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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교황님 방한과 청소년들이 세운 한국천주교회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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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방한과 청소년들이 세운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 창립 제235주년 기념행사(2014.06.24, 화요일)를 거행하고,
 
 
2014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 천진암 성지에서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기념하는 교회 창립 제235주년(1779~2014) 기념제를 거룩히 봉헌하였다. 연례 기념행사로서, 제36회(1979~2014) 제전이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와 전 교구장 최덕기 주교, 이성효 주교 및 변기영 몬시뇰과 30여명의 사제들과 150여명의 대신학생들과 많은 교우들이 함께하였다. 이번 기념제에는 이달 말로 도지사 임기 연속 8년을 마치는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와 신임 안경필 도지사의 참석으로 더욱 뜻있는 행사가 되었다.
 
특히, 제1부 기념식에서는 모든이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4절까지 제창, 6.25 전사자들 영혼을 위하여, 동시에 南北平和統一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천진회 창립위원 이수성 고문(前 서울대학교 총장, 前 국무총리)의 紀念式辭와, 8년 임기를 마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祝辭가 있었다. 이어서 교회 창립선조 후손들의 先唱으로, “대한민국 만세”, “한국천주교회 만세”,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만세”, “천진암 성지 만세”, 모두 12창을 우렁차게 목청껏 함께 불렀다.
 
이날 기념식에 이어 기념 미사가 봉헌되고, 점심식사 직전, “天主恭敬歌” 기념비석이 제막되었다. 天主恭敬歌는 우리나라 천주교회 최초의 聖歌이며,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천진암 성지에 모이던 靑少年 선비들이 李檗 聖祖를 웃어른으로 모시고(爲上), 新學問 연구와 함께 자발적인 진리탐구의 講學이 절정에 오르던 1779년 겨울을 전후하여, 바로, 한국교회 창립초기에 이벽 성조께서 지어서, 제자들이 부르게 하던 노래로서, 천진암의 天學道場에서 賢友賢士 道友들의 天學叢林歌(其門下如叢林)였으며, 같은 시기에 지으신(下筆), 天學 敎義 敎科書와도 같은 聖敎要旨와 더부러, 심산궁곡에서나마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탄생(natalis)을 알리는, 한국천주교 신앙의 움이 트고, 교회 공동체의 싹이 돋는 呱呱之聲이었다.
 
천주공경가는 다른 나라 敎會史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實生活에서 例示를 들어보이며, 천주교 기본 敎義를, 補儒論的이며 護敎論的으로 읊은 복음선포의 함성이었다. 歌詞 외에는, 曲調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우리나라 천주교회 신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자자손손이 부르며, 우리 신앙선조들의 자발적인 신앙을 지키고 아끼며 가꾸어야 할 신앙의 遺産이다.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는, 235년 전, 천진암의 天學道場을 본거지로 하여, 15년 가까이 당시 10代 후반과 20代 초반의 젊은 청소년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면서,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한 기적적인 敎會史를 증명해 주는 천진암 강학의 결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 당시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10대 중반의 청소년들이었음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천진암 강학이 절정으로 이르기 시작하던 1777년~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등이었으니, 지금의 고등학교 2,3학년생들과 대학교 1,2학년생들 나이의 청소년들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1770년 15세 경 廣州山脈 앵자산 천진암에 入山하여, 1784년 봄까지, 자발적으로 천진암에 찾아드는 젊은 선비들과 더부러, 천주교 교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10계명을 준수하고, 한국에서는 아직 양력과 요일을 모르던 그 시절, 음력으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고정된 主日로 제정하여 지키고자, 천주께 기도를 바치고, 휴식하며 금식하였다. 이 때, 聖敎要旨와 十誡命歌를 지어 부르고, 모든 종교의 출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천진암의 天學道場 靑少年들은 천학총림가(天學叢林歌), 즉 校歌와 같은 團體歌처럼, 李檗 聖祖께서 지어 주신, 天主恭敬歌를 불렀다. 이런 점에서 천주공경가는 한국교회 청소년들의 모든 단체가로 자자손이 부르도록 해야 하겠다
 
