영 신부에게 기증한(1988.02.24)한 것을, 몇년 후, 기증자의 동의를 받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현재는 삼각지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육사 교장, 장준익 장군, 천진암 성지 연구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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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성조의 형 이격장군의 장군기병풍(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 기증, 1988.02.24) 이벽성조의 형 이격 장군의 계자가 된 이현직 장군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주요 부대장 명 사령깃발원본으로 만든 장군기병풍. 이 병풍은 이격 장군의 후손 이응우씨가 변기영 신부에게 기증한(1988.02.24)한 것을, 몇년 후, 기증자의 동의를 받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현재는 삼각지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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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성지에서 기증할, 장군기병풍을 육군사관학교에서 가지러 옴(1988.02.27) 이벽성조의 형 이격 장군의 계자가 된 이현직 장군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주요 부대장 명 사령깃발원본으로 만든 장군기병풍. 이 병풍은 이격 장군의 후손 이응우씨가 변기영 신부에게 기증한(1988.02.24)한 것을, 몇년 후, 기증자의 동의를 받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현재는 삼각지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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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戊申譜(1848년)에 나온 족보 기록은 이벽 성조 순교(1785) 후 63년만에 편찬된 것인데, 그동안 을사년 박해(1785), 신해년 박해(1791), 을묘년 박해(1795), 신유년 박해(1801), 을해년 박해(1815), 기해년 박해 (1839), 병오년 박해(1846),등을 거치는 장기간의 反天主敎 시국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특히, 無育은 친정 가문에도 수치이므로 안동권씨의 아버지 병조판서 대감 권엄 세도 집안의 눈치와 윤리적 압력도 전제해야 한다.
 
          해주정씨와 이현모 승적 문귀는 이벽 성조와 무관한 사항으로서, 후대 족보 편집자들의 첨가 기록이다.특히, 최종 수정보완한 甲戌譜(1934)  54권(그 중 국당공파 계보는 17권)의 안동권씨와 해주정씨 무육(無育) 기록은, 1800년대 말에 천주교 박해자들의 편에서 기록된,南譜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필자는 두 여성들도 천주교 신앙인들로 볼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있으며, 동정녀들이었다고 추정하고싶다. 
 
 이벽 성조께서는 布衣道士(황사영 기록)로서 어려서부터 덕을 닦던 신선(令德勉早修,仙鶴, 風神)같은 분으로(정약용, 박제가, 등의 표현), 반만년 한민족사에 유일무이한, 성 요한세자와 같이, 실로, 조선왕국에 천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특별히 쓰시고자 선택하여 보내신 (Daveluy 주교) 선지자이시다.
 
          2015/10/15. 교회  학자, 성녀 대데레사 축일에.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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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03위 시성 위해
한국 주교단 전원이 서명 요청한
기적심사관면 신청서.
 
 
                      (본 내용은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자료실" 에서 퍼온 글입니다.)


103위 시성기적심사관면청원서 사본,1983년 3월 5일 자, 한국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서명으로
교황성하께 올린 문서. 사실은 1982년도에도 2차례나 있었으나, 주교회의 시복시성담당위원장 김남수 주교의 서명만으로 제출되었었다. 그러나 103위가 소속된 연고지 관할교구장들이
고유권한(competenza)을 위임받은 주교회의 담당 위원장의 서명만으로는 문제발생여지가 있어서,시성성성의 지시대로 보완한 최종 공문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서울교구장 자격으로 제일 먼저 서명하였다.103위시성 후보의 연고지가 전혀 없는 교구장들(제주,청주, 춘천, 등)은 처음에 제외되었었으나, 연고지 변경 불가피의 변동사유 발생시를 대비하여, 모두 하기로 하였다. 시성성성에서는 이 공문이 [절대적 구비 근거요건]이 되는 것이다. 전 세계 특히 주변 관련국들의 대주교나 추기경(김수환추기경을 포함한, 일본, 대만, 필립핀,프랑스, 미국, 등)들이나 대통령이나 왕들이나 학회 대표들의 시성 지지 탄원서나 추천서나 진정서 같은 것은 다만,[반대하지 않는다]거나, [찬성한다]거나,나아가 [간청한다]고 하여도, 시성성성에서는 참고자료 정도로 다룰 뿐이지, 절대적인 필요 근거 문서는 아니다. 그 이유는 교구장 주교들이 시복시성 청원의 직권자들이기 때문이다.


103위 시성기적심사관면청원서 사본,1983년 3월 5일 자, 한국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서명으로
교황성하께 올린 문서


103위 시성기적심사관면청원서 사본,1983년 3월 5일 자, 한국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서명으로
교황성하께 올린 문서

 
입력 : 2016.12.07 오후 1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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