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도 아주 적어 수십명에 불과하던 산골 동네에, 매우 적고, 신자도 전무하던 심산궁곡 천진암 성지본당의 20년 짧은 역사(1985~2005)에,전 천진암본당(현 퇴촌 성당 전신) 영덕리 공소 회장 구춘섭 벨라도 회장이 향년 86세로 선종하였읍니다.
(변기영 몬시뇰 문상,2023.08.30.)
퇴촌면에 천주교 신자가 1명도 없다고 여기던 시절, 양평 본당 용문 구역 심산궁곡에서, 영덕리 석둔으로 이사온 구회장은 1년에 두번 거의 10여리 길이 되는 한강가에까지 내려가서 노젖는 작은 시골 동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서 양평본당에서 성탄미사와 부활미사를 하였는데, 주일에는 가족들이 모여 공소예절을 바치며 신앙을 지켜왔읍니다.
신장본당의 구산공소 출신 순교자 김성우 안당 형제들의 후손 구교우 김정호 회장의 손자 김학성 젊은 청년이 가난하던 구산 마을에 서울 부근에서는 아마 처음으로 겨울 비닐우로 상추재배밭들을 시작하여 마을이 이웃 마을 주로 더우개의 연리 50 % 장리쌀을 얻어다가보리고개를 넘는 집들이 적지 않던 시절, 가까스로 시골의 경제 자립 마을을 이룩하기 시작하자,새마을 운동가로 인정을 받아 광주군에서 가장 가난한 퇴촌면 면장을 자원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퇴촌 면장이 된 후, 면 내 산골마을들을 순방하다가 석둔이가서 초가 삼칸 집 봉당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보고, 천주교신자임을 확인하였으나,광주읍내 성당이나 동부면 신장 성당까지는 너무나 멀고, 시골길에 버스를 몇 시간씩 기다려가며 몇차례씩 갈아타고 가고 와야 하므로,주로 강건너 가까운 양평 본당으로 작은 노젖는 배를 타고 건너가서 성탄미사와 부활미사에 참석하며, 신앙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고, 천진암 성지 개척을 시작하는 필자에게 알려주었다,
비로서 나는 신장본당 신부로 있으면서 광주본당 관할의 퇴촌면과 남종면과 중부면(남한산성리) 사목 관할권을 문서상으로 광주 본당 주임 유진선 신부님에게 붕어 매운탕 점심을 한그릇 사드리면서 받았는데, 신자들도 없고 있어도 너무 가난하여 교무금도 쌀 몇되씩 바치기가 어려운데, 변신부가 맡아서 고생만 할 텐데 !! 하면서 필자에게 넘기는 것을 받아,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님 재가로 명실공히 필자가 주임신부로서 석둔이 교우들 두 집을 위해 매년 봄가을 판공미사를 드렸다.
신자가 없는 퇴촌면 광백이와 남종면 분원리, 영덕리,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 같은 공소 판공 때는 신장에서 붉은 팥고물 찰시루떡 한말을 해가지고 신장 교우들 한두명데리고 갔었다.
그러나 구회장은 비록 돈도 없고 땅도 없어도, 순수하고 진솔하고 소박하고 천진한 진심은 있어서,진심으로 나를 도와, 초기 천진암 성지 성역화를 위해,길을 만들고, 느틔나무, 은행나무, 잦나무,들을 심고,가꾸고,아끼고,사랑하는 성지개척의 연혁에 남는 주인이 되었다. 다만 처음에는 석둔이에서 천진암을 봉사하러 오기가 길도 너무 거칠고, 차도 없고 돈도 없고 마음뿐이라서 무척 희생이 많았으나, 좀 지난 후, 성지에 반짐차도 생기고, 차량진임로도 어거지로 만들어 쓰면서, 또 염윤식 군이 입교하여 차운전을 하므로 아침 저녁으로 구회장의 봉사를 하는 발이 되어 주었다.
서울 신자들이 성금은 바쳐주나, 산골 성지 험한 노동일을 하지는 못하나, 구회장이 신입교우들과 함께 구회장은 모범적이었는데, 이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보다 몇 걸음 먼저 갈 뿐인데,얼마 안가서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게나 !
-변몬시뇰-