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 창립연도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 소개
① 1593년 임진왜란. 스페인 출신 예수회원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수사.
임진왜란 때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Cespedes 신부가 일본인 修士 2명과 함께, 일본 침략군의 군종신부로 일본군 부대와 함께 1593년 12월 28일, 한국 남해안 진해에 上陸하여, 곰내(熊川)에 주둔한 일본군 軍營에 몇 달간 머물면서, 조선인 포로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국내의 천주교 신앙인들은 사라져서, 계속되지 않았다. 이는 한 때, 일본 군종신부들의 軍宗活動史나, 스페인 예수회원의 宣敎活動史로서 매우 고맙고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는 있으나, 오늘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神聖 로마 제국 시대에 천주교회의 큰 발전을 보였던 북아프리카, 특히 오늘의 리비아와 에집트 지역과 이란, 이라크, 터키, 등 지중해 연안과 중동지역이 이슬람의 점령으로 수세기 동안 천주교회가 사라지고 황무지가 되어, 천주교 불모지의 천주교 신앙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만일, 1593년,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 조선 침략과 남해안 점령 시기를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연도라고 주장한다면, 당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修士를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이라고 부르며 존경해야 하며,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의 보호와 후원에도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마치 중세기에 남미 지역의 선교에 있어, 스페인 군함의 남미 정복군에 힘입은 남미 선교활동처럼. 또한 일본군 주둔지 군진영(軍陣營)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나 창립지로 삼아야 하고,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지로 인정하고, 기념해야 하며, 일본군의 잔인한 조선 점령지에 성역화 사업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史實은 무시되고 잊혀지고 거부될 것이다.
지난 1993년 12월 30일, 로마에서는, 예수회 주관으로, 한국천주교회 탄생 (il Natale della Chiesa coreana,,,400 anni,,,) 400주년 기념<1593~1993) 경축행사가 대규모로 거행되었다.(1993. 12. 31. L'Osservatore Romano, 교황청 日刊紙의 한국천주교회 탄생 400주년 기념행사 보도 기사 참고, 및 Medina S.J.신부 저서, Juan Ruiz de MEDINA, S. J., Origenes de la I glesia Catolica Coreana des de 1566 hasta 1784, Roma, 1986, p. 37. 특히,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과 함께 조선 진해에 상륙한, 선교사 도착 자체를 한국천주교회의 탄생으로 기념하려는 견해도 있으나, 선교사들의 열성과 희생에 대하여 우리는 존경하며 감사해야 하지만, 일본군 진영에서 영세한 일부 조선인 교우들도 일본군과 함께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국내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사라져서, 200 여년이나 천주교 신자(信者)부재(不在) 상태였으니, 1593년을 오늘의 한국교회 창립이나 탄생으로 볼수는 없는 것이다.
② 1645년: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이경상, 아담 샬 신부.
남한산성이 1637년에 청(靑) 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인조(仁祖) 임금이 지금의 송파구 삼전도에 내려와 치욕의 항복을 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병자호란 때, 1645년 봄 북경에까지 끌려온 소현세자가 서장관 묵암 이경상의 주선으로 북경의 남당(南堂) 성당 주임 독일인 예수회원 Adam Schall과 교분을 맺고, 조선인 시종관 3명이 영세하고, 영세한 중국인 5명과 함께, 모두 영세 신자 8명을 소현세자와 서장관 이경상을 따라, 조선 국내로 귀국하도록, 아담 샬 신부(한국명, 湯若望)가 주선하여,사실상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 왕궁으로 투입 귀국하게 하였다. 그러나, 靑 나라 장군한테 온갖 모욕을 당하며 항복한 당시 조선 임금 인조는 볼모로 붙들려 갔다가 8년만에 귀국하는 소현세자가 너무나 親靑派가 되었다는 이유로, 세자 일행이 귀국한 후 달포가 지나자 즉시 소현세자는 독살되었고, 중국인 신자 5명은 중국으로 추방하였으며, 귀국 전 북경 남당에서 영세한 조선인 영세신자 시종관 3명은 어떻게 조치하였는지, 지금까지 그 행방이 묘연하여 종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역시, 독일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의 위대하고 고마운 조선(朝鮮) 宣敎活動史나, 조선 使臣들의 천주교 入敎史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고귀하고 훌륭하지만, 소현세자 독살과 동시에 낙향하게 된 서장관 이경상의 急死로 인하여 끝났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만일 1645년,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이경상이 볼모로 붙들려 갔다가 귀국하던 시기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연도라고 주장한다면, 독일 출신의 예수회원, 아담 샬 신부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로 인정해야 하는 동시에, 중국 북경의 남당천주교회를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지로 삼게 되며, 역시 한국교회는 그곳에 한 조각 돌이라도 세워,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 체할 수 없으며,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史實은 무의미하게 되고 잊혀지고 거부되어 매몰될 것이다.
