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란속에서도,
서울 도시 본당신자들의 산골 공소 단체순례
(2021.09.10. 오전 10시. -곡수리성당에서 미사 봉헌-)
공소는 본당들의 어머니요, 교구들의 할머니입니다.박해시대에는 동서양의 모든 본당이나 교구청은 텅텅 비어 신앙인들의 말소리와 기도소리, 숨결이 사라졌어도, 공소들은 살아서,박해로 사라져가던 본당들과 교구청들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거룩한 음성이 그치지 않았던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고향이었습니다.지금은 고물상의 창고에서 먼지로 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는, 아무 짝에도 별로 쓸모가 없도록, 8순 고개를 넘기며 다 낡아빠진 늙은 사제가, 그래도 겨우 미사라도 바치며 지키고 있지만, 공소는 난국의 본당과 교구청과 신학교를 보살피는 신앙의 보금자리였읍니다.
지나간 1950년 6.25.사변 때만 하더라도,북한 공산당 인민군들이 점령하여 차지하고 있던 서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얼굴이오, 심장과 같이, 가장 크게 번화하였던 명동 대성당은 텅 비어 주야로 적막강산이었듯이 !!
그러나 심산궁곡의 산골 공소들은 살아서 움직였읍니다. 그 해 7월 초부터 8월과 9월에 명동 대성당과 혜화동 큰 성당과 대신학교는, 심지어 대신학교 운동장까지도 공산군들의 적기가가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었으나, 명동 주교관과 사제관에 머물던 장금구 신부님과 윤공희 신부님(현재 광주대교구 은퇴교구장 대주교님), 혜화동 성신대학의 최민순 신부님, 김창린 신부님과 이계항 신부님, 등은 전주교구와 원주교구(?) 몇몇 대신학생들과 함께 구산 공소(龜山 公所)신자들의 기도와 희생과 보호를 받으며 피난할 수 있었읍니다.
특히, 현재의 하남시 본당 관활이었던 구산 공소에 가서 머물면서 낮에는 콩밭에 나가서 누어서 피신하고, 밤에는 교우들이 갖다주는 깡보리 밥과 열무김치로 시장끼를 채웠으며, 한 밤중에는 회장내 사랑방에 몰래 모여서 들창문을 이불로 가리고, 젊은 이들이 동네 어구부터 골목마다 보초를 서서 망을 보면서, 촛불아래서 미사를 드렸답니다.
서울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구산 마을 공소는 일찌기 1801년 신유년 박해로 어머니와 누이들과함께 온 가족이 모두 거지가 되어 다니던 7세의 어린 소년 정하상 성인과 훗날의 중국인 주야고버 신부님,여항덕 알렉시오 신부님, 프랑스 선교사 솨스탕 정신부님, 마카오로 떠나기 전 15세의 김대건 소년,등이 성 김성우 안당의 형제들 집에서 은거하였던 곳으로, 이 구산 공소에서는 많은 사제들과 수녀들이 배출되었으니, 수원교구 김은식 신부와 현재 박건순 신부, 고태훈 신부, 김학렬, 김학무 형제 신부, 윤민재 신부, 등과 구산공소 출신의 인천교구 강 신부님과 박신부님, 등,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직자들이 나왔읍니다.
또한 용인군 포곡면과 모현면 지역의 심산궁곡에 위치한 오산수 (奧山水)공소 (일명 소울이 마을, 우명동(牛鳴洞)을 포함하여, 현재의 서울대교구 교회묘지가 있는 마을)에는 6.25 당시 수원 북수동 본당 보좌로 임명된지 두서너 달밖에 안된 고 최석우 신부님이 불시에 피난하여 와서 산골 공소 오산수 공소 회장 댁 사랑방에 머물면서 지내었는데, 이 오산수 공소에서도 일찌기 구한국말과 왜정 초기 그 어렵던 시기에 북만주 지역에까지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유신부님을 비롯하여 현재 수원교구의 이상영 신부님, 등이 배출된 공소입니다.
북수동 본당 보좌 신부였던 최석우 신부님은 사제 지망 예비신학생이었던 그 곳 산골 마을 소울이(당시 교우들 5세대 내외가 화전밭하며 살던 곳) 양병묵 루카 신학생을 시켜 혜화동 대신학교를 가서 보고 오게 할 정도로,믿음직한 청소년 사제 지망생이 있을 정도였읍니다!
잡히면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신학교 입학이 허가되고 확정되었던 소울이 마을의 양병묵 신학생은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산당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걸어서 굶어가면서 천호동으로 해서, 끊어진 일차선 광진교(廣津橋) 다리 아래 노젖는 작은 배를 부리는 농부한테사정사정하여 얻어타고 광진교 나루를 건너가서, 낙산으로까지 숨어들어가서, 공산당 인민군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내려가서 대신학교 성당까지 몰래 들어가, 제단 뒤와 제의방에 모셨던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참배하고, 무사히 오산수 공소 소울이 마을로 돌아와, 안절부절하며 걱정하며 눈이 빠지게 기다리시던 최석우 신부님께 보고를 드렸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신학생 때 직접 몇차례나 들은, 우리에게는 젊은 시절의 복음처럼 들렸읍니다.
본당과 교구청과 대신학교는 텅비어 기도소리가 그쳐도, 본당의 어머니요, 교구청의 할머니 같은 공소와 공소의 신자 마을들과 신자 가정들만은 살아서 활동하며, 혹독한 박해 중에 숨소리조차도 사라진 본당과 교구청과 신학교를, 기도하며 둘러보는, 살아있는 신앙의 단체였읍니다.
- Msgr. By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