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신장본당 총회장, 고 이원호 미카엘 회장님 부인 오영숙 마리안나 신장본당 전 성모회장님 선종(202.09.16),
향년 92세, 안성 수원교구 교회 추모공원에 안장(2020.09.18)
오영숙 마리안나, 신장본당 전 성모회장님 선종 - 향년 92세 -
오 마리안나 성모회장님은 금년 향년 92세로, 9월 순교자 성월 거룩한 달에, 성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기념일(2020.09.16,)에 선종하시고, 수원교구 안성 천주교회 추모공원에 안장되셨다.(2020.09.18) /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을 격고 있는 난국이라서 정부와 교회의 방역 지침을 따라 직계 가족들만이 참석하는 가족장으로 보내드렸다. 하관 예절 주례는 옛날 신장본당 주임(1976. 3.3.~1984.12.31.)으로 함께 교회 일을 열심히 봉행하던 금년 81세의 현재 은퇴한 변기영 몬시뇰이 집전하고, 당시 신장본당 출신 대신학생으로 1976년 서품받은 현재 은퇴한 김학렬 신부가 와서 하관 예절에 함께하여 의미를 더하였다.
<추후 추억을 더듬어가며, 몇 자 더 적어서, 관련 자료 사진들과 함께 추가코자 함-Msgr.Byon>
49. 평생을 별 罪 없이 살다가 별 病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88세의 이원호 회장 문병기
평생을 별 큰 罪없이 살다가 별 病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88세의 미카엘 이원호 회장님을 3일전 문병하고 왔다.
이원호 미카엘(88세) 회장은 하남시 신장성당 총회장으로 15년(1971∼1986) 간, 또 천진암 본당 총회장으로(1985∼1995)도 10 년간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서울시립농대의 식물학교수로 여러 해를 교육에 전념하였고, 식물학 교과서도 집필, 발행하였다. 1980년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쁜 가운데도, 부인 오영숙 마리안나(78세)씨와 근검절약으로 마련하였던 천호동 큰 길 가의 대지 200평(당시 시가 2억 내외)을 천진암대성당 터 확보에 쓰도록 봉헌하였다.
몇 년 전부터 건망증과 치매기가 시작되어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부인만 잠간씩 알아보고 금방 잊어버리고, 같이 살고 있는 아들과딸들, 사위도 몰라보는 상태로, 현재 김포의 우리병원 7층에 있는 8명의 노인들이 함께 쓰는 공동 입원실에 있는데, 가족들의말이 무슨 특별한 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통증이나 무슨 고통을호소하신 적은 없고, 다만 自然 老衰에서 오는 無氣力症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하여 미음을 조금씩 떠 넣어 주는 대로 넘기며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그 흔한 암이나 무슨 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무슨 특별한 통증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로지 몸에 힘이 없어서 온 몸이 차분히 착 갈아 앉고 있는 쇠잔(衰殘)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3일 전에 내가 問病을 갔었는데 깨끗이 단정하게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내가, "옛날 신장성당 변기영 신부예요. 포천에 돌아다니며 이벽 성조 묘를 찾고 이장할 때 회장님도 나와 함께 다녔지요. 생각 나세요? 성지 변기영 신부예요!" 변신부 모르세요?" 하고 말하자 정말 뜻밖이었다. 내 말을 들으며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회장은 얼굴색이 환해지면서, "변신부님, 그래 천진암 성지 변신부님, 참 반갑습니다. 오래간만입니다."함므로, 가족들도 나도 놀랐다.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도 몰라보아 가족들의 애를 태우는 이회장이 나를 알아보며 서너 차례 내 이름을 다시 부르며, 반갑다는 말을 아주 똑똑히 하며 화색이 환해져 웃으며 좋아하였다. 나중에 작별 인사를 하면서, "회장님 몸조리 잘 하시면서 안녕히 계십시오. 또 올께요. !" 하자, 역시 멍하니 응시하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자, " 신부님 안녕히 가세요. 또 오십시오 !" 하고는 다시 할 말을 잊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건망 상태로 돌아가 멍하니 발걸음을 돌리는 내 뒤를 쳐다볼 뿐이었다.
