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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원주교구 동창 안승길 신부의 선종 ! 성탄 전야 저녁에!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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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임종시각을 미리 알고, 알리고, 지난 24일, 성탄전야에
동창신부 2명과 같이 미사를 함께봉헌하고나서 잠시 후 바로 선종한 안승길 신부!  
 
 
이번 성탄 전야, 24일 저녁 8시에 원주교구의 우리 동창 안승길 신부(69세)가 동창신부 2명(최기식 신부, 이대식 신부)과 성탄 전야미사를 병원에서 함께 봉헌하고나서, 자신이 미리 몇차례 알려준 대로, 약 한시간 남짓하여, 저녁 9시40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암 수술 후에, 폐암 수술까지 하면서도, 일부 동창신부들만 알게 하고, 무서운 인내로 힘든 호흡을 하면서도, 동창신부 2명과 미사를 함께 봉헌하고나서, 친지 2명만 남으라며, 임종 직전까지 이야기하며 앉아 있다가, 누운 후, 미리 몇차례 10시쯤 가게 되리라던 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차분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평화로운 얼굴로 운명하였다고 원주 동창신부들이 들려줍니다. 필자역시 입관 전 얼굴을 대하니,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며 몇 년간 투병하던 임종환자의 모습이 아니고, 평소처럼 상한데가 전혀 없는 얼굴로 보였습니다
 
신학생 때, 피정하고나면 안신부가 우리들에게 몇 번인가 하던 말이 기억납니다. 자기네 집안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자신들의 운명 시각을 미리 알고,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전통(?)이 있어서, 자신도 죽을 시각을 미리 알고, 알리게 될꺼라고 하였는데, 안승길 신학생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사실 그 때마다 픽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예사 소리로 치부했었으나, 안신부의 임종 전후 상황에 관하여 원주 동창 최기식 신부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학생 때 안신부가 하던 말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로베르또 안승길 신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알고 있는데, 신학생으로서의 소속은 용문 본당 출신으로 우리 수원교구 소속 신학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대신학교 신학과 2학년 때 강경품을 받은 후(?), 원주교구 소속 대신학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원주교구에는 신학생이 너무나 없어서 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이 우리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님한테, 수원교구에는 신학생들이 많으니, 원주교구로 신학생들을 나누어 보내달라고 간곡히 누차 청하였기에, 지원자에 한하여 윤공희 주교님이 허락하셔서, 안승길 신학생이 원주교구로 자원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순교 성인 최경환 회장의 후손 최기식 신부가 덜 외롭게 되었으니, 살레시오수도회 출신의 충북 옥천 본당 출신 이대식 야고버 신학생도 원주교구를 지원하여, 1971년도에 원주교구는 뜻밖에도 3명의 새 사제가 탄생하였고, 수원교구는 4명의 사제가 서품을 받았읍니다. 그래서, 1971년도 사제서품 예정자가 5대1이었던 수원교구와 원주교구가, 4대 3으로 거의 형평을 이루어, 지학순 주교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사제와 신학생이 너무나 부족하여 걱정이 많던 원주교구의 사목활동이 힘을 받게 되었읍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단보짐을 쌌다네, 노래가 한창이던,  가난한 시절, 가장 가난한 산골교구로 알려진 원주교구로 자원하여 가는 동창을 보내면서, 남은 4명의 우리 수원교구 동창들은 실로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원주교구는 강원도 감자바위 교구라고, 우리 학생들끼리 농담하던 가난한 산골 본당에 가면, 취나물, 도토리, 등 식사도 고생이 많을 것을 각오하고 자원한 것입니다. 수원교구는 논밭이 많은 벌판 들녘이라서 그래도 가끔씩 쌀밥도 얻어먹을 수 있을텐데,,,!
 
어려서는 아버지가 서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水道局長(?)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식수를 책임진 직책에 근무하여, 가정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았으나, 4.19 학생의거 이후, 죄없는 경무대의 직원들까지 해임되어, 용문 산골로 이사하게 되었고, 어머님이 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가 혼자 가정을 돌보느라, 안신학생도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교구장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의구현에 용감히 앞장섰고, 고달푼 사제생활 42년(1971~2013)을 거룩히 마치고 바치며 떠나갔습니다.
 
안승길 신부의 사제생활 42년이 있기에, 천주님은 계셔야 하고, 계실 수밖에 없고, 천당도 없을 수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이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안신부가 한 걸음 앞서 들어간 출입문을 바라보며, 줄을 서서 대기하는 우리도, 안신부처럼 미사봉헌 직 후, 한시간도 채 넘기기 전에 이 세상을 고요히, 조용히 떠나는 특은을 받을 수 있을지 부럽습니다.
 
사제들은 성사를 집행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들 하는데, 미사거행을 마치고나서 바로 떠나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 신부의 입관 예절을 마치고 와서, 몇자 적자니, 우리가 학생 때, 점심시간마다 박고안 신부님과 함께 축구하러 운동장에 모일 때면, 제일 먼저 뛰어나오던 안신부의 순진하고 젊은 모습이 선하게 다시 떠오르며 보입니다.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 때, 우리가 함께 부르던 校歌를, 이제 나도 70 이 넘은 늙은이의 낡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 들으며, 성신께로 먼저 오르겠지 !
 
진세(塵世)를 버렸어라. 이 몸마져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
聖神의 그늘으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救援의 VERITAS !
聖神 ! 聖神 ! ALMA MATER 이여 ! ALMA MATER !  ALMA MATER ! 우리 聖神이여 !
 
<최민순 신부님 작사, 이문근 신부님 작곡, 1960 ?>
 
-변기영 신부-
입력 : 2013.12.28 오후 8: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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