대학자 권철신 성현도 참석하던 己亥年 겨울, 천진암 강학에 함께 하기 위하여, 엄동설한 한 밤중에 눈쌓인 경기도 광주산맥 主峰 鶯子峴을 넘던 23세 이벽 성조의 발걸음으로 시작하여, 영세를 받기 위해 북경 3천리 길을 걸어가고 오던 이승훈 진사의 발걸으로, 또, 하느님의 종, 정약종 성현의 아들 성 정하상이 조선교구 설립을 위하여 10여세 소년 시절부터, 순교한 아버지의 친구, 趙東暹, 李基讓, 등의 유배지를 찾아 함경북도까지, 심지어 백두산 아래 茂山 땅까지도 오고가며, 북경 3천리를 10여차례나 왕복하던 발걸음이며, 정하상 성인의 어린 제자들, 즉 15세 전후의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소년들이 사제가 되기 위하여 마카오까지 2만리 길을 걸어가던 같은 맥락의 발걸음이었다.
 
새로운 신앙으로 끓고 타며, 소박하고 순수한 젊은 청소년 선비들은 그리스도의 젊은 제자들처럼, 새로운 종교, 천주교를 힘차게 전파하며, 순교의 피로 목숨을 바쳐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전승하였으니, 젊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청소년들의 정신과 덕행과 열성의 발걸음은 오늘의 대신학교 지망생들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금년에는 로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78세의 年老하심에도 불고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모이는 靑少年들과 자리를 함께하기 위하여, 8월 무더위에 극동 우리나라에까지, 訪韓하신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총인가! 한국교회를 창립하신 이벽 성조를 비롯한 한국 청소년들의 젊은 신앙을 계승하여, 이 시대의 전 세계 교회는 靑少年 司牧과, 특히 未信者의 자발적인 入敎를 돕는 宣敎 施策의 轉換點을 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진암 성지에 착공된,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은, 그 옛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심산 궁곡 암자 곁의 이벽 성조 讀書處 비좁은 天學堂에서 불과 10여명 내외의 소년들이 천주공경가를 부르던 때와 달리, 현재 530만 신도 뿐 아니라, 향후 25년 내에 1천만 신도 시대에, 중국과 일본, 인도와 유롭에서 모이는 순례단들, 특히 젊은 청소년들을 위하여, 검소하고 단순하게 건립될 것이다. 유롭의 대성당들처럼, 화려하게 건립할 자금도 없을뿐더러, 이벽 독서처에 모이던 소년들을 생각하며, 소박하고, 순수하며, 검소한 성당이 될 것이다. 유롭 대성당들이 관광을 위한 것이라면, 장차 천진암 대성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젊은이들이 모여 기도하는, 기도의 큰 집, 하느님의 집이 되도록 세워질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는 젊은 청소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신라의 불교는 이차돈이 17세 때 시작하고, 22세에 순교하였다. 천도교, 東學역시 최제우 대신사가 16세에 家出 修道하기 시작하므로서 출발하였다. 더욱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아시아 청소년들을 만나는 忠南 內浦 지역은 젊은 愛國 烈士들의 고향이다.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선하던 15세 소녀 유관순 여사, 청산리 전투에서 왜병들을 물리치던 대한 독립군 중대장 16세의 이범석 장군, 당시 독립군 사령관 19세의 김좌진 장군,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떠나던 18세의 윤봉길 의사, 및 이청천 장군, 등과 솔뫼 출신의 15세 김대건 소년, 다락골 출신의 15세 최양업 소년, 당진 출신의 14세 최과출 소년, 모두가 內浦의 거룩한 젊은 피가 파도처럼 용솟음치는 듯 하다. -Msgr. Byon-
입력 : 2014.07.05 오전 12: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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