옛날 中國 어느 異人의 글이 생각난다. "한 평생 큰 허물(罪)없이 살다가, 늙어서 이렇다 할 별 病이 없어 苦痛없이 죽는 것이 福이 아니랴?" 바로 이원호 회장에게 해당되는 표현이다. 이원호 회장은 내가 1976년 3월 3일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이래 특히, 1978년부터 광암 이벽성조의 묘를 찾으러 다닐 때 바쁜 중에도 늘 본당신부인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따라다녔으며, 이벽성조 誌石 확인 발굴과 移葬에도 나를 도와 온갖 궂은 일을 다 하였고, 내 부탁을 받아들여 이벽 성조의 천진암 새 묘 내부설계도를 만들었으며, 천진암에서 처음으로 거행하기 시작한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행사" 계획서를 늘 만들어 몇 해 동안 행사준비와 거행에 나와 함께 최선을 다하였으며, 성지 개발과 본당 설립, 특히 광동리, 귀여리, 남한산성, 등의 공소 전교활동에도 크게 봉사하였다. (각권 국배판 350면~400여면의 [천진암 자료집] 1권~15권 참조).
전공분야가 식물학인지라 성지의 植樹 분야 책임을 맡겼는데 아주 훌륭히 직무를 수행하였다.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이승훈, 선조들의 묘 이장과 직계 가족들의 묘 이장에도 참여하여 봉사해 주었다.
동시에 현모양처로서 항상 밝은 얼굴로 돈 못 벌어오는 대학교수의 부인으로 5남매를 키우며, 남편과 함께 교회 일에 부지런히 봉사해온 오영숙 마리안나 자매님에게도 순수하고 진솔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이원호 회장 부부는 이 못난 본당신부의 말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울로2세 성하의 주례로 거행된 103위 한국순교성인 축일 첫 미사 때, 주교회의의 103위시성추진부장으로 이 행사의 한국교회 실무총책이었던 나는 미사 중 한국평신도들을 대표하여 교황성하께 예물증정자로 두 내외분을 선정하고, 시성추진부에서 마련한 예물,[天?地?人의 特産 人蔘 3상자]를 봉헌하고 교황님의 손을 잡게 한 것은 큰 영광이었다. 다음날 교황청에서 6개국어로 동시에 발행하는'Osservatore Romano 紙 첫 1 면에 이원호 회장 부부의 큰 사진과 함께 103위 축일미사 소식과 교황성하의 강론 전문이 크게 게재되었는데(위 신문 1984년 10월 15일 자), 김수환 추기경님과 한국 주교회의 주교님들 전원과 우리 실무 사제 2명(필자와 장익 신부)은 미사 후, Internazionale Domus Romana Sacerdotalis 성직자 호텔에 돌아와 함께 점심을 하면서 모두가, 특히, 김남수 주교님과 필자(103위 시성추진위원회 위원장 주교와 추진부장 신부)는 축하 인사와 마음 속에서부터 울어나오는 기쁨으로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원호 회장이 별 病없이 自然 老衰로 별 고통 없이 衰殘해 천국 문 앞으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이들은 몰라보면서, 심지어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도 몰라보면서, 그래도 이 못난 옛날의 본당신부, 그렇게도 일을 많이 시켰던 변신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금할 길이 없다.
오마리안나 자매님은 옛날과 다름없이 이 못난 변신부를 그냥 가시게 할 수 없다고, 아랫마을에 가서 추어탕으로 나와 같이 간 우리 직원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고, 미사예물도 10만원을 받쳐주었다. 그 신심은 여전하였다. 귀가 들리지 않는 불편한 중에도, 대화하는 상대에 대한 신뢰심과 애정이 넘쳐, 항상 명랑하고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오마리안나 자매님에게도, "주님 건강과 평화를 주소서. !"
지금 같은 세상에, 이원호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 이런 信者, 이런 總會長 부부를 언제 어디서 또 볼 수 있을지 !
● 이원호 회장은 88세로 2004년 8월 30일(?) 선종하여, 안성에 새로 자리잡은 수원교구 추모공원 묘지 맨 앞 단 첫 줄에 자신의 묘지를 잡았고, 2020년 9월 16일에 선종한 부인 오마리안나 자매님도 18일에 합장하였다. <천진암 성지 홈페지 2004-06-05, 게재, 필자 Msgr. Byon>2020.09.18 오후 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