③ 1674년: 고려 대목구(高麗代牧區) 설정.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1`674년 중국인 최초의 신부, 나문조(羅文藻) 신부(Gregorio Lopez)를 남경(南京) 교구장으로 임명하면서, 동시에 高麗의 교황청 관리자(Administrator Apostolicus)로 임명하므로써, 사실상 高麗 代牧區가 설정되고, 대목구장이 임명된 것이다. 즉, 아직 천주교 신자가 전무한 조선이 교황청 관리자가 관할하는 대목구(代牧區)로 설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특히, 아담 샬 신부의 조선 선교 계획과 노력이 독일과 로마에 알려지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나문조(羅文藻) 주교는 3차에 걸쳐 조선 선교활동 계획과 추진 현항을 해마다 3차례나 로마 교황청 포교성에 서면 보고하였으나,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면서 선교사 파견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교구 설정사에 한 페이지가 될 수는 있어도, 오늘의 한국교회 창립사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만일, 1674년 남경 교구장으로 중국인 최초의 사제요, 최초의 주교였던 羅文藻 주교 임명을, 당시 천주교신자가 전혀 없던 조선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으로 인정한다면, 중국인 나문조 주교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로 마땅히 인정해야 하고, 남경의 주교좌 대성당을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지, 큰 댁으로 삼아야 하며, 역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체 할 수 없고,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史實은 무시되고 잊혀지고 망각될 것이다.
④ 1779년: 이벽 성조의 천진암 강학과 천학총림(天學叢林)
천진암에서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젊은 20대 전후의 선비들이 개최하던 講學이 절정에 오르던 시절, 당대 저명한 학자 권철신도 참석하던 자발적인 강학을 통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도리를 비교 검토한 후, 마침내 천주교의 탁월성을 발견하고 믿고 실천하므로써, 십계명을 지키고,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며, 이벽 성조는 天主恭敬歌를 지어 부르게 하며, 기도하고, 심지어 양력과 요일이 아직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던 당시에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주일로 제정하여 지키며, 신구약 성경의 대의를 요약한 詩文,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천주교회 교리 교과서처럼, 부르는 대로 제자들이 받아서 적게 하고, 배우게 하며, 더욱이 성금을 모아 힘을 합쳐, 이승훈 진사를 이벽 성조의 대리자 겸 자신들 공동체의 대표자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하여, 성물구입과 영세까지 하고 돌아오게 하므로써,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세우고 발전하게 하였다. 약 15년간(1770~1784) 계속된 天學 講學과 이벽성조의 활약은 세계 교회사에 유일하게 빛나는 자발적인 진리탐구와 복음선포의 교회창립이었다. 1785년 을사년(乙巳年) 봄의 한국 최초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미 500여명의 신도들이 있는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전 세계의 교회 역사가들이 경탄하는 사실이다. 특히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이벽 성조와 젊은 선비들의 자발적인 진리 탐구 강학과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전 세계 추기경, 대주교, 주교들과 함께 전 세계에서 모인 2만이 넘는 신도들 앞에서, 1984년 10월 14일 주일 오전 11시,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첫 기념일 대미사를 공동으로 집전하면서 이러한 역사(,,,1779,,,questi laici coreani,,,fondatori della Chiesa Cattolica in Corea,,,) 를 공식으로 인정하며, 격찬하는 강론으로 선언하였다. 그 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을 2차례나 다녀가신 후, 1993년 9월 23일, 천진암을 한국천주교회 탄생지(Chon Jin Am Locus Natalis Ecclesiae Catholicae in Corea)로 문서로 천명하였다.
⑤ 1784년: 북경에서 요셉 드 그라몽 신부한테 이승훈 진사가 영세(領洗)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 파견한 이승훈 진사가 북경 천주교회에서 프랑스 출신 예수회원 요셉 드 그라몽 신부로부터 1984년 봄 영세하고 귀국하므로써, 비로서 한국천주교회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기술한 프랑스 선교사 샤를르 달레 신부의 저서를 따라, 아직도 이 1784년을 한국교회의 기원으로, 창립연도로 알고 믿는 이들이 없지 않으나, 이는 세례성사를 천주교회 탄생의 근거와 출발 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지역교회 출발은 천주교신자 공동체의 결성을 말하는 것인데, 세례를 받아야만 천주교신자가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아야만 천주교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천주교 신자라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성사를 집행하기 전에 사제는 세례를 받고자하는 요청자가, 천주교 교리를 믿느냐고 수차 질문하면서,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사제는 최종적으로 재삼재사 질문, 확인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천주교를 믿지 않는 미신자나 무당이나 무신론 공산당원은 세례를 받지도 않을뿐더러, 받아도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성사 거행으로 교회가 탄생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가 세례를 성사로 설정하고, 거행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니, 교회는 세례 거행보다 先在하고 先行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단체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만일, 1784년 북경 북당에서의 이승훈 진사 영세를 한국교회 기원이나 창립으로 본다면,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않은 프랑스 선교사 요셉 그라몽신부를 한국교회 창립자로, 혹은 창립 스승으로 인정해야 하고, 북경 북당을 한국천주교회 탄생지로 인정해야 하며, 우리 한국 신도들은 북경의 북당 성지 순례 뿐 아니라, 그곳의 기념사업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체 할 수 없고,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한국 땅을 밟아보지도 않은 프랑스 선교사 요셉 드 그라몽 신부의 고향에도 한조각 돌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빛나는 史實은 무시되고 부정되고 망각될 것이다.
⑥ 1795년: 최초로 중국인 야고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조선 입국.
폴투갈 선교사로서 북경 교구의 교구장이었던 Alexander Gouvea 주교가 중국인 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최초 주임신부로 파견하므로써 조선에서 성사를 집행하며 교회를 발전시켰는데, 일부 폴투갈 역사가들은, 이 해를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된 해로 여기면서, 북경 교구장이었던 폴투갈 선교사 구베아 주교를 조선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5년 1월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거행한 세례성사를 받은 영세신자들이 이미 5,000여명에 달하였다. 당시 박해 중의 상항을 이해한다면 실제 영세신자는 1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본다. 사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폴투갈 출신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로 인정하고 모셔야 한다면, 북경의 주교좌 대성당을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지로 삼아야 하고, 역시 한국교회는 그곳을 가꾸고 꾸미며, 성지로 삼아, 한국 신도들은 그곳을 모른체 할 수 없고, 순례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폴투갈 구베아 주교의 고향, 폴투갈의 코임브라와 중국 주문모 신부의 탄생지, 등에, 한조각 돌이라도 세워, 감사와 존경의 기념사업을 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史實이 무시되고 잊혀지게 될 것이다.
⑦ 1831년: 조선교구설정과 초대교구장 부르기에르 소주교 임명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Bruguiere 소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한 것은 한국천주교회가 이룩한 비약적인 발전을 로마 교회가 인정한 것으로서, 한국의 敎區設定史 출발이지만, 교구 설정과 교회 창립과는 상이한 것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아직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아시아 동쪽 끝 동방의 조선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진리탐구의 강할회를 10여년 넘게 개최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성직자없이 수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으면서도(1785, 1791, 1795,1801, 1815,),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북경 3천리 험로를 오고가면서 성직자 파견을 애타게 간청하는 열성과 신앙심에 관한 보고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는, 로마 교황청 포교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1830년 그레고리오 16세로 교황이 되자마자, 각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즉시 조선교구 설정을 서둘러 주선하여, 마침내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동시에, 부르기에르 소신부를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조선교구 설정과 교구장 주교 임명은 한민족의 구원을 위한 천주님의 크신 은총이다. 그러나 조선에 교구가 설정될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킨, 조선 신자들의 신앙심과 순교의 피는 조선교구 설정보다 얼마나 훨씬 더 앞선 거룩한 희생이었는가? 대목구나 교구나 대교구 설정은 교회 사목 행정상의 역사로서, 하느님의 백성인 천주교회의 교회 창립사와는 다른 것이다.
변기영 몬시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